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섬 3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어야 할까? 자꾸 이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경이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공상과학(SF)소설의 원조라는 수식어를 읊어댄들, 결국은 '19세기 소설'이기 때문이다. 1800년대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세계일주를 80일 만에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지 몰라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나 이틀이면 지구 한바퀴쯤 돌고도 남으니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 '잠수함'으로 해저를 누비고 '우주선(대포알)'을 타고 달궤도를 돌아 귀환했다는 이야기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저 식상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어느 외딴섬에 표류하여 모진 고생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존한 뒤에 기적과 같이 고국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눈에 들어올 독자도 그닥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보다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이 얼마든지 있는 요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난 자꾸 쥘 베른의 소설이 끌린다. 뭐라 딱 꼬집어서 '이것'이 매력이라고 말하기 난감하지만 말이다.

 

  한편, 쥘 베른의 소설을 '아동용 소설'로 소개하기도 애매하다. 애초에 베른의 소설은 '아동'을 위해서 쓰여지지 않았다. 물론, 출판사가 베른의 소설을 '축약'하여 호기심이 충만한 19세기 아이들에게 신비로운 이야기로 소개하기도 했다고는 전해진다. 또 이러한 전략이 20세기 아이들에게도 <소년소녀명작동화>로 만들어져 나름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아이들에게도 잘 먹히는 전략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그의 소설에 흥미를 느끼기에는 21세기 과학기술이 너무 발달한 탓이고, 그의 소설이 너무 '장황한 나열과 설명'으로 이루어진 탓에 요즘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길더라도 '감동'이라도 진하게 전해질 주제를 담았다면 '교육용'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을텐데, 쥘 베른의 소설에는 '재미(흥미)'라는 요소 이외에 '교훈'이라고 할 내용이 거의 없다보니 요즘 아이들에게 소개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난 쥘 베른의 소설로 논술수업을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리곤 한다.

 

  왜냐면 쥘 베른의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의 창조자이면서 '모험소설'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쥘 베른의 업적은 평범한 소설가에 불과한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들어낸 결과물이 오늘날에는 '현실'로 실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다시 말해, 몽상가의 꿈이 현실로 가능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단 말이다. 거기에 아무리 극한 상황에 놓이고 험난한 위기에 닥치더라도 '인간'에게는 '이성의 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낼 수 있으며 끝내는 기적과도 같은 생환이 이루어지는 '낭만적인 모험담'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적 요소가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보다 해몽'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신비의 섬>은 총 3부작으로 쓰여졌다. 쓰여질 당시에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영감을 받아 '외딴섬'에 표류한 주인공들이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극적으로 귀환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그래서 '모험소설'의 교과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쥘 베른만의 독특한 양식인, (당시로서는 첨단이었을) '과학적인 설명'을 눈앞에서 실현하듯 생생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을 황홀(?)하게 만들고, 계몽사상을 충실히 실천하듯 '이성의 빛'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해내는 '문명의 힘'을 선보이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듯 대양 한복판의 외딴섬에 표류한 처지이면서도 '깃발꽂기'를 선보이며, 조국사랑의 실천과 애국적 행위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묘한 감동(자긍심(?)) 전해준다.

 

  이런 모험담을 성사시킨 5명의 개척자 또한 각자 나름의 매력을 선보이며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쥘 베른의 소설에서는 이렇듯 '강인한 신념'을 갖추고 '뛰어난 이성'으로 온갖 위기를 극복해낸다는 이상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오히려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반동적인 인물'이 너무 나약해 보일 정도다. 허나 쥘 베른의 소설에는 허약한 빌런(악당)보다 더 위험한 것이 등장하기 때문에 악당 따위는 등장하지 않아도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자연환경(비문명적 조건)'이다. 자연환경의 거대함은 그 앞에선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등장하곤 한다. <해저2만리>에서도 남극점 도달 직후에 빙하속에 갇힌 노틸러스호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에게 무한한 자원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던 링컨섬이 하루 아침에 화산섬으로 돌변해서 화산분화와 함께 송두리채 파괴되어 개척자들을 남태평양 한가운데도 날려버렸다. 그러나 쥘 베른은 그러한 '거대함' 앞에서도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죽음에 이르지 않게 만든다. 왜냐면 한없는 '인류애'를 갖추고 있는 마음씨 고운 이들을 신(하느님)께서 쉬이 거두어갈리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많은데 어딜 저승 문턱으로 들이겠느냔 말이냐는 듯이 말이다. 착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설정(해피엔딩)을 난 참 좋아한다.

 

  그런데 그 '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장황한 설명을 한다는 점이 쥘 베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해서 그 '장황함'을 빼버리면 주인공들이 왜 착한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빼기에도 그렇다. 다시 말해, 그렇게 길게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주인공들의 '매력'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신비의 섬>에서도 개척자들의 리더격인 '사이러스 스미스'의 매력은 해박한 지식으로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를 '지상낙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의 이기를 누리게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은, 이를테면 그가 '과학지식'을 동원해서 그저 돌멩이에서 '철광석'으로 탈바꿈시키고, 그 철광석에서 뽑아낸 '순철'로, 필요에 맞게 '주철'을 만들고, '강철'로 제련해서,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를 척척 만들어 과정을 엿보아야만 알게 된다. 이런 예들을 수도 없이 많고, 그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히 개척자들이 집이 필요해서 집을 만들었다거나 새로운 먹거리를 구한 김에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안정적인 식량공급원을 마련했다는 내용인데,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한 지식이 총동원되어 자세하게 나열되었다. 그 덕분에 개척자들은 무인도에 불과한 섬을 불과 3년만에 '전신주'를 설치해서 통신장비까지 구축해 '문명생황'을 영위해 나간다. 만약, 그들이 더 오래 그 섬에 정착했더라면 '기차'를 비롯한 교통수단까지 마련해서 남태평양 한복판에서 '산업혁명'을 이룩하는 위엄을 뽐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현가능성'이 농후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결코 허무맹랑한 상상의 산물이 아님을 독자들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문에 19세기 몽상가들이 20세기에 위대한 과학자, 공학자 들로 거듭나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최첨단 기기를 만들어 해저를 정복하고, 우주를 항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난 이런 점에서 쥘 베른의 소설을 우리 아이들의 필독서로 삼고 싶었다. 비록 읽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 '진면목'을 깨우치는 순간, 우리 아이들도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대한민국을 넘어 대양을 누비고 우주로 나래를 펼칠 게 아니냔 말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21세기에 재미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꼰대스타일의 '설명충'의 지루한 설교를 읽고서 '몽상가'를 꿈꾸고, 21세기형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쥘 베른이 갖춘 위대함을 '압축'해서 숨겨진 진면목을 '단숨'에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책속에 담긴 '지식'을 '지혜'로 변환시켜주는 기계를 머리에 쓰고서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면, 장황하기 짝이 없는 기나긴 설명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해서 핵심만 쏙 넣어주는 방식이 도입될 것이라는 상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이런 상상이 22세기에는 너무나도 식상하고 뻔한 내용의 지루함을 선사하게 된다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 듯한 '해몽'보다 '꿈'이 절실하다. 남들이 쌓아놓은 '기초과학'을 빌어다 실컷 '응용과학'의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젠 그런 혜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우뚝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쥘 베른'을 소개해야할 당위성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쥘 베른이 20세기를 장황하게 설명한 '설명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번뜩이는 아이디어(상상력)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쥘 베른의 소설속에서 '낡은 지식'을 뽑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떻게' 해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들을 (전문가도 아니면서) 상상해 낼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을 배워야 한단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을 살더라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은 바로 '상상력'뿐이다. 그렇기에 선생인 내가 할 일은 바로 이 지루한 소설속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뿜어낼 수 있는 원천에 이르는 지름길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비록 꿈 같은 이야기고, 해몽에 불과한 소리일지라도, 선생이라면 반드시 꾸어야 할 꿈이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