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 삼국지 2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허경대 글, 정규하 그림, 손영운 기획, 나관중 원작 / 채우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26 : 삼국지 2>  나관중 / 손영운 / 허경대 / 채우리 (2013)

[My Review MMCXXII / 채우리 27번째 리뷰] 2권은 '적벽대전'부터 '사마염의 진(晉) 건국'까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전히 오타가 많아서 눈에 거슬렸고, 워낙 빠른 전개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심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수준 높은 독자가 읽기에 좋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달린 '주석의 내용'은 유일하게 읽을 만한 정도였지만, 정작 핵심적인 '만화내용'이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듯 해서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숱한 <삼국지>를 읽었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요즘엔 '어린이를 위한' 책들도 꽤나 수준 높게 나오고 있는데, '서울대 선정'이란 타이틀을 달았으면서 이 정도인 것은 많이 아쉬웠다. 저자의 변명처럼 '2권'에 <삼국지연의>를 다 담기에 너무 벅찼다는 말이 십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어린이용 만화책'처럼 '3~5권' 정도로 기획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정말 2권 이상으로 기획하기 힘들었다면, 1권으로 줄여서라도 '핵심 사건'만 나열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유비'와 '조조' 중심에서 벗어나 '동오의 인물들'이 많이 소개된 점이다. 이 책의 시작이 '적벽대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와 황개'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화공작전'을 구상한 것도 황개가 조조의 대선단이 빽빽하게 뭉쳐 있는 것을 염탐하고서 '화공'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도독인 주유에게 보고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역할은 조조의 80만 대군이 남하했을 때 손권의 신하들은 전쟁은 피하고 항복과 다를 바 없는 '강화회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젊은 손권의 혈기를 자극해서 '전쟁'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전부였다. '화살 10만 개'나 '손바닥에 불 화(火)자 쓰기', '동남풍 기원제' 같은 것은 나관중이 창작한 내용일 뿐이다. 정사 <삼국지>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적벽대전'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전쟁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역을 답사하면 생각보다 협소하고, 도저히 조조의 80만 대군이 대선단을 이끌고 쳐들어왔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얕은 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사 <삼국지>에서도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조조군 측에 '역병'이 돌아 많은 군사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에 조조군 군영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 유비군에 쫓겨 퇴각했다는 점이 눈에 띨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적벽대전'과 같은 대대적인 싸움의 흔적이 당췌 보이질 않는다. 이를 정리하면, '적벽대전'은 실제 벌어진 전쟁이라기보다는 풍토병과 같은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조조군이 '자진퇴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만약 조조군영 쪽에서 일어난 화재가 '황개의 화공'인 것으로 본다면 적벽대전의 일등공신은 '황개'에게 돌아가야 하고, 유비는 고작해야 패퇴하는 조조군을 쫓아 이득을 챙긴 것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암튼,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라고 하는 든든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갈량이 주장했던 '천하삼분지계'를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럼 유비는 그토록 바랐던 '영토'도 얻었고, 와룡과 봉추 등 걸출한 인재도 영입했는데, 어찌하여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사실 유비가 차지한 '형주와 서천(파촉)' 지역은 천하를 도모할 정도로 유리한 지역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중원을 차지해야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말할 때 '중원'은 황하의 중하류 지역을 이르는 말이고, 이 지역은 이미 조조가 다 차지했다. 그리고 양자강(장강) 유역의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알짜배기 땅은 손권이 차지하고 있으니, 유비는 감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천하의 제갈량도 '천하통일'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겨우 '천하삼분'을 이야기하며 조조와 손권의 싸움을 관망하며 어느 한 쪽이 너무 우세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위치를 차지하며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를 골자로 담아 '천하삼분지계'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40대를 넘어선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는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비는 다리 한 번 쭉 뻗을 수 있는 '영토 한 뼘'도 없는 처지였으니, 일단은 수락했던 것이고, 그런 뒤에 '유표와 유장의 영지'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절반의 성공'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유비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레(?) 넓어진 영토를 다스릴 만큼 수많은 인재를 얻기도 전에 '방통', 관우'를 잃은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아직 나라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상황에서 제갈량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주'를 잃어버린 것까지는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서촉에 들어가서 천천히 '권토중래' 기다렸다면 <초한지>에서 유방이 서초패왕으로 불린 항우를 사면초가로 몰아서 '한 나라'를 건국한 위업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유비는 '유방'과 참 많이 닮았다. 그가 서촉을 다스리면서 스스로 '한중왕'이라 칭한 것도 유방이 진(秦)나라를 멸망한 뒤에 서촉땅에 유폐(?) 되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방이 세운 나라 이름이 '한(漢)'이 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비는 관우를 잃은 슬픔이 컸던 것인지 제갈량의 만류를 무릅쓰고 '동오 정벌'에 나선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릉전투'에서 대패를 한 뒤 백제성에서 쓸쓸한 퇴장을 하고 만다. 그렇게 유비까지 죽고 나자 '촉한'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제갈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방통도 이미 죽고 없고,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 걸출한 명장도 속절없이 죽어나갔고, 조운, 마속과 같은 인재도 운이 따르지 않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기도 전에 퇴장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선주의 유명을 충심으로 실천하며 열심히 '출사표'를 내보였지만, 번번히 사마의에게 막혀 별다른 수를 짜낼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면서 사마의를 깍아내리고 제갈량을 드높였지만,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제갈량의 압도적인 패배만 남아 있다. 이런 면에서 사마의는 <삼국지연의>가 만든 이미지 때문에 두고두고 '저평가'를 받고 만다. 사마의의 제대로 된 실력은 그의 후손인 사마염이 위나라를 물려 받아 황제에 오르는 위엄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번번이 골탕을 먹는 인물로 등장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살았던 '원말명초'의 시대적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원나라가 기울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도적떼가 기승을 부렸는데,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홍건적'이었다. 이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가난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세력인데, 후한말에 활약했던 '황건적'과 흡사했던 것이다. 나관중은 이런 혼란한 시기에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생각하다가 <삼국지>를 떠올렸을 것이고, 위촉오 세 나라가 들어서 각축전을 벌이던 '영웅담'이 민중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럼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서 '조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했을텐데, 그러기에는 조조는 마땅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 가운데 '충'과 '의'를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비열한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조조가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실리'를 중시하고, '효율'이 좋은 것을 따박따박 잘 챙기는 엄청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조조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조조의 세력은 결국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조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관중은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조조에게 협조했던 세력들 전체를 깎아내렸다. 여기에 반사적 작용으로 덕을 본 인물이 바로 '유관장 삼형제'였던 것이다.

실제 정사 <삼국지>에 유비는 말할 것도 없고, 관우와 장비는 진짜 몇 줄 나오지도 않는다. 촉한 출신이었던 진수는 꽤나 '객관적인 관점'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고 평가를 받기에 이런 '몇 줄 안되는 기록'은 그들의 평가가 나쁘지도 않지만, 그닥 좋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관중은 다르게 본 것이다. 유비를 '한고조 유방'과 동급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으면서, 관우와 장비가 '복숭아밭(도원)'에서 한 목숨을 다 받쳐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겠다는 '결의'를 다진 내용을 선보일 정도로 이미지를 급상승 시켰던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복숭아가 무슨 의미였겠는가? <서유기>에서도 손오공이 복숭아를 먹고 불로장생의 삶을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성스러운 장소에서 누가 보아도 멋짐이 폭발하는 충성과 의리를 다지며 굳센 결의를 하였다는데, 이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누가 주인공이 될 것이냔 말이다. 그렇게 '도원결의'가 꽃을 피우면서 <삼국지연의>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사 <삼국지>보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깊고 오래 가는 까닭이다. 명나라가 건국한 14세기부터 21세기 지금까지 '유관장 삼형제'가 주인공인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만 보아도 나관중의 기획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이렇게 유비 세력이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하다. 덩달아서 드높여진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표현되는 제갈량이지만, 사마의는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단지,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은 조조가 '사마의'를 중요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던 탓에 사마의에 대한 평가도 어쩔 수 없이 많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아예 '축소'하기까지 하면서 야심만 가득한 '이리'처럼 비열한 인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마의에 대한 인상이 그리 썩 좋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당대 최고였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은 빼박이다.

사실 <삼국지연의>는 너무 많은 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는 '누가 쓴 책'을 읽었는지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기회가 되어 다른이가 쓴 책도 읽는다면 그 느낌이 정말 많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한중일 삼국의 '서술 관점'도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다. 600여 년이 넘도록 널리 읽힌 소설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 이야기'는 해도 해도 재밌다. 기회가 되면 또 들려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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