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1 : 페스트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1
권기희 글, 이철희 그림, 황의조 감수, 손영운 기획, 알베르 카뮈 원작 / 채우리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1 : 페스트>  알베르 카뮈 / 손영운 / 권기희 / 황의조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 / 채우리 23번째 리뷰] 알베르 카뮈의 대표적인 작품인 <페스트>는 우리에게 '실존주의'와 '부조리'의 대표작이라는 대명사로 더 많이 알고 있다. 허나 오늘날에 와서 '실존의 문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아니 '퇴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지만, 요즘 누가 그런 골 아픈 논증을 하며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또 궁극적으로 실존주의는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한 번 벌어진 격차'를 좀처럼 좁힐 수 없는 현대인들의 고뇌와 불만을 잠재워 줄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페스트>를 읽으며 '실존'을 운운하는 건 잠시 놓아두도록 한다. 아무리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도 현대인들의 답답한 속마음을 해체해줄 대안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부조리'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부조리'는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현대인을 괴롭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부조리'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부조리'도 실존주의 철학용어로써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뜻을 해석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 또는 그런 일'을 아울러 이르는 용어다. 이를 테면, <페스트> 속에서 파늘루 신부가 겪는 고뇌 같은 일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20세기까지도 '전염병'은 씻지 못할 죄악 때문에 받는 형벌이 그 원인으로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천벌' 말이다. 그래서 파늘루 신부는 오랑 시에 페스트가 퍼지자 교회에서 신도들을 향해 '기도'를 드리자고 외친다. 신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천벌을 내린 거라면서 말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달리 말해 전염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죄를 씻어내는 일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상황은 '부조리(이치에 맞지 않게)'하게 흘러간다.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죽고 만 것이다. 페스트가 씻지 못할 죄악에 의해 걸리는 병이라면, 아직 큰 죄를 짓지도 못했을 어린아이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파늘루 신부는 이런 '부조리'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답을 내놓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의 부정'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즉, 전염병은 하나님이 내리는 형벌이 아니라 '쥐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에 의해서 걸리는 질병일 뿐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쥐벼룩'이 창궐하지 못하게 주변 위생을 깨끗하게 하고 청결한 생활습관을 기르고 '혈청(항생제)'을 연구해서 사람을 살리는 의학기술을 발달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답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 페스트를 극복하기 위한 '신앙심'은 별개의 문제라며 손을 떼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건대'를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된다면서 '신부'라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행동했어야 한다. 헌데 파늘루 신부는 이런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부조리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에서도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다. 왜냐면 부조리한 상황은 '내가 원치 않는다'고 그 상황에 처하지 않거나 맘대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느닷없이 벌어지는 '교통사고'로 인해 크게 다치는 부조리와 마주할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층간소음'을 일으키거나 '불쾌한 냄새(음쓰, 땀내 등등)'를 맡으며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야 하는 경우도 겪을 수 있다. <페스트>에서도 취재차 오랑 시에 들렀던 랑베르가 발이 묶인 처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알베르 카뮈도 사랑하는 아내와 때마침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생이별'을 했던 경험으로 이 소설 <페스트>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런 부조리는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과연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인가?

카뮈는 우선 '반항 정신'을 강조했다. <페스트>에서는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우리가 부조리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을 미연에 막거나, 원천적으로 예방할 도리는 없다. 허나 그런 부조리한 경우에 맞닥뜨렸을 때 '반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항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릴 수 있어서 '저항 정신'이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최악의 팬데믹을 경험했다. 그때도 이런 '반항'을 일상화했던 덕분에 힘겨웠지만 끝내 이겨낼 수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팬데믹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했고, 그 결과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극복했다. 부조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전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정말 인상적이지 않은가. <페스트>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보건대의 활약'이다.

또 하나는 '연대 의식'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관여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그보다 처참한 참극도 없을 것이다. 정말 '합리적인 방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테니 말이다. <페스트>에서 랑베르가 처음에 이런 모습이었다. 자신은 오랑 시와 아무런 연관이 없으니 '페스트'에 걸려서 죽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러 탈출하는 것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일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외지인에 불과한 랑베르의 '시선'으로 오랑 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랑베르처럼 행동하게 된다면 우연찮게 마주하게 되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될 뿐이다. 물론 랑베르도 페스트에 걸려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상황속에서 할 만한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다름 아닌 '연대 의식'을 갖고 '내 일처럼' 여기며 함께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다. 이런 자세 덕분에 인류는 수많은 최악의 위기를 극복해냈고, 앞으로도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연대 의식'만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이와 더불어서 카뮈는 '성실함'을 강조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면 인간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끝없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랑(위대한)'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체구도 작고 나이도 많은 늙은이에 불과하지만 그랑 씨는 페스트에 걸리고도 혈청을 맞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타루의 죽음'과 대비되면서 더욱 빛이 난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타루가 살고 그랑이 죽을 것만 같은데, 결과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페스트>에서 타루의 죽음은 너무 뼈아픈 절망감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토록 성실하고 삶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이 죽어야만 했는지 언뜻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조리를 극복하는데 '반항'과 '연대', 그리고 '성실'이 효과적이라는 것이지, 그것들이 '만병통치약'처럼 완전무결한 해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조리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조차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무도 슬프고 비참한 고통을 동반하겠지만, 그러함에도 '반항'을 멈추지 않고, '연대'를 놓지 않으며, 한발 한발 뚜벅뚜벅 '성실'하게 나아가야 비로소 부조리를 이겨낼 수 있음을 말이다. 이는 '부조리 극복'이 완전한 영광을 선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를 테면, 일단 '일어난' 자연재해로 인해 벌어진 엄청난 '인명 피해'과 막대한 '재산 손해'는 감수하고, 그 폐허의 현장 위에서 '우뚝' 일어서는 것이 '부조리 극복의 최선'임을 일깨워주는 복선으로 봐야 할 것이다. <페스트> 속에서 페스트로 인해서 희생된 모든 이들이 바로 그 복선인 것이다.

<페스트>는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 상황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서 달게 받아야 할 숙명 따위가 아니다. 그냥 벌어진 상황이다. 이렇게 누구도 원치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최악의 상황을 우리는 '부조리'라고 부른다. 허나 우리는 그런 최악의 상황조차 극복할 '원천적인 힘'을 갖고 있다. 바로 '반항', '연대', 그리고 '성실'이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윤석열의 비상계엄, 트럼프의 관세 정책, 우크라와 가자 전쟁에 이어 '대만 전쟁'으로 확전될 위기감에 '제3차 세계대전'까지 운운하고 있는 이런 상황이 '내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우리 모두'에게 맞닥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이 '부조리'하지 않다면 뭐란 말인가? 그럼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반항', '연대', 그리고 '성실'이다. <페스트>에서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를 우리가 관심 높여야 할 적기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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