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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언어 - 상 - 논어와 함께 노자, 열자, 장자 읽기 ㅣ 고전 아틀리에 3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12월
평점 :
나는 '번역'이라는 일본식 한자표현이 아닌 '뒤침'이라는 우리식 표현이 옳다고 본다. 다른 나랏말로 쓰여진 것을 '옳게' 이해하려면 우리말로 '바르게' 뒤쳐야 온전히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나랏말에는 '있지'만 우리말에는 '없는' 표현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랏말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버스나 컴퓨터 같은 말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려들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태우고 저절로 달리는 커다란 수레'라든지, '번갯불같이 빠르게 어려운 풀이를 척척 해내는 전에 없던 편리하고 유용한 전자장치' 따위로 어색하고 뜬금없이 말만 긴 표현만 즐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뒤침'은 적절한 '풀이(해석)'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외국의 고전이 '뒤침'의 첫 대상이 될 것이다. <고전>의 유용함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니 건너띄면 좋을 것이고, 따져볼 일은 <고전>을 '어찌' 풀이할 것인지다. 서양의 고전은 '논리적인 풀이'를 좋아하니,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서 풀어나가면 '뜻'이 크게 달라질 까닭은 없을 것이고, 각 나라의 '문화'적 특색을 고려하며 풀어나가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나, 동양의 고전은 좀 생각해볼 일이다. 왜냐면 '한자'로 쓰였기 때문이다. 크게 '한중일, 세 나라'가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탓에 오래된 문헌은 거의 대부분 '한자'로 쓰였다. 허나 한자의 쓰임새와 뜻풀이는 서로 다르게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같은 문구'라도 나라마다 뜻풀이가 달랐고. 시대에 따라 달랐고, 심지어 학자마다 서로 다르게 풀어낸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동양의 고전'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풀이(해석)'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책 <치유의 언어 (상)>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저자가 '그런 고민'까지 미리 해준 덕분일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열자의 <열자>, 장자의 <장자>는 각 고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테지만, 이들을 한데 엮어서 우리에게 '고전의 매력'을 흠뻑 젖게 만들어주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참,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한 손엔 유가사상을, 다른 한 손엔 노장사상을 들고서, 옛 사람들의 지혜를 곱씹으면 현대인들의 만성고민도 해결될 묘책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인들은 '부의 넉넉함'을 꿈꾸며 부단히 쫓아가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는 절망만을 느낄 뿐이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시간을 쪼개며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공평과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현실에 분노할 뿐이다. 이런 현대인들이 <논어>만 읽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과 의로 개인의 덕성과 인성을 닦고, 충과 효로 나라(사회)를 바로 잡으며, 평생을 갈고 닦은 지혜로 세상을 평안하게 만드는데 부단히 '자기 채찍질'만 가할 뿐일 것이다. 이러면 끝내 지쳐 쓰러지고 만다. 반면에 무위자연을 노래한 <노장사상>만 읽었을 땐 어떨까? 바쁜 일상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선사하며 '안분지족'으로 저마다 스스로 만족한 삶을 영위하며 '안빈낙도'하는 신선의 삶을 살게 될까? 오히려 그런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모으려 안달복달할 것이며, 그도 안 되면 코인과 주식으로 평생 모은 돈을 탕진하거나, 로또라는 환상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는 '도피처'만 찾는 우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을 놀고 먹을 돈을 모은 현대인은 행복하게 살까? 현대인 가운데 젊은 나이에 평생 써도 남을 돈을 모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리 없으니 '비정상적인 삶'에 쉽게 유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허튼 일에 돈을 쓰게 되고 탕진 이후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시 돈을 모을 줄 모르니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기 십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찌 살았을까? 그들도 근본적으로 현대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실은 가혹했고 불공평과 불평등은 더욱 심했으며 세상은 짧은 환란과 긴 혼돈의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 될 뿐이었다. 그 지독한 괴로움 속에서 옛 사람들의 지혜는 돋보였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공맹사상>과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노장사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책 <치유의 언어 (상)>이 말하는 핵심사항이다. 지나고 보니 나도 그랬다. 부지런히 달리다가 지치면 적당히 쉬었고, 쉼에 지쳐 몸이 달아올랐을 땐 미치도록 달리기를 반복한 삶을 살았다. 우리 선조들도 벼슬을 탐할 땐 공자의 <논어>를 파고 들었고, 벼슬을 내려놓을 땐 노자, 장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낙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특히, 풍진 세상을 만났을 땐,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속세를 떠나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가진 것 하나 없음에도 근심걱정하지 않았으니, 그 균형점의 어느 곳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다해도 '마음'이 병들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찾은 셈이다.
물론, 이런 지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삶'에서나 이룰 수 있다. 혼란한 사회속에서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외면하고 저 혼자만의 낙원을 찾는다면 '현실도피'와 다를 바 없다. 더구나 현대인들에게 속세를 벗어난 무릉도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많은 개인이 아프면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다. 그럴 땐 '안빈낙도'에서 탈출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난세를 평정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러 분연히 일어서야 한단 말이다. 그때 바로 공맹사상의 '인의예지'가 필요한 법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특효약은 <논어>, <맹자>에 있단 말이다. 이렇듯 공자와 노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속에 서로를 존경하며 탐하는 사이였단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각자도생'을 외치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병들었기에 그렇다. 옛 사람들의 지혜에서 해법을 찾자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책의 '해석'에 무리가 있다며 딴죽을 걸지도 모르겠다. <논어>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되고, <도덕경>과 <장자>를 누가 그렇게 읽느냐면서 말이다. 또는 '걍 뒤침말투(직역투)'를 트집 잡으며 저자의 비전문성을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만 번듯하면 '뜻'을 곡해할 까닭이 없다. 시의적절하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따위로 못생긴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한다"고 지적하면, '부적절'한 이가 누군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현재 우리는 '비정상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홀라당 '비정상'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각자도생'이라는 모진 상황일지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정상적인 사회로 치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이 아플 땐 '개인적 치유'에, 우리가 아플 땐 '국가적 치유'에, 모두가 아플 땐 '세계적 치유'에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