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2 : 데카메론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2
조남진 글, 이세계 그림, 윤순식 감수, 손영운 기획, 조반니 보카치오 원작 / 채우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2 :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 손영운 / 조남진 / 윤순식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I / 채우리 24번째 리뷰]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은 어린이가 읽기에 부적절한 고전인 것은 틀림 없다. 인간의 '솔직한 면모'를 진솔하게 보여주는 위대한 문학작품인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겠지만, 너무나 솔직했기에 '성(性)적 표현'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다 큰 어른들이 읽어보아도 낯뜨거울 정도의 섬세한 묘사에 아무리 훌륭한 문학이라고는 하나 어린 자녀에게 읽혀서 '삶의 교훈'을 직접 배우라고 권하기가 정녕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어른들조차 읽었다는 표시를 낼 수 없어 몰래 읽었고, 대부분은 그런 제목의 유명한 책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정도로 외면 받은 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테가 쓴 <신곡>에 빗대어 '인곡(人曲)'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는 문학이 바로 <데카메론>이다. 보카치오는 <신곡>에서 다룰 수 없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해 솔직하게 묘사했고, 14세기 르네상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엄청난 영감을 선사한 인류 최고의 문학으로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데카메론>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에도 '반 기독교적'인 윤리관이 문제가 되어 푸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일반 대중들은 어려운 어휘가 아닌 '이탈리아 속어'로 쓰여 읽기 쉬운 <데카메론>에 푹 빠져들었고,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널리 읽혔을 정도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인쇄술 혁명'이 있기 전에 벌어졌던 일이니, <데카메론>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고 신분상 고위 계층 뿐만 아니라 서민 계층에게도 교양과 지혜를 누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그토록 고마운 책이 '외설스럽고 추잡스런' 성(性)을 매개로 하여 쓰여져서 점잖은 사람들이 읽고 즐기기에 부적절한 책이 되었단 말인가? 이는 학창시절의 여러분을 떠올리면 좋지 않을까 싶다. 지루한 내용의 수업이 이루어지다가도 선생님이 기분전환용으로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면 두 눈이 말똥말똥 해지고 솔깃해진 귀가 쫑긋거리던 순간을 말이다. 지금이야 '인권 문제'로 인해서 성폭력과 성희롱에 가까운 '음담패설(일명 EDPS)'을 수업시간에 입에 올리기 힘들지만 말이다. 암튼 '야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최고 관심사'였었다. 그보다 더한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또 있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성에 대한 개념조차 모르는 '유아'들조차 똥 이야기와 방귀 이야기만 나오면 자지러지게 웃음꽃을 피우지 않느냔 말이다. 암튼 '팬티 안의 두 글자'에 관한 이야기는 전 인류의 최대 관심사이기 때문이라는 것만 기억해두고 <데카메론>을 한 번쯤 읽어보면 기대하지 않은 깊은 감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데카메론>은 어떤 줄거리를 담고 있을까? 먼 옛날의 책들은 모두 '성인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책의 '내용'이나 '수위조절'은 염두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이라면 '어린이용'의 경우엔 '심의'를 거쳐서 비교적 '순화'된 내용만을 다룰 수도 있겠지만, 보카치오는 7명의 귀부인과 3명의 남자들, 모두 10명이 하루에 한 편씩 '열흘 동안' 야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그럼 이들이 왜 한데 모이게 되었을까? 그건 바로 14세기 당시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흑사병(페스트)'을 피해서 외딴 성에 모여 들었던 것이다. 흑사병이 어떤 병이던가? 한 번 걸렸다하면 치료방법도 몰라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바라던 병이었고, 천행으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병된 지역에서 되도록 멀리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던 '천벌'로 여기던 끔찍한 전염병이 아니던가. 그러니 외딴 성에 모인 이들도 병이 물러날 때까지 하루도 안심하며 살 수 없는 '최악의 공포' 속에서 숨만 쉬며 버티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이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들이 한 행동이 바로 '야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위안으로 삼았던 것이다. 만약 이런 공포 속에서 '야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양과 기품이 넘치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더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그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는커녕 '광기와 광증'으로 인해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나누며 '삶을 이어갈 원초적인 힘(?)'을 부여받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야한 이야기에 몰입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어린이(청소년)'를 위해서 출간하였기에 원작의 수준에 버금가는 '야한 이야기'는 솔직하게 다 뺐다. 그럼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성적 묘사'를 쫙 빼고 읽으니 <데카메론>에 담겨 있는 본연의 교훈적이고 교양적인 메시지가 더 잘 드러나게 되었다. 그동안 '야한 이야기'에 매몰되어 있던 교양이 총천연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렇기에 원작에서는 살짝 가려졌던 '인본주의 색채'가 더 잘 드러나 보이는 효과가 극대화된 셈이다. 물론 원작의 '수위'가 워낙 높아서 모두 100편의 이야기 가운데 고작 10편 밖에 담지 못한 이 책을 읽고서 <데카메론>을 완독하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건전(?)한 내용으로 재탄생한 <데카메론>을 읽고 '원작'에 대한 관심을..아니 '인상'을 좋게 가질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데카메론>에 담겨 있는 핵심 내용은 단연 '사랑'이다. 사랑에 울고 웃는 다채로운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삶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데카메론>은 '애로티즘'에 입각한 것처럼 인식되기 일쑤지만, 그보다는 더 찐한 '휴머니즘'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휴머니즘이 때때로 '남을 속이는' 사기와 불륜으로 점철되는 묘사가 밥 먹듯이 등장하기 때문에 자못 헷갈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사기를 당하거나 불륜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을 '동정'하기보다 사기꾼과 불륜 당사자조차 '관용'으로 포용하고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내용을 보여 준다. 왜냐면 죄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인간이 사는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관용 정신(일명 똘레랑스)'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멸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아닌 '상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오롯이 살아있어야 그 사회가 살기 좋게 바뀔 수 있다는 내용을 품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어느 한 쪽을 죽여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보여주는 잔혹성과 끔찍함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맹목적인 관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건 '관용'이라 말할 수도 없다. 관용은 말하기는 쉽지만 결코 쉽게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들다. 그러나 관용을 행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관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용'을 뭐라 딱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진정한 관용을 행하게 되면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관용이기도 하다. 또한 성숙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미덕이기도 하고 말이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너그러운 관용과 진솔한 사랑이 꼭 필요하다.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섞어 놓은 <데카메론>을 제대로 읽어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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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1 : 페스트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1
권기희 글, 이철희 그림, 황의조 감수, 손영운 기획, 알베르 카뮈 원작 / 채우리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1 : 페스트>  알베르 카뮈 / 손영운 / 권기희 / 황의조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 / 채우리 23번째 리뷰] 알베르 카뮈의 대표적인 작품인 <페스트>는 우리에게 '실존주의'와 '부조리'의 대표작이라는 대명사로 더 많이 알고 있다. 허나 오늘날에 와서 '실존의 문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아니 '퇴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지만, 요즘 누가 그런 골 아픈 논증을 하며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또 궁극적으로 실존주의는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한 번 벌어진 격차'를 좀처럼 좁힐 수 없는 현대인들의 고뇌와 불만을 잠재워 줄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페스트>를 읽으며 '실존'을 운운하는 건 잠시 놓아두도록 한다. 아무리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도 현대인들의 답답한 속마음을 해체해줄 대안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부조리'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부조리'는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현대인을 괴롭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부조리'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부조리'도 실존주의 철학용어로써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뜻을 해석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 또는 그런 일'을 아울러 이르는 용어다. 이를 테면, <페스트> 속에서 파늘루 신부가 겪는 고뇌 같은 일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20세기까지도 '전염병'은 씻지 못할 죄악 때문에 받는 형벌이 그 원인으로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천벌' 말이다. 그래서 파늘루 신부는 오랑 시에 페스트가 퍼지자 교회에서 신도들을 향해 '기도'를 드리자고 외친다. 신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천벌을 내린 거라면서 말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달리 말해 전염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죄를 씻어내는 일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상황은 '부조리(이치에 맞지 않게)'하게 흘러간다.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죽고 만 것이다. 페스트가 씻지 못할 죄악에 의해 걸리는 병이라면, 아직 큰 죄를 짓지도 못했을 어린아이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파늘루 신부는 이런 '부조리'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답을 내놓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의 부정'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즉, 전염병은 하나님이 내리는 형벌이 아니라 '쥐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에 의해서 걸리는 질병일 뿐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쥐벼룩'이 창궐하지 못하게 주변 위생을 깨끗하게 하고 청결한 생활습관을 기르고 '혈청(항생제)'을 연구해서 사람을 살리는 의학기술을 발달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답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 페스트를 극복하기 위한 '신앙심'은 별개의 문제라며 손을 떼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건대'를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된다면서 '신부'라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행동했어야 한다. 헌데 파늘루 신부는 이런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부조리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에서도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다. 왜냐면 부조리한 상황은 '내가 원치 않는다'고 그 상황에 처하지 않거나 맘대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느닷없이 벌어지는 '교통사고'로 인해 크게 다치는 부조리와 마주할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층간소음'을 일으키거나 '불쾌한 냄새(음쓰, 땀내 등등)'를 맡으며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야 하는 경우도 겪을 수 있다. <페스트>에서도 취재차 오랑 시에 들렀던 랑베르가 발이 묶인 처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알베르 카뮈도 사랑하는 아내와 때마침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생이별'을 했던 경험으로 이 소설 <페스트>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런 부조리는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과연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인가?

카뮈는 우선 '반항 정신'을 강조했다. <페스트>에서는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우리가 부조리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을 미연에 막거나, 원천적으로 예방할 도리는 없다. 허나 그런 부조리한 경우에 맞닥뜨렸을 때 '반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항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릴 수 있어서 '저항 정신'이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최악의 팬데믹을 경험했다. 그때도 이런 '반항'을 일상화했던 덕분에 힘겨웠지만 끝내 이겨낼 수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팬데믹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했고, 그 결과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극복했다. 부조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전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정말 인상적이지 않은가. <페스트>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보건대의 활약'이다.

또 하나는 '연대 의식'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관여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그보다 처참한 참극도 없을 것이다. 정말 '합리적인 방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테니 말이다. <페스트>에서 랑베르가 처음에 이런 모습이었다. 자신은 오랑 시와 아무런 연관이 없으니 '페스트'에 걸려서 죽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러 탈출하는 것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일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외지인에 불과한 랑베르의 '시선'으로 오랑 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랑베르처럼 행동하게 된다면 우연찮게 마주하게 되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될 뿐이다. 물론 랑베르도 페스트에 걸려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상황속에서 할 만한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다름 아닌 '연대 의식'을 갖고 '내 일처럼' 여기며 함께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다. 이런 자세 덕분에 인류는 수많은 최악의 위기를 극복해냈고, 앞으로도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연대 의식'만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이와 더불어서 카뮈는 '성실함'을 강조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면 인간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끝없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랑(위대한)'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체구도 작고 나이도 많은 늙은이에 불과하지만 그랑 씨는 페스트에 걸리고도 혈청을 맞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타루의 죽음'과 대비되면서 더욱 빛이 난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타루가 살고 그랑이 죽을 것만 같은데, 결과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페스트>에서 타루의 죽음은 너무 뼈아픈 절망감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토록 성실하고 삶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죽어야만 했는지 언뜻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조리를 극복하는데 '반항'과 '연대', 그리고 '성실'이 효과적이라는 것이지, 그것들이 '만병통치약'처럼 완전무결한 해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조리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조차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무도 슬프고 비참한 고통을 동반하겠지만, 그러함에도 '반항'을 멈추지 않고, '연대'를 놓지 않으며, 한발 한발 뚜벅뚜벅 '성실'하게 나아가야 비로소 부조리를 이겨낼 수 있음을 말이다. 이는 '부조리 극복'이 완전한 영광을 선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를 테면, 일단 '일어난' 자연재해로 인해 벌어진 엄청난 '인명 피해'과 막대한 '재산 손해'는 감수하고, 그 폐허의 현장 위에서 '우뚝' 일어서는 것이 '부조리 극복의 최선'임을 일깨워주는 복선으로 봐야 할 것이다. <페스트> 속에서 페스트로 인해서 희생된 모든 이들이 바로 그 복선인 것이다.

<페스트>는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 상황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서 달게 받아야 할 숙명 따위가 아니다. 그냥 벌어진 상황이다. 이렇게 누구도 원치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최악의 상황을 우리는 '부조리'라고 부른다. 허나 우리는 그런 최악의 상황조차 극복할 '원천적인 힘'을 갖고 있다. 바로 '반항', '연대', 그리고 '성실'이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윤석열의 비상계엄, 트럼프의 관세 정책, 우크라와 가자 전쟁에 이어 '대만 전쟁'으로 확전될 위기감에 '제3차 세계대전'까지 운운하고 있는 이런 상황이 '내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우리 모두'에게 맞닥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이 '부조리'하지 않다면 뭐란 말인가? 그럼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반항', '연대', 그리고 '성실'이다. <페스트>에서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를 우리가 관심 높여야 할 적기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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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0 : 춘향전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0
김창회 글, 현광영 그림, 손영운 기획, 작자미상 원작 / 채우리 / 201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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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0 : 춘향전>  작자미상 / 손영운 / 김창회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IX / 채우리 22번째 리뷰] 역시 고전의 백미는 '사랑이야기'다. 더구나 청춘남녀의 불 같이 뜨거운 사랑을 엿볼 때에는 누구나 가슴이 설레기 마련이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한국에는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이 있다. 사실 널리 알려지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겠지만, 재미와 완성도로 본다면 우리 <춘향전>이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는 걸 인정할 것이다. 마침 '케데헌'의 인기로 전세계가 '한국문화의 진입장벽'이 허물어졌으니, 호랑이 '더피'가 유행을 했을 즈음에 우리에겐 '판소리'라는 것이 있었고,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가장 으뜸이 바로 <춘향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왜냐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새드엔딩이지만, <춘향전>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엔딩계의 승자는 언제나 '해피'였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춘향전>의 줄거리는 간략하다. 전라도 남원을 배경으로 성춘향이 그네를 타다가 새로 부임한 사또의 자제 이몽룡의 눈에 띄었고, 둘은 그렇게 첫 만남과 동시에 '백년가약'을 맺으며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다. 허나 젊은 청춘의 불 같은 사랑은 늘 위기를 맞기 마련이다. 이몽룡의 아버지가 임금께 동부승지로 승진하라는 교지를 받아 한양으로 상경해야 했기 때문에 이몽룡도 함께 한양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허나 성춘향은 기생이 낳은 딸이라 '정실부인'으로 들일 수 없는 처지였고, 훗날 이몽룡이 관직에 오르면 '첩'으로 들일 수는 있었으나, 아직 과거급제도 하지 못한 서생이 '첩질'부터 할 수는 없다며 양반 망신시키지 말고 당장 춘향과 헤어지라는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에 춘향은 몽룡과 헤어짐을 애달파 하며 서럽게 울지만, 춘향에게 닥친 현실이 그러하매 어쩔 도리가 없다며 눈물로 몽룡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이제 이야기는 방향전환을 하며, 새로운 남원 고을 사또로 '변학도'가 등장한다. 그리고 변사또가 처음으로 한 공식업무는 '기생점고'였다. 조선시대 관리에게는 '관청에 속한 노비'를 단속하는 것도 주요 업무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해야 마땅할 업무였다. 그러나 변사또의 목적은 천하일색으로 소문이 자자한 '춘향'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청 들게 하는 것이었다. 허나 춘향은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왜냐면 춘향에겐 이미 '지아비'가 있다면서,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처럼 열녀도 두 지아비를 둘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틴 것이다. 이에 변사또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춘향에게 모진 형벌을 가한다. 더구나 천한 기생 주제에 양반들이나 할 법한 '열녀' 흉내를 낸다는 것에 괘씸죄를 더해서 말이다.

그렇게 춘향은 모진 형벌을 받고 변사또의 끝없는 회유를 당하며 고초를 겪고 있는 사이에, 몽룡은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남원에 내려가고 있었다. 허나 어사인 신분을 감춰야 했기에 춘향의 앞에는 거지꼴로 나타나지만, 결국 변사또의 생일잔칫날에 "이 술은 천 백성의 피요, 이 고기는 만 백성의 기름이다"라는 시로 호령을 내리며 "암행어사 출두야'를 온 사방에 메아리 치게 한다. 그렇게 춘향이 죽을 위기에서 살려내고, 임금께서는 춘향에게 '정렬부인'을 내리니,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는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 한다.

<춘향전>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춘향이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켜낸다는 서사다. 더구나 '천한 신분'인데도 높은 신분인 양반들도 하기 힘든 '정절'을 지켜내어 끝내 행복하게 산다는 결말을 보여준 것은 18세기 조선시대를 크게 울릴 정도로 '파급력'이 어마어마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서처럼 '기생'이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허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한마디로 합법적인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계층사다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신분사회'는 기둥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사고 파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경제적 성장을 한 '부농'과 '거상' 들 가운데에는 양반 신분을 사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더구나 <춘향전>에서 '기생'인데도 열녀의 반열에 오른 여인들을 줄줄이 읊는 대목에서 춘향이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당시 '판소리'는 서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서민들 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판소리를 즐겨 듣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판소리'도 양반들의 취향에 걸맞는 '한시'나 '중국 고사' 같은 내용을 곁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춘향의 목소리'는 단지 서민들의 열망만을 담은 것이 아니고 양반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도 양반들이 그토록 중시하던 '유교적 예법'을 철저히 따르고 지키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양반들도 춘향 같은 열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열린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물론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하다는 꼬장꼬장한 양반들이 훨씬 더 많았기에 쉬이 허물어질 질서는 아니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춘향전>은 백성들의 열망으로 작용했고, 또 한가지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천한 기생도 '열녀'가 되어 존중 받는 사람이 되고자 저렇게 열심인데, 양반이란 작자가 하는 짓이라고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것'이라니 정말 너무 하지 않는가? 라는 푸념 섞인 비판을 <춘향전>을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지배자인 '고을 원님'을 사사로이 혼쭐 낼 수는 없다. 물론 '농민봉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불만을 호소할 수도 있었겠으나 역사적으로도 '농민봉기'를 해서 양반들의 목숨을 빼앗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대신 '탐관오리'를 일시적으로 내쫓을 수 있었고, 봉기를 선동했던 '주동자' 몇 명의 희생으로 잠시나마 백성들을 탄압하는 일을 멈추게 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춘향전>에서는 '농민봉기'를 꾀하기보다 더 합법적인(?) 방법인 '암행어사 출두'로 탐관오리를 벌하는 방식을 택했다. 더구나 그 암행어사로 춘향의 정인인 '이몽룡'이 등장하니 관객들의 환호성은 더욱더 크게 날 것이 틀림 없다. 정말 속이 다 후련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이렇게 <춘향전>에는 '청춘남녀의 사랑',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 그리고 '탐관오리 축출'이라는 이야기가 아주 잘 어우려져 있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했다. 더구나 '판소리'와 '필사본'이라는 표현적 한계로 인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원래의 이야기'에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뺐으며, 고치고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며 수많은 '100여편이 넘는 이본(異本)'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춘향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색다른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서울(한양)에서 돌았던 '경판본 <춘향전>'과 전주에서 제작한 '완판본 <춘향전>'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경판본의 특징은 '문장이 간결하고 묘사가 적어 빠른 스토리 진행'이 으뜸이며, 완판본의 특징은 '전라도 사투리'가 잘 반영되어 있고, 주요 독자층이 서민이었던 관계로 '사건 묘사가 자세히 담겨' 있어서, 춘향의 출생과 성장까지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각각의 이야기마다 '춘향의 묘사'가 사뭇 다르다는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인데, 가장 큰 공통적인 묘사는 춘향을 '팔방미인형 인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는 춘향을 당시 조선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완벽한 여인상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며, 그녀가 양반이든, 기생이든 상관할 것 없이 당시 여인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정절'을 소중히 지켜내어 더욱 완벽해진다는 설정을 눈여겨 볼 만하다. 그렇다면 21세기 춘향은 어떤 여성상이어야 할까? 그건 오늘날에 가장 완벽한 여성상이 어떠한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상은 아직 '과도기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여성들조차 가장 완벽한 여성성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으며, 여성만이 누려야 할 '특권'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그 특권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해도 저마다 중구난방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분명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실현되기도 하고 있지만, 모든 여성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는 것도 그런 경향을 한 몫하고 있는 것 같다. 모쪼록 21세기 춘향은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길 바란다. 여성들이 행복한 사회를 추구해야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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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 걸리버 여행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김세라 글, 문성호 그림, 강서정 감수, 손영운 기획, 조너선 스위프트 원작 / 채우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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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 손영운 / 김세라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II / 채우리 21번째 리뷰] 나는 태어나 보니 '박정희 정권' 시대였고, 살다보니 '전두환 정권'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군사독재'를 관통하던 시절을 살아서 <걸리버 여행기>를 그저 동화책으로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소인국'만 있는 책으로 말이다. 그때 어떤 친구가 '소인국'이 전부가 아니라 '거인국'도 있고, '천공성'도 있으며, '마인국'도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실체'를 보지 못했으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2년에 '문학수첩'이란 출판사에서 '최초 완역본'으로 <걸리버 여행기>를 출간했더랬다. 그때 우연히 책을 손에 넣긴 했는데, 정작 완독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첫 번째 충격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어른들을 위한 '풍자소설'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당시 영국 정치인들의 세태와 위선을 꼬집은 '정치소설'이었다. 그러나 더 꼬집어보면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인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모두 어리석고 사악하며 탐욕스럽기 그지 없다고 모조리 다 싸잡아 비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리고 뒤이은 두 번째 충격은 왜 <걸리버 여행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아작을 냈었던가다. 비단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었단다. 불편한 내용은 '삭제'하고, 원래의 내용을 알 수 없게 '왜곡'했으며, 그런 부담을 덜기 위해서 아예 '소인국'과 '대인국' 정도로만 짜깁기 해서 '아동용 소설'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인국'편에선 그저 신기한 모험 이야기로만 읽히다가 '거인국'편에 들어서면서 세계 최강으로 자부했던 대영제국을 신랄하게 까댔고, 걸리버가 사는 인간세계에서는 영국이란 나라가 최강일지 몰라도, 걸리버가 한낱 소인으로 보이는 '거인국'에서는 대영제국일지라도 그저 거인들의 한 발자국만으로도 가볍게 제압 당할 수 있는 약소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걸리버가 늘어놓은 대영제국의 위상이란 것이 거인들의 눈에는 참으로 거슬리는 비열한 종족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상대를 속이는 일을 자랑 삼아 늘어놓고, 약소국과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온갖 무력을 앞세워서 파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약탈과 수탈, 심지어 학살까지 자행하며 힘을 과시하는 장면에서 거인들은 진정으로 분노하기에 이른다.

'천공성'으로 올라간 걸리버는 인간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허위와 부조리, 그리고 끝없는 탐욕을 신랄하게 까댄다. 그리고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인간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따끔하게 지적하는데, 그건 '마인국'에서 휴이넘을 만나고서 극치의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걸리버는 야후(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휴이넘(말 종족)'과 비슷한 고도의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괴리감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마인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며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처럼 살고 있는 하찮은 종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찮은지 휴이넘들이 '가축'으로 길들여 써먹으려 해도 제대로 통제가 되질 않아 포기했고, 야생동물처럼 풀어놓고 살게 해주려해도 '같은 종족'인 저들끼리도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폭력적인 존재라 아주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걸리버는 '여자 야후'를 아내로 받아들여 지성을 심어주려 했으나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슬픔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걸리버는 '휴이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만, 휴이넘들은 애초에 야후를 '위험요소'로 보았기에 걸리버가 이성을 가진 야후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더 큰 위협'으로 여겼기에 마인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걸리버는 휴이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죽으려 하지만 인간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가도 문제다. 걸리버가 영국이란 '야후'가 사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걸리버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가족들에게조차 '야후의 악취'를 맡게 되자 식사도 혼자하고, 말들이 있는 마굿간에서 안식을 얻으며, 말들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걸리버가 자신의 모험담을 글을 써내려 가는데, 그게 바로 이 책<걸리버 여행기>라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의 세태를 비판한다. 사실 '맹비난'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조나단 스위프트는 '성악설'에 근거해서 이 책을 썼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성직자'였다. 당시 18세기 종교관으로 보면 인간은 모두 선하다는 '성선설'의 입장을 고수해야 할 위치에 있는데, 그는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추하다며 '성악설'보다 더 심한 악담을 쏟아낸 격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본토'에서 성직을 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작용(?)한 듯 싶다. 애초에 그가 원하던 대로 쉬이 '영국 본토'에서 성직자 생활을 했더라면 이런 비난을 쏟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영국 본토'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 까닭을 당시 '성직자들의 위선과 비열한 정치질'이라고 본 스위프트는 인간의 본성을 까발리듯 <걸리버 여행기>를 써내려 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도무지 '희망'이 없었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다보면 '인간의 이성'이 환하게 빛나는 대목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인국의 왕이 그렇고, 휴이넘에서 걸리버가 주인으로 섬겼던 말이 그렇다. 그들의 빛나고 존경스러울 정도로 높은 이성이 바로 '최상의 인간'이 소유한 이성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스위프트가 대부분의 인간은 '야후'만도 못한 짐승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지만, 그가 이상적으로 바라본 이성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높은 이성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실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스위프트가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꼬집긴 했지만, 인간에게 아예 희망조차 없다고 체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은 비로소 '풍자소설'로 완성이 되며, 걸리버가 겪은 이상한 모험들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해가 1726년이라고 한다. 무려 300년 남짓이나 지났는데도 이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은 여전히 필요충분하다. 우리가 진보와 보수, 극좌와 극우로 갈라져서 '정치싸움'을 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상대를 '제거'하고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왜 우리는 추한 본성을 티내고 싶어 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즐기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그걸 즐기면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된 듯 싶다. 적어도 나는 그런 종자들의 비열함을 한껏 욕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이성'을 챙기길 바라고 또 바란다. 한낱 짐승도 '자기 종족'끼리는 싸우지 않는 법이다. 오직 인간만이 '같은 종족'임에도 생각이 다르고, 겉모습이 다르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서 서로를 죽이는 짓을 일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 그런 야만스럽고 혐오스러운 짓은 그만 하자. 제발 이성을 찾고 서로를 존중하며 높은 이성을 가진 인간답게 살아가길 바란다. 뭐, 기왕 죄 지은 놈은 달게 죄를 받고 말이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너무 역겹다. 애초에 인간이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말이다. 그나마 인간으로 '대접'을 해주니 정상적인 법 절차를 거쳐서 죄를 따지고 있는 것 아닌가. 더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인간답게 죄값을 치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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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 무정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고재봉 글, 장우룡 그림, 손영운 기획, 이광수 원작 / 채우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8 : 무정>  이광수 / 손영운 / 고재봉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I / 채우리 20번째 리뷰] 나는 이광수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는 '변절자'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다지만 '이광수'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시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참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이광수'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친일파'로 치부하고 한껏 무시하며 살다보니, '그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인들을 몇몇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최초의 근대인'이었고, '한국 근대소설의 창시자'였으며, '그의 업적'을 빼놓고 '한국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그랬고, 홍난파가 그랬으며, 서정주조차 일제를 찬미하지 않고서는 '예술의 길'을 걷는 것은 고사하고, 엄혹한 시절을 견디며 살아갈 수조차 없다는 변명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이광수, 그가 열였다는 한국 문학의 시작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꺼내든 소설은 <단종애사>였지만,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것'을 깎아내리고, '일제의 것'을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꼬락서니가 정말 '아첨꾼'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왕위에서 끌려 내려져서 끝내 죽임을 당하는 '단종'이 조선의 운명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왕위를 찬탈하며 화려하고 강한 힘으로 조선을 바꾸어 나가는 '수양대군'이 끝없이 욱일승천하는 일제의 숙명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은 가망이 없고, 오직 일제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내용을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아첨을 떨었으니, 일제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종애사>를 읽다가 말고 내던지고 말았다.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 그가 '변절하기 전에 쓴 소설'이 있다면 읽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접한 소설이 바로 <무정>이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쓴 소설이라기에 흥미도 생겼다. 양가 부모님들이 정한 사람을 '정혼자'로 받아들여 얼굴도 보지 못한채 '혼인'을 해야만 했던 시절에, '자유연애'를 통해서 서로의 배우자를 정해나가는 줄거리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예전의 관습을 타파하지 못하고 얽매이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차츰차츰 바꿔나가려는 모습의 등장인물들이 참 보기 좋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21세기 독자인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시 20세기 초에 '신문연재'로 읽어나가던 독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으로 흥분하였을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이광수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하고 위대한 감동을 선사한 장본인이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가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는 변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변절자'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근대인'이었고,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지몽매한 군중들을 일깨우기 위한 '계몽가'로 활약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민족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진정한 '애국청년'이었던 것도 분명했다. 단지, 그는 '약자의 편'에 서서 힘쓰는 것을 경멸하는 엘리트 계층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강자의 편'에 서서 군림하길 선호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동경유학'을 결심했고, 동경해 마지 않던 '일제의 편'에 서서 군림하며 계몽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것이다. 이 소설 <무정>을 읽으니 더 확고하게 맞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은 조선이라는 낡은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청춘들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다. 남주인 '이형식'은 학교선생님이다. 그리고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김선형'을 영어과외하게 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청춘남녀가 마주 앉아서 속닥속닥 함께 시간을 보내니 '사랑'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무정> 이전의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전개 방식이었다. 남녀칠세 부동석을 외치던 사람들이 <무정>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아니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금기시 되던 '자유연애'를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들도 피 끓는 청춘시절을 겪어봤고, 겪고 있을테니, 이형식과 김선형의 만남이 어찌 싱숭생숭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이형식은 자연스레 '사랑'을 떠올리고, 곧이어 '결혼'이란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런데 이형식에게는 이미 정해진 정혼자가 있었다. 고아 신세였던 자신을 이렇게 어엿한 선생으로 성장하게 해준 고마운 은인 박진사의 딸 '박영채'가 바로 그녀다. 그런데 그녀와는 오래전에 헤어졌었다. 박진사가 일제의 터무니없는 방해로 '교육사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행동조치들이 우여곡절 끝에 범죄(?)로 이어졌고, 비록 박진사가 직접 저지른 범죄는 아니었으나 '올곧은 교육자'였기에 자신의 제자가 저지른 범죄를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연루되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어 버린 박진사의 집안 사정 때문에 박영채의 생사도 모르고 이형식은 헤어지게 되었고, 김선형과 사랑의 감정이 싹튼 바로 그날에 우연찮게 박영채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삼각관계가 하루 사이에 형성되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무정>이 처음 '매일신보'에 연재된 해가 1917년이라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병탄 되어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시기에 난데없이 '사랑이야기'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삼각관계'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치열한 공방전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두고서 갈팡질팡 흔들리는 마음을 교묘하게 서술하고 있으니 '연재소설'을 읽는 신문독자들의 애간장도 하루가 다르게 녹아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어그로를 끌어놓고서 '박영채의 과거'를 보여준다. 양반가 규수로 자라 '유교적 가르침'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던 계집아이에게 집안이 풍비박산 되고, 아버지가 감옥살이하며, 친척들의 구박을 피해 달아났지만, 여인의 몸으로 돈 한 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지만 '돈'이 없으면 감옥에서 아버지를 꺼낼 수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길도 마땅치 않아 박영채는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 '기생'이 되었다. 허나 그 사실을 한 아버지 박진사는 감옥에서 목을 매 자결하고, 박영채는 천애고아가 되어 경성에 있는 이형식을 찾아 만나게 된 것이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이광수가 박영채의 사정을 이리 절박하게 꾸며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박영채로 투영해서 보여주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광수는 박영채를 철저히 박하게 묘사했고, 애절하게 서술하여, 끝내 이형식에게조차 '버림'을 받고 죽는 인물로 쓰려 했단다. 그래야 이광수가 처음 의도했던 '낡은 조선'을 철저히 벗겨내고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나라'가 독립한 조국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이광수는 애초에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식으로 써내려갈 뿐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생긴다. 독자들의 심금이 절절하게 울리자 '박영채를 살려내라'는 독자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정인 즉슨, 이형식이 김선형과 혼담이 이어지고 기생이 된 박영채가 '정절'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영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평양으로 떠나는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애독자들이 기왕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목적이라면 '박영채'도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영채가 자결하지 않기를 바라는 투고가 계속 이어졌단다.

그러자 이광수도 줄거리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박영채에게 '김병욱'이라는 인물을 꺼넣어서 '변화'를 꾀했다. 김병욱의 본명은 '김병옥'이다. 여자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름이 남자 같은 사연은 병옥이 당시의 '보통 여인'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신식 여성'이었고, 일찍 일본유학을 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음악가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여기서도 이광수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바로 '조선의 여성'과 '일본에 의해 개화된 여성'의 다름을 확연히 보여주고,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뻔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 의도된 본보기대로 영채는 병옥과 함께 일본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이형식과 김선형이 서로 약혼을 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르던 차에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잠시 '삼각관계'를 부추기며 젊은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하지만, 어차피 이건 주제가 아니다. 결국 해묵은 감정은 일단 정리가 되면서 4명의 청춘남녀는 스러져가는 조선의 아픈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몽'뿐이라며 자신들이 그 '선구자'가 되어 500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조선을 일깨우는 '선각자로서의 활약'을 다짐하며 이야기는 마무리가 된다.

그럼 이 소설의 제목은 왜 <무정>인가? 한마디로 '정(情)'이 없다는 뜻인데, 이광수는 '강한 힘'을 정의 원천으로 보았다고 한다. 강자만이 세상을 바꿀 힘도 있고, 그렇기에 세상을 바꾸려면 강한 힘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베푸는 아량이야말로 진정한 '정'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조선은 온통 낡고 버려야 할 것들 투성이 뿐이니, 베풀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으니 <무정>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는 이광수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한 몫 단단히 했다고 한다. 고아로 자란 이광수는 어려서부터 숱한 고생과 설움을 당했고, 오직 실력만으로 다녀온 '두 번의 일본 유학' 이후에는 이런 사고방식을 아예 각인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없이 살면 당할 수밖에 없다. 당하지 않고 당차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힘'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을 가져야만 '정'을 베풀며 살 수 있다. 작금의 조선은 '무정'하다. '유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이런 논리를 펴 나간 것 같다.

그래서 이광수는 '강한 힘'에 쉬이 굴복한다. 내가 갖지 못한 강한 힘을 가지려고 맞서 싸우는 일은 요원할 따름이다. 대신 '강자'에 빌붙어 그들이 만든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괜히 무정한 세상에서 힘들게 사느니 유정한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것이 백 번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는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 모로 '이광수'와 '이형식'은 닮았기 때문이다. '고아'라는 설정이 그렇고, '선생'이라는 직업도 똑같고 말이다. 이런 이형식이 박영채의 자결 소동에 충격을 먹지만, 금방 괜춘해져서 김선형과 약혼하고 미국유학길이라는 확실한 출세길을 '선택'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박영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갈등'을 하지만, 김선형과 마주하는 순간에 그런 갈등은 눈녹듯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슬며시 '조선이 처한 비참한 현실(홍수로 인해서 모든 일상이 망가진 서민들의 모습)'로 시선을 돌리고,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뛰어난 역량(힘)'을 과시하며, 더욱더 강한 힘을 신봉하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지몽매'하기 때문이라고 못 박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이형식은 '과학'을, 김선형은 '수학'을, 김병옥과 박영채는 '음악'을 공부해서, 무지몽매한 이들을 깨우쳐주는 선각자이자, 계몽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그 결심은 10000% 결실을 얻고, 조선에 더 많은 학교를 세워서 어리석은 민중들을 일깨워주겠다는 사명감에 활활 불타오른다.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한다면서 말이다.

물론, 고마운 마음가짐이다. 자신들이 '강대국'에서 뛰어난 교육을 잘 받고 와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일깨워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도 학교를 세워 '근대화'를 이뤄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산학교, 대성학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학교들이 '민족자본'에 의해 세워지고 조선의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 유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이 교육만으로 달성될 일일까?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독립운동'을 실행에 옮기기도 힘들었으며, '무장투쟁'을 하려해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크게 활약하곤 했지만, 결국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1920년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이후로 1930년대에 접어들면 변변한 '무장투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딴에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 독립(또는 자치)을 이루자는 노력도 보였으나, 결국 이승만 같은 괴물만 만들어냈을 뿐, '외교독립론'은 빛 좋은 개살구 격이었다. 그러니 '교육'만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행동(또는 운동)을 해나갔어야 한다. 그런데 <무정>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저 쉽디 쉬운 꿈만 꾸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그리고 정작 이광수 본인도 '교육자'로 별다른 활약도 하지 않고서 쉬이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쓴 글로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방점을 찍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는 결코 '유정'한 세상을 맞이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조선이 수탈 당해 일제의 배를 불려주는 것으로 조선땅에 '유정'한 세상이 만들어졌느냔 말이다. 그게 아님을 잘 알면서 그는 '조선의 무정'만을 탓할 뿐이다. 그래서 근대 한국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참으로 무색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이광수를 '애증의 대상'으로 표현했는데,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이 이광수에게서 '근대의 희망'을 품고서 그를 사랑하고 조국이 발전할 모습에 기대를 많이 부풀렸을 터이니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지식을 싹 제거하고 소설 자체만 놓고 따진다면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면으로만 보면, 분명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 문학의 쾌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싹 다 제외하고서 읽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광수의 '위를 향한 욕망'까지 제거할 수는 없고, 그 욕망의 면면을 파고 들다보면, 그가 친일부역자였다는 사실에 다다르고 만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인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췄어도 '배신의 아이콘'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경멸해야 할 대상인 것일까? 요즘 전세계적으로 '극우또라이들'이 활개를 치며 난장을 만드는 것을 보면, 단순히 '똑똑하다'고 추켜세워줄 까닭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들의 똑똑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리 없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하고 '경각심'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함께 더불어서 잘 살려는 착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절대로 '강한 힘(권력)'을 갖지 못하게 단절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무정>을 읽다보니, 그런 꼴통들이 떠올랐다. 그런 까닭에 이광수의 소설도 읽어야 하는 걸까? 경각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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