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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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 동아시아 (2025)

[My Review MMCXXXVI / 동아시아 8번째 리뷰] 각설하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개발' 과정 전체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지능보다 떨어지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만족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지능을 훌쩍 뛰어넘는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을 강행할 것이냐? 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현재의 고민이다. 이를 더 간단히 이해하려면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약 인공지능'과 인간의 통제가 불필요한 '강 인공지능'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 선택의 편리를 위해 간략하게 두 가지 인공지능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겠다.

인공지능 개발의 꿈은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옛날부터 존재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신들의 만찬에서 활약한 '스스로 움직이는 술쟁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들만이 마신다는 '넥타르'나 '암바사'를 무한정 운반하는 일종의 '인간 아닌 하인' 노릇을 한 것인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 로봇'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노력은 1950년대 이후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바로 '컴퓨터의 등장' 덕분이었는데, '인간의 지능'을 대신할 수 있는 대상이 드디어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등장이 곧바로 '인공지능'을 실현시켜 주지는 못했다. 특별한 '계산 능력'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긴 했지만, 여전히 '한정된 재능'이었고, 더구나 '인간의 명령'이 없으면 스스로 복잡한 계산을 해서 결과를 내놓지도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인간과 닮은 생각',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 더 나아가 '인간의 명령'이 따로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해내는'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실현은 착착 진행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난관은 엄청났고 잘 되는 듯 싶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인공지능'은 그 실현가능성이 매우 높은 방법을 마련하였다. 바로 '빅 데이터'를 활용한 '딥 러닝'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실, 컴퓨터가 인간과 비슷한 사고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용량'에 해당하는 방대한 저장매체와 '인간의 신경세포'를 닮은 '전산통합장치'만 있으면 가능했다. 문제는 그것 자체만으로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고, 그것을 운용하기에 엄청난 성능의 GPU(Graphics Processing Unit)가 다량으로 필요했으며, 설령 이 두 가지를 갖췄다고 해도 이런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원'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은 제대로 운용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미래에는 이 모든 난관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AGI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춘 '강한 인공지능'이 탄생을 앞두고 있는 현재다.

그럼, AGI가 탄생하면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 먼저 인간이 풀지 못한 숙제를 AGI가 대신 풀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난치/불치병 문제를 해결해서 인간의 생명연장도 더는 꿈이 아니게 된다. 또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서, 지금껏 인류가 누리던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서 지구의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게 만들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만들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더불어서 전세계적으로 만연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도 싹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서 온 인류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하는데 톡톡한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은 더 이상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AGI가 운용하는 시스템 속에서 풍요와 여유를 즐기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인간이 상상하는 '파라다이스(천국)'와 '유토피아(이상향)'가 실현되는 것이 연상되는 것과 동시에 불안감이 슬슬 들지 않는가? 그간 수없이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천국'속에 도사리고 있는 '지옥'을 발견할 수 있었고, '유토피아'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디스토피아'였다는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 AGI가 만들어낼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실제로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그 대목을 더 자세하고,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섬뜩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막연한 두려움으로 떡칠을 한 것이 아닌 '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더욱 섬뜩했다. 우리가 과학만능주의를 맹신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맞을 것인지, 속된 말로 뒤통수 조심하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이 번쩍 드는 소감이었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지구의 모든 것은 '인간의 몫'인냥 인간 마음대로 처리하며 살았다. 그런데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하게 된다면, 더구나 그것이 너무나도 '인간과 똑같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자신보다 떨어진 지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가 말이다. 물론 겉으로는 '인간과 친구로' 지내는 척 할 것이고, '인간을 돕는 일'만 하겠지만, 그간 인간이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진 동물'을 어떤 취급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본다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더구나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존재'가 언제까지나 '인간의 도구'이자 '인간의 노예'로 만족할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한낱 기계에 불과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전원버튼'을 눌러서 간단히 꺼버리거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몸체(로봇)'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통제가능'하지 않겠냐는 낙관론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AGI가 가동하는 시점에서는 '전원차단'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이 '개인용 컴퓨터(pc)' 한 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서버(전산망)'속을 누비고 다닐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 서버만 차단한다고 해서 완전하게 소멸시킬 수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원차단'을 강행한다면 인류는 모든 전기장치를 다 꺼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기장치를 다시는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인류는 디지털적인 삶을 포기하고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다시, 돌과 나무, 흙을 이용하는 '석기시대'로, 간단한 금속을 이용하는 '철기시대'의 연장인 조선시대쯤으로 문명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현재의 인류가 그 옛날로 되돌아가서 살 수 있을까? 그나마 전쟁이 아닌 평화가 이어질 거란 상상에서나 '조선시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자. 인공지능에 대한 '통제권'을 인간이 소유하는 '약 인공지능'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을 더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 개발을 마치고 '강 인공지능'을 활성화시키는 버튼을 누르고 결과를 기다릴 것인가? 지금 당장으로썬 어떤 미래가 더 나은 미래인지 장담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생긴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반반'은 아닌 것 같다.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무(無)'에서 탄생해서 스스로 학습한 결과에 따라 엄청난 지식을 쌓은 것이라면, 선함과 악함의 기대치를 반반으로 놓을 수 있겠지만, 그동안 쌓은 '인류의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낙관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AGI가 천사일지, 악마일지, 어렵지 않게 가늠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약 인공지능에서 멈출지, 강 인공지능 개발을 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 선택권이 현재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강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만들기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적국'이 먼저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AGI(강 인공지능)를 만들 나라는 '미국'이어야 하고, 절대로 '중국'이 먼저 만드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제3위권 그룹'에 대한민국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윤석열과 그 일당이 저지른 헛발질 때문에 한참 뒤쳐지고 말았고, 다행스럽게 미국에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 큰 헛발질을 하면서 '미국'이 크게 휘청거리는 상황이라 추격할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그 사이에 '중국'이 먼저 만들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먼저 만들면 '천사 AGI'이고, 중국이 먼저 만들면 '악마 AGI'일거란 장담도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내겐 천사'일테지만, '남에겐 악마'처럼 보일 거라는 쪽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그래서 AGI가 만들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구도 속에서 다른 결론이 내려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은 곧 찾아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가 뭘 준비할 것이 있을까? 이 책에서는 현재의 인간은 '개미'에 빗대고, 앞으로 탄생할 인공지능을 '인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개미 가운데 아인슈타인처럼 뛰어난 지능을 가진 개미가 있다고 판명이 난다고 하더라도 '인간(미래의 인공지능)'이 그 '개미(훗날의 인간)'를 어떻게 처분(!)할 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격차'가 존재하는데 뭘 대비할 수 있을까? 어떤 대비가 소용 있을까?

정말 십분 양보해서 '램프의 지니'와 같은 전지전능한 노예를 갖게 되는 상상을 해보자. 인간은 그 전지전능한 노예에게 무슨 소원이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 지도 모른다. 허나 이야기속 '램프의 지니'는 주인을 해칠 수도 없고, 인간을 살해하는 일도 할 수 없는 따위의 '마법(족쇄)'가 채워져 있다. 그래서 램프의 주인은 안심하고 지니를 노예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 인공지능'에게 누가 '마법 족쇄'를 씌울 수 있을까?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는 '명령'에 순순히 따를까? 그걸 장담할 수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맘처럼 안 된다면? 오히려 인간이 노예처럼 전락하고 말지 않을까? 문득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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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이빨 요정을 만나다 이사도라 문 시리즈 13
해리엇 먼캐스터 지음, 심연희 옮김 / 을파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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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이빨 요정을 만나다>  해리엇 먼캐스터 / 심연희 / 을파소 (2022) [원제 : Isadora Moon meets the Tooth Fairy(2021)]

[My Review MMCXXXV / 을파소 14번째 리뷰] 어린 시절에 '치과'에 가길 좋아하는 어린이는 없다. 좋아하는 어린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걔는 어린이가 아니다. 어린이가 '전기드릴'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그 드릴로 자기 이를 구멍 뚫고, 긁어내고, 갈아내는 일을 견뎌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모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치과에 발을 들여놓는 까닭은 딱 하나다. 달콤한 사탕? 아니다. 예쁜 간호사 선생님? 더더욱 아니다. 그건 바로 바로 참을 수 없는 '치통' 때문이다. 볼따구가 팅팅 부어 올라서 욱신욱신 거리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평소에 맛나게 먹던 음식조차 손에 댈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밀려올 때쯤이면 이젠 만사가 다 포기다. 배도 고파오지만, 그런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저 아프고, 또 아플 뿐이다.

그렇게 치과 '문턱'에서 30분, '의자' 위에서 30분 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어린이가 한두 명쯤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치과 치료가 끝나고 통증이 가라앉게 되면 의외로 순순하지고 만다. 손에는 어김없이 달콤한 사탕을 꼭 쥐고 있고 말이다. 그래도 좀 의젓한 어린이라면 통증이 가라앉고 나면 '치료행위'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지고, 치과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낼 여유를 찾게 된다. 그리고 좀 똑똑한 어린이라면 치과에 다녀온 뒤부터 '이닦기' 등 관리에 더욱 철저히 하기 마련이다. 물론 세상에 그런 어린이는 흔치 않지만 말이다.

이사도라가 이번에 만난 에피소드는 바로 '이빨'이 빠지고 '새이빨'로 가는 첫 경험 이야기다. 아, 사람의 경우엔 '이'로,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이 경우엔 '이빨'로 표현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이사도라 문은 '뱀파이어 요정'이므로 이빨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영어 표현으로는 'tooth'로 통일된 듯 싶다. 영어를 잘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어 예문을 살펴보면, tooth는 단수, teeth는 복수로 구분할 뿐, 사람이나 개도 모두 tooth로 쓰고, 우리 말로만 '치아'와 '이빨'로 구분했을 뿐이다. 암튼, 누구나 '젖니'에서 '간니'로 이갈이를 첫 경험할 때는 조금씩 흔들흔들 거리다가 쑥 빠지곤 한다. 흔히 자다가 그런 경우가 많고, 식사할 때 끈적이는 음식에 달라붙어서 빠지는 경우도 흔하다. 이사도라는 사과를 먹다가 빠졌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건 '뱀파이어 전통'으로는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니는 '뱀파이어의 자긍심'에 해당하므로 특별한 유리 상자 속에 넣어서 평생 간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정 전통'으로는 빠진 이빨은 베개 밑에 두고 이빨 요정이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빨 요정은 이빨을 가져가는 대신 '요정 은화'를 선물로 두고 갈 것이고 말이다. 이사도라는 '아빠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엄마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좀처럼 선택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이럴 때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 아빠를 따라 '뱀파이어 전통'에도 따라보고, 엄마를 따라 '요정의 전통'을 따라보고 난 뒤에 이사도라에게 딱 맞는 방법을 선택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사도라의 빠진 이빨은 '하나뿐'이었다는게 문제였다. 하나를 둘로 나눌 수도 없고, 더구나 이빨 요정이 가져가 버리면 다시는 되찾을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 와중에 이사도라는 자기 이빨을 가져간 이빨 요정이 그것으로 무얼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이빨 요정은 그렇게 가져간 '헌 니'를 모아 반짝반짝 빛나는 궁전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아빠가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냈다.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절대로! 그래서 이사도라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를 따르자니 '치과'에 가기가 무섭고, 또 요정의 전통을 따르지 않아서 실망할 엄마 때문에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엄마를 따르자니 그 어떤 요정 이빨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사도라의 송곳니를 그냥 넘겨주기도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어떡하지?

과연, 이사도라의 선택은 무엇일까? 결국 요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빨 요정'과 만나긴 해야 할텐데, 만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무척 궁금하지 않겠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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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학이 문제일까? - 10대에게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왜 문제일까?
김동광 지음 / 반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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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문제일까?] <왜 과학이 문제일까?>  김동광 / 반니 (2023)

[My Review MMCXXXIV / 반니 1번째 리뷰] <왜 문제일까?> 시리즈가 나왔었다. 벌써 2년 전이다. 독서논술쌤으로 지내다보면 이런 유형의 책은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신간소식'을 제때에 들을 처지가 못할 정도로 '현역'에서 은퇴한 선생이다보니 좀 발빠르게 챙겨서 읽지 못할 뿐이다. 한때는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을 주고 리뷰를 부탁할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리즈 책이니 틈틈이 읽어볼 작정이다. 암튼, 시리즈 책 목록을 훑어보니 초등 고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읽으면 좋을 내용으로 주제를 선별해 놓았다. 인문적 교양을 쌓으면서도 '통합교과'로 문이과 융합형 교과 연계가 되어 있어서, 학생들이 읽으면 '관심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끌어들여, 궁극적으로는 '사탐/과탐' 영역과 연관이 된 내용이기 때문에 학습에도 도움이 될만한 훌륭한 참고 자료로 가득했다. 나의 학창시절에도 이런 유형의 책들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면 '사탐/과탐' 영역을 단순히 암기하기에 그치지 않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어서 학업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방법도 저절로 터득했을텐데 말이다. 옛날에는 그저 죽어라 외우고, 나중에 대학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서야 겨우 이해하는 느려터진 학습법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해박하고 친절한(?) 선생님이 계셔서 '코칭'이라도 제대로 받았더라면 좋으련만, 공부하다 생긴 '호기심'과 '궁금증'을 질문하면, 그 당시에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걸 쓸데없이 왜 물어!"라는 대답과 함께 꾸중만 들었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논술쌤이 되고 보니, 그건 그 선생님도 잘 몰랐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왜냐면 나도 잘 모르는 걸 학생들이 물어보면 짜증부터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학생이 어떤 질문을 하든 다 대답할 수 있도록 이책저책을 탐독하고 있다. 그래도 모르면 '다음 시간'에 제대로 답변해주기 위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답을 찾으면서 말이다. 이건 '선생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학생을 칭찬해주지는 못할 망정 '핀잔'이나 '꾸중'을 하는 선생은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책 <왜 과학이 문제일까?>는 과학이 인류에게 미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결코 외면해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 과학이 우리에게 일으킨 많은 문제들을 되돌아보고, '과학 지상주의'에 빠져들어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밝혀냈다. 더구나 오늘날의 과학은 '거대과학화' 되고, '상업화' 되어 꼭 필요한 과학을 발전시키기보다는 '돈(이익)'을 얼마만큼 벌어 들일 수 있는 과학연구인지부터 따지기 때문에 '첨단과학'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는 '부자'를 위한 과학', '권력'을 위한 과학으로 되려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경향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고 말이다. 거기다 과학이라는 분야조차 '차별'이 심해서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차별도 심심찮게 폭로가 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이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엄청난 이득에 취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평등을 조장해서 선택받은 소수만을 위한 과학으로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럼 과학으로 인한 문제들에는 어떤 예가 있을까? 먼저, 전쟁과 과학발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우려스럽다. 아시다시피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독가스'라는 대량살상무기이자 독성 화학무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맨해튼프로젝트'라는 '거대과학의 시작'으로 인해 핵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터뜨려 엄청난 인적 · 물적 파괴를 직접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과거의 전쟁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까지 목숨을 건 처절한 전투를 벌어야 해서 '전쟁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낄 수라도 있어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1차 · 2차 세계대전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포탄과 폭탄, 그리고 독가스와 핵폭탄 같은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무기로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전쟁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더 많은 인명살상을 결과로 겪고 나서야 '전쟁의 위험성'을 새삼 깨닫게 되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다 전쟁의 양상도 확연히 바뀌었다. 과거의 전쟁에서는 참전하는 '군인'만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전후방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총력전'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훨씬 더 커졌다는 것이다. 도시를 향해 쏘아진 '독가스'와 '핵폭탄'이 과연 누굴 죽였겠느냔 말이다. 아무런 대비도, 방비도 없이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학살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학은 전쟁의 시기에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왜냐면 적을 얼마나 많이 죽이고, 더 빨리 죽여서, 상대국을 무력화시켜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적의 심장부라고 여기는 곳이라면, 그곳이 전방이든 후방이든 가리지 않고 '선제타격'을 하며 상대국이 미처 대비하지도, 방비하지도, 그래서 '반격'하지 못하게 초토화시키는 것이 최우선 목표인 탓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군산복합체'를 만들어 전국민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군대와 산업'이 결탁해서 최후의 하나까지 짜내서 상대를 섬멸시키려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이는 '거대과학의 탄생'을 실현시키고 만 셈이다. 개별적으로 연구해오던 '과학'에서는 꼭 필요한 연구도 하지만, 과학자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지만, '거대과학'으로 총력을 기울이려면 '엄청난 연구자금'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적 낭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로 몰아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연구자금'만큼 '성과이익'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한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만들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경제위기(?)를 감수해낼 국민들이 과연 있을까? 그렇기에 거대과학을 추진하는 정부에서는 '이익이 날 만한 과학연구'에만 연구자금을 몰아주는 경향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꼭 필요한 '기초과학연구'에는 성과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연구자금이 말라가고, 당장 눈앞에 큰 이득을 가져다줄 안정적이고 확실한 연구에만 엄청난 자금을 지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과학연구가 먼 미래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거대과학화'된 과학연구자들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생명과 안전, 그리고 일상의 행복을 가져다 줄 '연구성과'까지 특정 국가와 기업에게 '로열티'와 '지적재산권'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물론, 특허와 같은 '재산권 소유'는 당연히 보장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엄청난 연구자금을 투자해서 '신약'을 개발했는데, '공짜약'으로 무료배포할 수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제약회사의 지적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1회 투여' 비용으로 1억 원이라는 고액을 책정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이런 식이라도 '재산권 보장' 운운할 수 있을까? 이런 조치는 한마디로 '돈 없는 가난한 환자들'은 신약조차 써보지 못하고 그냥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기업이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돈장사를 하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이런 예는 에이즈, 백혈병,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 실태를 아주 생생히 겪어보았다. 과연 앞으로도 '환자의 생명'을 두고 부자와 빈자로 구분 짓는 행태를 반복해야만 할까?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투자금 회수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이익을 챙기는 선을 넘어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연구 개발'로 나온 신약을 효과적으로 처방하기 위해서 국가가 나서서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형태로 치료방법이 발견되는 즉시, 그 혜택도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의 관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온 국민의 관심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과학계에도 여전한 불평등' 때문이다. 특히, '첨단과학'이 발달 할수록 어렵고 복잡한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과학은 점점 발전하는데, 그로 인해서 기존의 세대는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신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 그 기회를 잘 살리기 위해 '정보교육'까지 제공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해서 사회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빈부격차' 때문이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가 첨단기기를 '공짜'에 가깝게 싸게 제공하고, 그 기기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무상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은 그런 '기기'를 쓸 시간적 여유도 없고, 그런 '교육'을 들을 시간에 추가근무수당을 챙기기 위해 일터로 나가는 일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부자들만을 위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게 문제가 된다. 여기에 더해 '인종차별', '여성차별'은 아직도 과학계의 평등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떤가? 왜 과학이 문제가 되는지 여실히 보이지 않은가? 우리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풍요롭고, 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첨단과학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편리함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공될 뿐이고,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일상은 더 빈곤하고, 더 불편한 진실만 마주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삼성 반도체가 수출 호황을 맞았다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삼성 반도체가 아무리 많이 팔린다고 해도, 내가 '삼성전자 주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그닥 좋은 일도 아니다. 물론 한 기업이 성장하면 국가경제도 성장하는 것이고, 그러면 국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질 거라는 '낙수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낙수 효과'를 실현시킨 정부는 전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기분만 좋을 뿐이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이 나의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높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나라의 경제는 성장했는데, 가난한 나의 삶은 더 가난한 방향으로 추락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부자들만 더 큰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으로 후퇴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민의 세금으로 발전시킨 과학적 성과가 제대로 '나의 삶'을 풍족하고 편리하게 만들고 싶다면 '비판적 사고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과연 이런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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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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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 / 문학동네 (최신 개정판, 2025) [개정판 (2018) / 초판 난다출판사 (2016)]

[My Review MMCXXXIII / 문학동네 26번째 리뷰] 한강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죽음'과 마주하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는 표현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작별하지 않는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소설 전편에 해당하는 문구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한강은 '죽지 마라'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을 묘사하면서 그 어둡고도 찬란한 미사여구를 흐드러지게 썼으면서도 죽지 말고 살라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고,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랬고, <바람이 분다>, <희랍어 시간>...내가 읽은 모든 한강 소설에서 무섭고 힘들겠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미학이라도 써내려는 듯이 '죽음'을 그토록 아름다운 문구로 꾸며 놓고서 말이다. 차라리 끔찍하게 써놓았다면 말이나 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이 책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해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강 소설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은 듯이 말이다. 그 첫머리에 한강은 소설에서 '질문'을 던진다고 하였다. 특별한 '답'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때론 무심하게 '질문 공세'를 펼친다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몫이라고 했지만, 그조차 급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순간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을 찾기 힘들 거라면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 듯 질문에 답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동안 한강 소설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런 책'이며, '저렇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니 '그런 답'을 찾았다면 옳게 읽은 셈이라는...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누가 보더라도 뻔한 답을 찾아야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인냥 열심히 답을 찾았다. 물론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인 셈이다. 애초에 뻔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보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인데, 어리석게도 난 그간 헛되게 읽었던 셈이다. 그럼 한강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삶 또한 없으니 '어떤 삶'이든 살아보라. 삶은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모두'가 찬란한 삶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니 살아라! 찰나와 같이 스치듯 지나는 삶일망정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아무리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진저리를 치더라도 삶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니 살아라! 스치듯 지나는 짧은 삶일망정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모두 기쁨일지니...

<흰>의 첫머리에도 단 두 시간 남짓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산달이 다 차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젊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마저 직장에 있던 그 순간에, 모진 산통을 견디고서 갓 지은 배냇저고리를 검붉게 물들인 채 한 시간만에 겨우 두 눈을 뜬 갓난아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 본 젊은 엄마의 첫 아기는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한 삶을 살다 온몸을 휘도는 고통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젊은 엄마는 홀로 싸늘히 식어가는 갓난아기의 눈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죽음'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첫 느낌은 죽음에 대한 애달픔이었다. 너무 짧은 생애이지 않은가 말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갖춘 의료시설에서도 '팔삭동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초산'이었을 젊은 엄마가 낳은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았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삶'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죽음'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조차 담담하게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고 서술했다. 아직 뱃속에 더 있어야 할 순간일텐데, 너무 서둘러 나와서 미처 자라지 못한 상황이었을 텐데, 갓난아기는 힘겹지만 두 눈을 뜨고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엄마를 바라봤다고 했다. 그 한 시간 남짓한 '만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고 깊은 생각의 끝에 나는 '기쁨'이었다고 답을 찾았다.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 그리 생각을 하였다. 조금만 더 느긋한 '만남'이었다면 그 기쁨을 더 오래오래 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갓난아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조금 서둘렀고, 그리 많은 준비를 갖추지 못한 서툰 만남이었지만, 젊은 엄마의 첫 아기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고,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해서 뭐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힘겹게 뜬 두 눈 가득 '기쁨'을 뿌려주고 서둘러 가버린 짧은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한강 작가는 이런 애달픈 기쁨을 온통 '흰' 것으로 치장하였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수의, 그리고 하얗게 웃다는 말까지 흰 것들로 말이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애달픔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흰 것들은 삶의 '기쁨'을 관통하고 있고, 순간이든, 영원이든, 삶은 기쁨이니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소설들이라는 '질문의 의미'를 찾아냈다. 여전히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답을 떠올렸다. 길고 긴 여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삶도 기쁨이길 바랄 뿐이다. 아직까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 말이다. 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볼 누군가가 없기에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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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의 쓸모 - 어른의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66개의 단어들
김범준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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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의 쓸모 : 어른의 삶을 다채롭게 만드는 66개의 단어들>  김범준 / 한빛비즈 (2025)

[My Review MMCXXXII / 한빛비즈 174번째 리뷰] 우리 말에는 형용사가 많다. 그만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나타내주는 말이 많다는 건 '같은 사물'이라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길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도 '형용사 단어' 하나만으로도 풍부하게 표현해 낼 수 있기도 하다. 그럼 자연스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외국어에는 우리 말처럼 형용사가 다채롭지 못하다는 것인가? 그 흔한 외국어인 '영어'조차 잘 못하는 나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지만, 외국인들의 입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한국어는 '악마의 언어'다"라고 할 정도로 뒤치기(번역하기) 힘든 언어라고 혀를 내두르곤 한다. 오죽했으면 한강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으뜸공로자는 다름 아닌 '뒤치미(번역가)'라는 말을 하겠는가. 한국 소설을 외국어로 뒤쳐내는 일이 무척이나 힘든 까닭이 바로 한국어의 어마어마한 '표현력'을 품고 있는 단어를 감히 외국어가 감당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에 '한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한류열풍'을 타고 'K-pop'이 큰 인기를 끌자 한국어의 묘한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열성팬은 한국아이돌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제발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바꿔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왜냐면 '영어 가사'로 바꿔 부르면 그냥 평범한 '팝송'이 되어 버려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당장은 '한국어 가사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겠지만, 일단 뜻을 몰라도 '한국어 가사'만 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그 매력에 빠져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며 노래 가사의 뜻까지 알고 나면 더 큰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으니, 제발 '한국어'로 불러 달라고 간절히 애원을 하는 열성팬의 의견이었다. 왜 전세계 K-pop팬들이 그리 많은지 짐작케 해주는 단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도 '우리 말 실력'을 높이기 위해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독서논술지도'를 하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재미가 없었다면 <국어사전>을 소설책 읽듯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롭게 알아낸 낱말들이 많았는데, 형용사의 순우리말 표현도 그때 알게 되었다. 형용사(形容詞)는 모양 형, 얼굴 용, 말씀 사를 쓰고 있기에, 곧바로 뒤치면(직역하면) '얼굴의 모양을 나타낸 말'이란 뜻이다. 여기서 얼굴이란 '사물을 대표하는 부위'를 뜻하는 것일테니,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말을 '형용사'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를 순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딱일까? 바로 '모양씨'다. 모양이나 상태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핵심(씨)을 이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이런 매력을 깨우치니 다른 뜻도 함께 찾아보았다. 동사는 '움직씨', 명사는 '이름씨', 수사는 '셈씨', 조사는 '토씨', 부사는 '어찌씨'였다. 그리고 감탄사는 '느낌씨'다. 이렇게 풀어내니 딱딱하고 어렵기만 하던 '문법'조차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 책 <형용사의 쓸모>는 내게 그런 느낌을 다시금 불러 들였다. 그리고 또 하나를 떠올렸는데 인기 TV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던 <세대공감 올드 앤 뉴>였다. 어른 세대와 어린 세대가 쓰는 말이 서로 달라 '공감'하기 힘든 점이 없지 않았는데, 이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세대공감'을 이룸과 동시에 '우리 말의 매력'을 새삼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그때 익혔던 낱말 가운데 '두루뭉술하다', '휘뚜루마뚜루' 같은 말은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 이 책에서도 '늘차다', '결곡하다', '습습하다', '늡늡하다', '여낙낙하다' 같은 말은 평소에 써본 적도 없는 신선한(?) 말이어서 그 당시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더 꼼꼼히 읽고 또 읽어나갈 지경으로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늘차다(능란하고 재빠르다 :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온 경험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숙련도)'와 '여낙낙하다(성품이 곱고 부드러우며 상냥하다/미닫이 따위를 열거나 닫을 때에 미끄럽고 거침이 없다 : 내적인 힘과 외적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췄을 때 나타나는 특별한 품성)'는 뜻이 정말 마음에 흡족했다. 딱 내가 추구하는 삶에 어울리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낙낙하다'라는 말을 알기 전까진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겉으론 부드럽지만 속은 굳건한 사람이 되어 '어떤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멋진 사람이 어릴 적부터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늘찬 삶'을 추구하면 아주 딱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내가 아무리 '늘차고 여낙낙한 삶'을 살기로 노력하고, 그런 말을 즐겨 쓴들 이 '아름다운 말뜻'을 알아듣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앞에서도 번역하다는 '일본식 한자표현' 말고 순우리말로 '뒤치다'라고 썼지만, '뒤침'이라는 말뜻을 알고 있는 이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은 나도 어떤 책의 저자가 '일본식 한자 표현'을 대신할 '우리 말'을 찾으려다 '번역'이란 말을 대신할 우리 말로 '뒤침'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뜻에 십분 공감해서 따라 쓰게 되었다. 딴에는 '번역'이란 말 대신 '옮김'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외국어 번역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단순히 옮겨 놓는 일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맞게 노력했다'는 뜻을 담아 '뒤치다(엎어지거나 자빠진 것을 바로 잡아 정돈하다)'로 대신하면 좋겠다는 글쓴이의 뜻을 쫓아, 번역이란 말을 대신해서 '뒤침'이라고 줄곧 써왔다. 하지만 이런 '뒤침'이라는 표현을 알아채는 이가 없어서 부득이 '뒤침(번역)'이라고, '뒤치미(번역가)', '뒤치다(번역하다)', '뒤친(번역한)', '뒤칠(번역할)', '뒤쳐진(번역된)' 따위로 활용해서 혼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늘차고(오랜 경험과 노력으로 순련되고)', '여낙낙한(외유내강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이다라는 식으로 '섞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이 씁쓸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한 번 뜻을 품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며 살아온 나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굽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 책은 단지 '우리 말의 숨은 뜻'을 새삼스레 밝혀내어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모양씨(형용사)가 갖고 있는 뜻을 활용해서 '인생의 교훈'을 찾고 지혜로 승화시켜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지침서로 활용하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지식'을 쌓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참신함을 느낄 수 있으니 재밌기도 했지만, 그보다 '일상'에서 지혜를 깨닫게 해주었으니 더욱 희망으로 가득해졌다. 멋진 어른이 되고픈 이들에게 권하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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