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양장본) 오늘을 산다 2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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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2]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ヒトミさんの戀]

[My Review MMLVI / 새의노래 1번째 리뷰] 정말이지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는 차고 넘친다. 온라인 서점에서 단순검색하는 것만으로도 200개가 훌쩍 넘어가는 수를 자랑한다. 20여 년 동안 그녀의 책들이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더구나 대부분 '평점'도 높은 편이다. 가볍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일까? 30대 여성들의 고민을 대신 해준 덕분일까? 그렇지만 남자인 내가 읽었을 때엔 '문제의식'만 있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는 답답한 책이었다. 뭐랄까? 여자들의 수다를 세 시간 넘게 들으며 깔깔대고 웃고 떠든 느낌이랄까? 정말 재밌는 수다였는데, 정작 헤어지면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거지? 하면서 씁쓸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도 그랬다. 띠지에는 [기대도 없이 절망도 없이, 오늘을 산다'면서 마스다 미리 월드의 정수 <오늘을 산다> 시리즈 2편]이라고 적혀 있다. 기대도 없고, 절망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40살의 여성대표, 사와무라 히토미 씨의 삶'을 이렇게 적어 놓았던 것이다. 너무 부정적이지 않은가? 여자 나이 40살이 뭐 어때서 말이다.

앞서 '수짱 시리즈'나 '내 누나 시리즈', 그리고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 시리즈' 등에서 '30대 독신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성도 자기계발을 위해서 대학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해외연수도 다녀오고 그러면 취업도 늦어지고, 승진을 하기 위해서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를 미루다보면 '30대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흔한 요즘이라고 썰을 풀었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는 20대를 정점으로 찍고서 30대로 접어들면 무엇을 하든 '늦었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우울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것'을 두고서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부담'을 더해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몇 자 적기도 했는데, 마스다 미리의 책에서는 '부담'을 덜기는커녕 일본사회 전체가 여성의 늦은 결혼, 늦은 임신, 늦은 출산, 늦은 육아를 탓하는 것을 넘어 '싸움에 진 개(けんかに負けた犬)', [줄여서 '負け犬(마케이누)'라고도 함]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건 완전히 '인권모독'에 해당하는 언어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일본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고, 심지어 여성들끼리도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며 '20대에 결혼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짱도, 히토미도 자신을 '싸움에 진 개' 신세가 된 것에 우울감을 표현할 뿐, 이렇게 독신이 된 것에 대한 '사회문제'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몫', '여성의 몫'으로 전가하고 만 셈이다.

난 이게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여러 모로 검색해보니 일본의 정치가들은 '저출생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라는 썰을 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일본의 '초고령화 진입 시기'를 조금 늦추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는데, 이게 잘한 정책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이 이렇게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사회문제'를 완화(?)시킬 즈음, 대한민국은 초고속으로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말았다. 물론 우리 나라도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정치선동가들에 의해서 '젊은 여성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종종 벌어졌으나, 우리 여성들은 그따위 발언을 한 시키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발언'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마스다 미리의 책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양상이 참으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물론 몰상식한 일본정치가의 발언을 두고 마스다 미리 작가 한 사람을 탓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작가도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면,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뭔가 액션을 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만약 마스다 미리의 책에서 그런 발언을 찾았다면 '내 마음'에 쏙 드는 작가였을텐데 말이다. 그저 수다를 떠는 정도의 이야기꺼리로 '에피소드'화 시켜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뭐, 일본 사회 전체에 그런 '문제의식'이 공론화 되지 않는 이상에 굳이 그걸 문제로 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 싶다. 이 책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의 주인공인 '사와무라 히토미'는 40대 독신여성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다 보니 결혼적령기를 놓쳐 버렸고, 직장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지만, 남자직원에 비해서 '승진'이 빠른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남자직원의 '보조역할'에 만족하는 '오피스레이디(OL)'의 삶으로 만족하고 있나? 이야기 속에서 히토미의 아버지 사와무라 씨는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것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70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40대 독신여성의 삶에 자조 섞인 뉘앙스만 잔뜩 담아 놓은 내용을 읽으며 '행복'을 말한다면, 그 일상에 충분히 공감할 젊은 여성들, 그리고 히토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또 얼마나 공감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50대 독신남성'으로 접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대'를 품고 살고 있으며, '절망'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연애나 결혼이 거의 불가능한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기대'를 접지는 않았다. 비록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쓸 정도로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적어도 '나이'보다는 젊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그런 덕분에 '기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무슨 일이든 의욕적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그 때문에 '절망' 따윈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는가? 그 절망감은 오히려 30대에 더 컸다. 흙수저로 재산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인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계층사다리를 올라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릴 때가 더 많을 때에 '절망감'이 절정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 30, 40대를 지나고 나니, 오히려 삶을 즐기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운'이 찾아오지 않은 아쉬움은 털어버리고 내 주위에 널려 있는 '행복'을 찾아내어 만족한 느낌을 얻는 지혜였다.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면 묘한 '동질감'을 느낄 때도 있다.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또래'가 주는 그런 느낌 말이다. 같은 세대를 살았구나 싶은 그런 느낌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좀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데, 너무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인물들의 묘사가 가득해서 마뜩찮다. '그걸 굳이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싶은 대목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일본어에는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참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걸 좋게 표현해서 '배려심이 많다'고도 하는데, 그건 너무 피곤하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넌 그게 문제니까 좀 고쳤으면 좋겠어"라고 지적을 해줘야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분명히 잘못하고 있고,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그걸 '직접적'으로 지적으로 하면 기분 나쁠테니까 좋게 좋게 돌려서 말을 하면, 어느 세월에 문제를 고쳐서 더 나은 사회가 되겠느냔 말이다. 일본인들끼리는 그렇게 돌려서 말을 해도 잘 알아들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소리도 자주 하던데, 그렇게 잘 알아 듣는 것 같지도 않다. 정작 '외부의 쓴소리'에는 귀를 닫고서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이 더 많으니 하는 소리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이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에서는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약자에게 허리를 펴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미덕이고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논리에 순종하는 모습에서 나는 '행복'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뭐 그리 심각하게 읽느냐고? 성평등시대에 '사회적 약자'인 여자가 남자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야만 '여성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히니까 하는 소리다. 이건 안 될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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