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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 현실 편 : 철학 / 과학 / 예술 / 종교 / 신비 ㅣ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2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0년 2월
평점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 현실 편 / 철학 / 과학 / 예술 / 종교 / 신비> 채사장 / 웨일북 (2020) [개정판(초판 2015/한빛비즈)]
[My Review MMLXXXV / 웨일북 2번째 리뷰]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땐, '너무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정말 괜찮은 책이었다. 그래서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정독'을 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쉽고 재밌는 책이라 '정독'도 정말 휘리릭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소개하자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소개한 '책의 내용'이 이미 '축약본'인 탓에 더 간단하게 줄여서 요약하는 것이 만만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 책을 쓴 목적이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을 알아보자는 것이기에, '한 편의 리뷰'를 쓰는데에도 똑같은 '분량'이 필요할 지경이었기에, 도저히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남길 자신이 없었다. 이미 완벽한 축약본이고 친절한 요약본인데, 뭘 더 어떻게 설명하라는 말인가?
그런 책들을 리뷰할 때에 종종 써먹던 방법이 책의 내용에 대한 '딴죽'을 걸고 이래 저래 요래 물고 늘어지며 '억지 춘향'격으로 글을 쓰기도 했었는데, 적어도 이 책 만큼은 그런 리뷰를 사양하고 싶었다. 왜냐면 정말 감동적일 정도로 유용하게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고로 훌륭한 교양서적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적으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지식인으로 인정한다. 어디 인문학 뿐인가. 과학과 수학에도 통달했고, 거기에 종교와 신비까지 웬만한 전문가 수준으로 썰을 풀어놓고 있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대개 어느 한 가지 분야에 정통하게 되면, '다른 분야'는 좀 약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데 말이다. 암튼 이런 책이 1권과 2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0권'과 '무한'까지 두 권 분량 내용이 더 있다는 점만 인지하고, 굉장히 부족한 실력이지만 감히 손가락을 놀려 보려 한다.
나는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을 갖추고 있는 논술쌤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딱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절대불변의 진리는 없다.] [따라서 정답도 없다]는 것이 또 다른 하나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린 왕자>의 주제는 이것이고, <데미안>은 이렇게 해석해야 맞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절대불변의 진리가 없는데, 어떻게 <어린 왕자>의 주제를 딱 이것만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미안>을 해석하는 것에도 '모범답안'은 있을 수 없다. 이 해석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에 타당한 근거를 찾아 증명하면 된다. 저 해석이 더 그럴 듯 하다면 역시나 적절한 근거를 내놓으면 그뿐이다. 모든 독자들이 <어린 왕자>와 <데미안>을 읽으면서 똑같은 '감동'을 얻고, 교과서에 실릴 법한 '교훈'만을 달달 외워야 한다면, 굳이 힘들게 읽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해답지'를 읽는 것이 '시간 낭비'를 막고, '시험 점수'도 더 높게 받을 수 있으니,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원작'을 읽으려 들지 말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러면서 저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비교분석하게 하며 '독서토론'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선으로 다채롭게 주제를 끄집어 내도록 '배경지식'을 다양하게 풀어놓곤 한다. 물론, 선생인 나조차도 누구나 알 법한 주제가 아닌 '독특하고 신선한 접근'으로 내놓은 엉뚱한(?) 주제를 내놓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 방법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인생책'으로 꼽을 정도로 감명 받았던 여학생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키다리 아저씨'를 고아 출신인 순진한 여고생을 꼬드겨 원조교재(?)를 한 나쁜 남자일 수도 있다. 그러니 '동화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일 수 있지만, '현실속'에서 키다리 아저씨 같은 늙다리가 너희들에게 접근한다면 의심부터 해야 한다. 현실에선 '공짜' 좋아하다 패가망신 당하기 딱 좋다면서 썰을 풀었더니, 해당 여학생이 수업중에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동심'을 파괴한 나쁜 선생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키다리 아저씨>를 '잔혹 동화' 버전으로 읽는 것이 전혀 쌩뚱 맞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런 접근이 아닌 진지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애초에 '진리 탐구'가 모든 학문의 목적인데, 그런 '진리'를 애초부터 부정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란 절대불변,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한다는데 동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불변이라는 '진리'가 정치나 경제, 그리고 역사, 문화 등등 다양한 시선으로 볼 때마다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이를 테면, 원시 시대의 진리는 '자연, 그 자체'였으나, 고대 시대로 넘어가면 '신화'로 모습을 바꾼다. 중세로 넘어가면 '유일신'으로 제법 진리에 가까워졌으며, 근대로 넘어오면서 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역부족하자 진리는 '이성의 빛'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특히, '수학, 물리학, 철학'이란 학문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의 빛'도 현대로 넘어오면서 흔들리게 된다. 절대불변의 '신학' 체계를 넘어 보편타당한 '이성' 체계로 진리를 밝혀나가다보니, 이성으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한계'와 '불가능성'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학에서는 '불완전성 정리', 물리학에선 '불확정성 원리, 철학에서는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라고 일컫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조차 '절대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회의주의'로 바라볼 때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학문마다 진리는 모습을 바꾼다. 하지만 진리의 모습을 명철하게 파헤치다 보면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 점만 추려내며 '학문의 체계'를 갖춰나가면 위대한 인류의 지적 보고가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지식은 결국엔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새로운 학문이 그 진리를 '또 다른 모습'으로 선보여주며 새롭게 정리한다. 그렇게 한계를 극복한 '진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시대를 주름잡게 된다. 이런 수준의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정말 대단한 '교양인'으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더 높고 깊은 '진리'를 탐구한다면 석사나 박사와 같은 '전문가'로 대우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지적 대화'는 왜 나눠야만 하는가? 그냥 심심풀이로 괜찮은 '수다'만 떨어도 충분하지 않은가?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 대화'가 아닌, '수다'로 만족하고 살아가지 않느냔 말이다. 왜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수다만 떨면서도 얼마든지 삶을 살아가고 일상을 즐길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수다만으로는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 나쁜 의도를 감추고 퍼트린 '가짜 뉴스'를 접하고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냥 속아 넘어가 버리기 십상일 것이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적어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갖고, 어떤 뉴스가 옳은 분석을 통해 효율적인 담론을 끌어내는지 정도는 척하면 착하고 알아 들을 수 있어야 '민주시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음모론이 판 치고,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세상을 살면서, 똑소리와 헛소리도 구분하지 못하고 들리는대로 앵무새처럼 나불거리고, 보는대로 족족 속아 넘어가 거짓을 '참'으로 철떡같이 믿어버리면, 훗날 진실을 마주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교양지식은 반드시 쌓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이 대단한 것이다. 이 책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이 책 말고도 '교양 상식'을 쌓을 수 있는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 정말 많다는 것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보는 것이 옳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높은 '지적 담론'을 깨우치고 싶다면, 격렬한 '지적 토론'까지 나눠봐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와 토론이 다른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아닌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도 잘 알 것이니 더는 말 않겠다. 물론 시작은 '지적 대화'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지적 담론', 또는 '지적 토론'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그 담론과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책의 '0권'과 '무한'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 또 읽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