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 걸리버 여행기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김세라 글, 문성호 그림, 강서정 감수, 손영운 기획, 조너선 스위프트 원작 / 채우리 / 2013년 5월
평점 :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9 :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 손영운 / 김세라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VIII / 채우리 21번째 리뷰] 나는 태어나 보니 '박정희 정권' 시대였고, 살다보니 '전두환 정권'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군사독재'를 관통하던 시절을 살아서 <걸리버 여행기>를 그저 동화책으로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소인국'만 있는 책으로 말이다. 그때 어떤 친구가 '소인국'이 전부가 아니라 '거인국'도 있고, '천공성'도 있으며, '마인국'도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실체'를 보지 못했으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2년에 '문학수첩'이란 출판사에서 '최초 완역본'으로 <걸리버 여행기>를 출간했더랬다. 그때 우연히 책을 손에 넣긴 했는데, 정작 완독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첫 번째 충격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어른들을 위한 '풍자소설'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당시 영국 정치인들의 세태와 위선을 꼬집은 '정치소설'이었다. 그러나 더 꼬집어보면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인 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모두 어리석고 사악하며 탐욕스럽기 그지 없다고 모조리 다 싸잡아 비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리고 뒤이은 두 번째 충격은 왜 <걸리버 여행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아작을 냈었던가다. 비단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었단다. 불편한 내용은 '삭제'하고, 원래의 내용을 알 수 없게 '왜곡'했으며, 그런 부담을 덜기 위해서 아예 '소인국'과 '대인국' 정도로만 짜깁기 해서 '아동용 소설'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인국'편에선 그저 신기한 모험 이야기로만 읽히다가 '거인국'편에 들어서면서 세계 최강으로 자부했던 대영제국을 신랄하게 까댔고, 걸리버가 사는 인간세계에서는 영국이란 나라가 최강일지 몰라도, 걸리버가 한낱 소인으로 보이는 '거인국'에서는 대영제국일지라도 그저 거인들의 한 발자국만으로도 가볍게 제압 당할 수 있는 약소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걸리버가 늘어놓은 대영제국의 위상이란 것이 거인들의 눈에는 참으로 거슬리는 비열한 종족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상대를 속이는 일을 자랑 삼아 늘어놓고, 약소국과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온갖 무력을 앞세워서 파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약탈과 수탈, 심지어 학살까지 자행하며 힘을 과시하는 장면에서 거인들은 진정으로 분노하기에 이른다.
'천공성'으로 올라간 걸리버는 인간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허위와 부조리, 그리고 끝없는 탐욕을 신랄하게 까댄다. 그리고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인간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따끔하게 지적하는데, 그건 '마인국'에서 휴이넘을 만나고서 극치의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걸리버는 야후(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휴이넘(말 종족)'과 비슷한 고도의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괴리감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마인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며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처럼 살고 있는 하찮은 종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찮은지 휴이넘들이 '가축'으로 길들여 써먹으려 해도 제대로 통제가 되질 않아 포기했고, 야생동물처럼 풀어놓고 살게 해주려해도 '같은 종족'인 저들끼리도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폭력적인 존재라 아주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걸리버는 '여자 야후'를 아내로 받아들여 지성을 심어주려 했으나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슬픔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걸리버는 '휴이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만, 휴이넘들은 애초에 야후를 '위험요소'로 보았기에 걸리버가 이성을 가진 야후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더 큰 위협'으로 여겼기에 마인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걸리버는 휴이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죽으려 하지만 인간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가도 문제다. 걸리버가 영국이란 '야후'가 사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걸리버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가족들에게조차 '야후의 악취'를 맡게 되자 식사도 혼자하고, 말들이 있는 마굿간에서 안식을 얻으며, 말들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걸리버가 자신의 모험담을 글을 써내려 가는데, 그게 바로 이 책<걸리버 여행기>라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의 세태를 비판한다. 사실 '맹비난'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조나단 스위프트는 '성악설'에 근거해서 이 책을 썼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성직자'였다. 당시 18세기 종교관으로 보면 인간은 모두 선하다는 '성선설'의 입장을 고수해야 할 위치에 있는데, 그는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추하다며 '성악설'보다 더 심한 악담을 쏟아낸 격이다. 이는 아무래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본토'에서 성직을 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작용(?)한 듯 싶다. 애초에 그가 원하던 대로 쉬이 '영국 본토'에서 성직자 생활을 했더라면 이런 비난을 쏟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영국 본토'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 까닭을 당시 '성직자들의 위선과 비열한 정치질'이라고 본 스위프트는 인간의 본성을 까발리듯 <걸리버 여행기>를 써내려 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도무지 '희망'이 없었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다보면 '인간의 이성'이 환하게 빛나는 대목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인국의 왕이 그렇고, 휴이넘에서 걸리버가 주인으로 섬겼던 말이 그렇다. 그들의 빛나고 존경스러울 정도로 높은 이성이 바로 '최상의 인간'이 소유한 이성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스위프트가 대부분의 인간은 '야후'만도 못한 짐승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지만, 그가 이상적으로 바라본 이성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높은 이성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실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스위프트가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꼬집긴 했지만, 인간에게 아예 희망조차 없다고 체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은 비로소 '풍자소설'로 완성이 되며, 걸리버가 겪은 이상한 모험들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해가 1726년이라고 한다. 무려 300년 남짓이나 지났는데도 이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은 여전히 필요충분하다. 우리가 진보와 보수, 극좌와 극우로 갈라져서 '정치싸움'을 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상대를 '제거'하고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왜 우리는 추한 본성을 티내고 싶어 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즐기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그걸 즐기면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된 듯 싶다. 적어도 나는 그런 종자들의 비열함을 한껏 욕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이성'을 챙기길 바라고 또 바란다. 한낱 짐승도 '자기 종족'끼리는 싸우지 않는 법이다. 오직 인간만이 '같은 종족'임에도 생각이 다르고, 겉모습이 다르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서 서로를 죽이는 짓을 일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 그런 야만스럽고 혐오스러운 짓은 그만 하자. 제발 이성을 찾고 서로를 존중하며 높은 이성을 가진 인간답게 살아가길 바란다. 뭐, 기왕 죄 지은 놈은 달게 죄를 받고 말이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저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너무 역겹다. 애초에 인간이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말이다. 그나마 인간으로 '대접'을 해주니 정상적인 법 절차를 거쳐서 죄를 따지고 있는 것 아닌가. 더는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인간답게 죄값을 치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