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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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 문학동네 (2011)

[My Review MMCXXV / 문학동네 25번째 리뷰] 한강 소설은 나에게 버겁다. 나는 '시어(詩語)'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강의 장편소설은 마치 '시어'처럼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에 한강이 쓴 소설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시어'가 그렇듯,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그뜻까지 해독하는데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마치 명작 그림을 눈앞에 두고도 '참 잘 그렸다'는 감상 이외에 더 많은 소회나 느낌을 내뱉지 못하고 말문이 턱 막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한강 소설은 딱 그렇다. 그런데도 작년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도 있었고, 마침맞게 한강의 수상을 예상이나 한듯 수상자를 맞췄기에 '예스24'에서 1000원 상당의 상품권도 아주 잘 받아서 딱 그만큼 기뻐했더랬다. 그래서 한강의 책들을 줄줄이 구입했더랬다. <희랍어 시간>도 그렇게 뒤늦게 구입한 책이다.

그런데 막상 읽는데 너무 힘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면서 읽다보면 '전체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전체 줄거리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아름다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겉핥는' 식으로밖에 읽지 못하는 나의 독서 수준이 참으로 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구나 중간 중간에 불쑥 튀어나오는 '외국어'는 나의 감상을 더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국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딱한 수준인데, '외국어'로 전달되는 감상까지 곁들이는 일은 무척이나 힘겨웠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절박한 사정에서 내가 느껴야 하는 감동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 답답했던 것이다. 그것이 중반 이후에 빛을 잃어가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애달파지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개하고 있음에 절박한 정황은 점점 절절한 사랑을 승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는데,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손짓으로, 눈빛으로 대신하려 하지만, 남자는 빛을 잃어가서 연인의 손짓과 눈빛을 차마 볼 수 없게 된다는 슬픈 사랑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더 애끓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되어 '표현'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간'은 촉박하기 그지 없는데,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말과 찬란한 빛은 참으로 오랫동안 빚어져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감정을 서로 나누는데 성공은 하지만, 결국엔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이기에 안쓰러울 따름이다.

딱 여기까지의 감상만으로 <희랍어 시간>을 이해하고 뭉클한 감정을 오래오래 간직하기만 했다면, 이 책이 난해한 소설이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여기에 하릴없는 '사족'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청각과 시각의 소실로 인해 '접점'을 찾을 수 없다면 남은 감각은 '후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이 남았는데, 후각은 좀 그렇다고 하더라도 '촉각과 미각'으로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느냔 별 쓰잘데 없는 딴죽을 걸어재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깝게 지내는 부부사이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사이인 까닭에 '사랑의 재확인(!)'을 하기 위한 '접촉(!!)의 편의성'이 쉽사리 성사되지 않을 거라는 '가설(?)'까지 세우고 있는 나 자신에게 참으로 대실망을 했더랬다. 이게 뭔 대환장의 파티란 말인가.

암튼, 아직은 '문학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엔 내공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다. 먼 훗날 '내공'을 냠냠한 다음에 다시 <희랍어 시간>에 도전해보고자 한다. 내 천박한 문학적 소양에 다시 한 번 절망을 안겨준 소설로 기억할 순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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