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3
이우혁 지음 / 들녘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퇴마록 국내편 3 : 초치검의 비밀>  이우혁 / 들녘 (1994)

[My Review MMLX / 들녘 7번째 리뷰] 퇴마록 국내편의 완결은 바로 이 3권에 수록된 '초치검의 비밀'이었다. 국내 오컬트 장르 소설 가운데 가장 스케일이 크고 거대한 미스터리 속에 감춰진 비밀이 꺼내지면서 퇴마사들의 행보는 드디어 '국내'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쾌한 스토리로 전개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국내편 3권에 수록된 이야기는 '초치검의 비밀'을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밤은 그들만의 시간', '쌀', '그네'도 퇴마사들의 특색을 엿볼 수 있는 깔끔한 단편이며, 이런 단편 스토리를 빼놓지 않아야 '퇴마사들의 능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번에 '개개정판(반타)'이 출간되면서 <퇴마록>을 다시 읽는 분들이 많을 텐데, '개정판(엘릭시르)'과의 내용 차이는 크지 않지만, '초판(들녘)'과의 차이는 꽤 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미 '개정판'을 내놓을 때 대대적인 수정을 한 탓이 크지만, '초판'의 서술이 좀 더 '자세하다 못해 장황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개개정판'은 이야기 서술의 군더더기를 깔끔하게 걷어낸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편'에서는 딱 거기까지다. 내용상의 차이점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간혹 '문장'만을 걷어낸 것이 아니라 '문단'까지 덜어낸 경우도 눈에 띄긴 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읽는데 큰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많이 '축약'한 것은 없다. 다만, '초판'의 서술이 좀 더 '날 것, 그대로'인 느낌이 강하고, '거친 표현'도 많았기에 더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에 비해서 '개개정판'은 좀 더 단정하게 순화하여 '강렬한 전달력'이 좀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행을 밝히는 부분에서 좀 더 거칠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부분이 다소 차분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바뀐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주석 설명'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초판'의 주석에 비해서 '개개정판'의 주석은 분량부터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무튼, <초치검의 비밀>은 납량특집을 준비하던 신문기자가 '강화도'에서 발굴된 500구가 넘게 매장된 왜구의 시체를 취재를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엔 '시원한 여름맞이'를 위해서 등골이 오싹한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지만, 90년대만해도 극장가를 비롯해서 '안방극장'이라고 불리는 TV프로그램에서 '납량(오싹한) 특집'을 참 많이 했더랬다. 그래서 신문기자들이 이를 취재하기 위해서 강화도로 가는 도중에 엄청난 능력자들로 보이는 무리를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점점 고조된다. 현현파, 오의파, 그리고 청홍검을 든 여인이 등장하는 등등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강화도로 속속 모여들고 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는 도대체 누가 등장해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크게 살펴보면 '국내의 도인들'이 떼거리로 등장하고, '일본의 도인들'이 3명 등장하며, 거기에 우리의 퇴마사들이 참여한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퇴마사들이 참여했다고 말하는 까닭은 강화도에 모인 수많은 도인들은 '목적'이 분명하지만, 퇴마사들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결코 탐내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강화도에 모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초치검(일명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얻기 위해서다.

초치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책 <태평기>를 참고해야 한다. 그 책에 일본 남북조 시대를 마감했을 때, 남조의 천황이 북조의 천황에게 힘에서 밀려 패배하고 천황의 상징과도 같은 '삼종신기(야타의 거울, 구사나기의 검, 야사카니의 구슬목걸이)'를 품에 안고서 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까닭에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 이후에 일본 황실에 전해지는 '삼종신기'는 가짜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삼종신기'의 하나인 검을 천총운검(초치검)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퇴마록>에서는 이를 살짝 비틀어서 고다이고 천황이 죽고 '남조의 멸망'이 확실시 되었을 때, 부하 장수였던 미쓰마사에게 '초치검'을 맡기고 가짜 삼종신기를 들고서 자결했고, 미쓰마사는 '초치검'을 들고서 남조의 부활을 꿈꾸며 '한반도'로 향했고, 이곳 강화도에서 '초치검'과 함께 묻혔다는 설정을 하였다. 남조가 멸망할 당시가 1392년이고, 이 해에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한창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을 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인 것이다.

이처럼 '초치검의 비밀'은 역사적 개연성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라 읽다보면, 점점 더 이야기 속에 빠져들면서 읽게 된다. 먼 과거에 일본 남조의 부활을 꿈꾸고 한반도를 찾아와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하고 말이다. 더구나 현재 시점에서 일본의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도인 3명이 찾아와서 '초치검'을 차지하려 든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검을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미처 완수하지 못한 '일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꿍꿍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강화도에 잠들어 있는 500구의 왜구 시체를 깨워서 말이다. 도대체 왜구들이 강화도를 찾아온 까닭은 무엇이며, 500구의 해골이 가지런히 눕혀진 채 발굴된 것도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단순히' 도적질을 하려고 찾아온 왜구들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되어서 벌인 일이며,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해골들이 눕혀진 것을 보아서는 '집단 자살'이나 '의도된 할복'을 하고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벌인 계략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더구나 일본의 도인 가운데 '스기노방'이라 불리는 도인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한국의 혈자리를 찾아 기맥을 끊겠다면서 풍수적으로 좋은 기운이 모이는 곳을 찾아 '쇠말뚝'을 박는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었단다. 이런 짓을 저지른 위인들이 강화도를 찾아와서 '초치검'을 차지하려 드는 목적이 결코 순수할 리 만무하다.

이야기는 점점 고조되며 한국의 도인과 일본의 도인이 마주하며 싸우려는데, 일본 도인들이 암기와 독을 쓰면서 한국의 도인 가운데 상당수가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는 위험천만한 일을 당하게 된다. 동시에 500구의 왜구를 해골의 모습으로 살아나게 만들어서 한국의 도인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데, 드디어 퇴마사들이 나서며 500구의 왜구 시체들과 일본 도인 3명과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된다. 상대적으로 열세인 퇴마사들을 돕기 위해 박수무당인 철기옹과 '주기(붉은깃발)선생'이라 불리는 박상준이 퇴마사들을 도와 일본측과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게 참 볼만하다.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서 단군의 상징인 '천부인'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애초에 일본 무사 미쓰마사가 무인 500명을 데리고 '고다이고 천황의 검(초치검)'을 들고 한반도를 찾아온 목적이 바로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단군왕검을 상징하는 '천부인'을 탈취해서 일본 남조의 부활을 꿈꿨던 것을 밝혀내게 된다. 아니 일본 황실을 되살리는데 '한국의 징표'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건 다름 아니라 일본 황실의 조상이 한반도에 넘어간 신라 장수라는 '역사적 진실'이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천황가가 '백제의 유민'이라는 사실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빼앗긴 삼종신기'를 되찾을 길이 막막한 터에 '단군의 천부인'을 탈취해서 일본에 가져가면 이미 망해버렸던 '남조의 부흥'을 이룩할 수 있을 거라는 목적에서 벌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단군의 천부인'이 일본 황실의 '삼종신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일까? 힘에서 밀려서 '진짜 삼종신기'를 갖고 있었음에도 '가짜 삼종신기'를 소유한 북조의 천황가에게 자리를 빼앗겼는데, '진짜 삼종신기'도 아닌 '단군의 천부인'을 내세우면 남조의 부활이 가능하겠느냔 말이다. 14세기만 해도 일본에선 자신들의 천황가가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닥 숨길 까닭이 없던 분위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신라와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천황가의 주축'이었다면 삼국시대보다 앞선 '고조선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통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일본의 삼종신기, 더구나 북조에선 '가짜 삼종신기'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정품 단군의 천부인'을 탈취할 수만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으리란 설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면 '정품 단군의 천부인'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일본의 삼종신기'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신민(臣民)들은 '명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강한 힘'에 복종하는 습성이 뿌리 깊게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장수가 천황가를 일구었다는 사실만 봐도, 당시 일본의 무사 집단을 힘으로 굴복시킨 '신라 장수'가 일본의 오야붕으로 자리 잡고서 왕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인들이 '힘'이 아닌 '명분'을 중시했더라면 아무리 신라 장수가 일본을 정복한들 '왕'으로 받아들였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힘'에 복종하는 습성이 뿌리 깊었기에 '강한 자' 앞에서 철저히 머리 숙이는 관행을 시행했을 것이다. 그러니 북조의 힘에 밀려서 남조가 멸망했는데, 남조에서 살아남은 무사 하나가 '일본의 삼종신기'보다 우월한 '단군의 삼종신기'를 가지고 왔다고해서 머리를 조아릴 까닭이 없다. 그나마 '단군의 천부인'을 알아보고(?) 미쓰마사의 휘하로 '총집결'을 하는 무사 집단들이 무수히 많다면 어찌어찌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힘의 논리'에 민감한 일본인들이 '명분' 따위에 머리를 숙이고 구름처럼 모여들 것을 기대하기란 매우 힘들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이는 오늘날의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군국주의 시절'의 제국주의 서열(?)을 중시하거나 '경제대국 2위'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의 장,노년층은 여전히 '한류열풍'에 빠져든 일본의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는가 말이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한국보다 나은 일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여전히 한국을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애초에 '한국'에 뒤쳐진 일본의 현실을 받아들여서 '한국의 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은 이런 일본의 행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대등한, 서로 존중하는 자세로 일본을 대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움'은 오로지 한국인들의 몫이 되고 만다. 물론 단적인 예시를 들어서 풀이한 것이기에 100%의 모든 일본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체로 그런 습성이 있다고 알고 있으면, 일본인들을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초치검의 비밀'은 살짝 빗나간 결말을 맞게 된다. 애초에 일본인들이 '명분'을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9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며 경제성장이 하락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당시 일본의 경제력은 대한민국에 비해서 꽤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더욱더 실현가능성은 없었던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초치검의 비밀'을 읽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우리 한국이 일본을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때에 일본을 '힘'으로나 '명분'으로나 모든 면에서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뿌듯하고 당당한 느낌으로 <퇴마록 세계편>을 읽어나가면 퇴마사들의 행보 하나하나가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게 된다. 이제 세계로 나아가는 퇴마사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것이다. 커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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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서가명강 시리즈 37
천명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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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37] <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천명선 / 21세기북스 (2024)

[My Review MMLIX / 21세기북스 39번째 리뷰] 2005년 8월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재난이 발생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집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할 일이 생겼다.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워 놓은 둑이 터져버려 도시 안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기에 살기 위해서는 구조대의 손길을 받아들여 달랑 몸 하나만이라도 탈출을 해야 생존을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위험 상황 속에서도 42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민들이 대피를 하지 않았단다. 미처 난리를 피할 새도 없이 위험을 맞닥뜨려서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도 있었지만 구조대가 도착해서 피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집에 남기'를 선택한 38퍼센트의 주민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피난을 거부한 까닭으로 '반려동물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했단다. 왜냐면 구조나 대피시 '반려동물 동반 금지'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반려동물을 집에 홀로 남겨두고 자신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말에 공감한다면 당신은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공감하지 못한다면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첨예한 문제에 너무 이분법적인 구분이라 선택하기 힘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면 전세계 선진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대한민국은 동물애호에 관해서 7단계 등급 가운데 딱 '중간'인 4단계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동물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육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맛난 육식을 값싸게 즐기기 위해서 '공장식'으로 길러낸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완전 금지하는데 찬성하지는 못하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아직 '동물에 대한 인식'에 완전히 자유로운 접근을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편리한대로만 단편적으로 생각하는데 그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바람직한 것일까? 이 책에 따르면 '인간도 동물인가?'라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혹시 아직도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고서 모든 생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또는 인간이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생물들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엄청난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어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 동물들이 살고 있는 서식지까지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인간'에게만 이롭고,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있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처럼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냥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생물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생태계 파괴'를 지속시키면 우리 지구의 환경은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 자명하며, 그렇게 파괴된 환경 속에서 인간도 더는 살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걱정을 한다면 인간도 '동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생물의 다양성' 속에 인간도 포함시키고, '생태계 보존'을 위해서 인간도 동참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을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호주에서 있었던 일 두 가지를 예로 들겠다. 하나는 호주에 정착한 백인들이 '사냥감'으로 데리고 온 '토끼 24마리'가 초래한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영국인들은 '사냥'을 스포츠처럼 여기며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호주에서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 '토끼 24마리'를 방사했는데, '천적이 없는 환경'에서 토끼의 수가 급작스럽게 늘어나고 말았단다. 수가 늘어난 토끼들은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호주의 자연 생태계를 교란시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끼 사냥을 대대적으로 허용하고, 덫을 놓고, 독약을 사용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늘어난 토끼를 막기 위해서 무려 3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토끼 방제 울타리'를 설치해야 했단다. 그래도 늘어나는 토끼의 수를 감당하지 못해서 토끼를 살처분하기 위한 '바이러스 살포'까지 했지만, 그때 뿐, 얼마 안 가서 토끼는 엄청난 수로 불어나서 호주의 자연 생태계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단다. 이는 인간이 자연 생태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줌과 동시에 망가진 자연 생태계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어디 그뿐인가. 늘어나는 토끼를 감당하지 못하자 결국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은 심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와 충격, 그리고 공포를 느끼고 한동안 제대로 된 일상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증세에 시달리기도 했단다.

이래도 끔찍한 재앙에 대한 예로 부족했다면, 호주에서 벌어진 '최악의 산불'을 이야기하겠다. 2019년 6개월간 계속된 호주 산불은 '한반도 크기'의 임야를 송두리채 불태웠다. 주택과 건물 수천 채가 불탔고 33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산불로 인한 연기에 질식해서 사망한 사람만 수백 명이라고 한다. 여기에 56000마리의 가축이 미처 피하지 못해 불타 죽거나 강제 살처분 되었고, 12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단순히 숫자만 나열해서는 그 피해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한반도 전체가 불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겨우 사람만 살아남은 셈이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재건'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재건 비용은 또 얼마가 될 것이며, 당장 몸을 뉘일 곳은 어디며, 비와 바람, 더위와 추위를 피할 공간은 어디 있으며,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생계 수단'은 무엇으로 마련할 것이냔 말이다. 호주 산불의 원인이 바로 '심각한 기후 위기' 때문이라는 보고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로 확실시 되고 있으며, 만약 지구적인 재앙이 당장 찾아온다고 해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 모든 재앙의 시발점이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우리가 동물을 보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지 않고, 인간을 소중히 여기듯 동물도 똑같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주고 잘 대우해주어야 우리가 사는 지구가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수많은 동물들을 오로지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서 희생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은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하다. 왜냐면 인간의 생명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동물실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쓰는 '생활용품'서부터 끔찍한 질병으로부터 인류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신약 개발'이나 '백신 개발'에 인간을 대신해서 먼저 동물에게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동물실험'을 완전히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쉽사리 하지는 못한다. 물론 모든 동물실험이 인간에게 유용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밀어서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면 신약이나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 '인간 실험'을 하자는 얘기냐면서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AI 컴퓨터 발달로 인해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동물 실험을 대체하고는 있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동물실험'은 계속 진행중이다

이처럼 어쩔 수 없는 '희생'을 치뤄야 한다면 적어도 '예우'는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타도 만만치 않다. 왜냐면 모든 '동물 실험'이 인간을 대신해서 실험을 치르는 동물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하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을 한낱 '기계'로 치부하며 실험과정에서 겪는 동물들의 끔찍한 고통을 즐기듯이(!) 실험을 진행하는 냉혈한 같은 인간들도 아주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소한 적은 고통을 겪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고 그저 '망가진 기계'를 다루듯이 동물들의 생명을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하며, 그렇게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냉정한 '결과'만 채취해서 자신들의 업적 쌓기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약과 백신으로 인류의 생명을 구원한다는 숭고하고 위대한 공헌을 한다는 공명심에 사로 잡혀서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동물 실험을 거쳐서 만들어진 '일상 생활용품'과 '신약, 백신'을 공급 받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쓰고 있다. 머리를 감을 때 눈에 들어간 샴푸거품으로 따가워하며 서둘러 씻어내지만, 그 샴푸를 제조할 때에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도 안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토끼의 눈'을 강제로 벌리고서 새로 만든 샴푸를 들이붓는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그 과정을 거쳐서 성능은 좋으면서 사람의 눈에는 해롭지 않은 '신제품'을 우리가 쓰고 있는 셈인데, 토끼는 그 실험을 통해서 '실명'을 하고, 그대로 '살처분' 당한다. 그 실험용 토끼는 그런 용도로 사육되었다가 '쓰임새'를 다하고 나면 그냥 죽임을 당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게 '동물 실험'의 한 예다.

이 밖에도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에게 가하는 끔직한 행태는 너무나도 버라이어티하다. 이대로 계속 진행되어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인류가 '육식'을 금지하고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동물이 끔찍한 고통을 받는 것만큼이나 식물도 '살아있는 생물'이고, 동물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낀다고 하니까 말이다. 더구나 인간은 많은 양의 '단백질 섭취'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육식을 하는 것만큼 '고단백 선취'가 가능한 것도 없다. 그러니 인간은 '육식 식생활'은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다. '동물 실험'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을 해야 한다면 인간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 공간을 확보하고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개발을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인간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동물을 위한 일'로 귀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동물이 살 수 없는 지구라면 결국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동물에 대한 권리를 '별도의 특별한 권리'로 여기지 말고, 인간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처럼 동물들도 그런 권리를 누리며 함께 '공존'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동물애호가(?)들이 벌이는 '당신의 접시 위에서 벌어지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강도 높은 캠페인까지 동참하라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맛있게 즐긴 '육식'을 하면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이 아닌 드넓은 초원에서 맘껏 풀을 뜯고 뛰놀던 소, 돼지, 닭을 '최소한의 고통'을 겪을 방법으로 도축을 한 뒤에 식탁에 오르게끔 노력하자는 얘기다. 오직 '사육'을 위해서 좁디 좁은 우리에 갇혀서 살을 찌우기 위해 강제로 사료를 먹이고, 근육 증강제, 항생제를 과다 투여하고 난 뒤에 고기를 얻기 위해 도축을 할 때 '전기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는...그런 몰상식한 방식은 더는 쓰지 말자는 얘기다.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맛있는 고기'를 얻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동물'에 대한 인식부터 차근차근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 먼 과거에 비해서는 분명히 우리네 인식도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개고기 식용도 금지하고 있고, 반려견 인구는 점점 더 많이 늘고...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맞이할 끔찍한 재앙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지구 생태계 파괴를 멈추지 못한다면 지구는 그보다 더 끔찍한 재앙으로 인간에게 되돌려 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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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는 아이
안노 미쓰마사 지음, 황진희 옮김 / 한림출판사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  안노 미쓰마사(安野 光雅) / 황진희 / 한림출판사 (2019)

[My Review MMLVIII / 한림출판사 3번째 리뷰] 안노 미쓰마사는 20세기 일본의 미술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교육에도 크게 관심이 많아서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미술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교사를 그만 둔 뒤에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단다. 그가 그린 <이상한 그림책>(비룡소, 2006)은 '글자'가 하나도 없는 그림책으로도 유명하지만,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의 기법을 착안해서 그림책을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단다. 전쟁의 먹구름으로 암울했던 패전 뒤의 일본 어린이들에게 '교과서'조차 마련하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근거해서 참교육을 실현시키려 애쓰던 교육가로도 알려져서 일본에서는 꽤나 유명한 인물이며, 서양 미술계에서도 '일본의 거장'으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미술가이자, 교육가란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책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는 굉장히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교육적인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라 아쉽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글쓴이가 무려 1926년 생이라서 그렇다. 무려 100년 전 사람이 쓴 참신한 내용이라, 그가 주장하는 '어린이교육'에 대한 참신한 시선은 모를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를 만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어린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고이니, 어른들(특히, 선생님과 학부모)은 좀 빠져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나가는 즐거움을 익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배우고 익히는데 가장 좋은 학습법은 다름 아닌 '놀이를 통한 공부'라면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웃고 떠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주장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 아닌가?

문제는 그 방법이 정말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 그 방법으로 '최적의 학습법'을 터득해서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성장하기까지 성공한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대한민국 교육도 그렇지만 일본도 아이가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여유'가 없기로 유명하다. 나이가 차면 '학년'이 올라가야 하고, 학습역량이 부족한 학생이 있다면 '보충수업'이라도 해서 억지로 학습수준을 맞춰서 진학을 시키며, 공부 재능이 없는 학생은 교사도 포기(?)하고 그냥 조용히 지내다 졸업하기만을 기다리는(?) 불성실한 교육체계로 뭇매와 질타를 받기 일쑤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는 결코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거의 드물고 선천적으로 이미 터득하고 있는 천재가 아닌 이상, 스스로 학습법을 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갖기까지 제대로 된 학습방법은 없다시피한 게 안타까운 교육 현실이다.

왜냐면 교사나 학부모의 '학습 개입'이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아이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을 때도 아이가 그림 속에 푹 빠져서 헤엄을 치며 놀다가 '이건, 저기에서 봤던 거고, 저건, 여기에서 봤던 건데, 이런 원리가 담겨 있었구나'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전에, 선생님이 먼저 "여러분, 14쪽을 펼쳤나요? 거기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죠.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힌트는 바로 '물 속에 사는 동물'이에요. (3초 후) 모두들 찾았나요? 아직도 찾지 못했다면 그림책을 뒤집어서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찾았죠? 맞아요. 깊은 숲 속 그림인데 그 속에 '고래 한 마리'가 숨어 있었어요. 다 찾은 학생들을 위해서 모두 박수 짝짝짝! 자, 이제 다음 쪽에서 또 찾아볼까요?" 한정된 수업시간(40분 정도)에 2~30명이나 되는 학생들에게 똑같은 '학습진도'를 나가고, 똑같은 '학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란 것을 십 분 공감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학습법'을 터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가운데 몇 명이라도 이 수업을 한 뒤에 '그림책 속에는 우리가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미지의 지식세계'가 담겨 있으니 그걸 찾기 위해서 충분히 깊이 생각하는 공부습관을 들여야 해. 그리고 보는 시선에 따라서 잘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니까 '다른 시선'으로 보려는 시도도 충분히 해야지. 그럼 나중에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공부라는 건 정말 재밌는 거잖아ㅎㅎ' 이란 생각을 하는 어린이가 생기겠냔 말이다. 더구나 '공부가 재밌다'는 것까지 터득한다고? 정말 꿈 같은 일이다. 학부모들은 더 가관이다. '자기 눈(어른의 시선)'에 보이는 것을 아이가 찾으면 대만족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대실망'을 하면서 아이 앞에서 천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가 얼마 텀을 두지도 않고서 바보라고 근심걱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자녀들이 '스스로 학습법'을 터득하기도 전에 엄마의 예민함에 '경기'부터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엄마에게 혼난다는 '경험'만 잔뜩 길러주어서 자녀가 공부를 더 좋아하기는커녕 점점 더 싫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위인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성향을 보여주었다가 아니다. 대개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경우가 더 많고 어떤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평생을 그 일에 매진을 하다가 세계적인 위업을 달성한 위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맹신하여 소중한 제자나 자녀를 망쳐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하지 않길 바란다. 그나마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을 많이 겪었다는 점이다. 물론 '직접 경험'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비교적 짧은 어린 시절에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경험을 축척하려면 '독서(간접 경험)'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모든 어린이가 '위인'이 되지는 않지만, 세상의 모든 위인은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니다. 더구나 세계 명문가로 손꼽히는 집안에서는 '특별한 서재'를 갖추고 있는 경우도 참 많다. 어린 시절에 그 서재에서 온갖 영감을 얻었다가 어른이 되어서 특출난 업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위인전'에 소개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런 서재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토마스 에디슨의 경우에는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빌려다 읽었다고 소개하곤 한다. 특히 '에디슨 독서법'이라고 해서 A부터 시작해서 책장에 꽂힌 책을 순서대로 모두 읽어재끼는 독서법은 지금도 유명하기도 하다. 물론 현재는 너무 책이 많은 환경이라서 그리 권장하는 독서법은 아니지만 말이다.

암튼,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만드는 최적의 방법에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리고 '책 속의 정답'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학습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도 소개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늘날처럼 방대한 정보를 습득해야 하고 발빠르게 정보 처리를 해야하는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학습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을 던져주고서 스스로 터득하라는 것보다는 이 책에서 터득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야, 그것을 찾을 때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렴. 그렇게 터득한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저런 것들이 있단다. 흥미가 생긴다면 도전해보고, 아니면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보려무나..라면서 살짝 '지도(코칭)'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는 지식을 '암기'할 때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주기율표'를 외우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들 선보여주고, 굳이 외우지 않아도 '주기율표'를 효율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만 터득하게 해줘도 충분할 것이다. 구구단을 외운다고 '천재적인 수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내노라하는 수학천재들도 구구단을 못 외워서 '손으로 직접 곱셈 계산'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요한 것은 암기할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가 너무 좋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런 아이로 만들겠다는 '방법론'에는 여전히 교육자들마다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아이로 모두 만들면 참 좋겠지만, 100명의 학생들 가운데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성장할 아이는 10명 안팎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될 아이는 그보다는 많은 5~60명은 될 것이다. 나머지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남의 생각'을 이해하고 잘 따르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며, 극소수의 아이는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짓을 하는 어른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엉뚱한 짓을 하는 어른들이 '금전적인 성공'을 거둬서 대박인생을 사는 경우도 참 많은 것이 현실이니까 말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동일하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까닭이다. 우리는 '스스로 내린 생각'에 절대평가를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창의적인 생각'에 어떻게 점수를 매길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설령 '점수화'했다고 치더라도 그 점수를 제대로 공정하게 매겼다고 수긍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점수를 매기려면 '모범답안'을 마련해야 하고, 그 모범답안에 최대한 접근한 것에 높은 점수를 준다면, 그건 이미 '창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을 한 것이라면 모두가 긍정적으로 평가를 내려야 한다. 이미 알려진 지식이라 할지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스스로 생각하는 올바른 습관'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스스로 생각했는데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평가절하를 받는 경험을 겪게 되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점점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힘든 교육과정인 까닭에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가르친다고 포장하고서는 사실은 '공부 잘 하는 아이'로 만들려는 계획이었기에 그렇게나 집착하며 매달렸던 것이다.

이게 교육계의 딜레마인 까닭에 공교육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만드는 것은 살짝 방만하게 시행해도 괜찮다고 본다. 애초에 완벽한 '스스로 학습법'을 시행하고 평가할 수조차 없다면, 그런 간판을 내걸고서 '자율적'으로 공부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만들기로 작정했다면 사교육(과외)이나 가정학습에서 기대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면 '소수 정예'로 구성해서 자율적으로 학습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천차만별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개성에 알맞게 적절한 학습법의 '변형'을 허용할 수 있는 자유는 사교육과 가정교육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에 걸맞는 학습지도법을 통달한 전문가의 지도편달이 필수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글쓴이인 안노 미쓰마사 선생님도 공교육계를 떠나고 나서야 진정한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를 위한 그림책을 그리기 시작했단다. 아무래도 제약을 많이 받는 자리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학습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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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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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마스다 미리 / 이소담 / 이봄 (2017) [원제 : 今日の人生 (2017년)]

[My Review MMLVII / 이봄 15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가 '오사카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막상 '그 책'을 읽으니 도통 알 수 없는 내용으로만 담겨 있어서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 책을 읽고 나니 마스다 미리가 말하고 싶었던 '오사카 사람만의 특징'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뭐, 지금도 '오사카 사투리'랑 '표준 일본어'의 차이점을 알 수는 없지만, 도쿄 사람들은 '절대'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마스다 미리는 그녀의 책속에서 주야장천, 그야말로 줄기차게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오사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혼잣말처럼' 은근슬쩍 찔러(넛지) 넣는다는 것이다.

이걸 우리 식으로 굳이 바꿔서 이해를 돕는다면, 판소리에서 '소리꾼과 고수' 사이에 오고 가는 말과 행동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소리꾼이 소리를 하는 도중에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니리'와 '발림(너름새)'을 하면 고수는 이에 흥을 돋우기 위해서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다. 이걸 오사카 사람들은 '보케(웃기는 쪽)와 쓰코미(헛점을 찌르는 쪽)'를 한다고 마스다 미리는 말했다. 그래서 마스다 미리가 오사카 사람처럼 '순발력' 있게 보케와 쓰코미를 능숙하게 날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사카 사람이라면 '그런 정도'는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고, 적당한 상황이 오면 흥이 많고 정도 많은 오사카 사람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재미'를 즐기곤 한다는 식으로 그녀의 모든 책 속에서 은근슬쩍 '본심(혼네)'을 드러냈던 것이다. 뭐, 굳이 그걸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상관은 없지만, 그걸 이해하는 순간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들을 즐기는 폭이 무한해지게 된다는 것을 이 책 <오늘의 인생>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로 '나의 하루가 반짝하고 빛난다'는 문구를 달고 있다.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포착하여서 만화의 컷을 구성하였기에 '마스다 미리의 일기'를 몰래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비밀 내용이 담겨 있거나 하지도 않는다. 다만, 마스다 미리만의 반짝반짝하는 눈빛으로 우리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바로 이거다!' 싶은 것이 있으면 '만화컷'으로 쓱쓱 그려 내듯 술술 풀어내었기 때문에 '읽는 맛'이 상당히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심오한(?) 문제의식'은 다루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경험할 법한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크지 않은 행복을 캐치 하고 있고, '독신여성'이기에 느끼는 쓸쓸함과 그에 적당한 위로까지 '스스로' 챙기는 그녀의 배려심(?)에 적지 않은 위로를 얻기도 한다. 그렇게 쓸쓸한 존재인데도 얼마든지 사랑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던져주고 있긴 한데, 아쉬운 점은 개인적인 문제점에서 발단한 외로움과 서러움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사회문제'까지 왜 여성 혼자, 아니 늙어서 서러운데 '주변에 도와줄 남자 하나' 없는 존재이니 그런 거라고 매몰차게 질타당하는 것까지 마스다 미리는 홀로 극복하려 애를 쓰느냔 말이다. 그런 문제라면 '사회공론화'해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서 해결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은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공론화'를 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이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탓에 '사회불만'은 점점 치솟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그런 불만이 쌓여서 사회문제가 극단화 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끝내는 '극우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음모론'에 빠져 극우적인 정치세력에 몰표를 던지는 젊은이들이 증가 추세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회문제'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답답해 하다가 결국엔 '극우화'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혼자서 속앓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을 때면 늘 어둡다. 그 어둠 속에서 마스다 미리 홀로 반짝반짝 하고 있긴 하지만, 얼마나 외롭게 보이는지 아는가? 왜 혼자서만 그 짐을 다 지려고 하느냔 말이다. 당신의 책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희망'이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왜냐면 목소리를 냈으면 '외향적인 뿜뿜'이 있어야 하는데, 늘 '내향적으로' 삭히고 말기 때문이다. 30, 40대 독신여성이라도 당당히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겠느냔 말이다. 외쳐야 한다.

내가 이런 문제점을 느꼈어요! 우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지 않겠어요!!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하고 희망 찰 것 같아서요!!!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사랑 받기에 딱 좋은 오늘의 인생을 살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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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양장본) 오늘을 산다 2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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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2]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ヒトミさんの戀]

[My Review MMLVI / 새의노래 1번째 리뷰] 정말이지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는 차고 넘친다. 온라인 서점에서 단순검색하는 것만으로도 200개가 훌쩍 넘어가는 수를 자랑한다. 20여 년 동안 그녀의 책들이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더구나 대부분 '평점'도 높은 편이다. 가볍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일까? 30대 여성들의 고민을 대신 해준 덕분일까? 그렇지만 남자인 내가 읽었을 때엔 '문제의식'만 있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는 답답한 책이었다. 뭐랄까? 여자들의 수다를 세 시간 넘게 들으며 깔깔대고 웃고 떠든 느낌이랄까? 정말 재밌는 수다였는데, 정작 헤어지면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거지? 하면서 씁쓸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도 그랬다. 띠지에는 [기대도 없이 절망도 없이, 오늘을 산다'면서 마스다 미리 월드의 정수 <오늘을 산다> 시리즈 2편]이라고 적혀 있다. 기대도 없고, 절망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40살의 여성대표, 사와무라 히토미 씨의 삶'을 이렇게 적어 놓았던 것이다. 너무 부정적이지 않은가? 여자 나이 40살이 뭐 어때서 말이다.

앞서 '수짱 시리즈'나 '내 누나 시리즈', 그리고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 시리즈' 등에서 '30대 독신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성도 자기계발을 위해서 대학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해외연수도 다녀오고 그러면 취업도 늦어지고, 승진을 하기 위해서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를 미루다보면 '30대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흔한 요즘이라고 썰을 풀었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는 20대를 정점으로 찍고서 30대로 접어들면 무엇을 하든 '늦었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우울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것'을 두고서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부담'을 더해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몇 자 적기도 했는데, 마스다 미리의 책에서는 '부담'을 덜기는커녕 일본사회 전체가 여성의 늦은 결혼, 늦은 임신, 늦은 출산, 늦은 육아를 탓하는 것을 넘어 '싸움에 진 개(けんかに負けた犬)', [줄여서 '負け犬(마케이누)'라고도 함]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건 완전히 '인권모독'에 해당하는 언어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일본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고, 심지어 여성들끼리도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며 '20대에 결혼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짱도, 히토미도 자신을 '싸움에 진 개' 신세가 된 것에 우울감을 표현할 뿐, 이렇게 독신이 된 것에 대한 '사회문제'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몫', '여성의 몫'으로 전가하고 만 셈이다.

난 이게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여러 모로 검색해보니 일본의 정치가들은 '저출생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라는 썰을 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일본의 '초고령화 진입 시기'를 조금 늦추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는데, 이게 잘한 정책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이 이렇게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사회문제'를 완화(?)시킬 즈음, 대한민국은 초고속으로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말았다. 물론 우리 나라도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정치선동가들에 의해서 '젊은 여성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종종 벌어졌으나, 우리 여성들은 그따위 발언을 한 시키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발언'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마스다 미리의 책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양상이 참으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물론 몰상식한 일본정치가의 발언을 두고 마스다 미리 작가 한 사람을 탓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작가도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면,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뭔가 액션을 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만약 마스다 미리의 책에서 그런 발언을 찾았다면 '내 마음'에 쏙 드는 작가였을텐데 말이다. 그저 수다를 떠는 정도의 이야기꺼리로 '에피소드'화 시켜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뭐, 일본 사회 전체에 그런 '문제의식'이 공론화 되지 않는 이상에 굳이 그걸 문제로 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 싶다. 이 책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의 주인공인 '사와무라 히토미'는 40대 독신여성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다 보니 결혼적령기를 놓쳐 버렸고, 직장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지만, 남자직원에 비해서 '승진'이 빠른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남자직원의 '보조역할'에 만족하는 '오피스레이디(OL)'의 삶으로 만족하고 있나? 이야기 속에서 히토미의 아버지 사와무라 씨는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것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70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40대 독신여성의 삶에 자조 섞인 뉘앙스만 잔뜩 담아 놓은 내용을 읽으며 '행복'을 말한다면, 그 일상에 충분히 공감할 젊은 여성들, 그리고 히토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또 얼마나 공감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50대 독신남성'으로 접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대'를 품고 살고 있으며, '절망'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연애나 결혼이 거의 불가능한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기대'를 접지는 않았다. 비록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쓸 정도로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적어도 '나이'보다는 젊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그런 덕분에 '기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무슨 일이든 의욕적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그 때문에 '절망' 따윈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는가? 그 절망감은 오히려 30대에 더 컸다. 흙수저로 재산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인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계층사다리를 올라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릴 때가 더 많을 때에 '절망감'이 절정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 30, 40대를 지나고 나니, 오히려 삶을 즐기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운'이 찾아오지 않은 아쉬움은 털어버리고 내 주위에 널려 있는 '행복'을 찾아내어 만족한 느낌을 얻는 지혜였다.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면 묘한 '동질감'을 느낄 때도 있다.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또래'가 주는 그런 느낌 말이다. 같은 세대를 살았구나 싶은 그런 느낌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좀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데, 너무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인물들의 묘사가 가득해서 마뜩찮다. '그걸 굳이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싶은 대목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일본어에는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참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걸 좋게 표현해서 '배려심이 많다'고도 하는데, 그건 너무 피곤하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넌 그게 문제니까 좀 고쳤으면 좋겠어"라고 지적을 해줘야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분명히 잘못하고 있고,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그걸 '직접적'으로 지적으로 하면 기분 나쁠테니까 좋게 좋게 돌려서 말을 하면, 어느 세월에 문제를 고쳐서 더 나은 사회가 되겠느냔 말이다. 일본인들끼리는 그렇게 돌려서 말을 해도 잘 알아들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소리도 자주 하던데, 그렇게 잘 알아 듣는 것 같지도 않다. 정작 '외부의 쓴소리'에는 귀를 닫고서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이 더 많으니 하는 소리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이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에서는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약자에게 허리를 펴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미덕이고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논리에 순종하는 모습에서 나는 '행복'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뭐 그리 심각하게 읽느냐고? 성평등시대에 '사회적 약자'인 여자가 남자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야만 '여성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히니까 하는 소리다. 이건 안 될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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