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만화로 보는 변호사의 세계 - 법률 해결사 피고미의 현실 변호생활 한빛비즈 커리어툰 2
조만호 지음, 다소니 그림 / 한빛비즈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XLVI / 한빛비즈 141번째 리뷰] 학창시절에는 '직업'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형적으로 '성적순'으로 대학을 지망했었기 때문에, 꿈에도 그리던 '대학 캠퍼스'였건만 가장 소중한 시절에 방황 아닌 방황을 심하게 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적에 맞춰서 '소신 지원'을 하긴 했지만, 막상 대학에 가니 '뭘 공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졸업 때가 되어 '학점'에 맞춰서 이곳저곳 지원서를 제출했고, 그렇게 입사해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지만 정작 '원하던 직업'이 아닌 탓(정규직도 아니었고)에 논술쌤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물론 난 책을 좋아했기에 독서논술을 가르치는 직업이 좋았지만, 돈은 많이 벌지 못했다. 만약 내가 학창시절에 '직업의 세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코칭을 해주는 참어른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되었을텐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기에, 이런 책을 만나면 너무나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지난 <수의사>에 이어, 이번 책은 <변호사의 세계>를 낱낱이 보여주는 책이다. 그래서 새롭게 알게 된 '직업의 세계'는 두구두구두구~~'변호사'는 나랑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법정드라마'속에서 보여지는 변호사의 모습은 너무도 멋졌다. 억울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정의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히어로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돈도 잘 벌어서 진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울 땐 '천원 한 장'으로 퉁치는 멋진 포스도 보여줄 수 있다고 철떡 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두꺼운 법전과 더 두꺼운 판례를 통째로 암기할 정도로 미친듯이 공부해야 하고, 사법고시가 폐지된 이후로 '좋은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선 실력보다 '간판'이 더 중요하는 사실도 엿볼 수 있었고, '화려한 말빨'보다는 '깔끔하게 정리된 글빨'이 변호사가 갖춰야 할 자질이라는 걸 보면서, 내 상상속 변호사의 화려한 모습은 와장창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의사의 세계>에서도 동물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그런 '극한직업'을 견딜 수 없다는 식으로 서술된 것이 살짝 아쉬웠는데, 이 책 <변호사의 세계>에서도 힘 없고 착한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멋진 변호사도 그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하면 이보다 더한 '극한직업'은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쉬웠다. 여기서 '그 정도의 돈'을 숫자로 매칭시키자면 '연봉 6~7천만 원'이다. 물론, 초임연봉의 경우이고, 경력이 쌓이면 '수임료'는 플러스 알파가 되어 '억대 연봉'을 받는 변호사가 될 수 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그렇게 똥줄 빠지게 열공했더랬는데, '그 정도의 돈'도 벌지 못하면 안 되지..라는 당연한 생각이 들면서도, 그러면 애초에 마음에 품었던 '꿈 이야기'는 뭐가 되느냔 말이다. 힘 없고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무료 변론'도 척척 해줘야 마땅한 것 아니냐? 싶지만, 막상 당신에게 "꽁으로 다 해줘. 안 그러면 '속물'이라고 소문내고 다닐 거야"라는 못된 심보들 때문이라도 해주기 싫은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걸 <수의사의 세계>에선 당연한 듯이 표현했는데, <변호사의 세계>에서는 대놓고 그런 진상은 별로 없었는가 보다. 아무래도 '법'이라는 민감하고 직접적인 직업이다보니, 감히 '함부로' 대하는 진상은 없는 모양이라 웬지 공평치 않아 씁쓸했더랬다.

  그래도 월 200만 원도 겨우 버는 가난한 서민들에게 '월 500만 원 이상'을 버는 변호사가 등을 시원하게 비빌 수 있는 듬직한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법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엄청난 수임료'를 지불해야만 하는 상황이 눈물나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1심판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심, 3심까지 비용청구를 계산하게 되면, 억울해도 그냥 몸으로 떼우는 것이 더 나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사법정의'의 일부분이다. 이럴 때 변호사들도 나름의 '사법정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처지를 변호하겠지만, 똑같은 '사법정의'란 말이지만, 둘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서 서로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국선변호'라는 대안이 제시되어 있지만, 국민들의 눈높이에 '국선'의 위상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암튼, '직업의 도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유망직종에 속하는 '변호사의 세계'를 좀 더 파헤쳐 보자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에 걸맞게 '공부'도 참 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잘 해야 한단다'. 그리고 좋은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선 '명문대 간판'이 절실히 필요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선 실력보다 '인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성적', '간판', '인맥'이라는 삼박자는 변호사의 세계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직종에서 다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이런 점을 유독 눈에 잘 띄게 드러낸 까닭은 바로 공부 잘 하는 '상위 1%'의 세계에서도 '실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동기끼리' 알아서 챙겨주는 '사람 사이의 원만한 교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특히, '홀로' 연구하는 직종이 아닌 이상 '인맥 형성'은 필수 중의 필수인 것이다. 더구나 '상류사회'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결집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꼭 필요한 자질인 것이다. 그러니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며 홀로 고군분투를 하는 '싸가지 없는 천재'가 살아남기 힘든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경우는 현실에서 거의 실현불가능한 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주인공이 순수하고 '기업은행(귀엽고) 농협은행(너무 예쁜)' 스타일이라..쿨럭쿨럭..암튼 '독불장군'은 곤란하다.

  대한민국 모든 직업의 세계를 낱낱이 파헤칠 때까지 '커리어툰'이 계속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의 한줄평은 "변호사의 세계는 돈을 많이 버는 만큼 피곤한 일이 잔뜩가득이다. 너무 당연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상이라는 환상 - 인간성을 외면한 물질주의 사회의 모순과 치유
가보 마테.대니얼 마테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XLV / 한빛비즈 140번째 리뷰] 현대인들은 엄청난 질병을 안고 살아간다. 해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점점 더 많아져만 간다. 이쯤 되면, 현대인들에게 '현대의학'은 왜 만병통치약을 제공하지 못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실상 모든 질병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 이는 의료계가 인정하는 사실이며, 앞으로 의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질병치료'는 왜 받는지 의문스러울 수도 있다. 그건 치료라는 행위가 질병(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간 질병이 나았다는 생각에 병원과 의사를 멀리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을 가진 단어는 '치유'일 것이다. 이 책 <정상이라는 환상>을 쓴 저자도 치유란 '완벽한 상태로 들어온다'는 개념이라고 뜻을 밝혔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을 아프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해결방법은 뭐란 말인가?

  저자는 현대인들이 만성적인 신체질환, 정신질환, 중독으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좁은 의미에서 '의학기술의 발달'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더 포괄적인 대상으로 확대하여 '우리 문화의 지체현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를 테면,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물가상승의 속도보다 임금상승의 속도가 느린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도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향'이 아닌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 질병을 치료해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는 잘못된 '방향'이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잘못된 사회문화 지체현상 때문에 아픈 것인데, 이런 잘못된 사회를 바꿔나갈 생각보다는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병원을 찾고, 약물과 주사를 남용하고, 그로 인해 더욱더 건강을 해치는 일이 많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일련의 '비정상적인 치료 행위'를 멈추고 '정상적인 치유'를 접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 책 <정상이라는 환상>의 골자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체제' 아래서 살아가는 우리는 조금만 곱씹어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경쟁'에 익숙하고, '경쟁'에서 지면 사회적 주류에서 밀려나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잘못된 신화에 빠져 살고 있다. 이렇게 '경쟁의 패배자들'은 자연스레 술, 담배, 마약 등 나쁜 것들에 매달려 현실을 비관하는 '중독'에 빠져들고, 이런 '나쁜 선택'을 하는 것만 보아도 인생의 실패자라는 빼박 증거이니 영구적으로 사회격리를 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쪽으로 쉽사리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이렇게 인류의 문명은 고도로 발달하면서 수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경제적 능력에서 뒤쳐지면 '치료' 받을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흐름이 '정상적'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충분히 치유받고 건강해질 수 있는 사람들까지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문명사회' 이전에도 인류는 이렇게 살아왔을까? 현재의 남미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원시부족'들의 모습을 보면 그다지 경쟁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수렵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해결하던 원시인류도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왜냐면 사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다보면 '사냥감'을 잡지 못하고 꽁치는 날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경쟁'보다 이웃부족들끼리 교류하면서 서로를 '연결'해주는 일이 더욱 중요했단다. 우리 부족은 꽁을 쳤지만, 다른 부족은 넉넉한 먹거리를 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날에는 상황이 반대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원시인류는 상호간 '연결'을 중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몸으로 깨우쳤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현대사회도 '경쟁'을 줄이고, 사회구성원들 간의 '연결'을 소중히 여기면 훨씬 더 이득이지 않을까? 치열한 경쟁이 사라지면 갈등과 다툼이 일어날 일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럼 건강과 직결되는 '스트레스' 같은 것을 받을 까닭도 없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 궁리를 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삶의 질'을 높이는 활동도 늘어나게 되어 만성적인 질병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훨씬 더 '정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한편, 중독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알콜중독자나 도박중독자, 그리고 마약중독자 등과 같이 무언가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인생을 망친 불량인생으로 취급하곤 한다. 이런 나쁜 것들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낙인을 찍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실제로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을 나쁜 유혹들로 내몰았다면 어떨까? 그래도 중독자들을 비방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무한경쟁체제'를 포기하고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주기만 했어도,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자본주의 경쟁체제가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런 험난한 무한경쟁체제 속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그리고 만수르 같은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를 차지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헐벗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다 '잘못된 선택'에 빠져들어 나락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물론, 그런 험난한 상황속에서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데 이런 정상적인 사람들도 자칫 '중독상태'에 빠질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바로 무분별한 '약물남용'으로 약물에 '의존'하는 환자들이 더욱 쉽게 '알콜, 마약'과 같은 것들의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나라도 '마약청정국'이란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애초부터 우리가 '마약'과 같은 향정신적 약물에 쉽게 빠져드는 나약한 사람들의 천국이었던가? 현대의학이 사소한 질병에도 손쉽게 '약처방'을 내리며 '약물남용'하게 되는 사회분위기에 젖어들었고, 그렇게 손쉽게 고통에서 벗어나고, 환각에 빠져드는 일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니 '마약'과 같은 나쁜 것에 더 쉽게 빠져드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에 너무나 깊이 매몰되어 탈출구조차 찾기 힘든 상황에 놓인 지 꽤 오래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를 병들게 만드는 '진짜 원인'을 찾아내서 잠깐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치료'를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완벽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진정한 '치유'를 해야 할 때다. 먼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만이 유일한 행복지름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유용한 방법일 것이다. 무엇보다 최고의 치유는 '완치'가 아니라 고통을 겪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완벽한 상태'를 갖추는 일이고,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아닌 그 상태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방향성'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삶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상태'가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 한 번이라도 '아파본 사람'이라면 더 잘 알 것이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그 고통만 사라지게 해준다면 억만금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돈'은 우리 삶에서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돈돈돈 하면서 살면서 언제라도 '고통이 재발할 수 있는 위태로운 삶'을 추구하느냔 말이다. 만성적인 신체질환, 정신질환, 그리고 중독에서 '확실히' 벗어나고 싶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제대로 '정상'인지 잘 알 것이다. 이 책의 '진단'에 공감한다면 '정상'이라는 환상으로부터 확실히 각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 셀프헬프 다이어리 - 예민하고 불안한 나를 위한 201일의 마음돌봄 연습
임상원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XLIV / 한빛비즈 139번째 리뷰] 나는 '모순'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직접적인 뜻은 '자기 주장이나 생각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말하지만, 나는 <한비자>에 나와 있는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바로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를 파는 상인 이야기 말이다. 한 상인이 있었는데, 창을 팔 때는 '뚫지 못할 방패가 없다'고 말하면서 팔았고, 방패를 팔 때는 '막지 못할 창이 없다'면서 팔았다. 그런데 이 말을 옆에서 듣던 사람이 "그럼, 당신의 창으로 방패를 찌르면 어찌 되겠소?"라고 물으니, 상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도망갔더라는 이야기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자신의 잘못을 알고 스스로 물러났으니 '착한 상인'이라고 칭찬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맞을까? 일구이언을 했으니 부끄러워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상인도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었테니, 자신이 준비한 물건을 팔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저없이 자신의 창으로 방패를 찔렀어야 한다. 그 결과로 둘 중 하나가 부러지거나 뚫렸을테니 '망가진 물건'을 버리면서, "이건 내가 잘못 말했소. 앞으로 이 물건은 절대 팔지 않겠소. 내 잘못된 말을 믿고 이미 사 간 사람이 있다면 환불해주리다. 하지만 이 멀쩡한 물건은 최상의 물건일 것이오. 여러분들 앞에서 이미 '증명'해보였으니 믿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사주시오.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처지이니, 나는 꼭 돈을 벌어야하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시오. 다시는 '모순'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소"라는 뒷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이는 스스로 '양립되는 곤란한 처지'에서 갈팡질팡하는 나의 모습을 자주 만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과거의 나는 '결정장애'가 심한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난, 이런 '나의 모습'을 참으로 싫어했다.

  이 책 <마이 셀프헬프 다이어리>는 하버드 졸업생인데도 '자기만족'을 모르고 초조하고 불안한 일상을 살아가던 비운의 주인공인 저자의 비참한 처지를 개선한 '자기계발서'다. 한마디로 자기 스스로 이렇게 극복하고 저렇게 대처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골자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자기 스스로 돕는 일기'라고 봐도 거의 틀림 없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고 말이다. 문구가 '의역'인가 아닌가는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뜻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에게 온 세상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저자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귀찮아하던 심한 무기력증과 우울감을 떨쳐내고 자신이 바라던 삶을 살게 되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저자는 먼저 '심리상담가'의 도움을 받았고, 천연 항우울제를 복용하기도 했으며, 적절한 운동습관을 기르며, 점차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춰나가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나씩하나씩 일상으로 만들고서 하루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었다고 이 책에 고백적으로 써내려갔다. 결국 저자가 무기력한 삶에서 행복한 삶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한 방은 바로 '자기애'였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일상생활에 실천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 생각한다. 명문대에 입학하면 행복할 거라고. 대기업에 취직하면 더 행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최고로 행복할 거라고 말이다. 나부터 그랬다. 남 부러울 것이 없는 '완벽한 삶'이지 않은가 말이다. 저자는 무려 '하버드 졸업생'이다. 거기에 '석사 학위'까지 땄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도 부족함 없이 벌었지만, 일상은 '가끔 행복하고 대체로 우울했다'고 한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취감'이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을 쫓아 '이직'도 고려했지만, 과연 잘 될까? 되더라도 행복해지긴 할까? 그러다 다니던 직장도 잃어버리고 불행해지면 어쩌지? 에잇, 그냥 이대로 살자...라면서 대충대충 남들과 비슷하게(?) 살면서 그냥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더란다. 수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저자도 비슷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니, 그냥 '대충대충' 남들과 비슷하게 우울해하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면 될까?

  뭐, 그런 삶에 만족한다면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삶'과 '할 수 없는 삶'의 차이는 어마어마 하다. 그런 삶에 만족하는 삶은 '자신을 절대 사랑하지 않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이다. 그러니 스스로 우울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다면 당장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야 한다. 자신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말을 아끼지 말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 아낌없이 고마워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멈추지 말고 해야 한단다.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활동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일이고, 자기 스스로를 해치지 않으며, 자기보다 남을 위하는 일이라면 '최고'일 것이다. 그런 일을 즐기면서 '일상의 보람'을 얻는 일을 꾸준히 하면 반드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결심을 했더랬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겠다고 말이다. 나는 '책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니, 아이들과 '독서토론수업'을 하는 일을 하면 즐겁고 행복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책속의 진리'를 깨닫고 '삶의 지혜'를 깨우치는 일을 '나의 수업'을 통해서 얻는다면 더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렇게 나는 부지런히 '책 읽는 즐거움'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런 까닭에 나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독후감도 꾸준히 쓰고 있다. 이것이 모여 나에게 '또 다른 기쁨'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처럼 누구나 '마이 셀프헬프'하는 삶을 살아가면 참 좋겠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2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2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XLIII / 넥서스Friends 2번째 리뷰] 이 책은 <전천당>으로 유명한 히로시마 레이코의 어린이 소설이다. <전천당>에서도 기발한 에피소드를 펼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선보였는데,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그 기발함과 흥미로움은 난형난제라 할 것이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요괴인 '우부메의 집'을 망가뜨린 죄로 우부메를 대신해서 '요괴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큰 줄거리 속에 요괴의 특징이 드러나는 '자잘한 에피소드'를 펼쳐내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 형태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전형적인 '시리즈물' 구성이지만 전혀 식상하지 않은 것이 '레이코 소설'의 장점일 것이다. 이번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요괴 아이의 혼'을 빨아들이고 '인간의 시체'를 잡아먹는 포식자 요괴와 살아있는 인간과 꼭 닮은 인형을 만드는 재주를 가진 '인형술사'가 메인 스토리다. 언뜻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등장인물이지만, '생명연장'이라는 인간의 탐욕과 결합하면 이 둘의 조합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쳐서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죽는다. 이는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사랑하는 존재'가 영원히 나와 함께 하길 바란다.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시들지 않는 꽃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길 바란다. 그런데 여기 '인형술사'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꼭 닮은 인형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형술사 말이다. 그런데 인형술사는 자신의 인형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모습만 꼭 닮아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포식자 요괴'에게 먹이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받은 '무엇'을 이용해서 자신이 만든 인형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주문'이 넘쳐난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다시 살아난 듯 싶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려내는 듯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거래를 한 '인형'이 망가져도 다시 새것처럼 '고치면' 그뿐이다. 이렇게 죽은 사람도 되살려내는 '인형술사'의 꿈은 자기 자신을 '완벽한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형술사는 '요괴의 아이'와 '죽은 시체'를 포식자 요괴에게 먹잇감으로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인형술사'는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만드는 유용한 재료를 챙긴다. 그렇게해서 근래에 행방불명된 요괴의 아이와 분명히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요괴 돌보미 야스케는 이 사건들을 어떻게 해쳐나갈까?

  신기하고 흥미로운 요괴이야기를 읽다가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만나면 즐겁기 그지 없다. 우선, "생명연장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생명을 연장하겠습니까?"라는 질문부터 던져보자. 인간이 영생, 즉 '영원한 삶'을 꿈꾼 것은 아주 오래 되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탐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고, 이집트의 미라도 '부활'을 꿈꾸며 육신이 썩지 않게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다. 현대의 기술발달은 '냉동인간'도 가능케 했고,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간복제'도 가능케 했으며, 뇌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뇌'를 대신할 기기만 있다면 '뇌를 담을 그릇'인 몸은 무엇으로든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전한다. 물론, 아직까진 '실용화 단계'까지 성공한 생명연장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요점은 '생명연장'이 어렵지 않게 가능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생명연장'에 오케이하겠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닥 높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많은 까닭으로는 '인간답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동의한다. 과거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서도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는 그 꿈을 포기하고 만다. 애초에 자신이 생각했던 삶과는 아주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생명연장'은 어떤 방법이어야 하는가? 그건 바로 '젊음의 유지'다. 스물다섯 살의 모습 그대로 늙지도 아프지도 않고 오래도록 유지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는데,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젊음의 유지는커녕 건강 유지조차 힘겨운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인형술사'처럼 삐뚫어진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탐욕으로 그릇된 행동을 일삼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망가지기 마련이다. 단 한 사람이라의 탐욕이라도 말이다.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은 줄을 지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탐욕'을 경계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병들어 가는 시점에서 인간이 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량학살'을 계획중이라면 어떻겠는가? 대찬성인가? 물론 지구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대찬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지구가 병들어가는 것과 '인구 증가'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 지구환경파괴는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파괴가 심각해진 탓이고,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갈 터전인 숲마저 '인간을 위한다'는 논리로 파괴하고 도시나 농경지, 또는 공장지대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연 생태계는 파괴되어 제 기능을 잃어버렸고, 인간을 보호하던 자연이 도리어 인간을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증거가 바로 '지구온난화', '해수면상승', '기후변화' 등이고,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도 덩달아서 전세계적인 대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괴의 생명'도 소중할 수밖에 없다. 비록 요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만, 요괴 하나하나가 '만물'에서 비롯되었다는 '애니미즘 사상'을 확대하면 요괴의 생명은 곧바로 '자연의 생명력'과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요괴들도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탄생'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야스케의 마음은 그대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또한, 인간이 만든 물건일망정 그 재료는 '자연'에서 얻은 것이기에 소중히 다루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어떤가? 어린이책으로 철학을 하는 것도 재미나지 않은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시작된 물음에서 '지나친 욕심(탐욕)'은 도리어 화를 부른다는 결론과 인간이 아닌 생명도 소중히 다뤄야 마땅하는 결론까지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정답'은 없다. 탐욕은 나쁘지만 욕심이 없는 세상도 활기를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이 될 우려도 있으며,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지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해충과 병균'마저 사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더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은 혼자 읽고 말 것이 아니라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어야 더욱 지혜로운 법이다. 또래와도 생각을 나누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면 더할나위가 없다. 그래서 '좋은책'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은 책' 모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모두, 좌현으로!
장 이브 르 나우르 지음, 마르코 그림, 소서영 옮김 / 팬덤북스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팬덤북스 1번째 리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꼭 빠지지 않는 '좌우 갈등'에 대해서 궁금했더랬다. 지금은 '좌파'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좌익'이라고도 불렀다. 무엇으로 불리던지 그렇게 불리는 정치세력은 무언가 범죄를 저지른 나쁜 집단처럼 들리곤 했는데, 사실 '좌파의 어원'은 프랑스혁명(1789~1799) 당시 제1 국민의회의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에 섰던 무리를 '좌파', 오른쪽에 섰던 무리를 '우파'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두 세력은 서로 정치적 대립을 했었고, 일반적으로 '안정보다 변화', '성장보다는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정치사상을 품은 세력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앙시앵레짐(구시대 체제)'의 무능함 때문에 먹고 사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으니, 바로 이들에게 '시민의 권리'를 가져다 준 사상이 바로 '좌파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이 나쁜 것이었나? 그렇다면 좌파사상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좌파'라고 하면 나쁜 것이라는 편견이 생긴 것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 '만화'인데도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내용이 난해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치사상적 배경지식'이 한없이 부족한 탓에 수많은 사상과 사상가들의 나열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낯익은 이름 하나만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바로 '마르크스'다. 그리고 좌파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쁘다고 못박은 까닭도 바로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기초를 닦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안 좋은 기억들 때문에 '좌파'라고 하면 싸그리 뭉뚱그려서 '나쁜 것'이라고 매도한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좌파와 우파가 대립적인 정치사상이니 '좌파=나쁨'이라면 자연스럽게 '우파=좋음'이어야 할텐데, 우파가 그렇게나 좋은 정치세력이었던가? 내 기억엔 '우파'도 그리 좋은 짓을 많이 한 것 같지 않아 의아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서로 그리 좋은 집단도 아니면서 왜 만날 치고박고 싸움질만 하느냔 말이다.

  물론 '좌파의 이미지'가 좀 과격한 것은 사실이다. 변화를 추구하다보니 '기존의 것'을 맹렬히 공격하고 심지어 파괴도 일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안정'을 추구하는 사상까지 '썩은 것' 취급을 하며 싸그리 갈아엎어버리려는 끔찍한 테러까지 자행하는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좌파만의 문제'일까?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도 처음에는 '변화'를 이끄는 중심세력이었고, 그렇게 중심세력으로 '집권'을 오래하다보니 '기득권 세력'만을 옹호하고 사회가 '계급적 갈등'을 겪게 되는 문제가 심각해지니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결집하게 마련인 것이다. 상식이 통하고 소통이 원활한 '우파'였다면, 이러한 '좌파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개선'해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변화'는 말뿐이고, 여전히 '기득권 유지'에만 골머리를 썩히다가 끝내 사회문제가 심화되다가 '시위와 폭동'으로 불만표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세력'은 이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극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셈이고 말이다. 그렇게 '좌파 집권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는가? 그것도 딱히 그렇지가 않았다. 애초에 추진했던 '변화'는 곧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고, 그렇게 '안정화' 된 정책들도 사회문제가 일어나긴 마찬가지였다. '성장'을 문제삼고 '분배와 복지'를 추구하다보니 금방 '재정고갈'을 겪게 되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범죄시하는 경향이 끝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세력'에 좋은 놈들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좌우 가릴 것 없이 '나쁜 것' 투성이란 말이다. 특히나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문제고, 왼쪽으로 치우쳐도 문제다. 그렇다면 균형을 잡아 '중간'을 추구하는 중도세력에는 문제가 없을까? 역시나 그들도 '집권'을 하면 어김없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좋은 정치사상이 있단 말인가?

  정답은 '유능한 정치인'이다. 유능한 정치인은 좌우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한다. 혼란스런 시절에는 '안정'을 추구하고, 수구세력이 판을 치는 꼴 같잖은 시절에는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는 유연한 사상가 말이다. '좋은 시절'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어떨 땐 '신나는 음악'이 필요하고, 때로는 '잔잔한 음악'이 듣기 좋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신명나는 분위기라고 해도 너무 시끄럽고 너무 빠른 비트로 쿵쾅거리다보면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럴 땐 비트와 볼륨을 낮추고 잔잔한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심장을 달래야 한다. 그렇게 멜로디에만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하품이 나며 졸리고 잠이 들기 마련이다. 그것이 계속되면 지루해질 뿐이다. 그럴 땐 또다시 비트와 볼륨을 올리고 쿵쾅쿵쾅 떠들썩하게 놀아주어야 살맛 나는 세상이 되는 법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만능뮤지션'이 없듯 유능한 정치인도 찾기 힘들다. 랩퍼가 EDM을 부르면 어색하고, 발라드는 못부른다. 반대로 발라더가 "드랍 더 비트!"를 외치며 옹알거려봐야 듣기에 거북할 뿐이다. 그래서 유능한 정치는 '한 사람'이 도맡아서 할 수 없다. 마치 '아이돌그룹'처럼 보컬과 서브보컬, 랩퍼, 댄서, 그리고 비쥬얼 담당, 연기자, 예능 등등 '완전체'로 활동하기도 하고, '유닛'으로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소화해내는 '만능뮤지션'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말이다. 정치가도 이젠 '아이돌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하모니를 선보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돌그룹과도 '콜라보'를 하면서 새롭고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물론 정치인이니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활약을 펼쳐 '문제해결'을 하는 실력도 보여주어야 하고 말이다. 이때에도 홀로 활약해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사상의 정체성도 밝히지 못하고서 '여당과 야당'이 되는 순간부터 무조건 '반대'만을 외칠 뿐이다. 국민들이 보기에 '좋은 정책' 같은데, 어떤 프레임을 뒤집어 씌워서라도 '나쁜 정책'이라며 맹공을 하고, 그마저도 시원치 않으면 '상대 정치인의 뒷조사'를 캐내어서 망신살이 뻗치게 만들고, 범죄인으로 매도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들쑤셔서 기어코 '연좌죄'를 물어야 속이 시원해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쌈박질하고나면 애초의 '좋은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의 세를 과시하며 '일부 국민'을 '전체 국민'이라 뻥튀기 시켜 끝끝내 '반대'를 하고 만다. 그 뒤에는 어땠나? 반대를 하고 '좋은 정책'을 흐지부지 만들고서는 결국 '나쁜 정책'을 시행하다 손해 보는 것은 결국 국민들 아니었느냔 말이다. 세상에 이런 멍청이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는 '반대'를 하다하다가 상대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모자라 '없애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상대방과 대화와 타협, 토론 등 점잖은 방법으로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조건 반대'만 하니, 나와 생각이 다르면 '죽여 없애' 버려도 된다는 식으로 테러를 벌이고 만 것이다. 어떻게 '나홀로 혁명'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그건 혁명이 아니라 테러다. 그런 끔찍한 짓에 동조할 '건전하고 공정한 국민들'은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냔 말이다. 상식과 소통을 바라는 국민들은 그런 테러를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그 어디에도 없는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선보여준 정치적 선도국가란 말이다. 이제 곧 상식적이고 소통을 바라는 공정한 국민들의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그 모든 선거는 다 '국민의 심판'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국민들이 저마다의 소신으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정치는 '심판'을 내린다. 민주주의 국가의 모범국민들은 이 '심판'에 공정성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할 줄도 안다. 이런 훌륭하고 위대한 국민에 걸맞는 '유능한 정치인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면 좋겠다. 좌우 갈등에 매몰되어 뻘짓하지 말고 진정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게 비추는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