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동물대탐험 4 : 잎꾼개미와 지하 도시 - 지구 최초의 농사꾼, 잎꾼개미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4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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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제는 '잎꾼개미의 생태'를 통해서 개미사회의 생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생물의 생태'를 유심히 살펴보는 까닭은 이들의 생태속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생학(바이오메틱스)'이라는 것인데, 자연을 흉내 내어 기술을 개발하는 학문이란다. 의생학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찍찍이 벨크로'다. 도꼬마리 씨앗의 '갈고리'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제품인데, 운동화, 가방, 옷, 기타등등 안 쓰는 곳이 없을 정도로 대박을 친 히트상품이며, 인간이 쓰기에 매우 유용하다는 점에서 '의생학'은 매우 관심이 높은 분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생학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거미줄'에서 강철 섬유를, '식물의 잎'에서 태양 전지를 모방하였고,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의생학은 전도유망한 학문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개미박사'인 최재천 교수는 '잎꾼개미'를 통해 개미사회의 일면을 어린이들이 살펴볼 수 있게 펴냈으며, 어린이들은 '개미의 생태'를 살펴보며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얻어 우리 일상에서 유용한 것을 창출해내었으면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미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이 있을까? 지혜를 배우기에 앞서 '개미의 생태'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개미처럼 군집을 이루며 사는 생물한테는 '사회성'이 있다고 말들 한다. 허나 '인간사회'와 일률적으로 같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면 개미와 같은 곤충들의 생태는 거의 대부분 '생존본능' 가운데 '종족번식'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알만 낳고, 일개미는 일만 하고, 병정개미는 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자기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 이를 두고 인간들은 개미사회가 '희생정신'이 가득한 '계급사회'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를 '인간사회'에 곧바로 적용하여 '철저한 계급사회'로 분업화시킨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개미사회'에서 인간이 배울만 한 유용한 점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개미사회를 이룬 집은 대부분 '어두운 지하'에 건설하였다. 빛이 한 점도 들지 못하는 곳에서도 '의사소통'을 하는 개미만의 방식을 눈여겨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페로몬'이라는 독특한 호르몬으로 '눈을 감고도',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를 정확히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사소통 '전달방식'에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들이 더는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으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지하도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사회에서 '빛'이 없으면 삶을 살 수 없을테지만, 잠시 잠깐이라도 '어둠'이 짙게 깔리는 순간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개미들의 의사소통'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후각'의 시각화, '후각'의 청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문자'나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좀더 단순한 형태로 전달하는 체계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빨강'은 위험, '노랑'은 경고, '초록'은 안전, '파랑'은 집중 따위와 같이 '특정한 냄새'에 고유한 메시지를 정해놓으면,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냄새의 종류'가 수백만 가지라고 하니, 냄새만으로도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체계를 구축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 '곰팡이 살균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인간에게 유용한 '살균제'를 만들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항생제 남용'으로 인해 슈퍼박테리아가 등장함으로써 치료가 불가한 질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해야만 하는 절실함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라도 '천연성분의 항생제', 다시 말해 '자연생태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항생제'를 써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개미의 생태'를 비롯해서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생학적으로 분석하면 인간에게 유용한 것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미 선진국이라 정평을 받은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다른 나라'가 성과를 올린 기초학문을 엿보고 훔쳐 배울 것인가. 그런 식의 자세로는 결코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당장의 성과를 얻을 수 없는 엉뚱한(?) 연구라 할지라도 과감히 투자하고 '우리만의 표준(스탠다드)'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선도국가'로 자리잡을 수 있고, 앞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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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9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9
안형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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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느닷없이' 확 바뀌는 것일까? 쿤은 '느닷없는' 쪽이 옳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학문이 '지식 축적'이라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학)이 뉴튼의 만유인력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정립되듯이 발전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쿤은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과학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뉴튼의 만유인력 공식이 나올 수 없고, 만유인력의 공식을 아무리 나열한다해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정립될리 만무하다면서,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구조'에 따라 패러다임(틀)이 바뀌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문학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신이 지극히 사랑한 '지구'를 한가운데에 두고 그 둘레를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는 천문학설은 하늘을 관측한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에도 부합하는 아주 훌륭한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과학자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더랬다. 수성과 금성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음에도 '태양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천동설은 설명하지 못했고, 또, 화성, 목성, 토성은 완벽한 천구의 움직임에서 심지어 '역행'하는 것을 수차례 관측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천동설'은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동설'은 태양을 한가운데 두고 태양이 있던 자리에 '지구와 달'을 가져다두고 설명을 하니, 수성과 금성이 태양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과 화성과 목성, 토성이 '역행'을 하는 까닭도 잘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천동설은 과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지동설은 천동설을 '대신해서' 과학의 새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전의 패러다임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어 '정상과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쿤은 '과학혁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혁명이 구체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 자리에 신체제를 정립하기에 과학도 혁명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천동설의 잘못을 고쳐나가며, 천동설의 바탕 위에 지동설이란 새로운 과학지식이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천동설의 잘못을 지적하면 할수록 '정상과학의 지위'를 잃게 되고, 끝내 지동설이란 '새 패러다임'이 천동설을 완전히 밀어내고 '정상과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과학이란 학문은 '지식 축적'으로인해 점진적인 전환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고, 혁명적인 과정을 거쳐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다.

 

  이는 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학문은 '이전의 학문'을 반박하고, 틀림을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새 것만이 옳고, 헌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것은 저래서 옳고, 이것은 이래서 옳다'고 말할 뿐이지만, 과학에서만큼은 '이전 과학'을 잘못을 지적하고, 틀림을 증명하는 순간 '폐기'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야멸치게' 사라져버리는 냉철한 과학계의 모습 때문에 '혁명'이라는 무지막지한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놓친 부분은 바로 '과학혁명의 과정'이 한순간에 반짝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틀림'이 있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이전부터 발견되었던 사실이며, 그로 인해 천동설도 숱하게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쳐왔다. 그 과정이 짧게는 100여 년이 넘게 걸렸으며, 심지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뒤에도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뉴튼도 <프린키피아>를 세상에 내놓고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인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과학혁명'은 정말이지 느리디 느린 혁명인 셈이다. 그럼에도 과학분야의 특성은 '새 패러다임'이 주류가 되는 순간 '이전 과학'은 완전폐기되어 사라져버린다는 점 때문에 가히 '혁명답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쿤의 과학혁명구조'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바로 '오래된 믿음'이 무조건 옳지는 않으니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천동설만으로도 지구에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떠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 '태양'이 떠올라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결코 태양은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스스로' 돌아간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동설이 아무리 옳아도 '불편한 진실'이라 느껴지고 오히려 천동설이 더 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천동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은 '발전'을 이룰 수 없고 '걸림돌'로밖에 작용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당장의 편리함에 젖어버리는 것에 만족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지경에 다다르게 될 뿐이다. 그렇게 천동설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결과, 우리는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더 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아갈 준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천동설'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했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 '과학'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것에 '잘못'이 있다고 느낀다면 '의문'을 품고 진실을 밝히는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내가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더욱더 의문을 품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그 '옳음'이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살펴본 뒤에, 잘못이 드러나면 과감히 '칼'을 들이대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낡게 되고, 썩게 되어, 냄새가 고약해지고, 그렇게 되면 '도려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엔 완전히 갈아엎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게 바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은 순수한 학문조차, '지식 축적' 위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순간에 깨버린 토마스 쿤의 역작이다. 지금 우리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깨버려야 할 '오래된 착각'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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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시대정신이 되다 -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 서가명강 시리즈 27
이동신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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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그렇겠지만 '장르'에 흠뻑 빠지면 너무 즐겁다. '시즌제 드라마'를 비롯해서 '수십 편에 달하는 소설'까지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시간이기에 절대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뭔소린고 의아한 분들이라면 '마블영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아이언맨>으로 시작해서 <어벤져스 : 엔드 게임>까지 무려 12년(2008년~2019년)의 세월이었지만, 마블팬들에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엔드 게임' 이후에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이언맨, 블랙 위도우, 캡틴 아메리카, 블랙팬서, 스파이더맨이 사라졌을 때 눈물을 펑펑 쏟은 팬도 있었고, 울적한 감정에 빠져 우울감을 호소한 팬도 많았다. 비록 현실의 인물이 아닌 상상속의 캐릭터였지만, 그 캐릭터를 더는 연기할 수 없다는 소식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SF장르에 빠지리라는 걸 상상조차 못했다. SF보다 더 먼저 '판타지장르'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호빗>, J.K. 롤링의 <해리포터>,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이우혁의 <퇴마록>, <치우천왕기> 등을 비롯해서 웬만한 '판타지장르'는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타지물'이 아니어도 '엘프'와 '드래곤', 그리고 '칼을 든 전사(<야만인 코난> 같은 '스워드 앤 소서러 장르')'만 나오면 환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루카스의 <스타워즈>와 스필버그의 <백 투더 퓨처>의 추억을 떠올리며 F. 허버트의 <듄>, A.C.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I. 아시모프의 <로봇>, <파운데이션>, 그리고 P.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비롯한 숱한 SF 소설을 탐닉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SF소설에는 어떤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궁금해서 이 책 <SF, 시대정신이 되다>를 펼쳐들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길, 사실 '판타지'나 '공상과학' 장르의 소설들은 모두 '현실도피'를 위해서 고안된 장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장르소설이 유행을 할 시점은 실제 현실이 고달픈 시기라고 한다. 허나 딱히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신빙성'은 높겠지만, 내가 이런 장르를 좋아한 까닭은 딱히 '현실도피'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판타지'나 '공상과학'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것이지 팍팍한 현실이 괴로운 탓에 뭔가 새로운 활력소를 찾다가 매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해리포터> 소설을 읽던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져들었다거나 <마블영화>를 즐겨보던 20, 30대 젊은이들이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현실도피한 것은 아닐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저 '재밌으니까' 본 것 뿐이다.

 

  어쨌든, '냉전시대'를 맞으며 전세계적인 '공상과학(SF)' 장르가 대유행을 했더란다. 미소가 펼친 우주경쟁시대 속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거둬야만 했는데, 그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기 위해선 'SF' 장르에 대한 대유행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1969년 달착륙에 성공하면서 SF 장르는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기대했던 막상 도착을 해보니 '외계생명체'가 살 수 없는 척박하고 황량한 모습에 관심이 급감했기 때문이란다. 그 전까지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우주전쟁>까지 벌이곤 했는데,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런 상상력이 더는 통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달 착륙 이후에도 화성과 금성 등 생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고, 더 먼 목성과 토성, 그리고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탐사위성을 쏘아올리며 SF 장르는 최대 흥행을 이끌어나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생명체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 오직 지구에만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칼 세이건을 비롯해서 '지적외계인'을 찾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점점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실망(?)한 대중들의 관심을 주목받게 된 것이 바로 '판타지 장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신비한 대상이 필요했는데, 시기적절하게 '판타지 장르'가 그 대상으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2000년대 <해리포터> 등이 대유행을 했던 거란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SF장르는 또다시 흥행을 이끌게 되었단다. 바로 'SF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들이 잇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1900년대에 이미 출간된 소설들이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우리 나라에 상륙하게 되었고, 올드팬들의 추억이 깃들어 있던 소설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셈이다. 그리고 더는 '우주'를 배경으로 '로켓(우주선)'을 쏘아대지 않는 SF장르가 쏟아지듯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작을 소개하라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같은 암울한 미래사회를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이렇게 SF 장르는 단순히 '상상력'만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불안'까지 담아내며 '문제작'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는 실제로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데서 많은 '공감'을 얻게 된 점이 인기비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SF소설과 영화속에서나마 그런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었는지 분석하며 막연하게나마 현실의 사회문제를 간접적으로 접해보고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해보는 점이 '색다른 맛'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SF적인 상상력'이 왜 필요한지 제시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SF적 상상력'이 필요를 넘어 절실한 시점에 SF 소설에 위기가 찾아왔더란다. '장르소설'은 전적으로 팬덤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대중에게 '팔려야' 소설가가 '더 쓸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더 많이 사주어야 할 대중들에게 '너튜브' 같은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장르소설'이 외면받게 되었단다. 실제로 '장르소설'의 판매량은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고, 대중들은 점점 더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숏폼'에 빠져드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단다. 이래선 결국 'SF 장르'는 다시 침체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우울한 전망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SF 장르를 읽고 'SF적인 상상력'을 키워야 한단다. 왜냐면 '인공지능 로봇' 같은 것이 멀지 않은 미래에 곧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공상'에 불과했던 일이 곧 '현실'이 되는 시점에서 무언가 '대책마련'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시모프가 '로봇 3원칙'과 같은 것을 이미 마련해놓긴 했다. 1원칙,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원칙,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물론 '앞선 원칙'이 우선 되어야함은 당근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로봇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한다.

 

  어디 이뿐인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재정립'해야만 한다. 이젠 인간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삶의 터전을 넓히려다 동물의 터전을 보장하지 않으니 당장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대유행하고 말았다. 이젠 '조류독감(AI)'는 해마다 터지며,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다른 동물에 비해 건강하던 돼지마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물론 '항생제'를 먹여 인간이 먹거리 걱정을 하지 않게 할 순 있겠지만 결국엔 '언 발에 오줌누기' 같은 처방일 뿐이다. 언젠간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항생제'가 더 많이 함유된 고기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 동물뿐이랴. 식물까지 확장해서 생각을 한다면 인간이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인류세'를 넘지 못하고 절멸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들 지경이다.

 

  우리는 이런 '지구적인 문제점'을 더 깊은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SF적인 상상력'이 담뿍 들어 있는 소설을 더 많이 접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젠 SF 장르는 '취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의무'로 접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과학'적인 공상만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과학으로 연구되어야만 할 것이다. 정리하면, SF 소설이라고해서 우주를 배경으로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모험만을 떠올리지 말라는 얘기다. 물론, 그런 장르의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이제는 우주가 아닌 '지구'에서도 얼마든지 '공상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골소재였던 '시간여행(타임루프)'뿐만 아니라 '남녀의 구분'이 없는 세상, '동식물'이 일체인 세상,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로 더는 지구가 아닌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모든 것이 SF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쓰여진 소설들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를 '사변'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굳이 (외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용어를 써가며 생각하지 않아도, 우린 그냥 '생각'하면 될 뿐이다.

 

  끝으로 SF장르는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듦과 동시에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새로운 장르가 모두 그렇다. 새로 보여주기 때문에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세계에 빠져들면 결국 '낯설었던 것들'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아직 현실에는 '없는' 그런 것들에 익숙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이런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맞이할 미래는 결코 '낯선 것'에 당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슬기롭게 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SF 장르'에 흠뻑 빠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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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언어 - 상 - 논어와 함께 노자, 열자, 장자 읽기 고전 아틀리에 3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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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번역'이라는 일본식 한자표현이 아닌 '뒤침'이라는 우리식 표현이 옳다고 본다. 다른 나랏말로 쓰여진 것을 '옳게' 이해하려면 우리말로 '바르게' 뒤쳐야 온전히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나랏말에는 '있지'만 우리말에는 '없는' 표현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랏말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버스나 컴퓨터 같은 말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려들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태우고 저절로 달리는 커다란 수레'라든지, '번갯불같이 빠르게 어려운 풀이를 척척 해내는 전에 없던 편리하고 유용한 전자장치' 따위로 어색하고 뜬금없이 말만 긴 표현만 즐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뒤침'은 적절한 '풀이(해석)'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외국의 고전이 '뒤침'의 첫 대상이 될 것이다. <고전>의 유용함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니 건너띄면 좋을 것이고, 따져볼 일은 <고전>을 '어찌' 풀이할 것인지다. 서양의 고전은 '논리적인 풀이'를 좋아하니,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서 풀어나가면 '뜻'이 크게 달라질 까닭은 없을 것이고, 각 나라의 '문화'적 특색을 고려하며 풀어나가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나, 동양의 고전은 좀 생각해볼 일이다. 왜냐면 '한자'로 쓰였기 때문이다. 크게 '한중일, 세 나라'가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탓에 오래된 문헌은 거의 대부분 '한자'로 쓰였다. 허나 한자의 쓰임새와 뜻풀이는 서로 다르게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같은 문구'라도 나라마다 뜻풀이가 달랐고. 시대에 따라 달랐고, 심지어 학자마다 서로 다르게 풀어낸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동양의 고전'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풀이(해석)'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책 <치유의 언어 (상)>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저자가 '그런 고민'까지 미리 해준 덕분일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열자의 <열자>, 장자의 <장자>는 각 고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테지만, 이들을 한데 엮어서 우리에게 '고전의 매력'을 흠뻑 젖게 만들어주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참,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한 손엔 유가사상을, 다른 한 손엔 노장사상을 들고서, 옛 사람들의 지혜를 곱씹으면 현대인들의 만성고민도 해결될 묘책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인들은 '부의 넉넉함'을 꿈꾸며 부단히 쫓아가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는 절망만을 느낄 뿐이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시간을 쪼개며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공평과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현실에 분노할 뿐이다. 이런 현대인들이 <논어>만 읽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과 의로 개인의 덕성과 인성을 닦고, 충과 효로 나라(사회)를 바로 잡으며, 평생을 갈고 닦은 지혜로 세상을 평안하게 만드는데 부단히 '자기 채찍질'만 가할 뿐일 것이다. 이러면 끝내 지쳐 쓰러지고 만다. 반면에 무위자연을 노래한 <노장사상>만 읽었을 땐 어떨까? 바쁜 일상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선사하며 '안분지족'으로 저마다 스스로 만족한 삶을 영위하며 '안빈낙도'하는 신선의 삶을 살게 될까? 오히려 그런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모으려 안달복달할 것이며, 그도 안 되면 코인과 주식으로 평생 모은 돈을 탕진하거나, 로또라는 환상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는 '도피처'만 찾는 우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을 놀고 먹을 돈을 모은 현대인은 행복하게 살까? 현대인 가운데 젊은 나이에 평생 써도 남을 돈을 모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리 없으니 '비정상적인 삶'에 쉽게 유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허튼 일에 돈을 쓰게 되고 탕진 이후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시 돈을 모을 줄 모르니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기 십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찌 살았을까? 그들도 근본적으로 현대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실은 가혹했고 불공평과 불평등은 더욱 심했으며 세상은 짧은 환란과 긴 혼돈의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 될 뿐이었다. 그 지독한 괴로움 속에서 옛 사람들의 지혜는 돋보였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공맹사상>과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노장사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책 <치유의 언어 (상)>이 말하는 핵심사항이다. 지나고 보니 나도 그랬다. 부지런히 달리다가 지치면 적당히 쉬었고, 쉼에 지쳐 몸이 달아올랐을 땐 미치도록 달리기를 반복한 삶을 살았다. 우리 선조들도 벼슬을 탐할 땐 공자의 <논어>를 파고 들었고, 벼슬을 내려놓을 땐 노자, 장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낙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특히, 풍진 세상을 만났을 땐,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속세를 떠나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가진 것 하나 없음에도 근심걱정하지 않았으니, 그 균형점의 어느 곳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다해도 '마음'이 병들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찾은 셈이다.

 

  물론, 이런 지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삶'에서나 이룰 수 있다. 혼란한 사회속에서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외면하고 저 혼자만의 낙원을 찾는다면 '현실도피'와 다를 바 없다. 더구나 현대인들에게 속세를 벗어난 무릉도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많은 개인이 아프면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다. 그럴 땐 '안빈낙도'에서 탈출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난세를 평정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러 분연히 일어서야 한단 말이다. 그때 바로 공맹사상의 '인의예지'가 필요한 법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특효약은 <논어>, <맹자>에 있단 말이다. 이렇듯 공자와 노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속에 서로를 존경하며 탐하는 사이였단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각자도생'을 외치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병들었기에 그렇다. 옛 사람들의 지혜에서 해법을 찾자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책의 '해석'에 무리가 있다며 딴죽을 걸지도 모르겠다. <논어>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되고, <도덕경>과 <장자>를 누가 그렇게 읽느냐면서 말이다. 또는 '걍 뒤침말투(직역투)'를 트집 잡으며 저자의 비전문성을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만 번듯하면 '뜻'을 곡해할 까닭이 없다. 시의적절하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따위로 못생긴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한다"고 지적하면, '부적절'한 이가 누군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현재 우리는 '비정상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홀라당 '비정상'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각자도생'이라는 모진 상황일지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정상적인 사회로 치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이 아플 땐 '개인적 치유'에, 우리가 아플 땐 '국가적 치유'에, 모두가 아플 땐 '세계적 치유'에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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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1 최후의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4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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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자면, <3001 최후의 오디세이>는 전작들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매 시리즈를 더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충격'을 선보였던 것에 비해 '최후의 오디세이'는 비교적 잔잔한 마무리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 클라크가 언급한 것처럼 '2001', '2010', '2061', 그리고 '3001'에서 이어지는 줄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류보다 앞선 문명의 산물이었던 'TMA-1(일명 '티코석판')이 지구에서 초기 인류에게 '발견'된 이후 인류가 달에 발을 딛는 순간 '새로운 티코석판'을 발견했고, 인류가 태양계로 확장시켜 눈을 돌리는 순간 '또 새롭고 거대한 티코석판(일명 '큰형')이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에서 발견하는 '순서'로 점차점차 독자들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나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이 그린 '미래'는 오류투성이였다. 작가가 살던 시기는 7080 '냉전시대'였지만, 작가가 그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1세기였기 때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그 시기에서 보았을 때에는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화합을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최후의 오디세이'를 집필하던 90년대에는 느닷없이 독일이 통일하고 구소련이 붕괴를 하는 등 작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뻥뻥 터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최후의 오디세이'는 어떤 면에선 '방향전환'이 필요했었을 거라 짐작이 된다. 더구나 세 번의 밀레니엄을 거쳐 네 번째 밀레니엄 시대를 맞은 '3001년의 지구'는...아니 '우주'는 온인류가 '지구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의 체제 아래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구인들이 이렇게 똘똘(?) 뭉칠 수밖에 없게 된 까닭은 지구인들이 더는 지구에서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속에서도 지구인은 '지표면'에서 살지 않았다. 바로 '인공위성이 돌던 궤도'상에 인공건축물을 만들고, 그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 대에 수없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한 '기술적 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보다 손쉽게 우주로 나아갈 수 있고, 우주 어디서든 머물 수 있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을 거라 작가는 상상했던 것이다. 이른바 '테라포밍(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이나 위성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지구환경과 비슷하게 조성하는 일련의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테라포밍'은 다각도로 연구되고 있고 현재의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기도 한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46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듯이 가장 가까운 달을 비롯해서 화성과 수성, 그리고 거대한 기체행성들의 위성들을 '테라포밍'해서 지구인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까지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억 년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긴 시간들조차 137억 년전에 만들어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작가 클라크는 비교적 짧은 '1000년'이라는 시간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가능케 한 '작가적 상상력'에 뜨거운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가정'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목성'이 '또 하나의 태양(루시퍼)'으로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코석판'이라는 외계 문명의 결정체가 지구인과, 그리고 '인공지능'과도 결합(?)하여 최고의 지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의 '지적설계론'이 한몫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 클라크는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두고 상상력을 펼칠 것은 아닐 것이다. 티코석판이 '어떤 존재'인지 밝히지 않았기에 독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배경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작가도 '새로운 생명체'가 지구인과 조우하기 위해선 '운명적인 만남'을 주선할 '무엇'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설계)이 필요했을 뿐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특정' 종교가 이야기하는 '종말론'이 전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클라크의 소설에서는 '지구의 종말'이나 '외계의 침공', 그로 인해 지구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허황된 짓을 전혀 하지 않아 고마울 따름이다. 뭐, 소행성 충돌 따위의 위험인자까지 싹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시나리오는 우주적 관점에서 평범한 일상이고, 이미 지구가 경험한 '사실(팩트)'이니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의 줄거리를 짤막하게나마 소개를 해야 겠다. <3001 최후의 오디세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놀랍게도 1편에서 등장했다가 우주선(디스커버리 호) 밖으로 튕겨나간 프랭크 폴이다. 미친 인공지능 HAL과의 싸움에서 어이없게 소외(?)되었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니 얼떨떨한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렇게 차가운 우주속에서 그야말로 '얼어붙었다가' 거의 1000년 만에 다시 깨어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태양계 안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광활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그 넓고 텅빈 공간을 떠돌다가 기적과 같이 지구로 생환하게 된 셈이다. 신호가 끊긴 인공위성도 찾지 못하는 21세기 과학수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31세기에는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더 기적같은 일은 1000년 가까이 꽁꽁 얼었던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는 '의료기술'일 것이다.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안에 있던 미라를 다시 되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미라클처럼 펼쳐진 것이다. 물론 '미라'와 '동면기술'은 엄연히 다른 방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폴의 기적같은 생환이 벌어진 이후의 묘사들은 살짝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마치 '고대 중세사람'이 오랜 잠을 자다 '현대'에 깨어나서 벌이는 에피소드처럼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이 책이 쓰여진 1996년 당시의 상상력이 그려낸 먼 미래와 현재 2024년에 펼쳐진 현실과 상상하는 미래 '사이'의 묘한 이질감이 집중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30년 전의 독자들은 이 책에 묘사된 이야기에 열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전편에서 다루었던 '지적외계인의 존재', '목성의 대폭발', '에우로파(유로파)의 생명체' 등의 '충격'에 비하면 너무나도 밋밋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31세기 사람들은 모두 '대머리'...아니아니 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기에 이쯤 하겠다.

 

  그럼에도 대작의 결말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인류는 오랜 꿈인 우주로 나아가기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우주정복'과 같은 심술궂은 야망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시의 불빛이 사라진 깜깜한 어둠속에서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이다. 그 까닭은 세이건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다시 우주로 돌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작가 클라크는 우리의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담은 것일테다. 그리스의 지략가 오디세이가 온갖 험난한 모험을 겪으며 기나긴 항해 끝에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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