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0 : 공감은 마음을 연결하는 통로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10 : 공감은 마음을 연결하는 통로>  정재승 / 정재은, 이고은 / 아울북 (2022)

[My Review MMCXXVI / 아울북 35번째 리뷰] 어느덧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 아우린이 쓴 '인간 탐구 보고서'도 종결을 고하게 되었다. 아우린 탐사대원들이 드디어 고향별로 귀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파견된 탐사대가 먼저 귀환해서 아우린들이 살기에 적합한 행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우린들이 지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아우린 종족들 모두를 만족시킬 행성을 발견한 것은 아닌 까닭에 다시 지구를 아우린들의 정착지로 정할 가능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서는 아니지만 이번에 귀환하는 우주선에 '아우린 탐사대'가 모두 탑승할 수는 없었다. 아우린 탐사대 가운데 누가 지구에 남겨진 것인지는 책을 직접 읽으며 밝혀내길 바라며, 남겨진 탐사대원이 수행할 새로운 임무는 무엇인지 '시즌 2'에서 차차 알아가면 좋을 것이다.

시즌 1의 마지막인 10권의 주제는 '공감'이다. 인간은 유독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공감을 발휘하면 더욱 끈끈한 정을 나눌 수도 있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내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뇌과학적 관점에서는 미스테리할 따름이다. 인류역사학에서는 이를 두고 '경험'에서 나오는 '생존의 유리함'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독불장군처럼 혼자만의 힘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려 한 인간들은 생존에서 불리했기 때문에 개체수를 늘리지 못했고, 여럿이 힘을 모아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한 인간들은 생존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공유한 집단'은 공감 능력을 더욱 키우는 쪽으로 문화를 형성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뇌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일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공감 능력'이 전 인류의 공통적인 특징인 것은 분명할텐데, 지역사회마다 차이는 있는 모양이다. 도움을 주고 받는 성향은 공통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이다. 이런 '개인주의'가 더 발달한 서구 사회에서는 '공감 능력'이 때때로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물론 이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무시무시하게 번져 나갈 때 보여준 '개인주의'적 행동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약자를 도태 시켜버리려는 경향이 훨씬 더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노인이나 동양인이 길거리를 걷고 있으면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해서 상처를 주는 일이 빈번해서 큰 이슈가 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한 일본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외면하는 일본인들을 지적하면서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사례도 있다.

그럼 이들에겐 '공감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기보다는 '지역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사례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앞서 해코지하거나 외면한 이들에게도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도와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이 '공감 능력'을 먼저 발휘하지 않고 폭력과 외면을 먼저 행한 까닭도 '자신의 이익'이 침해 받았다는, 침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을 지도 모른다. 왜냐면 사람에게는 '이기적 본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 본능'도 함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무엇이 먼저 발동할 것인지는 '케바케'가 되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랍어 시간>  한강 / 문학동네 (2011)

[My Review MMCXXV / 문학동네 25번째 리뷰] 한강 소설은 나에게 버겁다. 나는 '시어(詩語)'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강의 장편소설은 마치 '시어'처럼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에 한강이 쓴 소설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시어'가 그렇듯,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그뜻까지 해독하는데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마치 명작 그림을 눈앞에 두고도 '참 잘 그렸다'는 감상 이외에 더 많은 소회나 느낌을 내뱉지 못하고 말문이 턱 막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한강 소설은 딱 그렇다. 그런데도 작년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도 있었고, 마침맞게 한강의 수상을 예상이나 한듯 수상자를 맞췄기에 '예스24'에서 1000원 상당의 상품권도 아주 잘 받아서 딱 그만큼 기뻐했더랬다. 그래서 한강의 책들을 줄줄이 구입했더랬다. <희랍어 시간>도 그렇게 뒤늦게 구입한 책이다.

그런데 막상 읽는데 너무 힘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읽다보면 '전체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전체 줄거리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아름다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겉핥는' 식으로밖에 읽지 못하는 나의 독서 수준이 참으로 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구나 중간 중간에 불쑥 튀어나오는 '외국어'는 나의 감상을 더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딱한 수준인데, '외국어'로 전달되는 감상까지 곁들이는 일은 무척이나 힘겨웠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절박한 사정에서 내가 느껴야 하는 감동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 답답했던 것이다. 그것이 중반 이후에 빛을 잃어가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애달파지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개하고 있음에 절박한 정황은 점점 절절한 사랑을 승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는데,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손짓으로, 눈빛으로 대신하려 하지만, 남자는 빛을 잃어가서 연인의 손짓과 눈빛을 차마 볼 수 없게 된다는 슬픈 사랑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더 애끓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되어 '표현'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간'은 촉박하기 그지 없는데,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말과 찬란한 빛은 참으로 오랫동안 빚어져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감정을 서로 나누는데 성공은 하지만, 결국엔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기에 안쓰러울 따름이다.

딱 여기까지의 감상만으로 <희랍어 시간>을 이해하고 뭉클한 감정을 오래오래 간직하기만 했다면, 이 책이 난해한 소설이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여기에 하릴없는 '사족'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청각과 시각의 소실로 인해 '접점'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감각은 '후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이 남았는데, 후각은 좀 그렇다고 하더라도 '촉각과 미각'으로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느냔 별 쓰잘데 없는 딴죽을 걸어재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깝게 지내는 부부사이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사이인 까닭에 '사랑의 재확인(!)'을 하기 위한 '접촉(!!)의 편의성'이 쉽사리 성사되지 않을 거라는 '가설(?)'까지 세우고 있는 나 자신에게 참으로 대실망을 했더랬다. 이게 뭔 대환장의 파티란 말인가.

암튼, 아직은 '문학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엔 내공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다. 먼 훗날 '내공'을 냠냠한 다음에 다시 <희랍어 시간>에 도전해보고자 한다. 내 천박한 문학적 소양에 다시 한 번 절망을 안겨준 소설로 기억할 순 없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 동화를 꿀꺽해버린 꿀잼 심리학
류혜인 지음 / 스몰빅인사이트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 동화를 꿀꺽해버린 꿀잼 심리학>  류혜인 / 스몰빅인사이트 (2021)

[My Review MMCXXIV / 스몰빅인사이트 1번째 리뷰] 심리학은 과학일까?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는 꽤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면 우리 나라에서 '심리학'이라고 하면 마음(心)을 이치(理)를 연구(學)한다고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은 '철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과학적 관점'의 영역으로 본격화하였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정신분석의 대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생각)'을 '분석(검증)'한다는 '정신분석학'은 분명 과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이라는 명칭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과 생각을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을 별개로 여기고, 전혀 다른 학문이라고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정말 별개의 학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철학적인 성향이 강한 '심리학'이란 명칭이 과학적 데이터를 모아서 검증을 하는 방식으로 연구하는 '정신분석학'으로 더 명징하게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오늘날에는 같은 뿌리에서 이어진 같은 학문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 즉 '심리학'은 과학적 관점으로 좀 더 객관화하며 읽고, '정신분석학'은 철학적 관점으로 더욱 넓게 바라보면서 읽는 것이 조금 더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책 <심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를 읽어보니 '심리학'이 좀 더 명징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우리에게 낯익은 동화의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이를 '심리학적 관점'이라는 낯선 '이론'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말하면, '동화의 재해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이 '심리학' 책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재해석'이 아닌 '과학자(심리학자)의 관점으로 바라본 동화'라고 표현해야 이해하기 쉽겠지만, 이런 제목이라면 누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겠는가? 어린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을 우수한 지능을 가진 '과학자의 눈높이'로 바라봤다는 것에 메리트를 느낄 독자는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래서 절충한 제목이 바로 <동화를 꿀꺽해버린 심리학>이다. 정말 읽고 싶어지는 제목이다.

책의 서문에서도 저자가 밝히고 있다. 많은 분들이 '심리학'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쉽게 풀어 쓴 '심리학책'은 많지 않다고 말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수많은 '심리학 이론'이 꽤나 복잡한 연구과정으로 나열하고 있기에 쉽사리 이해가 되지도 않고, 툭하면 '누구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또 재인용하는 등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심리학 상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깊이'에 호기심을 갖고서 <심리학책>에 접근하려고 하면 너무 어려운 내용을 접하고 화들짝 놀라서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덮기 일쑤다. 거기다 참고해야 하는 '과학 이론'은 뭐 그리도 많은지..거기다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려는 심리학자들의 변명(?)도 웬만한 '대학논문'을 섭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접근조차 하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와 '칼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만 이해하려해도 얼마나 방대하고 산만하냔 말이다. 그들은 자신조차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만나면 '무의식의 세계'로 도망가버리고 만다. 그리고서는 '그것'이야말로 자기 학문의 연구성과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저 황망하기만 하다. 그나마 '재미있는', '하기 쉬운', '콘서트' 등등 이런 제목을 달고 나온 '심리학 도서'들은 읽기에는 편하다. 이런 책들이 어려운 과학을 쉽게 풀어 썼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하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이를 계기로 더 깊은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세계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 관점의 해설'보다는 '동화의 재해석'이 더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에 빠진 것이다. 동화 <신데렐라>에서 "그래서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만, 그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부분'에 심리학적 풀이를 세세하게 써내는 정성을 쏟았지만, 그건 그거고! 동화를 그런 식으로 '재해석'하는 부분이 훨씬 더 인상 깊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 덮고 난 지금도 '심리학자들의 연구 이론'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이론을 바탕으로 풀어낸 '동화의 뒷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게 되었다. 물론 그 오래 전해지는 여운의 실체는 분명 '위대한 심리학'이 맞다. 그렇게 철저하고 적확한 '검증'을 했기에 더욱 합리적이고 인상적인 '뒷이야기'가 탄생한 배경인 것은 분명하지만, 역시나 '그건 그거고!'. 더 인상 깊은 것은 동화의 뒷이야기인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독자들 반응일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결국 '실패'인 것인가? 그렇게 볼 순 없다. 만약 이 책에 이어진 '뒷이야기'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상상력'만의 결과였다면, 이렇게까지 깊고 오래가는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심리학의 재미'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심리학 공부가 결코 쉽진 않겠지만, 심리학에 익숙해지면 비교적 '단순한 동화'조차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격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정말 매력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은 최고의 '심리학 입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 열린책들 (2023) [원제 : L'Ultime Secre (2001년)]

[My Review MMCXXIII / 열린책들 24번째 리뷰] 베르나르의 소설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지금까지 <타나타노트>, <나무>, <고양이>, <죽음> 등을 읽었지만, 그의 소설은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매번 흥미로운 소재를 갖고 톡톡 튀는 이야기 이끌어가는 만담꾼이지만, 그의 소설에서 '성(性)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나면 그저 그런 이야기만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오르가슴' 같은 묘사가 난무하기에 읽기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늘 들곤 한다. 물론 그게 그렇게까지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야기 전개에 '몰입'을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인 것은 분명했다. "거기서 꼭 그렇게 노골적인 넝담이 필요했나?"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말을 넋두리처럼 내뱉게 된다. 뭐, 비단 베르나르 소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노통브를 비롯한 대개의 '프랑스 소설'이 쫌.. 그런 경향을 보이는 듯 싶다. '불필요한' 성애 묘사..이런 거 말이다. 꼭 그런 묘사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텐데, 굳이 그런 뉘앙스를 풀풀 풍겨서 '더 재밌을 소설'이 그저 평범하고 그저 그런 소설로 만드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뭐, 내 취향이 그렇다는 얘기다. 아직 <개미>는 읽지 않았는데, 설마 곤충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식의 썰렁한 성적 넝담을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의뭉스럽다.

암튼, <뇌>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요즘 부쩍 '뇌과학'과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어서 불현듯 이 소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20여 년 만에 다시 읽으니, 그때에는 '구현'되지 못했던 첨단기술이 '지금'은 일상의 일부로 흔하게 쓰이고 있어서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 읽을 때에는 '우와~'스러웠던 내용이 지금은 '그러네' 하면서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 '소설가'라는 직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일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도 경이롭게(!) 즐겨 읽곤 한다. 잠수함도, 우주선도, 세계일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쥘 베른은 마치 '미래'를 구경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운 묘사를 해냈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의 <뇌>도 그랬다.

소설의 시작은 슈퍼컴퓨터 '딥 블루 IV'와 '사무엘 핀처'라는 인간이 두는 체스 대결로 펼쳐진다. 그리고 숨막힌 승부 끝에 최종적으로 '인간'이 이기게 된다. 2025년인 지금은 한낱 인간이 '인공지능'과 체스 대결을 벌인다면 완전한 패배만 경험하게 될 테지만, 20세기 말이 시대적 배경인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뭐, 그 당시만 해도 '인공지능'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았고, 2016년 '알파고 vs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이세돌이 4:1로 패배를 함으로써 체스나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을 상대로 인간이 더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딥 러닝' 프로그램으로 인해 인공지능의 성능은 큰 도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인공지능(슈퍼컴퓨터)과 인간 간의 대결에서 왕왕 인간이 '슈퍼컴퓨터'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음을 추억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의 이야기는 곧바로 '사무엘 핀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것도 세계적인 모델과 섹스를 나누다가 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뉴스에서는 이렇게 타이틀을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여성이 '세계 최고의 두뇌'를 쓰러뜨렸다. 사무엘 핀처 박사는 '사랑에 치여 죽은' 셈이다. 라고 말이다.

이보다 행복한 죽음이 있을까? 하지만 소설에서 사무엘 핀처 박사는 다시 살아난다. 물론 핀처 박사의 '과거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그가 '어떤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게 한다. 박사는 '정신 병동'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행한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었지만, '의식'은 살아 있으며, 거의 모든 감각을 상실했지만, '한 쪽 시력'과 '한 쪽 청력'은 기능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라고는 오직 '눈꺼풀'밖에 남지 않은 희귀한 질환을 앓게 되었다. 전문 용어로 '리스'라고 부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보통은 '식물인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오직 눈꺼풀만 움직일 있는 사람을 과연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환자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외면'을 당하고 만다. 왜냐면 '리스 환자'는 회복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깨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온 케이스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그 환자(이름은 '장루이 마르탱'이다)는 결국 '온전한 의식'을 한 채, 죽은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소설의 전반부에서 '행복한 죽음'과 '불행한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환기시켜 준다.

이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이지도르'라는 전직 경찰 출신 '프리랜서 기자'와 '뤼크레스'라 불리는 신문사 '객원 기자'다. 이 두 인물은 전작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아버지>에서도 출연했다는데, 아직 읽지 못해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다. 암튼, 두 기자는 '사무엘 핀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내려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행복한 죽음'이 아니라 '의도된 살해'라고 확신하고 수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핀처의 죽음은 과연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렇게 수사를 진행하다보니 살아생전에 핀처가 '에피쿠로스 학파'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사실을 파헤치게 된다. 흔히 '쾌락주의'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은 것으로 많이들 오해를 하는 학파인데, 이 학파를 창시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쾌락이란 실상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고, 쾌락이라 지칭한 것들도 온몸을 짜릿하게 해주고 전율이 일어난 만큼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말초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때 찾아오는 내면의 평온함을 충만에 이르도록 '경건한 삶'을 주장했던 것인데, 그의 후계자들은 그저 인생을 즐기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바람에 그저 그런 '쾌락주의'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 핀처가 참여한 '시엘(CIEL)'이라는 모음에는 그런 추종자들만 가득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핀처의 아내도 바로 이 모임에서 만난 아리따운 여성이었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무엘 핀처'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섹스를 하면서 죽었다면, '죽을만큼 강렬한 오르가슴'을 만끽하다 심장이 멈출 정도로 짜릿한 쾌락을 맛보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냐는 논리다. 원, 세상에! 부러울 것이 겨우 그거란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이 결정적인 죽음의 '동기'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보다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쾌락'에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 강력한 원인(동기)이 따로 있을 거라고 파고 들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 핀처가 일을 하는 장소인 '정신 병원'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뭔가 비밀스런 실험을 했거나, 뭔가 다른 동기가 될만 한 것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낸다. 아니, 아직 정확히 찾지는 못했다. 다만, 그렇게 찾아간 '정신 병원'에 뤼크레스가 갇혀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비밀은 '2권'에서 밝혀질 것이다.

베르나르는 <뇌>를 통해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뇌가 '행복함'을 느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은 새로운 의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뇌에서 분비되는 '어떤 것'이 있는지는 밝혀냈는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아니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를 밝혀내려는 노력을 '뇌과학'쪽에서 많이 하고 있고, 현재에는 상당부분 밝혀내긴 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것'을 뇌가 분비하게끔 만들고, 그렇게 분비된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확인된다면, 인위적으로 그 '어떤 것'을 합성해서 외부에서 뇌속으로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절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예스'라는 것이다. 물론, 뇌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반응'은 아니며, 정확하고 적절한 용량이 아니라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엄청나게 심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뇌과학이 발전한 오늘에도 말이다.

그럼 다시 질문을 되돌려서,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이 행복하게 해주는가? 욕구충족이 되기만 한다면 행복한 귀결을 맞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욕구를 가지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동기가 존재한다면, '어떤' 동기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질문을 하다보면, 자꾸 돌고 도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쾌락=행복=동기'라고 하는 묘한 등식이 성립하는 것도 깨닫게 된다. 즉, 우리가 왜 쾌락을 추구하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럼 행복해지려면 쾌락을 즐기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가? 막연한 쾌락보다는 '강력한 동기'를 충족시키면서 얻는 쾌락에서 더 강렬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단순히 '마약' 같은 것을 인위적으로 몸 안에 주입하는 것으로도 쾌락을 얻을 수 있지만, 바라고 바라던 것을 엄청난 노력을 해서 성취했을 때에 더 큰 쾌락을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행복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뇌의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이 바로 <뇌 2>에서 밝혀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 삼국지 2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허경대 글, 정규하 그림, 손영운 기획, 나관중 원작 / 채우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 삼국지 2>  나관중 / 손영운 / 허경대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XII / 채우리 27번째 리뷰] 2권은 '적벽대전'부터 '사마염의 진(晉) 건국'까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전히 오타가 많아서 눈에 거슬렸고, 워낙 빠른 전개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심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수준 높은 독자가 읽기에 좋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달린 '주석의 내용'은 유일하게 읽을 만한 정도였지만, 정작 핵심적인 '만화내용'이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듯 해서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숱한 <삼국지>를 읽었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요즘엔 '어린이를 위한' 책들도 꽤나 수준 높게 나오고 있는데, '서울대 선정'이란 타이틀을 달았으면서 이 정도인 것은 많이 아쉬웠다. 저자의 변명처럼 '2권'에 <삼국지연의>를 다 담기에 너무 벅찼다는 말이 십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어린이용 만화책'처럼 '3~5권' 정도로 기획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말 2권 이상으로 기획하기 힘들었다면, 1권으로 줄여서라도 '핵심 사건'만 나열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유비'와 '조조' 중심에서 벗어나 '동오의 인물들'이 많이 소개된 점이다. 이 책의 시작이 '적벽대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와 황개'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화공작전'을 구상한 것도 황개가 조조의 대선단이 빽빽하게 뭉쳐 있는 것을 염탐하고서 '화공'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도독인 주유에게 보고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역할은 조조의 80만 대군이 남하했을 때 손권의 신하들은 전쟁은 피하고 항복과 다를 바 없는 '강화회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젊은 손권의 혈기를 자극해서 '전쟁'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전부였다. '화살 10만 개'나 '손바닥에 불 화(火)자 쓰기', '동남풍 기원제' 같은 것은 나관중이 창작한 내용일 뿐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적벽대전'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전쟁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역을 답사하면 생각보다 협소하고, 도저히 조조의 80만 대군이 대선단을 이끌고 쳐들어왔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얕은 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사 <삼국지>에서도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조조군 측에 '역병'이 돌아 많은 군사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에 조조군 군영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 유비군에 쫓겨 퇴각했다는 점이 눈에 띨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적벽대전'과 같은 대대적인 싸움의 흔적이 당췌 보이질 않는다. 이를 정리하면, '적벽대전'은 실제 벌어진 전쟁이라기보다는 풍토병과 같은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조조군이 '자진퇴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만약 조조군영 쪽에서 일어난 화재가 '황개의 화공'인 것으로 본다면 적벽대전의 일등공신은 '황개'에게 돌아가야 하고, 유비는 고작해야 패퇴하는 조조군을 쫓아 이득을 챙긴 것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암튼,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라고 하는 든든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갈량이 주장했던 '천하삼분지계'를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럼 유비는 그토록 바랐던 '영토'도 얻었고, 와룡과 봉추 등 걸출한 인재도 영입했는데, 어찌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사실 유비가 차지한 '형주와 서천(파촉)' 지역은 천하를 도모할 정도로 유리한 지역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중원을 차지해야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말할 때 '중원'은 황하의 중하류 지역을 이르는 말이고, 이 지역은 이미 조조가 다 차지했다. 그리고 양자강(장강) 유역의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알짜배기 땅은 손권이 차지하고 있으니, 유비는 감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천하의 제갈량도 '천하통일'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겨우 '천하삼분'을 이야기하며 조조와 손권의 싸움을 관망하며 어느 한 쪽이 너무 우세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위치를 차지하며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를 골자로 담아 '천하삼분지계'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40대를 넘어선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는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비는 다리 한 번 쭉 뻗을 수 있는 '영토 한 뼘'도 없는 처지였으니, 일단은 수락했던 것이고, 그런 뒤에 '유표와 유장의 영지'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절반의 성공'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유비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레(?) 넓어진 영토를 다스릴 만큼 수많은 인재를 얻기도 전에 '방통', 관우'를 잃은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아직 나라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상황에서 제갈량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주'를 잃어버린 것까지는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서촉에 들어가서 천천히 '권토중래' 기다렸다면 <초한지>에서 유방이 서초패왕으로 불린 항우를 사면초가로 몰아서 '한 나라'를 건국한 위업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유비는 '유방'과 참 많이 닮았다. 그가 서촉을 다스리면서 스스로 '한중왕'이라 칭한 것도 유방이 진(秦)나라를 멸망한 뒤에 서촉땅에 유폐(?) 되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방이 세운 나라 이름이 '한(漢)'이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비는 관우를 잃은 슬픔이 컸던 것인지 제갈량의 만류를 무릅쓰고 '동오 정벌'에 나선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릉전투'에서 대패를 한 뒤 백제성에서 쓸쓸한 퇴장을 하고 만다. 그렇게 유비까지 죽고 나자 '촉한'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제갈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방통도 이미 죽고 없고,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 걸출한 명장도 속절없이 죽어나갔고, 조운, 마속과 같은 인재도 운이 따르지 않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기도 전에 퇴장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선주의 유명을 충심으로 실천하며 열심히 '출사표'를 내보였지만, 번번히 사마의에게 막혀 별다른 수를 짜낼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면서 사마의를 깍아내리고 제갈량을 드높였지만,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제갈량의 압도적인 패배만 남아 있다. 이런 면에서 사마의는 <삼국지연의>가 만든 이미지 때문에 두고두고 '저평가'를 받고 만다. 사마의의 제대로 된 실력은 그의 후손인 사마염이 위나라를 물려 받아 황제에 오르는 위엄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번번이 골탕을 먹는 인물로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살았던 '원말명초'의 시대적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원나라가 기울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도적떼가 기승을 부렸는데,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홍건적'이었다. 이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가난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세력인데, 후한말에 활약했던 '황건적'과 흡사했던 것이다. 나관중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생각하다가 <삼국지>를 떠올렸을 것이고, 위촉오 세 나라가 들어서 각축전을 벌이던 '영웅담'이 민중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럼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서 '조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했을텐데, 그러기에는 조조는 마땅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 가운데 '충'과 '의'를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비열한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조가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실리'를 중시하고, '효율'이 좋은 것을 따박따박 잘 챙기는 엄청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조조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조조의 세력은 결국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조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관중은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조조에게 협조했던 세력들 전체를 깎아내렸다. 여기에 반사적 작용으로 덕을 본 인물이 바로 '유관장 삼형제'였던 것이다.

실제 정사 <삼국지>에 유비는 말할 것도 없고, 관우와 장비는 진짜 몇 줄 나오지도 않는다. 촉한 출신이었던 진수는 꽤나 '객관적인 관점'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고 평가를 받기에 이런 '몇 줄 안되는 기록'은 그들의 평가가 나쁘지도 않지만, 그닥 좋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관중은 다르게 본 것이다. 유비를 '한고조 유방'과 동급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으면서, 관우와 장비가 '복숭아밭(도원)'에서 한 목숨을 다 받쳐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겠다는 '결의'를 다진 내용을 선보일 정도로 이미지를 급상승 시켰던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복숭아가 무슨 의미였겠는가? <서유기>에서도 손오공이 복숭아를 먹고 불로장생의 삶을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성스러운 장소에서 누가 보아도 멋짐이 폭발하는 충성과 의리를 다지며 굳센 결의를 하였다는데, 이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누가 주인공이 될 것이냔 말이다. 그렇게 '도원결의'가 꽃을 피우면서 <삼국지연의>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사 <삼국지>보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깊고 오래 가는 까닭이다. 명나라가 건국한 14세기부터 21세기 지금까지 '유관장 삼형제'가 주인공인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만 보아도 나관중의 기획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이렇게 유비 세력이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다. 덩달아서 드높여진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표현되는 제갈량이지만, 사마의는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단지,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은 조조가 '사마의'를 중요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던 탓에 사마의에 대한 평가도 어쩔 수 없이 많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아예 '축소'하기까지 하면서 야심만 가득한 '이리'처럼 비열한 인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마의에 대한 인상이 그리 썩 좋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당대 최고였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은 빼박이다.

사실 <삼국지연의>는 너무 많은 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는 '누가 쓴 책'을 읽었는지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기회가 되어 다른이가 쓴 책도 읽는다면 그 느낌이 정말 많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한중일 삼국의 '서술 관점'도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다. 600여 년이 넘도록 널리 읽힌 소설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 이야기'는 해도 해도 재밌다. 기회가 되면 또 들려드리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