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까면서 보는 해부학 만화 - 못다 깐 근육과 신경 이야기 한빛비즈 교양툰 25
압듈라 지음, 신동선 감수 / 한빛비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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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교양툰>이 참 좋다. 내가 그닥 해박하지 못한 분야라 하더라도 훌륭한 '입문서' 역할을 해줄뿐 아니라 초보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론서'로써 낯선 개념들을 확실히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교양툰>을 읽으면서 인문학적 배경지식을 충분히 넓힐 수 있기에 좋아한다. 그 가운데 한빛비즈 <까면서 보는 해부학 만화(이하 '까해만')>는 단연 최고였다. 귀신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지만 '해부도'는 어릴 적부터 꽤나 무서워했기 때문에 잘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유심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뼈다구만 걸려 있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고 맛나게만 보이는데도 말이다. 그러고보니 뼈에 붙은 살점(근육)은 끓여먹고, 지져먹고, 잘도 구워먹...츄룹..암튼, 그토록 무서워하는 분야였기에 곁눈으로도 볼 생각이 없었는데, <까해만>을 만나고부터는 왠지 '해부학'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전편 <까해만>도 좋았지만, 후속작인 <또까해만>은 그 이상이었다. 비유하자면, <까해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면, <또까해만>은 그 충격에 뒤이은 감동의 여운이 '전율'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은 '압듈라' 작가의 미친(?) 드립을 호평하며 이 책의 '재미의 원천'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깊이 공감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보다 '여왕들의 캐미'에 주목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일부'를 의인화에 성공하여 낯선 학문에 대한 진입문턱을 확 낮춤과 동시에 '이해의 깊이'를 대단히 높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올곧은 척추퀸, 고독한 심장퀸, 예민한 신경퀸은 이미 전편인 <까해만>에서 미친 드립을 선보였고, <또까해만>에 새로 등장하는 근육퀸과 두 프린세스, 그리고 세포퀸은 전편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해부학의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한마디로 여러 여왕들의 속깊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절로 '해부학 전공자' 못지 않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단 말이다. 정말 신기방기한 <교양툰>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영국의 베이컨은 말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이다. 계몽주의 학자였던 베이컨은 '지식'이야말로 인간 본연이 갖춘 힘의 근원이며, 오직 '신'이 전부였던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인간중심으로 되돌아가자는 근대적 인본주의 사상의 선구자였다. 어쩌면 그에게 '지식'은 신의 영역을 뛰어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진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런 힘을 가진 '지식'을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는 해부학 만화 <또까해만>에 투영하면 단순히 '우리 몸의 신비'를 밝혀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 넓고 복잡한 '지식의 향연'에 문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나의 문화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한 말이라 알려져 있지만, '출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볼 수 있는 영역'도 자연스레 넓어진다는 '해석'이다. 비록 이 책이 '해부학'에 한정된 지식을 담고 있긴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더 넓은 세상'을 엿보고 온 듯한 진한 여운을 느끼게 된다.

 

  그건 아마도 '압듈라 작가'가 단순히 '해부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영역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간절함이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저 '단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파고 들었을 뿐인데, '그 한 사람'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이 '좋아함의 극치'를 함께 느끼고, 같이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정말로 이 책의 참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해만>, <또까해만>을 읽고 나면 어느새인가 '해부학'이 좋아지게 되었고, 나도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담아 미친듯이 파고 들고 싶어진다. 나의 미친 열정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끝으로 압듈라 작가가 추천한 책이 있다.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2012년)란 책인데, 이 책의 작가도 좋아하고 '해부학도'라면 오늘날도 널리 읽히고 있는 <그레이 해부학>(1858년)의 해설서 같은 책이라는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책 같아서 책꽂이를 뒤져보니 내가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이었다. 별다른 낙인이 찍혀 있지 않은 걸 보니 직접 '구매한 책'인 듯 싶은데 도통 기억에 없다. 아마도 예전에 '과학고전목록'을 작성하면서 구매한 책이라 짐작할 뿐이다. 당연히 아직 읽지 못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해부도'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읽을 수 있겠다. 난 이미 '해부학'과 친해졌기 때문이다. 모두 <또까해만> 덕분이다.

  1.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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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5월의 기록은 건너뛰고 6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요즘 건강이 들쭉날쭉이다보니 기분도 덩달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지금도 허리가 아파서 리뷰 한 편 쓰고 말았다.

내일은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좀 찍어보련다.


어쨌든 6월에 10편의 리뷰...다시 두 자리 수로 복귀하였다.

상반기에 꼴랑 63편의 리뷰...매우 저조하다.

새로 작성한 기록 기준으로 18년간 1595편의 리뷰, 43만여쪽, 219여만 원어치를 읽었다.

그 중, 어린이책 425편(27%), 인문학책 204편(13%), 역사책 182편(11%), 소설 171편(11%)

그리고 서평책 리뷰가 49%로 780여편이다.


음...올 하반기까지 '나의 독서기록'은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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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다 읽는 경제 에스프레소 금융 - 29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낸 돈의 역사
김종승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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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는 가방끈이 짧아도 열심히 일만 하면 먹고 살만 했다. 무엇이라도 한 가지 기술만 익히도 평생 밥벌이로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못하다. 10년이면 강산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로 업그레이드 되어 새로 지식을 쌓고 연마하지 않으면 써먹을 기술조차 남지 않게 된다. 또한, 새로운 상품은 채 2달이 못되어 '더 새로운 상품'으로 출시가 되어 소비를 촉구하며, 소비하지 않으면 유행에 뒤쳐지는 것을 넘어 도태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이렇게 나날이 새롭게 바뀌는 현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제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된 <경제교과서>를 가르치지 않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겨우 '경제'를 다루긴 하지만, 모든 학교에서 '필수'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 비중이 크지도 않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학창시절에 중요하게 다루지 않다보니 고교졸업 후에도 '돈벌이'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청춘들이 허다하고, '경제감각'이 떨어져서 국가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그나마 대학학자금을 갚기 위해 '알바'와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나서야 뒤늦게 '경제력'의 중요성을 깨닫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을 보면, 우리 나라의 경제교육이 한참 뒤쳐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경제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하는 편이다. 허나 경제교육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대안을 내놓자니 마땅한 것이 없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장 좋은 경제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직접적'으로 체험을 해보는 것이지만, 우리 나라 정서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큰돈'을 직접 다루는 것에 부정적인 편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걸림돌이다. 아직도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용돈'을 지급하는 것으로 경제교육을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받은 용돈으로 아이들이 직접 '주식'을 사고 팔거나 '펀드', '신용거래', '물품판매' 등을 통해서 이득을 챙기는 일에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고작해야 '은행예금'이나 '정기적금'을 드는 것 정도를 권장할 뿐이고, 심지어 자녀가 벌어들인(?) '돌반지'조차 돌잔치에 들인 비용을 탕감하는 데 쓰일 뿐, 유대인 부모처럼 '우량주식'을 사서 자녀들의 독립자금으로 건내주는 보태주는 것조차 따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경제교육의 기틀이 쌓이고, 경제적인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겠냔 말이다.

 

  존 리는 말했다. '투자'는 어릴 적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라고 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종잣돈'을 마련해서 성인이 되는 스무 살까지 20년간 '우량주식'에 묻어두면, 웬만한 '복리이자'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다고 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투자하는 '학원비'를 아껴서 '주식투자'를 하면, 명문대를 졸업해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으로 불려서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워렌 버핏'처럼 위대한 투자자가 되어 세계를 주름잡는 거물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은 '경제교육'인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투자가 다 성공을 하고,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투자는 '얻을 기회'도 제공하지만 '잃을 기회'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제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허황된 욕심'을 부추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고,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 '일확천금'과 같은 헛된 꿈을 갖게 되면 한 순간에 무일푼이 될 수도 있는 '위험성'도 함께 가르쳐야 마땅할 것이다.

 

  이처럼 균형잡힌 경제교육을 위해서 무엇을 알려주어야 할 것인가? 이 책, <경제 에스프레소(금융편)>은 인류의 경제발전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돈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금융시장이 우리에게 어떻게 펼쳐지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금융시장의 세 개의 축인 '은행', '증권', '보험'이란 무엇인지 개념설명부터 하면서, 실제 역사적으로 어떤 사례들이 있는지 꼼꼼하게 펼쳐보여 주면서 '경제개념'을 쌓을 수 있는 배경지식을 선보였다.

 

  돈은 '돌고 돌기' 때문에 '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내 수중에 '들어온 돈'은 언젠가 다시 내 손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로 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버는 족족 다 써버리는 삶을 실천하면 '경제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제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내 수중에 '움켜쥔 돈'이 쌓여야만 한다. 그렇다고 꼭 움켜쥐기만 할 뿐, 돈을 쓸 줄 모르면 '수전노'가 되어 욕을 먹거나 '경제경색'을 불러일으켜 애써 갖춘 '경제력'을 일순간에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니 나중을 위해 꼭 필요한 돈은 모으면서 적당한 수준에서 소비할 줄도 아는 '합리적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쓸만큼 벌 줄 아는' 훌륭한 금융자산가가 되어야 한다. 물론, 단박에 그런 '건실한 경제인'이 될 수는 없다. 오랫동안 경제지식도 쌓고 경제흐름도 파악하여 '뛰어난 경제력'을 갖춰야만 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이제라도 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경제공부'에 소홀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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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4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4
남명심 글, 정윤채 그림, 손영운 기획,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원작 / 채우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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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장편소설'은 읽기 힘들다. 책이 두껍고 분량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 이야기의 전개가 굉장히 느린데다가 인물들간의 얽히고 섥힌 복잡한 갈등 때문에 머릿속이 난삽해지기 십상인 탓이 가장 크다. 그런 까닭에 몇 주간, 길게는 몇 달 만에 '독파'한 뒤에도 줄거리조차 요약이 되지 않아 내가 읽은 책이 내용이 무엇인지, 책의 주제는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것 투성으로 책을 덮곤 했다. 내겐 그런 책이 몇 권 있는데,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모두 10대에 읽다가 만 대표적인 장편소설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바쁜 일상을 지내다가 읽다 말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책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시리즈가 참 맘에 든다. 좀처럼 읽기 힘든 '고전소설'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뒤에 '원작소설'을 꼭 읽어야 제대로 완성이 될 테지만, 원작의 내용을 단편적이나마 '요약본'으로 미리 읽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도 '먹어본 음식'이라지 않은가 말이다. 온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많고도 많겠지만, 내 머릿속에 기억된 맛은 이미 먹어본 것만을 떠올릴 뿐이다. 그러니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는 맛'일 수밖에 없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 지라도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낸 것'을 맛보았으니 가장 맛있을 수밖에 없는 <명작고전의 맛>도 천천히 음미하며 진하고 깊은 맛이 우러날 때까지 꼭꼭 씹으며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원작소설을 읽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는 대작이기도 하다. 단순히 분량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 내용의 깊이와 작가의 의도를 짚어가며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만큼 복잡한 인물구도 속에, 방대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며, 인간의 삶과 종교적 구원이라고 하는 거창한 주제를 읽노라면, 독자들에게 폭넓은 혜안을 요구하는 작가의 의도가 얄궂기조차 할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책 한 권(보통 2~3권 분량) 읽는데 얼마나 깊은 공부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소설의 표면적인 사건은 '아버지 살인범 찾기'다. 작가는 살해 당해 마땅한(?) 아버지로 이야기를 설정해놓고서, 죽어 마땅한 자를 죽이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고 되묻는다. 마치 <죄와 벌>이 연상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좀더 깊이 파고들어 '종교적 구원'에까지 파고 들어 질문을 퍼붇는다. "지은 적이 없는 죄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아 억울한 죄인이, 살아서 지은 모든 죄값을 치룬다면 성인이라 부를 만한가?"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살인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방탕한 삶'을 살아간 죄값을 속죄하기 위해 '살인죄'를 달게 받고, 고행을 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면 훌륭하다 칭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신의 존재'는 믿지만, '신앙은 없다'면서 기존 종교계를 맹비난하는 무신론자도 등장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종교'를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신의 존재'는 믿음의 차원을 넘어 종종 '사회규범'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열광적인 신자들을 배출하는 등등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드러내곤 한다. 그런 까닭에 종교를 섣불리 '어느 한 쪽'면만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기 곤란한 점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도 그 다루기 곤란한 종교에 대해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세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등장하곤 한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종교'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종교적 문제를 다룬 이야기의 결말은 대부분 '사랑'으로 끝맺기 마련이다. 그 뻔한 결말로 다가가기 위해서 그토록 이야기를 지지고 볶아대긴 하지만, '사랑'으로 끝맺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냔 말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사랑, 아닌 것'이 드문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사랑'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이렇게나 '뻔한 이야기'인데도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심상찮은 까닭은 바로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말씀(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 '좋은 말씀'에서 '종교적인 색채'는 쏙 빼고 담백하게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해 '실천'하는 종교인은 드물다는 것을 잘 안다. <성경>에 담긴 말씀을 달달 외우는 이는 많아도 그 '말씀'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곳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종교인은 드물다는 것도 잘 안다. 왜 '사랑'이라는 좋은 것을 배우고서 '같은' 종교인들끼리만 사랑하려고만 하는가? '다른' 종교인은 그토록 배척하라고 <성경, 어느 구절>에 적혀 있느냔 말이다. 또한, 그 많은 헌금을 걷어 으리으리한 '성전'을 쌓고, 목사의 통장잔고만 그득히 불려주고, 그리 거룩한 성전과 통장을 대대손손 물려주고, 저들끼리 해처먹으라고 말했느냔 말이다. 종교가 세속화되고 배타성을 띠게 되면 '타락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타락한 종교는 더는 올바른 종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올바른 신도라면 '잘못 들어선 길'에서 발을 빼서 돌려야 마땅하다. 도대체 어느 종교가 '신도'를 앞세워 성전을 수호하고 통장잔고를 사수하라 말한단 말인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전하는 '실천하는 사랑'이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쓸 당시에 '러시아 민중들'도 귀족과 자본가 들의 방탕한 삶을 목도하며 온세상에 썩어들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단다. 서구에서 밀려들어온 '계몽주의'로 러시아 민중들은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점점 깨우쳐가는데도 '제정 러시아'를 이끄는 지배층들의 문란한 삶은 그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돈을 모아 '졸부'가 된 이들이 벌이는 헤픈 삶을 보며 러시아 민중들은 서서히 분노에 차올랐다. 민중들 대다수가 굴주리는 마당에 소위 '가진자'들이 벌이는 행태가 눈꼴 시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난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할 '종교인'들조차 말로만 사랑을 입에 올리며 기득권층을 옹호하는데 앞장 설 뿐이니, 민중들은 기댈 언덕조차 없어 가난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지식인'들이 '실천하는 사랑'을 노래하는 소설을 지어 대중들에게 선보이니 열렬히 호응받게 된 것이다.

 

  이는 '19세기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몸소 실현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기후변화는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으며 인류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재앙은 인류 스스로 불러오고 있다. 이제 '지구온난화'는 어느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불행이 아니며,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 지구환경은 몸살을 앓다 못해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해가며 썩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이젠 생태계 절멸까지 불러재끼고 있어 개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나 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 온지구를 사랑으로 가득 채울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무엇이라도 좋다.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반드시 지구를 구할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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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계사 3 - 다양한 문화권의 형성과 발전 처음 세계사 시리즈 3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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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책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시대'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막막해지기 시작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왜냐면 서양의 중세를 배경으로 '역사'에 막 익숙해질 만하다가 이슬람제국이 등장하고, 동시대 동양에서는 중국의 분열과 통일로 한차례 난리법석을 피우다가 인도의 여러 왕조를 거쳐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이 역사까지 섭렵하다보면, 그 '역사의 방대함'이 처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외워야 할 것이 많아져서 부담스럽다는 말이다.

 

  물론, 역사공부에 있어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의 맥락과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방대한 분량'과 맞닥뜨린 학생들이 겪는 당혹스러움은 다들 겪어보셨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암기'를 하자니, 역시나 '방대한 분량'을 마주하고서는 즐거움보다 막막함이 먼저 다가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역사공부의 순서는 모름지기 [암기에서 이해로] 가는 방향이 '순리'이다. 아무리 이해가 중요하다고해도 '역사지식 암기'가 없이는 맥락과 흐름 파악도 저멀리 떠 있는 무지개와 같기 때문이다.

 

  나의 고등학교 '화학선생님'도 개학 첫날 첫수업에서 [주기율표] 암기를 숙제로 내주셨다. 다음 시간까지 원소기호 1번부터 20번까지, 1족부터 0족까지 원소들의 이름을 암기해오지 않으면 매타작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셨고, 실제로 다음 시간에는 수업시간 내내 6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5초의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술술 불지(?) 않으면 어김없이 매타작을 작렬하셨다. 나는 그렇게 [주기율표]를 달달 외웠고, 거짓말처럼 '화학수업'이 너무나도 머리에 쏙쏙 이해가 되는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난생 처음 배운 과목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암기]는 종종 '이해의 바탕'이 되며, 이해해서 지혜로 쌓여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한 셈이었다. 마치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연탄재를 눈밭 위에 굴리는 것처럼 말이다. 연탄재에 달라붙은 눈들이 동글동글 눈뭉치가 되고, 계속 굴리다보면 어느새 원하는 만큼의 눈덩이가 되어 어엿한 눈사람으로 완성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겨울철 연탄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암튼, '중세시대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중세유럽의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번영으로 비잔티움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서유럽이 지금이 프랑스와 영국, 독일과 이탈리아로 정착되기 시작하는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슬람제국의 형성]을 다루고 있는데,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 칼리프 체제 아래 우마미아 왕조와 아바스 왕조가 형성되고 이슬람세력이 팽창하는 과정을 친절히 보여주었다.

 

  한편, 동양의 역사는 크게 중국과 인도, 동아시아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서양의 중세시대와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수당제국이 들어섰다 다시 분열되고 송나라로 다시 통일되기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으며, 인도에서는 굽타왕조를 중심으로 인도의 종교와 문화를 소개하였으며, 끝으로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사의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과 흐름을 일본에 한반도 문화를 전파하는 과정까지 소개하며 끝마쳤다.

 

  비록, 이 책에서는 '한 권의 분량'으로 다뤘지만 실로 엄청난 분량의 세계사를 접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닥 어렵다고 두려워할 까닭은 전혀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삶과 과거의 삶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하면서 세계사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건'들이 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인지 감을 잡아나가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권한다. 또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여유를 갖게 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역사공부의 진짜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역사를 무작정 외우기만 하는 '암기과목'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생각을 바꿔보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쉽게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나열'에 불과한 역사교과서로 공부하고 시험도 치루겠지만, 그 단순한 '지식 암기'를 넘어서 '인류의 발자취'를 통해 옛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역사공부의 디딤돌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뒤부터 하는 '역사공부'는 반드시 즐겁고 재미날 것이다. 그게 진짜 역사공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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