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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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 열린책들 (2023) [원제 : L'Ultime Secre (2001년)]

[My Review MMCXXIII / 열린책들 24번째 리뷰] 베르나르의 소설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지금까지 <타나타노트>, <나무>, <고양이>, <죽음> 등을 읽었지만, 그의 소설은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매번 흥미로운 소재를 갖고 톡톡 튀는 이야기 이끌어가는 만담꾼이지만, 그의 소설에서 '성(性)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나면 그저 그런 이야기만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오르가슴' 같은 묘사가 난무하기에 읽기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늘 들곤 한다. 물론 그게 그렇게까지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야기 전개에 '몰입'을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인 것은 분명했다. "거기서 꼭 그렇게 노골적인 넝담이 필요했나?"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말을 넋두리처럼 내뱉게 된다. 뭐, 비단 베르나르 소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노통브를 비롯한 대개의 '프랑스 소설'이 쫌.. 그런 경향을 보이는 듯 싶다. '불필요한' 성애 묘사..이런 거 말이다. 꼭 그런 묘사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텐데, 굳이 그런 뉘앙스를 풀풀 풍겨서 '더 재밌을 소설'이 그저 평범하고 그저 그런 소설로 만드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뭐, 내 취향이 그렇다는 얘기다. 아직 <개미>는 읽지 않았는데, 설마 곤충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식의 썰렁한 성적 넝담을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의뭉스럽다.

암튼, <뇌>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요즘 부쩍 '뇌과학'과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어서 불현듯 이 소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20여 년 만에 다시 읽으니, 그때에는 '구현'되지 못했던 첨단기술이 '지금'은 일상의 일부로 흔하게 쓰이고 있어서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 읽을 때에는 '우와~'스러웠던 내용이 지금은 '그러네' 하면서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 '소설가'라는 직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일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도 경이롭게(!) 즐겨 읽곤 한다. 잠수함도, 우주선도, 세계일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쥘 베른은 마치 '미래'를 구경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운 묘사를 해냈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의 <뇌>도 그랬다.

소설의 시작은 슈퍼컴퓨터 '딥 블루 IV'와 '사무엘 핀처'라는 인간이 두는 체스 대결로 펼쳐진다. 그리고 숨막힌 승부 끝에 최종적으로 '인간'이 이기게 된다. 2025년인 지금은 한낱 인간이 '인공지능'과 체스 대결을 벌인다면 완전한 패배만 경험하게 될 테지만, 20세기 말이 시대적 배경인 이 소설에서는 '인간'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뭐, 그 당시만 해도 '인공지능'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았고, 2016년 '알파고 vs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이세돌이 4:1로 패배를 함으로써 체스나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을 상대로 인간이 더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딥 러닝' 프로그램으로 인해 인공지능의 성능은 큰 도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인공지능(슈퍼컴퓨터)과 인간 간의 대결에서 왕왕 인간이 '슈퍼컴퓨터'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음을 추억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의 이야기는 곧바로 '사무엘 핀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것도 세계적인 모델과 섹스를 나누다가 말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뉴스에서는 이렇게 타이틀을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여성이 '세계 최고의 두뇌'를 쓰러뜨렸다. 사무엘 핀처 박사는 '사랑에 치여 죽은' 셈이다. 라고 말이다.

이보다 행복한 죽음이 있을까? 하지만 소설에서 사무엘 핀처 박사는 다시 살아난다. 물론 핀처 박사의 '과거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그가 '어떤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게 한다. 박사는 '정신 병동'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행한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었지만, '의식'은 살아 있으며, 거의 모든 감각을 상실했지만, '한 쪽 시력'과 '한 쪽 청력'은 기능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라고는 오직 '눈꺼풀'밖에 남지 않은 희귀한 질환을 앓게 되었다. 전문 용어로 '리스'라고 부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보통은 '식물인간'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오직 눈꺼풀만 움직일 있는 사람을 과연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환자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외면'을 당하고 만다. 왜냐면 '리스 환자'는 회복불가능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깨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온 케이스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그 환자(이름은 '장루이 마르탱'이다)는 결국 '온전한 의식'을 한 채, 죽은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소설의 전반부에서 '행복한 죽음'과 '불행한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환기시켜 준다.

이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이지도르'라는 전직 경찰 출신 '프리랜서 기자'와 '뤼크레스'라 불리는 신문사 '객원 기자'다. 이 두 인물은 전작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아버지>에서도 출연했다는데, 아직 읽지 못해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다. 암튼, 두 기자는 '사무엘 핀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내려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행복한 죽음'이 아니라 '의도된 살해'라고 확신하고 수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핀처의 죽음은 과연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렇게 수사를 진행하다보니 살아생전에 핀처가 '에피쿠로스 학파'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사실을 파헤치게 된다. 흔히 '쾌락주의'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은 것으로 많이들 오해를 하는 학파인데, 이 학파를 창시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쾌락이란 실상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고, 쾌락이라 지칭한 것들도 온몸을 짜릿하게 해주고 전율이 일어난 만큼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말초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때 찾아오는 내면의 평온함을 충만에 이르도록 '경건한 삶'을 주장했던 것인데, 그의 후계자들은 그저 인생을 즐기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바람에 그저 그런 '쾌락주의'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 핀처가 참여한 '시엘(CIEL)'이라는 모음에는 그런 추종자들만 가득한 사람들이 즐비하다. 핀처의 아내도 바로 이 모임에서 만난 아리따운 여성이었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무엘 핀처'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섹스를 하면서 죽었다면, '죽을만큼 강렬한 오르가슴'을 만끽하다 심장이 멈출 정도로 짜릿한 쾌락을 맛보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냐는 논리다. 원, 세상에! 부러울 것이 겨우 그거란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이 결정적인 죽음의 '동기'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보다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쾌락'에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 강력한 원인(동기)이 따로 있을 거라고 파고 들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 핀처가 일을 하는 장소인 '정신 병원'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뭔가 비밀스런 실험을 했거나, 뭔가 다른 동기가 될만 한 것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낸다. 아니, 아직 정확히 찾지는 못했다. 다만, 그렇게 찾아간 '정신 병원'에 뤼크레스가 갇혀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비밀은 '2권'에서 밝혀질 것이다.

베르나르는 <뇌>를 통해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뇌가 '행복함'을 느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은 새로운 의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뇌에서 분비되는 '어떤 것'이 있는지는 밝혀냈는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아니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를 밝혀내려는 노력을 '뇌과학'쪽에서 많이 하고 있고, 현재에는 상당부분 밝혀내긴 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것'을 뇌가 분비하게끔 만들고, 그렇게 분비된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확인된다면, 인위적으로 그 '어떤 것'을 합성해서 외부에서 뇌속으로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절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예스'라는 것이다. 물론, 뇌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반응'은 아니며, 정확하고 적절한 용량이 아니라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엄청나게 심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뇌과학이 발전한 오늘에도 말이다.

그럼 다시 질문을 되돌려서,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이 행복하게 해주는가? 욕구충족이 되기만 한다면 행복한 귀결을 맞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욕구를 가지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동기가 존재한다면, '어떤' 동기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질문을 하다보면, 자꾸 돌고 도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쾌락=행복=동기'라고 하는 묘한 등식이 성립하는 것도 깨닫게 된다. 즉, 우리가 왜 쾌락을 추구하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럼 행복해지려면 쾌락을 즐기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가? 막연한 쾌락보다는 '강력한 동기'를 충족시키면서 얻는 쾌락에서 더 강렬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단순히 '마약' 같은 것을 인위적으로 몸 안에 주입하는 것으로도 쾌락을 얻을 수 있지만, 바라고 바라던 것을 엄청난 노력을 해서 성취했을 때에 더 큰 쾌락을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행복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뇌의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이 바로 <뇌 2>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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