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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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풍자는 꼭 해야만 한다. 특히 '정치 권력'을 향한 뼈를 때리는 농담은 '살아있는 권력'에 싱싱함을 더해주기 때문에, 권력자는 풍자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때로는 잘 받아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풍자를 하다가는 종종 생명를 위협받기 일쑤다. 부정한 권력일수록 권력을 제대로 쓰기는커녕 그저 맹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잘하라'는 의미의 풍자에도 화들짝 놀라 '무능한 권력'이 들통날새라 벌벌 떨며 잡아다 족치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니 정치풍자는 부정한 권력 뿐만 아니라 무능한 권력까지 걸려주는 청정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한다. 이렇게나 유용한 정치풍자를 왜 못하게 막는가?

 

  <걸리버 여행기>는 그런 정치풍자를 담은 대표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한때는 '아동용 소설'로 포장해서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만 편집해서 신기한 모험담을 소설로 통용시켰던 적도 있다. 허나 오래지 않아 '나머지 세 나라의 이야기'도 수록된 [완역본]이 선보이면서 정치풍자의 진수를 담은 진정한 어른들의 소설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책이 우리 나라의 90년대에 출간되었던 [첫 번째 완역본]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엄청나게 다양한 출판사에 출간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던 18세기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영국의 역사'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네 나라를 돌아다녔던 걸리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자의 대상'이 바로 영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풍자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효율이 극대화될 수 없기에, 풍자를 걷어낸 채 읽는 <걸리버 여행기>는 그저 그런 이상한 나라를 돌아다니는 '모험소설'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단편적이나마 <걸리버 여행기>가 담고 있는 풍자의 '대상'에 대해 언급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모험에서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걸리버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사람들이 달걀을 깨는 방향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 전쟁까지 일삼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고작 그런 시시한 이유로 전쟁까지 불사하는 모습을 보고 걸리버는 무엇을 느꼈을까? 바로 '영국의회'가 바로 그런 시시한 이유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으로 갈라져 서로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다퉜지만, 정작 조국인 영국은 뒷전으로 미루고 서로의 잇속만을 챙기기 위해서만 목숨걸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모험에서는 '큰 사람들의 나라'에 도착하는데, 여기선 걸리버가 정반대의 처지가 되고 만다. 큰 사람들의 왕 앞에서 걸리버의 조국 영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자랑을 늘어놓지만 큰 사람들의 왕은 도리어 걸리버처럼 작은 사람들이 무얼 할 수 있겠냐며 비아냥만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걸리버는 큰 사람들의 왕에게 '영국의 지혜'를 알려주겠다며 간신을 구별하는 방법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법을 자랑삼아 귀띔해주었다. 그러자 큰 사람들의 왕은 너처럼 작은 사람들의 심보가 너무나도 비열하고 잔악하다면서 우리 나라에는 '영국의 지혜' 같은 것은 필요없다며 거절하고 만다. 이는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대영제국에게 일침을 놓는 꾸중이었다. 영국이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뽐내지만 세상에는 영국보다 더 강하고 영국보다 더 위대한 생각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다면서 대영제국에게 겸손을 운운한 셈이다. 게다가 대영제국의 위대함의 밑바탕에는 '부정한 정치세력'과 '식민통치를 함에 있어 너무나도 악랄하고 잔혹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담아 놓았다. 이는 당시 스위프트가 거주하고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느끼는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불만을 담아놓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세 번째 모험은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에 방문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위대한(?) 사색에 빠진 탓에 일상생활조차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멍청이들을 지도자로 섬기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그런 위대한 지도자의 정책결정들이 얼토당토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저 순응(?)하거나 관망(?)하고만 있는 일반 주민들까지 싸잡아서 비판을 한 셈이다. 이런 무능한 라퓨타 사람들은 '첨단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반면에 라퓨타의 식민통치를 받는 나라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인들이 영국에 반기를 드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이에 영국인들은 '문명인'인 자신들이 '미개인'인 식민지에 문명의 혜택으로 '문명화'시켜준다고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지만, 그런 '문명화의 헤택'이란 것이 고작해야 수탈과 압제일 뿐이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명의 위대함'을 앞세워 꼰대짓밖에는 할줄 모르는 대영제국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그 꼰대짓마저도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굴복시키려 라퓨타를 이동시켜 '햇빛'을 가리거나 '짓눌려버린다'는 위협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짓눌려버리는 짓을 한다면 두 번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을 지경에 빠져버리는 허약한(?) 대영제국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모험은 '말들이 사는 나라'인데, 이곳에서 걸리버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춘 '휴이넘(말)을 만나 '야후(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진정한 휴이넘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이는 인간 자체가 지닌 '추악한 본성'에 대한 부정을 명백히 드러내며 인간사회가 구축해놓은 모든 것이 끝내는 '짐승'보다 못한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나 추악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신랄하게 까발린 스위프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인류가 문명이라 이름 붙인 '야만'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처절한 반성을 통해 거듭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굵직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이처럼 저자인 조나단 스위프트는 걸리버를 통해 인간사회를 비판하였고, 때로는 걸리버를 통해 인류에게 희망을 선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희망'이란 절망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고문'처럼 이룰 수 없는 일을 하염없이 욕망하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연 스위프트는 어떤 의미의 '희망'을 선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결코 선한 본성을 일깨울 수 없는 '나쁜 인간'들의 향연을 그저 묵묵히 견디라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걸리버가 휴이넘의 나라에서 추방된 뒤에 지독한 '자기혐오'속에서도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에게 '휴이넘의 이상'을 가르치고 '휴이넘'을 닮은 인간으로 거듭나려 애썼기 때문이다. 비록 검은 잉크속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지만, 그렇게 한 방울씩 깨어난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결국 '검은색'을 몰아내고 맑고 투명한 물로 잉크병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담았으리라 짐작한다. 허나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맑고 투명한 물은 쉬이 검은 잉크에 '물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 한 방울'이 아니라 '물 한 컵'을 붓는 방식이어야 하고, 때로는 수도꼭지를 틀 듯 '콸콸' 쏟아부어야 깨끗해진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걸리버가 되어야 한다. 야후에서 벗어나 휴이넘의 이상을 꿈꾸는 걸리버가 되어 실천해야만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걸리버는 서로 다를 지라도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이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걸리버'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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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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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의 맛은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기에 앞서 미리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추리소설을 섭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단서에서 사건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유추를 한 것을 '소설 속 탐정의 추리'와 비교하면서 사건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는 '나도 명탐정'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짜릿함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소설속에서 던져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추리 프레임을을 아주 잘 짜아놓은 추리소설이어야만 한다. 그런 관점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꽤나 훌륭하다.

 

  흔히 '살인사건'의 범인은 '한 명'일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추리소설 마니아들도 등장인물이 내놓은 정황과 알리바이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으레 범인에서 제외를 하고서는 엉뚱한 인물을 범죄자로 몰기 일쑤다. 하지만 어디에도 '범인은 오직 한 명'이라는 근거는 없다. 그래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의 범죄자를 찾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범인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특징이 '주홍색 잠옷 차림의 키가 작은 남자의 뒷모습에 여자처럼 가냘픈 목소리'의 소유자를 봤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으며, 심지어 탐정인 푸아로마저 그 인물을 직접 목격했기에 수사선에 살인용의자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사람을 찾도록 수사의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더구나 범행도구는 '칼'이었으며 피해자의 몸에는 이곳저곳에 칼에 찔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에 찔린 정도로 봤을 때, 힘쎈 남자가 찌른 듯 깊숙이 찔린 자국도 있었지만, 여자가 힘없이 찌른 것처럼 아주 얕게 찔린 흔적도 여럿 보였다. 여기서도 범인은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고 단서를 던져주었다.

 

  더구나 범죄현장은 달리는 기차 안의 객실에서 벌어졌다. 때마침 눈보라가 치는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달리는 기차에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끝내 눈보라로 인해 기차는 역과 역사이의 중간에서 멈춰서게 되었고, 살인범은 멈춘 기차에서 내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추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인자가 범죄현장을 떠났다면 기차 주변에 도망친 흔적이라도 발견이 되었을텐데, 그런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에 탑승한 인원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정리하면, 기차에 탑승한 인원이 달라진 것도 없었고, 멈춰진 기차에서 내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아직 '오리엔트 특급' 편 기차 안에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한밤중에 벌어진 사건이라 '객실칸-식당칸' 딱 두 개의 차량만 통행할 수 있었고, 모두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 '식당칸'으로 통하는 통로도 닫혀버렸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범행현장은 '객실칸'이 유일한 셈이다. 이른바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일까?

 

  객실칸에 탑승한 승객은 모두 열두 명이다. 탐정 푸아로도 '같은 칸'에 머물고 있었고, 살해된 피해자도 주검으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승객 열두 명 가운데 범인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열두 명의 승객은 살인현장에 가본 적도 없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할 근거로는 서로가 서로를 범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더구나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어준 열두 명의 승객들은 서로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사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범죄현장에는 '뚜렷한 단서'가 두 개 있었다. 알파벳 H가 수놓인 최고급 여성용 손수건과 고급 담배파이프 소제기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살인을 저지른 어둠속에서 범죄자가 떨어뜨리고 간 듯 했다. 그렇다면 범죄자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아님, 범죄자는 두 명인걸까? 그도 아니면 그 이상인걸까?

 

  사실, 사건이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논리적 오류'로 인해 범인색출에 난항을 겪게 되면 답은 뻔해진다. 그 뻔한 답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매력인 관계로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이미 100여 년전의 작품이라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분들이 많겠지만, 아직 책을 읽지도 않고 영화도 관람하지 않은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리'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지금까지의 단서만으로도 대충 범인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한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살인자보다 피해자가 더 나쁜놈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기차 안에서 칼로 난도질을 당해 죽은 피해자가 다름아니라 '어린이유괴 연쇄살인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풀려나서 사업가로 성공해 부족할 것이 없는 넉넉한 삶을 살며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호사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나쁜놈을 찾아 칼빵을 놓고 단숨에 죽여버린 살인자는 다름아니라 이 나쁜놈에게 희생을 당한 가족에게 크나큰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린 자식이 비명횡사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온가족이 불행하게도 슬픔속에서 하나둘 죽고 말았고, 애꿎은 사람이 범인으로 대신 지목되어 살인자로 낙인이 찍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등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살인사건은 '연쇄살인범'인데도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지 못하고 범죄자를 '증거불충분'으로 유유히 빠져나가게 하고,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더 큰 비극의 정점을 찍게 만든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이럴 때 '사사로운 복수'를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인가? 아니면 또다른 범죄일 뿐인가?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대도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유죄판결을 받긴 받았는데 말도 안 될 정도로 '가벼운 형벌'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물론, 현실에서는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해야만 하고, 사법정의가 명명백백하게 실현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사법부의 판단에 일일이 '불만'을 표하거나 '불신임'을 하게 된다면, 사법부의 독립이 지켜지지 않아 더욱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매우 신중하게 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내 딸을 죽인 살인범이 '무죄방면' 되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나 같아도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으로 복수를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사로운 처벌'이 용인된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고, 누가 보더라도 정당한 처벌처럼 보일지라도 '사사로운 처벌'을 용인하게 된다면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법 판결'은 무조건 존중하고 따라야만 하는 걸까? '유전무죄 무전유죄'처럼 사법부의 공정성이 심하게 훼손한 현대사회에서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편파적인 사법 판결', '불공정한 사법 판결'조차도 무조건 존중하고 따라야만 하는 걸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속에서 이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까닭에 제목조차 '어벤져스(복수자들)'라고 대놓고 복수를 정당하다고 짜놓은 극본이 연출되곤 한다. 또한 관객들도 그러한 '사사로운 복수'를 통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말이다. 외계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명분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여기에 사법/행정/입법 시스템 따위는 끼어들 틈마저 없다. 끼어들더라도 무능하고 무지할 따름이다. 그래서 '사사로운 복수'를 저지르는 개인은 '히어로(영웅)'이라 불리고, 더욱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빌런이 등장하자 '영웅들이 집단화'하여 쳐부수는 장면에 관객들은 더욱 열광하곤 한다. 과연 '사사로운 복수'는 매우 짜릿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현실에서도 그럴까? 일상속에서 그런 빌런이 등장해선 안 되겠지만, 간혹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빌런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빌런이 나를 비롯해서, 우리 가족, 우리 사회, 우리 나라, 우리 지구를 위협에 빠트리는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그때도 '사법/행정/입법' 시스템의 절차를 지켜가며 차분하게 하나씩 단계적으로 정의를 실현시켜 나가는 나약한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인걸까? 사사로운 복수에 대한 깊은 고찰은 이렇게나 거창하게(?) 나열할 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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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 덕의 정치, 사랑의 정치, 힘의 정치 홍성민 교수의 알기 쉬운 정치철학 강의 1
홍성민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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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정치는 '전쟁'이다. 어설픈 꼼수를 부린다거나 어리숙한 낭만적 감성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정치를 한다면 두 번 볼것도 없이 '걍 아웃'이다. 특히나 한국정치는 더하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죽여야 '우리'가 사는 약육강식의 '정글 정치'가 징글맞도록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인 홍성민 교수는 한국정치가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까닭을 정치시스템이 성숙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왕조정권'이 무너지자마자 '식민지배'를 당했고, '해방정국의 혼란'에 이어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만으로도 대견하긴 하지만, 성숙할 수 있는 '단계적 발전'을 이루기도 전에 급박하게 '강대강의 대결정치' 양상으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독립과 친일 등으로 파벌싸움만 일삼았기에 대한민국의 정치는 오직 '힘의 논리'로만 우열을 가르는 안타까운 모습만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국정치는 이대로 괜찮은가? 정녕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아무리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도 무너뜨릴 방법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정치의 정상화'도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그저 정치꾼을 정치인처럼 활동하도록 감시하는 수준 정도로 관심을 두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부터 차근차근 이해하게 되면 '정치꾼들의 꼼수'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정치인들의 행보'도 낱낱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지럽고 복잡한 '한국정치'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아니 적어도 저들의 일가친척만 잇속을 챙기는 난장만큼은 일거에 근절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온국민이 '정치철학'에 깊이 관심을 두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이 책도 지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책으로 <정치를 보는 3가지 관점>을 펴냈다. 그 세가지란 '덕의 정치', '사랑의 정치', '힘의 정치'라고 한다. 어려운 얘기는 빼고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정치를 함에 있어 '인덕'이 있어야 하고, 무릇 정치인이라면 마음씀씀이가 '(종교적 관점에서)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며, 승리하는 정치인이 되기 위해 과감한 결단, 다시 말해 '힘'을 적절히 발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는 시기적으로도 '고대의 정치'는 덕을 중요시 했고, '중세의 정치'는 사랑을 중요시 했으며, '근대의 정치'는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힘'만 갖추고 '덕'과 '사랑'이 부족해서는 올바른 정치를 이끌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인이라면 세 가지를 고루 갖춰야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치철학에 관심을 두었다면 오늘날의 '정치판'이 위의 세 가지 중 어느 쪽에 치우쳤고, 어느 것이 절대 부족한지 파악하면서 살펴보면 틀림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그람시까지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피며 덕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를 거쳐 힘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계보를 나열하며 설명하기도 했고, 동서양의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서로 비교분석하며 동서양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정치철학의 양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며 '균형잡힌 시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정치철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올바르고 균형잡힌 정치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조선왕조까지는 '덕의 정치'를 중요시해왔다. 허나 급변하는 시기에 외세의 문물을 뒤늦게 받아들이면서 '사랑의 정치'를 펼쳐보기도 전에 '힘의 정치'를 받아들이기 급급해서 '정치적 미완성', 또는 '정치적 미성숙'한 상태로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양상을 띠게 되었단다. 다시 말해, 우리 정치의 역사는 몇몇 뛰어난 인물(지도자)가 등장해서 훌륭한 인품으로 백성을 덕으로 감싸는 정치를 오래도록 해왔으나, 이런 '덕의 정치'가 발전해 마음씀씀이를 베풀줄 아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조화를 이루는 '사랑의 정치'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왕조의 패망과 함께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게 된 셈이다. 서구 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종교(그리스도교) 혁명'이 일어나며 왕족과 귀족 뿐 아니라 민중들까지 종교적 영향력이 파고들어 한마음 한뜻으로 '사랑'을 떠받들며 지내온 경험을 축적해왔는데,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덕의 정치'를 마감해야 했고, '사랑의 정치'는 협소한 의미의 포교활동(?)만 해본 채, 승패에만 집착하는 '힘의 정치'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정치는 '지도자'에게만 '덕'을 갖추라고 요구할 뿐, 국민들 스스로 '덕'을 갖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지도자(정치인)와 국민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씀씀이를 베풀 여력도 없이 오직 '이기는 정치'만을 위해 상대를 파멸시키거나 나락으로 내몰 궁리만 하는 저급한 정치풍토를 갖추게 되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얼추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게 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지도자와 국민들 모두 '덕'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정치적 기본소양'을 닦는 일일 것이다. 만약 '나'는 덕을 갖추고 사랑을 베풀었는데 '남'은 그렇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혜택을 누리기만 하는 얌체짓을 하게 된다면, '정의의 심판'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정의론'에 해당하는 요소로 존 롤스나 마이클 샌델이 떠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덕과 사랑을 저절로 뿜어져 나올 정도로 닦지 않게 된다면 '공리주의'를 비롯한 공정과 공평, 형평을 따지는 일에 매몰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는 사회속에서는 '덕과 사랑의 정치'가 성장할 수는 없다. 물론, '정의론'을 배척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일일이 '정의'를 논하기 이전에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만큼 상대를 존중하고 이익을 챙겨줄만한 '넉넉한 마음씀씀이'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덕과 사랑'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힘의 정치'를 논한다면, 제 잇속만 챙기기 급급한 아귀다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릇 '힘의 정치'란 상대를 재끼고 '권력'을 쟁취하는데 목적을 두기는 하지만, '이런당'이 정권을 잡든 '저런당'이 정권을 잡든 심지어 '요런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겨루는 정치를 말한다. 이를 테면, 권모술수로 가득하다고 오명을 뒤집어 쓴 <군주론>도 실상은 마키아벨리가 조국 피렌체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메디치가의 수장에게 바쳤던 정치철학책이었다. 비록 권력을 잡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지라도 '피렌체'가 다른 나라의 침략에도 끄떡하지 않고 나아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고 조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의 정치'도 정권을 잡기 위해 때론 비겁한 수단을 이용할지라도 정권을 잡은 뒤에는 오직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은 덕, 사랑, 힘의 진정한 정치양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직 저급한 정권투쟁만 일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들도 모두 수준이하는 절대 아니다. 덕과 사랑을 갖추고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정치인과 국민들이 반드시 있다. 비록 아직은 아주 미미한 '소수'일지라도 정치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 바로 그 '소수'가 비로소 제대로 활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는 이제 시작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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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 172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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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어릴 적에는 <걸리버여행기: 소인국 편>만 따로 편집해서 출간한 '문고판' 형식의 동화책으로 읽었더랬다. 재밌게 읽었던 터라 우연히 '대인국 편'을 보게 되었을 때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졌더랬다. 그러다 대학생시절에 '완역판'이 새로 출간되어 읽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먼저 방대한 분량에 놀랐고, 날카로운 정치풍자, 사회비판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더랬다. 그저 '아동문학'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진정한 '어른문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깊은 내용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영국소설'이고, 양당체제였던 영국의회의 휘그당과 토리당 사이에서 벌어진 정치인들의 다툼에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무능한 정치인들을 비꼬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게 만드는 내용인줄로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차피 '영국의 의회정치사'는 물론이고 '영국 역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때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걸리버 여행기>가 '아일랜드 저항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책 또한 허투루 보지 않게 되었다. 바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핸리 2세 때부터라고하니 12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해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좋지 않고, 간간히 유혈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깝기 그지 없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만나는 '아일랜드인의 아픔'이 바로 영국의 억압과 수탈로 점철된 가혹한 식민정책 때문이라고 봐도 거의 무방하다고 한다. 그렇게 아일랜드는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18세기 후반에는 아일랜드 자치 의회가 허용되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국의 착취는 더욱 악랄해졌기 때문에 아일랜드인의 무장봉기는 점차 '민족주의 운동'으로 번졌다고 한다. 이에 영국은 19세기 초에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영연방'으로 강제합병을 하면서 영국인들의 이주를 더욱 활발히 했고, 이에 저항하는 아일랜드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아일랜드의 독립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다 20세기 초에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신페인당'이 창설되면서 아일랜드의 자치 요구는 더욱 고조되었고, 10여 년 뒤에는 '아일랜드 국민의회'를 창설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탄압이 심해지자 아일랜드는 맞서 싸웠고, 급기야 전쟁상황으로 돌입(아일랜드 독립전쟁)했고, 휴전과 내전을 거듭하다 1937년에 국호를 '에이레'로 바꾸며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던 영국은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그러다 1949년에 다시 국호를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바꾸고 영연방에서도 탈퇴하면서 완전한 독립을 하였단다. 무려 900여 년간의 투쟁 끝에 거둔 독립이다.

 

  이러한 역사를 품고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스위프트는 영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교양을 쌓은 뒤에 '국교회 사제'로 아일랜드에 부임하게 되었고, 양국을 오가며 종교와 정치에 관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단다. 그의 젊은 시절은 출세지향적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정당이었던 '휘그당'과 '토리당'을 오가며 집권당을 편들며 영국 본토에서 종교에 종사하길 바랐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아 아일랜드로 밀려나게 되고 말았단다. 그렇게 아일랜드에서 머물게 되면서,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1720년대부터 영국의 식민지배에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노년때까지 왕성히 활동을 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존경받는다고 한다.

 

  이런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가 어떤 책이었겠는가. 당연히 '정치풍자'의 내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스스로 문명국이라 자랑을 늘어놓는 '영국 본토인'들에게 보란듯이 비판을 일삼았고, 때로는 비난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소설속 주인공 걸리버는 자신이 겪었던 여행담을 늘어놓으며 '강자'라고 떠세를 부리는 이들을 향해 무차별 풍자를 날리며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게 된다. 심지어 '말들의 나라'에서는 인간(야후) 자체를 부정하며 인간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낄 정도라고 야유를 보내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아동용'이라면서 왜곡했던 것일까? 그것은 '권력자'들이 하나 같이 무능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것에만 최선을 다했기에 <걸리버 여행기>를 '불편한 책'으로 여겼던 경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단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말이다.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가 마냥 재밌거나 통렬한 비판에 속시원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비판을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어내지 않으면 '주제'를 놓치기 십상인 책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주요 화자인 '걸리버'도 작가인 스위프트를 '대변'할 때도 있지만, 스위프트가 직접 '걸리버'를 비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비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따지면서 읽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영국의 역사'에 잘 모르면, 그 '비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인지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래서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위해 '영국의 역사'부터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영국의 역사 대신 '대한민국의 역사'나 '대한민국의 현실정치'를 대입하며 읽어나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으로 대입해서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정치풍자'는 만국 공통언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는 곳'은 달라도 '하는 짓'은 대개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치풍자는 어디까지 하면 좋을까? 사실 대한민국은 정치풍자 마저 '검열의 대상'으로 여기는 우스운 짓을 하기에 '풍자의 한계'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때 박근혜를 '마야의 그림'으로 풍자했다가 곤혹을 치룬 화가가 있었고, 지금 정권에서도 '윤석열차'로 대상을 수상하자 대회 자체를 박살(!) 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떳떳하지 못한 짓을 얼마나 많이 했길래 그 정도 풍자에 호들갑을 떤단 말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그저 허허 웃고 넘어갈 수 있잖은가 말이다. 그런데 질색팔색하는 꼴을 보면 뒤가 구리긴 구린 모양이다. 집회와 시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정말 한결 같다.

 

  한국인들 중에 한 사람이 걸리버처럼 여행을 떠난다면 어느 나라로 가게 될까? 소인국에 가면 '갑질'을 단단히 할 것 같고, 대인국에 가면 '비굴'의 끝판왕이 되어 나라도 팔아먹을 것 같고, 라푸타에 가면 '사이비 교주'로 등극해 라푸타를 침몰 시키고 말 것 같고, 휴이넘에 가면 야후 중에 야후가 되어 휴이넘의 분노를 사서 초강력울트라캡숑 뒷발질을 맞아 아구창이 너덜너덜해질 것만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짓'만은 절대 안 했으면 싶다. 지금 하는 멍청한 짓만으로도 나라꼴이 우스워져버렸는데 더욱더 호구짓을 하기 전에 휴이넘이 정의의 뒷발질로 그 입을 더는 놀라지 못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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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3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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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어야 할까? 자꾸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경이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공상과학(SF)소설의 원조라는 수식어를 읊어댄들, 결국은 '19세기 소설'이기 때문이다. 1800년대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세계일주를 80일 만에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지 몰라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나 이틀이면 지구 한바퀴쯤 돌고도 남으니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 '잠수함'으로 해저를 누비고 '우주선(대포알)'을 타고 달궤도를 돌아 귀환했다는 이야기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저 식상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어느 외딴섬에 표류하여 모진 고생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존한 뒤에 기적과 같이 고국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눈에 들어올 독자도 그닥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보다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이 얼마든지 있는 요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난 자꾸 쥘 베른의 소설이 끌린다. 뭐라 딱 꼬집어서 '이것'이 매력이라고 말하기 난감하지만 말이다.

 

  한편, 쥘 베른의 소설을 '아동용 소설'로 소개하기도 애매하다. 애초에 베른의 소설은 '아동'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았다. 물론, 출판사가 베른의 소설을 '축약'하여 호기심이 충만한 19세기 아이들에게 신비로운 이야기로 소개하기도 했다고는 전해진다. 또 이러한 전략이 20세기 아이들에게도 <소년소녀명작동화>로 만들어져 나름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아이들에게도 잘 먹히는 전략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그의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에는 21세기 과학기술이 너무 발달한 탓이고, 그의 소설이 너무 '장황한 나열과 설명'으로 이루어진 탓에 요즘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길더라도 '감동'이라도 진하게 전해질 주제를 담았다면 '교육용'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을텐데, 쥘 베른의 소설에는 '재미(흥미)'라는 요소 이외에 '교훈'이라고 할 내용이 거의 없다보니 요즘 아이들에게 소개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난 쥘 베른의 소설로 논술수업을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리곤 한다.

 

  왜냐면 쥘 베른의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의 창조자이면서 '모험소설'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쥘 베른의 업적은 평범한 소설가에 불과한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들어낸 결과물이 오늘날에는 '현실'로 실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다시 말해, 몽상가의 꿈이 현실로 가능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단 말이다. 거기에 아무리 극한 상황에 놓이고 험난한 위기에 닥치더라도 '인간'에게는 '이성의 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낼 수 있으며 끝내는 기적과도 같은 생환이 이루어지는 '낭만적인 모험담'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적 요소가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보다 해몽'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신비의 섬>은 총 3부작으로 쓰여졌다. 쓰여질 당시에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영감을 받아 '외딴섬'에 표류한 주인공들이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극적으로 귀환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그래서 '모험소설'의 교과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쥘 베른만의 독특한 양식인, (당시로서는 첨단이었을) '과학적인 설명'을 눈앞에서 실현하듯 생생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을 황홀(?)하게 만들고, 계몽사상을 충실히 실천하듯 '이성의 빛'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해내는 '문명의 힘'을 선보이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듯 대양 한복판의 외딴섬에 표류한 처지이면서도 '깃발꽂기'를 선보이며, 조국사랑의 실천과 애국적 행위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묘한 감동(자긍심(?)) 전해준다.

 

  이런 모험담을 성사시킨 5명의 개척자 또한 각자 나름의 매력을 선보이며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쥘 베른의 소설에서는 이렇듯 '강인한 신념'을 갖추고 '뛰어난 이성'으로 온갖 위기를 극복해낸다는 이상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오히려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반동적인 인물'이 너무 나약해 보일 정도다. 허나 쥘 베른의 소설에는 허약한 빌런(악당)보다 더 위험한 것이 등장하기 때문에 악당 따위는 등장하지 않아도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자연환경(비문명적 조건)'이다. 자연환경의 거대함은 그 앞에선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등장하곤 한다. <해저2만리>에서도 남극점 도달 직후에 빙하속에 갇힌 노틸러스호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에게 무한한 자원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던 링컨섬이 하루 아침에 화산섬으로 돌변해서 화산분화와 함께 송두리채 파괴되어 개척자들을 남태평양 한가운데도 날려버렸다. 그러나 쥘 베른은 그러한 '거대함' 앞에서도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죽음에 이르지 않게 만든다. 왜냐면 한없는 '인류애'를 갖추고 있는 마음씨 고운 이들을 신(하느님)께서 쉬이 거두어갈리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많은데 어딜 저승 문턱으로 들이겠느냔 말이냐는 듯이 말이다. 착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설정(해피엔딩)을 난 참 좋아한다.

 

  그런데 그 '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장황한 설명을 한다는 점이 쥘 베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해서 그 '장황함'을 빼버리면 주인공들이 왜 착한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빼기에도 그렇다. 다시 말해, 그렇게 길게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주인공들의 '매력'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의 리더격인 '사이러스 스미스'의 매력은 해박한 지식으로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를 '지상낙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의 이기를 누리게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은, 이를테면 그가 '과학지식'을 동원해서 그저 돌멩이에서 '철광석'으로 탈바꿈시키고, 그 철광석에서 뽑아낸 '순철'로, 필요에 맞게 '주철'을 만들고, '강철'로 제련해서,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를 척척 만들어 과정을 엿보아야만 알게 된다. 이런 예들을 수도 없이 많고, 그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히 개척자들이 집이 필요해서 집을 만들었다거나 새로운 먹거리를 구한 김에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안정적인 식량공급원을 마련했다는 내용인데,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한 지식이 총동원되어 자세하게 나열되었다. 그 덕분에 개척자들은 무인도에 불과한 섬을 불과 3년만에 '전신주'를 설치해서 통신장비까지 구축해 '문명생황'을 영위해 나간다. 만약, 그들이 더 오래 그 섬에 정착했더라면 '기차'를 비롯한 교통수단까지 마련해서 남태평양 한복판에서 '산업혁명'을 이룩하는 위엄을 뽐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현가능성'이 농후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결코 허무맹랑한 상상의 산물이 아님을 독자들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문에 19세기 몽상가들이 20세기에 위대한 과학자, 공학자 들로 거듭나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최첨단 기기를 만들어 해저를 정복하고, 우주를 항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난 이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을 우리 아이들의 필독서로 삼고 싶었다. 비록 읽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 '진면목'을 깨우치는 순간, 우리 아이들도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대한민국을 넘어 대양을 누비고 우주로 나래를 펼칠 게 아니냔 말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21세기에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꼰대스타일의 '설명충'의 지루한 설교를 읽고서 '몽상가'를 꿈꾸고, 21세기형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쥘 베른이 갖춘 위대함을 '압축'해서 숨겨진 진면목을 '단숨'에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책속에 담긴 '지식'을 '지혜'로 변환시켜주는 기계를 머리에 쓰고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면, 장황하기 짝이 없는 기나긴 설명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해서 핵심만 쏙 넣어주는 방식이 도입될 것이라는 상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이런 상상이 22세기에는 너무나도 식상하고 뻔한 내용의 지루함을 선사하게 된다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 듯한 '해몽'보다 '꿈'이 절실하다. 남들이 쌓아놓은 '기초과학'을 빌어다 실컷 '응용과학'의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젠 그런 혜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우뚝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쥘 베른'을 소개해야할 당위성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쥘 베른이 20세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설명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번뜩이는 아이디어(상상력)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쥘 베른의 소설속에서 '낡은 지식'을 뽑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떻게' 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들을 (전문가도 아니면서) 상상해 낼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을 배워야 한단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을 살더라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은 바로 '상상력'뿐이다. 그렇기에 선생인 내가 할 일은 바로 이 지루한 소설속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뿜어낼 수 있는 원천에 이르는 지름길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비록 꿈 같은 이야기고, 해몽에 불과한 소리일지라도, 선생이라면 반드시 꾸어야 할 꿈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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