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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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 / 문학동네 (최신 개정판, 2025) [개정판 (2018) / 초판 난다출판사 (2016)]

[My Review MMCXXXIII / 문학동네 26번째 리뷰] 한강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죽음'과 마주하는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라는 표현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작별하지 않는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소설 전편에 해당하는 문구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한강은 '죽지 마라'고 말한다. 수많은 죽음을 묘사하면서 그 어둡고도 찬란한 미사여구를 흐드러지게 썼으면서도 죽지 말고 살라고 말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고,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랬고, <바람이 분다>, <희랍어 시간>...내가 읽은 모든 한강 소설에서 무섭고 힘들겠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미학이라도 써내려는 듯이 '죽음'을 그토록 아름다운 문구로 꾸며 놓고서 말이다. 차라리 끔찍하게 써놓았다면 말이나 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이 책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해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강 소설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은 듯이 말이다. 그 첫머리에 한강은 소설에서 '질문'을 던진다고 하였다. 특별한 '답'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때론 무심하게 '질문 공세'를 펼친다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몫이라고 했지만, 그조차 급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순간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을 찾기 힘들 거라면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 듯 질문에 답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동안 한강 소설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모양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런 책'이며, '저렇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니 '그런 답'을 찾았다면 옳게 읽은 셈이라는...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누가 보더라도 뻔한 답을 찾아야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인냥 열심히 답을 찾았다. 물론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인 셈이다. 애초에 뻔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을 곱씹어보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인데, 어리석게도 난 그간 헛되게 읽었던 셈이다. 그럼 한강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삶 또한 없으니 '어떤 삶'이든 살아보라. 삶은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모두'가 찬란한 삶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니 살아라! 찰나와 같이 스치듯 지나는 삶일망정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그러니 죽지 마라! 아무리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진저리를 치더라도 삶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니 살아라! 스치듯 지나는 짧은 삶일망정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모두 기쁨일지니...

<흰>의 첫머리에도 단 두 시간 남짓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산달이 다 차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젊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마저 직장에 있던 그 순간에, 모진 산통을 견디고서 갓 지은 배냇저고리를 검붉게 물들인 채 한 시간만에 겨우 두 눈을 뜬 갓난아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 본 젊은 엄마의 첫 아기는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한 삶을 살다 온몸을 휘도는 고통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한 젊은 엄마는 홀로 싸늘히 식어가는 갓난아기의 눈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강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죽음'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첫 느낌은 죽음에 대한 애달픔이었다. 너무 짧은 생애이지 않은가 말이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갖춘 의료시설에서도 '팔삭동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초산'이었을 젊은 엄마가 낳은 아기의 건강상태가 좋았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삶'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죽음'이 압도적으로 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조차 담담하게 써내려 갔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꼭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고 서술했다. 아직 뱃속에 더 있어야 할 순간일텐데, 너무 서둘러 나와서 미처 자라지 못한 상황이었을 텐데, 갓난아기는 힘겹지만 두 눈을 뜨고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엄마를 바라봤다고 했다. 그 한 시간 남짓한 '만남'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고 깊은 생각의 끝에 나는 '기쁨'이었다고 답을 찾았다.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 그리 생각을 하였다. 조금만 더 느긋한 '만남'이었다면 그 기쁨을 더 오래오래 누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갓난아기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조금 서둘렀고, 그리 많은 준비를 갖추지 못한 서툰 만남이었지만, 젊은 엄마의 첫 아기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고,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해서 뭐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힘겹게 뜬 두 눈 가득 '기쁨'을 뿌려주고 서둘러 가버린 짧은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한강 작가는 이런 애달픈 기쁨을 온통 '흰' 것으로 치장하였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수의, 그리고 하얗게 웃다는 말까지 흰 것들로 말이다. 세상의 모든 흰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애달픔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흰 것들은 삶의 '기쁨'을 관통하고 있고, 순간이든, 영원이든, 삶은 기쁨이니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소설들이라는 '질문의 의미'를 찾아냈다. 여전히 정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답을 떠올렸다. 길고 긴 여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삶도 기쁨이길 바랄 뿐이다. 아직까진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 말이다. 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볼 누군가가 없기에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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