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7 : 인간은 타고난 거짓말쟁이다 - 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정재승 기획, 정재은.이고은 글, 김현민 그림 / 아울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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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뇌과학 프로젝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 7 : 인간은 타고난 거짓말쟁이다>  정재승 / 정재은, 이고은 / 아울북 (2021)

[My Review MMLXXXVII / 아울북 32번째 리뷰] '뇌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철학과 과학의 난제가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던 심리학자들이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정신분석학을 진정 과학답게 풀어내어 '인간의 심리'도 뇌의 영역에서 풀어내기 시작했고,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던 과학자들도 '인간의 뇌'가 신체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혀내면서 '인공지능(AI)의 실현'을 해내면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이렇게 뇌과학은 오늘날의 여러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고,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에게도 '과학의 신비'를 간접적이나마 체험해주려는 목적에서 이 책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뇌과학'을 들여다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뇌과학'의 최신 소식을 접하며 일상에서 낯설지 않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서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보이는 '행동 패턴'마저 뇌과학적 접근으로 해설을 덧붙이는 이야기를 늘상 접했기 때문에 크게 낯선 내용도 없는 편이다. 이번 7권의 주제도 '인간의 거짓말'에 관한 내용인데, 인간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면서 '거짓말을 잘 하는 인간 집단'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간 집단'보다 훨씬 더 생존률이 높다는 결과치만 보더라도 거짓말을 잘 하도록 인간이 발달하게 된 까닭을 알 수 있다는 정보를 쉽게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뇌과학'이 얼마나 깊숙이 우리 일상에 적용되고 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그러니 '뇌과학'이라는 이름만 듣고서 겁을 먹고 어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편, <정재승의 인간 탐구 보고서>는 '아우레'라는 외계 행성에 살고 있는 아우린(아우레 사람)이 황폐해진 행성을 대신해서 살기 좋은 행성을 찾다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 행성에 정착해서 살기 위해 찾아왔다가 '인간 탐구'를 시작했다는 줄거리를 선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인간 탐구의 객관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 외계인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단지, 어린이 독자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한 흥미로운 이야기꺼리를 삽입한 거라고 보면 좋겠다. 딴에는 '뇌과학'에 대한 정보에 더해서 칼 세이건이 주창했던 'SETI프로젝트'를 다룬 '천문과학' 정보를 다루고 있다고 보면 좋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이게 '이질적인 요소'로 다가와서 몰입을 방해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억지로 이해하자고 한다면 '지적인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와 '인간 탐구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간 탐구에 관한 객관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외계인의 존재가 확인된 바가 없는 현실에서 '인간 탐구의 객관성'을 다루어봤자,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성'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닥 신빙성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외계 종족이 자신들이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심심하면 '인간 제거'를 운운하고 있는 내용이 하릴없는 '외계인 공포심'만 부추기는 것 같아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암튼, 인간은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 하는 것으로 상당한 이득을 얻는 생물이라는 것이 이번 책의 주제다. 다른 생물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데 반해, 인간은 왜 거짓말을 잘 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일까? 물론, '언어체계'가 발달한 생물도 지구상에 '인간'이 유일한 탓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따로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도 남을 속이는 것(거짓)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 나쁜 행동을 능숙하게 잘 하는 인간 집단만 고도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과연 왜 그럴까?

물론, '나쁜 의도'로 하는 거짓말을 잘 한다면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해서 잘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좋은 의도'로 거짓말을 능숙하게 잘 한다면 이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예쁜' 아내가 '맛있는' 아침을 해줘서 '기분 좋게'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선의의 거짓'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한 침대에서 일어난 아내의 몰골(!)이 예쁠 리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대충 차린 아침밥이 일류 요리 뺨치게 맛있을 리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헝클어진 머리에 눈곱도 떼지 않고 손도 대충 닦은 채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준비한 '아내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차려줬다면 '위대한 아내'라고 추켜세워도 모자를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노력하고 애쓴 아내가 예쁘지 않고, 그런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이 맛 없을 리도 없는 셈이다. 그렇기에 '선의의 거짓말'은 좋은 의도로 한 거짓말이고, 비록 '거짓말'이길 하지만 절대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 인간은 이런 고도의 언어체계를 갈고 닦은 생물로 진화했다. 그리고 지능적으로도 '선의의 거짓말'을 기본 장착한 인간 집단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 반대의 인간 집단이 있었더라도, 그 집단은 곧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쁘지도 않은 아내가 맛 없는 아침밥을 차려줄 리도 없으니 쫄쫄 굶거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인간 집단은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일의 성과도 형편 없어서 '절멸의 수순'을 밟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짓말' 하나에도 뇌과학적 이야기꺼리가 충만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 책에는 그런 알찬 정보들이 가득하다. 어린이책이지만 부모가 먼저 읽고 자녀에게 권해줘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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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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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 강대진 / 민음사 (2009) [원제 : Oidipous tyrannos]

[My Review MMLXXXVI / 민음사 25번째 리뷰] 읽을 때마다 '처음 읽은 듯' 새로운 느낌을 받는 것은 <고전>이 주는 선물 같다. 이전에는 '같은 책'이지만 '다른 출판사'이기 때문에 드는 느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는데, 그보다는 '읽고 또 읽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쌓는 경험(혹은 연륜)이 크게 작용하는 듯도 싶다. 왜냐면 출판사까지 같은 '동일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기 때문이다. 왜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을, 이번에는 느끼게 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간에 쌓은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암튼, 지난 번에 읽은 <오이디푸스 왕>(이미영/별글)에 이은 '민음사' 버전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다.

이 책의 뒤친이 '강대진'의 해석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왕>은 일종의 '수사극(추리물)'으로 짜여졌다고 한다. 희랍(그리스) 테바이에 돌고 있는 역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밝히는 과정이, 마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명탐정이 단서를 찾고, 증거를 모아서 최종적으로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외치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란다. 그 과정에서 테바이의 이전 왕이었던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가, '내(오이디푸스)가 그 범인인가?로 바뀌고, 끝에는 '나(오이디푸스)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되었단다.

이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까닭은 '독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친부가 라이오스 왕이고, 우연한 사고(피할 수 없는 운명)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잠시 잠깐의 화를 참지 못하고 살해를 저지르기 때문에, 사건 자체의 '비극성'보다 정해진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애'가 더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수사극'이라는 느낌을 덜 받게 된다. 애초에 범인이 누구인지 다 아는 마당에 무슨 '추리'를 하려 든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서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하지만 극중 인물인 '오이디푸스'는 다르다. 그는 코린토스를 떠나 테바이로 가는 도중에 '스핑크스가 낸 문제'를 풀어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는 일을 겪는다. 다시 말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사건의 해결자'가 된 셈이다. 그리고 테바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결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에 '임금이 비운 자리'를 꿰어차고 임금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서 맞이한 '새로운 문제'는 바로 테바이를 급습한 정체 모를 역병(전염병)을 막아내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밝혀내려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이 어릴 적에 받았다는 '신탁(운명)'을 피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정해진 운명'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비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많은 독자들이 '필멸자의 숙명'이고,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라는 주제에 꽂히고 만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이 꼭 비극인 것만은 아니다. 필멸자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마주할 용기를 짜내어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찔러 앞 못보는 봉사가 될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다 지은 죄를 달게 받기 위해서 '고행'을 스스로 자초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는 약해 빠진 필멸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신이 정해준 운명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두 발로 걸어 나아가며 '자신이 지은 죄값'을 톡톡히 치르겠다는 다짐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을 보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질 용기가 있는 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한편, <안티고네>는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적 성격으로 읽어내는 맛이 톡톡한 작품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국가가 정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전통적, 관습적으로 지켜온 도덕'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따져보는 맛도 쏠쏠하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정해진 법대로 따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법정의'가 무너지고 법의 형평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맹목적인 법치주의'는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는 사실을 '12·3비상계엄사태'부터 '윤석열탄핵'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국가가 정한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의롭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시 말해,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고 사법을 악용하려 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일들이 '민주주의'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던지라 정말이지 식겁한 사태였다.

그에 맞선 '안티고네'는 인간이기에 마땅히 해야만 할 도리를 따른다는 논리가 얼마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국가가 정한 명령(법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정의롭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법률'이라면 법에 저촉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떤 걸림돌이 있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행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다행히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은 '비상계엄'이 부당한 것임을 잘 알고,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을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극우주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극한의 갈등은 전쟁까지 불사하고, 강대강 대치에서 한발짝이라도 물러서면 패배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끝장 날 때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키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대원칙을 위해 서로 양보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티고네>의 결말을 보면, 모두가 죽는다. 오직 한 사람 독재자처럼 굴었던 크레온만 빼고 말이다. 그는 '안티고네'가 자신이 정한 법을 어기자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지만, 종국에는 크레온 자신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크레온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으면 '악인'이 달게 받는 죄값이라며 고소해 하기라도 했을텐데, 크레온은 뒤늦게 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안티고네'에게 내린 형벌을 수습하려 들었지만, 너무 늦은 탓에 더욱 끔찍한 참극을 겪게 된 셈이다. 어쨌든 대부분 '강대강의 대치'는 대개 이런 죄값을 치르게 하고, 참극을 면치 못하게 만들곤 한다. 더구나 전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라고 해서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러우전쟁'이나, '이팔전쟁', '미국vs이란' 가운데 러시아의 푸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가 승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을까? 그들의 결말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 말썽을 부려놓고도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이다. 그리고 그들이 벌여놓은 짓으로 인한 '후폭풍'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작게는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큰 폐해를 남기고, 크게는 전 지구적인 참극을 남겨 놓을 것이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런데도 어찌하며 고집불통인 권력자는 계속 나오는가? 이는 권력의 속성이 '잘못'을 인정하면 권력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도, 크레온도 똑같이 '자기 잘못'을 제 때에 시인하지 않고, 고치려 들지 않았기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권력자들은 처음엔 인지하지 못해 잘못을 고치지 못했더라도, 인지한 뒤에도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시인하는 순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장을 본다. 어차피 스스로 내려가나, 끌려서 내려가나 '똑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결코 똑같지 않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순간 '두 눈을 찌르는 형벌'을 스스로 내리고 권좌에서 내려와 한 사람의 죄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이디푸스 왕을 동정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테바이 사람들이 역병에 시달리고 죽음을 당했지만, 결코 오이디푸스 왕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그건 정해진 운명으로 인한 비극이었고, 인간 오이디푸스는 왕의 위치에서 테바이 국민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크레온은 조국을 지켜낸 영웅을 떠받들고, 외국 군대를 몰고온 배신자를 처벌하는게 공정하다고 믿고 강행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법을 어긴 백성에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고압적이고 강제적인 처벌만 고집하다가 결국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만 비극의 장본인이 되었다. 이런 크레온을 두둔하는 이들이 있었을까? 법치주의를 수호한 위대한 영웅이라고 떠받드는 이들이 있었느냔 말이다. 적어도 크레온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도한 권력자의 비참한 결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아이아스>와 <트라키스 여인들>은 임팩트가 그닥 남지 않은 작품이었다. 아이아스는 굽힐 줄 모르는 영웅적 기질을 잘 보여주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닥 인기 있는 영웅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맞추지 못한다면 '자신을 소멸'시키는 쪽으로 선택하는 모습이 너무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안티고네'는 도덕적인 전통에 따라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했기에 많은 이들에게 정당성이라도 얻었지만, 아이아스는 자신이 영웅인데 '영웅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역정을 내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버리는 버리고 말았기에 공감대가 좀 떨어졌다. <트라키스 여인들>에서는 정말 유명한 헤라클레스가 등장해서 눈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영웅적인 모습의 헤라클레스보다는 광기에 빠진 모습만 보이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에 그닥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이라네이라'는 공주 신분인데도 '헤라클레스의 아내' 역할로 만족하고, 능동적이지 못한 수동적 모습만 연출하다 끝내 파멸하고 마는 인물로 등장해서 실망이 컸다.

나는 <고전>을 읽을 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며 읽기보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까닭을 밝히는 쪽으로 읽으려 노력한다.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도, 그 안에 잠재된 '권위'와 '명성'에 잠식 당해서 '과거의 고찰'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오늘날의 독자들이 굳이 '낡은 작품'을 귀한 시간을 내어 읽을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전>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는 느낌으로 읽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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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 현실 편 : 철학 / 과학 / 예술 / 종교 / 신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2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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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 현실 편 / 철학 / 과학 / 예술 / 종교 / 신비>  채사장 / 웨일북 (2020) [개정판(초판 2015/한빛비즈)]

[My Review MMLXXXV / 웨일북 2번째 리뷰]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땐, '너무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정말 괜찮은 책이었다. 그래서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정독'을 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쉽고 재밌는 책이라 '정독'도 정말 휘리릭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소개하자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소개한 '책의 내용'이 이미 '축약본'인 탓에 더 간단하게 줄여서 요약하는 것이 만만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 책을 쓴 목적이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을 알아보자는 것이기에, '한 편의 리뷰'를 쓰는데에도 똑같은 '분량'이 필요할 지경이었기에, 도저히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남길 자신이 없었다. 이미 완벽한 축약본이고 친절한 요약본인데, 뭘 더 어떻게 설명하라는 말인가?

그런 책들을 리뷰할 때에 종종 써먹던 방법이 책의 내용에 대한 '딴죽'을 걸고 이래 저래 요래 물고 늘어지며 '억지 춘향'격으로 글을 쓰기도 했었는데, 적어도 이 책 만큼은 그런 리뷰를 사양하고 싶었다. 왜냐면 정말 감동적일 정도로  유용하게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고로 훌륭한 교양서적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적으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지식인으로 인정한다. 어디 인문학 뿐인가. 과학과 수학에도 통달했고, 거기에 종교와 신비까지 웬만한 전문가 수준으로 썰을 풀어놓고 있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대개 어느 한 가지 분야에 정통하게 되면, '다른 분야'는 좀 약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데 말이다. 암튼 이런 책이 1권과 2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0권'과 '무한'까지 두 권 분량 내용이 더 있다는 점만 인지하고, 굉장히 부족한 실력이지만 감히 손가락을 놀려 보려 한다.

나는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을 갖추고 있는 논술쌤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딱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절대불변의 진리는 없다.] [따라서 정답도 없다]는 것이 또 다른 하나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린 왕자>의 주제는 이것이고, <데미안>은 이렇게 해석해야 맞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절대불변의 진리가 없는데, 어떻게 <어린 왕자>의 주제를 딱 이것만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미안>을 해석하는 것에도 '모범답안'은 있을 수 없다. 이 해석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에 타당한 근거를 찾아 증명하면 된다. 저 해석이 더 그럴 듯 하다면 역시나 적절한 근거를 내놓으면 그뿐이다. 모든 독자들이 <어린 왕자>와 <데미안>을 읽으면서 똑같은 '감동'을 얻고, 교과서에 실릴 법한 '교훈'만을 달달 외워야 한다면, 굳이 힘들게 읽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해답지'를 읽는 것이 '시간 낭비'를 막고, '시험 점수'도 더 높게 받을 수 있으니,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원작'을 읽으려 들지 말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러면서 저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비교분석하게 하며 '독서토론'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선으로 다채롭게 주제를 끄집어 내도록 '배경지식'을 다양하게 풀어놓곤 한다. 물론, 선생인 나조차도 누구나 알 법한 주제가 아닌 '독특하고 신선한 접근'으로 내놓은 엉뚱한(?) 주제를 내놓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 방법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인생책'으로 꼽을 정도로 감명 받았던 여학생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키다리 아저씨'를 고아 출신인 순진한 여고생을 꼬드겨 원조교재(?)를 한 나쁜 남자일 수도 있다. 그러니 '동화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일 수 있지만, '현실속'에서 키다리 아저씨 같은 늙다리가 너희들에게 접근한다면 의심부터 해야 한다. 현실에선 '공짜' 좋아하다 패가망신 당하기 딱 좋다면서 썰을 풀었더니, 해당 여학생이 수업중에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동심'을 파괴한 나쁜 선생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키다리 아저씨>를 '잔혹 동화' 버전으로 읽는 것이 전혀 쌩뚱 맞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런 접근이 아닌 진지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애초에 '진리 탐구'가 모든 학문의 목적인데, 그런 '진리'를 애초부터 부정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란 절대불변,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한다는데 동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불변이라는 '진리'가 정치나 경제, 그리고 역사, 문화 등등 다양한 시선으로 볼 때마다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이를 테면, 원시 시대의 진리는 '자연, 그 자체'였으나, 고대 시대로 넘어가면 '신화'로 모습을 바꾼다. 중세로 넘어가면 '유일신'으로 제법 진리에 가까워졌으며, 근대로 넘어오면서 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역부족하자 진리는 '이성의 빛'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특히, '수학, 물리학, 철학'이란 학문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의 빛'도 현대로 넘어오면서 흔들리게 된다. 절대불변의 '신학' 체계를 넘어 보편타당한 '이성' 체계로 진리를 밝혀나가다보니, 이성으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한계'와 '불가능성'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학에서는 '불완전성 정리', 물리학에선 '불확정성 원리, 철학에서는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라고 일컫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조차 '절대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회의주의'로 바라볼 때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학문마다 진리는 모습을 바꾼다. 하지만 진리의 모습을 명철하게 파헤치다 보면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 점만 추려내며 '학문의 체계'를 갖춰나가면 위대한 인류의 지적 보고가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지식은 결국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새로운 학문이 그 진리를 '또 다른 모습'으로 선보여주며 새롭게 정리한다. 그렇게 한계를 극복한 '진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시대를 주름잡게 된다. 이런 수준의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정말 대단한 '교양인'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더 높고 깊은 '진리'를 탐구한다면 석사나 박사와 같은 '전문가'로 대우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지적 대화'는 왜 나눠야만 하는가? 그냥 심심풀이로 괜찮은 '수다'만 떨어도 충분하지 않은가?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 대화'가 아닌, '수다'로 만족하고 살아가지 않느냔 말이다. 왜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수다만 떨면서도 얼마든지 삶을 살아가고 일상을 즐길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수다만으로는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 나쁜 의도를 감추고 퍼트린 '가짜 뉴스'를 접하고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냥 속아 넘어가 버리기 십상일 것이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적어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갖고, 어떤 뉴스가 옳은 분석을 통해 효율적인 담론을 끌어내는지 정도는 척하면 착하고 알아 들을 수 있어야 '민주시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음모론이 판 치고,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세상을 살면서, 똑소리와 헛소리도 구분하지 못하고 들리는대로 앵무새처럼 나불거리고, 보는대로 족족 속아 넘어가 거짓을 '참'으로 철떡같이 믿어버리면, 훗날 진실을 마주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교양지식은 반드시 쌓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이 대단한 것이다. 이 책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이 책 말고도 '교양 상식'을 쌓을 수 있는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 정말 많다는 것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보는 것이 옳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높은 '지적 담론'을 깨우치고 싶다면, 격렬한 '지적 토론'까지 나눠봐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와 토론이 다른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아닌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도 잘 알 것이니 더는 말 않겠다. 물론 시작은 '지적 대화'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지적 담론', 또는 '지적 토론'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그 담론과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책의 '0권'과 '무한'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 또 읽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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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무대에 오르다 이사도라 문 시리즈 10
해리엇 먼캐스터 지음, 심연희 옮김 / 을파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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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문, 무대에 오르다>  해리엇 먼캐스터 / 심연희 / 을파소 (2020) [원제 : Isadora Moon Puts on a Show(2019)]

[My Review MMLXXXIV / 을파소 11번째 리뷰] 뱀파이어 무도회가 열린단다. 이사도라 문의 아빠가 무척 기대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1년 중 가장 밤이 긴 달밤에 개최되는 무도회인데, 올해는 무척 특별하다. 바로 아빠의 딸 이사도라가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특별한 까닭은 올해는 '개기 월식'이 있는 '붉은 달'이 뜨는 밤이기 때문이다. '레드 문'이라고도 불리는 개기 월식은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완전히 가리는 때에 일어나는 천문현상이다. 이때는 달의 고도가 가장 낮기도 하고, 밝게 떠오르는 보름달이 가장 낮게 뜨는 바람에 서양 사람들은 가뜩이나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달밤인데, 한밤중에 그 달이 점점 가려져서 흐릿하게 보이니 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하지만 태양에 비해 지구가 턱없이 작기 때문에 '반그림자'에 의해서 완전히 빛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가려질 때보다 완전히 가려졌을 때 '더 붉게' 빛나 보인다.

이런 달밤이니 뱀파이어들이 무도회를 연다고 해도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레드 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사도라 문'이 더 중요하다. 난생 처음 참가하는 '뱀파이어 무도회'인데, 그 대회에 참가한 뱀파이어들은 '무대' 위에 올라 장기자랑을 하는 것이 전통이라는 설명에 이사도라는 흥분 반, 걱정 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아빠와는 달리 '뱀파이어 요정'인 이사도라가 가장 잘하는 특기는 '발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도라는 뱀파이어 무도회에서 '발레 공연'을 보여주려 했는데, 아빠는 뱀파이어들은 그런 공연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조언하자 이사도라가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사도라는 안중에도 없이 아빠는 자신이 어릴 적에 했던 장기자랑을 자랑 삼아 늘어놓았다. 200명이나 되는 관중 앞에서 아빠는 뾰족한 이빨을 잘 닦는 요령을 보여줘서 상을 탔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오, 정말이지 안 될 말이다. 이사도라는 그런 공연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다른 장기는 없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가문의 보물을 꺼내더니 이사도라에게 건내준다. 바로 '머리빗'이었다. 그 빗으로 머리카락이 흩어지지 않게 잘 빗으면 뱀파이어들이 자신에게도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비결을 물어 올 것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뱀파이어들은 원래 깔끔한 몸단장을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이제 이사도라는 체념을 했다. 뱀파이어 무도회에서 '발레 공연'을 보여주었다간 망신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런 공연 준비도 하지 않고, 할 의욕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빨 닦기나 머리 빗기 따위는 연습할 필요도 없는 공연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무도회 날이 되었지만, 이사도라는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뱀파이어 요정인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요정'처럼 우아하게 무대를 누비는 발레 공연이었지만, 아빠의 말씀대로라면 뱀파이어들은 그런 공연을 절대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으리으리한 무도회장에서 우연히 아라민타라는 여자아이가 '발레 복장'을 하고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여자아이도 '발레'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이 발레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이사도라는 짐작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놀랍게도 아빠가 '인간'인 뱀파이어 휴먼이란다. 그리고 '인간'처럼 아름답게 발레 춤을 추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우연히 만나서 '사고'를 칠 계획을 짠다. 뱀파이어들이 아무리 발레 공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발레'를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까짓 것,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즐겁고 신 나는 '발레 공연'을 보여줄 뿐이고, 이사도라와 아라민타는 아름다운 춤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무대 위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아라민타와 이사도라는 모든 뱀파이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최고의 발레 공연을 보여주었다. 과연 관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가끔은 '자신의 재능'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다. 열심히 준비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이들의 반응이 뜨뜨미지근한 경우도 간혹 마주 하게 된다. 그럴 때에는 어떡해 해야 할까? 엉엉 울면서 무대를 망쳤다고 속상해 해야만 할까? 아니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탄을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다. 자기만의 재능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에 아주 소중하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면 가치가 높아지고, '비난'을 받으면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면 '나만의 재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밖에 없기에 '특별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 특별함을 아직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들이 아직 재능을 이해하기에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인정'을 받기에 자신의 실력이 조금 미흡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좀 더 갈고 닦을 필요가 있고, 특별한 재능이니만큼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방법도 있다. 때론, 펼쳐보인 재능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건 '특별한 재능'이긴 하지만, 남들 앞에서 보여주기 민망하거나 부적절한 재능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는 '특별한 재능'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보여주어선 안 된다. 거듭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더욱더 그렇다. 정말 그렇다면 '비난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부적절한 부분을 '고쳐서' 다시금 재능을 뽐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재능'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재능에 '자신감'을 더하면 재능이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다. 만약 '부적절한 재능'이라서 비난을 받았다면, 부적절했음을 솔직히 사과하고, 적절하게 고쳐서 재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재능은 없다'는 것이다. 재능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노력의 문제'이고, '실력'은 갈고 닦으면 반드시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떤 재능이라도 마음껏 뽐내며 자랑으로 삼으면 된다. 이때 비로소 '자존감'이 우뚝 서게 된다. 이사도라가 뱀파이어 요정으로서 발레 공연을 뽐낸 것처럼 말이다. 다른 뱀파이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절대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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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2 - 춘추시대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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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2 : 춘추시대>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LXXXIII / 휴머니스트 44번째 리뷰] '고전'을 읽는 것은 정말 유익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전 읽기'에 도전하는 분들이 정말 많지만 제대로 읽는 분들은 정말 많지 않다. 심지어 '고전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읽는 분들은 꽤나 나이가 많은 고령의 독자분들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정작 '고전'을 제대로 읽어야 할 적정한 나이는 '10대'라는 사실이다. 읽어도 무슨 내용인줄 까맣다 못해 하얗게 모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고전'을 읽고, '고전'을 이해하고, '고전'을 삶의 일상으로 녹여내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그런데 정작 '고전'을 그 어린 나이에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나 할까? 나도 어린 시절에 어줍잖게 '고전 읽기'를 시도하긴 했지만, '깊이 읽기'는커녕 제대로 된 뜻도 파악하지 못하고 쓰여진 까만 글자(!)만 줄줄 외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정작 내 주위에는 '고전'을 먼저 읽고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어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시절이었으니...

내 나이 '지천명(50세)'을 넘어서니, 이제야 '고전 읽기'가 수월해졌다. 허나 정작 이 나이에 '고전'을 써먹을 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울적하게 만든다. 일자리는 태부족이고, 인재는 넘쳐나는 시대에 오십 줄을 넘겨서야 겨우 '고전'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10대에 고전의 내용을 줄줄 읊어내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하릴 없는 재주에 불가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고전 읽기'는 정말 별 볼 일이 없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늦은 나이라 할지라도 '고전 읽기'는 도움이 된다. 이제 내 나이가 '반백살'이 되었다지만, '100세 시대'를 살고 있으니 앞으로 50년 남짓의 삶을 더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늦은 나이라도 '고전 읽기'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제대로 된 돈벌이(직업)'를 할 수 없을 뿐이지, 인생을 다잡는 데에는 '고전 읽기'가 여전히 유용한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수많은 '고전'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는 비교적 읽기 쉬운 편에 속한다. 왜냐면 재밌기 때문이다. 물론 읽기도 수월한 편이다. <사기>는 '본기', '세가', '열전', '표', '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사기열전>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전'인 탓에 읽지는 못하고 이름만 익히 알고 있는 분들이 정말 많을 텐데, '일독'을 권하는 바다. 그래도 '고전 읽기'에 어려움을 토로하신다면 이 책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전7권)을 권한다. 여러 권으로 나뉘어진 <사기>를 '시대순'으로 새로 짜깁기한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서 어렵지 않게 '중국사'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전한(前漢) 시기'의 사람이라 고대 중국사라고 해봐야 '삼황오제부터 한 무제까지'의 역사(약 3000년)를 다루고 있기에 비교적 짧은 시대의 역사책이지만, 공자가 쓴 <춘추>이후에 제대로 쓰여진 '단 하나의 역사책'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기에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암튼, 2권에서는 '춘추시대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제자백가 가운데 '병법가'로 유명한 사마양저와 손무, 오자서의 일화를 중심으로 소개하였고, 오자서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춘추오패' 가운데 4패 오왕 합려와 5패 월왕 구천의 일화로 이어지며 '춘추시대'의 마지막을 장엄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위대한 사상가조차 재미난 일화로 만나게 되니 부담은 내려가고 관심은 높아져서, 그들이 말하는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곱씹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비록 '만화형식'이라 상당히 가볍게 다뤄지고 있지만, 고전의 깊이가 남다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란 무엇인가?'다. 사람의 욕심이란 제각각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뜻이 다르고 하고자 하는 바도 사뭇 다르다. 그런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어지러운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이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 만물이 서로 다른 욕망을 품고 살지만, 하늘은 그 모든 만물의 욕망을 미리 점지해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하늘의 이치는 '변함'이 없고, 단지 '거대'할 뿐이기에 한낱 미물에 불가한 사람의 모두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말이다. 그런데 그런 지고지순할 것 같은 '하늘의 이치'란게 참으로 요상하다. 착하게 산 사람이 큰 재앙을 맞아 비참하게 죽는 일이 있는 반면에, 악독하게 살던 사람 같지 않은 짐승이 온갖 복은 다 타고난 것처럼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관찰했기 때문이다. 비록 '기록'에 적혀 있는 것을 한데 모아 '정리'한 것인데도, 이토록 '하늘의 이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겠으니,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란 말인가? 정작 자신도 '궁형'을 당하여 치욕스런 삶을 연명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마천이 무에 큰 잘못을 했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보면, 종종 '하늘의 이치'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 하는 대목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노장사상에서는 '도'와 '덕'을 중시했고, 공자와 제자들은 '인의'와 '예'를 강조했다. 그런데 도덕도 중요하고, 어질고 의로운 것도 중요한데, 진정으로 무엇이 맞는 것인가? 도덕을 중시하다 보면 끝내 '무욕의 경지'에 다달아 속세를 떠나야 궁극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인의와 예를 강조하다 보면 결국 '출세하여, 입신양명을 이루어야' 최종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하나는 세상을 등지라 하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정점에 오르라 한다. 어쩌란 말이냐? 오자서의 일화를 보면, 자신의 가문을 몰살 시킨 초나라 왕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했고,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허나 오자서는 '정점'에 올라서서 결국 오왕 부차에게 자결을 강요 받게 된다. 내려 놓아야 할 때 내려 놓지 못했기에 끝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한편, 월왕 구천을 도와 복수를 성공시킨 범려는 정점에 올라서자 모든 짐을 내려놓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토사구팽이라면서 쓰임새가 다한 사냥개는 결국 잡아 먹힌다면서, 세상에는 고난의 짐을 나눠 가질 수는 있어도 부귀와 권력을 나누지 못하는 용렬한 사람이 있다면서, 월왕 구천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 밖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과연 범려의 말이 맞다면, 그렇게 허무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라고 사마천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 읽기'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까닭은 이와 같은 깊이가 묻어나는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으면 그게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답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일 수 있다. 그러니 고전 읽기는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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