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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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 강대진 / 민음사 (2009) [원제 : Oidipous tyrannos]

[My Review MMLXXXVI / 민음사 25번째 리뷰] 읽을 때마다 '처음 읽은 듯' 새로운 느낌을 받는 것은 <고전>이 주는 선물 같다. 이전에는 '같은 책'이지만 '다른 출판사'이기 때문에 드는 느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는데, 그보다는 '읽고 또 읽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쌓는 경험(혹은 연륜)이 크게 작용하는 듯도 싶다. 왜냐면 출판사까지 같은 '동일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기 때문이다. 왜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을, 이번에는 느끼게 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간에 쌓은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암튼, 지난 번에 읽은 <오이디푸스 왕>(이미영/별글)에 이은 '민음사' 버전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다.

이 책의 뒤친이 '강대진'의 해석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왕>은 일종의 '수사극(추리물)'으로 짜여졌다고 한다. 희랍(그리스) 테바이에 돌고 있는 역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밝히는 과정이, 마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명탐정이 단서를 찾고, 증거를 모아서 최종적으로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외치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란다. 그 과정에서 테바이의 이전 왕이었던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가, '내(오이디푸스)가 그 범인인가?로 바뀌고, 끝에는 '나(오이디푸스)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되었단다.

이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까닭은 '독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이디푸스 왕의 친부가 라이오스 왕이고, 우연한 사고(피할 수 없는 운명)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잠시 잠깐의 화를 참지 못하고 살해를 저지르기 때문에, 사건 자체의 '비극성'보다 정해진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애'가 더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수사극'이라는 느낌을 덜 받게 된다. 애초에 범인이 누구인지 다 아는 마당에 무슨 '추리'를 하려 든단 말인가. 그런 까닭에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서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하지만 극중 인물인 '오이디푸스'는 다르다. 그는 코린토스를 떠나 테바이로 가는 도중에 '스핑크스가 낸 문제'를 풀어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는 일을 겪는다. 다시 말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사건의 해결자'가 된 셈이다. 그리고 테바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결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에 '임금이 비운 자리'를 꿰어차고 임금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서 맞이한 '새로운 문제'는 바로 테바이를 급습한 정체 모를 역병(전염병)을 막아내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밝혀내려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이 어릴 적에 받았다는 '신탁(운명)'을 피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정해진 운명'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비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많은 독자들이 '필멸자의 숙명'이고,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라는 주제에 꽂히고 만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이 꼭 비극인 것만은 아니다. 필멸자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마주할 용기를 짜내어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찔러 앞 못보는 봉사가 될지언정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다 지은 죄를 달게 받기 위해서 '고행'을 스스로 자초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는 약해 빠진 필멸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신이 정해준 운명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두 발로 걸어 나아가며 '자신이 지은 죄값'을 톡톡히 치르겠다는 다짐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을 보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질 용기가 있는 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한편, <안티고네>는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적 성격으로 읽어내는 맛이 톡톡한 작품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국가가 정한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전통적, 관습적으로 지켜온 도덕'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따져보는 맛도 쏠쏠하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정해진 법대로 따르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법정의'가 무너지고 법의 형평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맹목적인 법치주의'는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는 사실을 '12·3비상계엄사태'부터 '윤석열탄핵'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국가가 정한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의롭고,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다시 말해,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고 사법을 악용하려 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일들이 '민주주의'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던지라 정말이지 식겁한 사태였다.

그에 맞선 '안티고네'는 인간이기에 마땅히 해야만 할 도리를 따른다는 논리가 얼마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국가가 정한 명령(법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정의롭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법률'이라면 법에 저촉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저항하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떤 걸림돌이 있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행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다행히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은 '비상계엄'이 부당한 것임을 잘 알고,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을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극우주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극한의 갈등은 전쟁까지 불사하고, 강대강 대치에서 한발짝이라도 물러서면 패배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끝장 날 때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키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대원칙을 위해 서로 양보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티고네>의 결말을 보면, 모두가 죽는다. 오직 한 사람 독재자처럼 굴었던 크레온만 빼고 말이다. 그는 '안티고네'가 자신이 정한 법을 어기자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지만, 종국에는 크레온 자신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크레온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으면 '악인'이 달게 받는 죄값이라며 고소해 하기라도 했을텐데, 크레온은 뒤늦게 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안티고네'에게 내린 형벌을 수습하려 들었지만, 너무 늦은 탓에 더욱 끔찍한 참극을 겪게 된 셈이다. 어쨌든 대부분 '강대강의 대치'는 대개 이런 죄값을 치르게 하고, 참극을 면치 못하게 만들곤 한다. 더구나 전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라고 해서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러우전쟁'이나, '이팔전쟁', '미국vs이란' 가운데 러시아의 푸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가 승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을까? 그들의 결말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 말썽을 부려놓고도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이다. 그리고 그들이 벌여놓은 짓으로 인한 '후폭풍'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작게는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큰 폐해를 남기고, 크게는 전 지구적인 참극을 남겨 놓을 것이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다.

그런데도 어찌하며 고집불통인 권력자는 계속 나오는가? 이는 권력의 속성이 '잘못'을 인정하면 권력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도, 크레온도 똑같이 '자기 잘못'을 제 때에 시인하지 않고, 고치려 들지 않았기에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권력자들은 처음엔 인지하지 못해 잘못을 고치지 못했더라도, 인지한 뒤에도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시인하는 순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장을 본다. 어차피 스스로 내려가나, 끌려서 내려가나 '똑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결코 똑같지 않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순간 '두 눈을 찌르는 형벌'을 스스로 내리고 권좌에서 내려와 한 사람의 죄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이디푸스 왕을 동정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테바이 사람들이 역병에 시달리고 죽음을 당했지만, 결코 오이디푸스 왕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그건 정해진 운명으로 인한 비극이었고, 인간 오이디푸스는 왕의 위치에서 테바이 국민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크레온은 조국을 지켜낸 영웅을 떠받들고, 외국 군대를 몰고온 배신자를 처벌하는게 공정하다고 믿고 강행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든 법을 어긴 백성에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고압적이고 강제적인 처벌만 고집하다가 결국엔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만 비극의 장본인이 되었다. 이런 크레온을 두둔하는 이들이 있었을까? 법치주의를 수호한 위대한 영웅이라고 떠받드는 이들이 있었느냔 말이다. 적어도 크레온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도한 권력자의 비참한 결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아이아스>와 <트라키스 여인들>은 임팩트가 그닥 남지 않은 작품이었다. 아이아스는 굽힐 줄 모르는 영웅적 기질을 잘 보여주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닥 인기 있는 영웅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맞추지 못한다면 '자신을 소멸'시키는 쪽으로 선택하는 모습이 너무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나마 '안티고네'는 도덕적인 전통에 따라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했기에 많은 이들에게 정당성이라도 얻었지만, 아이아스는 자신이 영웅인데 '영웅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역정을 내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버리는 버리고 말았기에 공감대가 좀 떨어졌다. <트라키스 여인들>에서는 정말 유명한 헤라클레스가 등장해서 눈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영웅적인 모습의 헤라클레스보다는 광기에 빠진 모습만 보이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에 그닥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이라네이라'는 공주 신분인데도 '헤라클레스의 아내' 역할로 만족하고, 능동적이지 못한 수동적 모습만 연출하다 끝내 파멸하고 마는 인물로 등장해서 실망이 컸다.

나는 <고전>을 읽을 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며 읽기보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까닭을 밝히는 쪽으로 읽으려 노력한다.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도, 그 안에 잠재된 '권위'와 '명성'에 잠식 당해서 '과거의 고찰'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오늘날의 독자들이 굳이 '낡은 작품'을 귀한 시간을 내어 읽을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전>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찾는 느낌으로 읽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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