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9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9
안형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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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느닷없이' 확 바뀌는 것일까? 쿤은 '느닷없는' 쪽이 옳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학문이 '지식 축적'이라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학)이 뉴튼의 만유인력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정립되듯이 발전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쿤은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과학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뉴튼의 만유인력 공식이 나올 수 없고, 만유인력의 공식을 아무리 나열한다해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정립될리 만무하다면서,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구조'에 따라 패러다임(틀)이 바뀌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문학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신이 지극히 사랑한 '지구'를 한가운데에 두고 그 둘레를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는 천문학설은 하늘을 관측한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에도 부합하는 아주 훌륭한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과학자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더랬다. 수성과 금성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음에도 '태양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천동설은 설명하지 못했고, 또, 화성, 목성, 토성은 완벽한 천구의 움직임에서 심지어 '역행'하는 것을 수차례 관측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천동설'은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동설'은 태양을 한가운데 두고 태양이 있던 자리에 '지구와 달'을 가져다두고 설명을 하니, 수성과 금성이 태양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과 화성과 목성, 토성이 '역행'을 하는 까닭도 잘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천동설은 과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지동설은 천동설을 '대신해서' 과학의 새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전의 패러다임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어 '정상과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쿤은 '과학혁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혁명이 구체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 자리에 신체제를 정립하기에 과학도 혁명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천동설의 잘못을 고쳐나가며, 천동설의 바탕 위에 지동설이란 새로운 과학지식이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천동설의 잘못을 지적하면 할수록 '정상과학의 지위'를 잃게 되고, 끝내 지동설이란 '새 패러다임'이 천동설을 완전히 밀어내고 '정상과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과학이란 학문은 '지식 축적'으로인해 점진적인 전환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고, 혁명적인 과정을 거쳐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다.

 

  이는 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학문은 '이전의 학문'을 반박하고, 틀림을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새 것만이 옳고, 헌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것은 저래서 옳고, 이것은 이래서 옳다'고 말할 뿐이지만, 과학에서만큼은 '이전 과학'을 잘못을 지적하고, 틀림을 증명하는 순간 '폐기'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야멸치게' 사라져버리는 냉철한 과학계의 모습 때문에 '혁명'이라는 무지막지한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놓친 부분은 바로 '과학혁명의 과정'이 한순간에 반짝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틀림'이 있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이전부터 발견되었던 사실이며, 그로 인해 천동설도 숱하게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쳐왔다. 그 과정이 짧게는 100여 년이 넘게 걸렸으며, 심지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뒤에도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뉴튼도 <프린키피아>를 세상에 내놓고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인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과학혁명'은 정말이지 느리디 느린 혁명인 셈이다. 그럼에도 과학분야의 특성은 '새 패러다임'이 주류가 되는 순간 '이전 과학'은 완전폐기되어 사라져버린다는 점 때문에 가히 '혁명답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쿤의 과학혁명구조'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바로 '오래된 믿음'이 무조건 옳지는 않으니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천동설만으로도 지구에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떠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 '태양'이 떠올라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결코 태양은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스스로' 돌아간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동설이 아무리 옳아도 '불편한 진실'이라 느껴지고 오히려 천동설이 더 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천동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은 '발전'을 이룰 수 없고 '걸림돌'로밖에 작용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당장의 편리함에 젖어버리는 것에 만족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지경에 다다르게 될 뿐이다. 그렇게 천동설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결과, 우리는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더 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아갈 준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천동설'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했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 '과학'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것에 '잘못'이 있다고 느낀다면 '의문'을 품고 진실을 밝히는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내가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더욱더 의문을 품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그 '옳음'이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살펴본 뒤에, 잘못이 드러나면 과감히 '칼'을 들이대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낡게 되고, 썩게 되어, 냄새가 고약해지고, 그렇게 되면 '도려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엔 완전히 갈아엎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게 바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은 순수한 학문조차, '지식 축적' 위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순간에 깨버린 토마스 쿤의 역작이다. 지금 우리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깨버려야 할 '오래된 착각'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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