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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2 - 춘추시대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5월
평점 :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2 : 춘추시대>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LXXXIII / 휴머니스트 44번째 리뷰] '고전'을 읽는 것은 정말 유익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전 읽기'에 도전하는 분들이 정말 많지만 제대로 읽는 분들은 정말 많지 않다. 심지어 '고전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읽는 분들은 꽤나 나이가 많은 고령의 독자분들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정작 '고전'을 제대로 읽어야 할 적정한 나이는 '10대'라는 사실이다. 읽어도 무슨 내용인줄 까맣다 못해 하얗게 모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고전'을 읽고, '고전'을 이해하고, '고전'을 삶의 일상으로 녹여내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그런데 정작 '고전'을 그 어린 나이에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나 할까? 나도 어린 시절에 어줍잖게 '고전 읽기'를 시도하긴 했지만, '깊이 읽기'는커녕 제대로 된 뜻도 파악하지 못하고 쓰여진 까만 글자(!)만 줄줄 외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정작 내 주위에는 '고전'을 먼저 읽고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어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시절이었으니...
내 나이 '지천명(50세)'을 넘어서니, 이제야 '고전 읽기'가 수월해졌다. 허나 정작 이 나이에 '고전'을 써먹을 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울적하게 만든다. 일자리는 태부족이고, 인재는 넘쳐나는 시대에 오십 줄을 넘겨서야 겨우 '고전'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10대에 고전의 내용을 줄줄 읊어내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하릴 없는 재주에 불가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고전 읽기'는 정말 별 볼 일이 없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늦은 나이라 할지라도 '고전 읽기'는 도움이 된다. 이제 내 나이가 '반백살'이 되었다지만, '100세 시대'를 살고 있으니 앞으로 50년 남짓의 삶을 더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늦은 나이라도 '고전 읽기'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제대로 된 돈벌이(직업)'를 할 수 없을 뿐이지, 인생을 다잡는 데에는 '고전 읽기'가 여전히 유용한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수많은 '고전'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는 비교적 읽기 쉬운 편에 속한다. 왜냐면 재밌기 때문이다. 물론 읽기도 수월한 편이다. <사기>는 '본기', '세가', '열전', '표', '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사기열전>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전'인 탓에 읽지는 못하고 이름만 익히 알고 있는 분들이 정말 많을 텐데, '일독'을 권하는 바다. 그래도 '고전 읽기'에 어려움을 토로하신다면 이 책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전7권)을 권한다. 여러 권으로 나뉘어진 <사기>를 '시대순'으로 새로 짜깁기한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서 어렵지 않게 '중국사'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전한(前漢) 시기'의 사람이라 고대 중국사라고 해봐야 '삼황오제부터 한 무제까지'의 역사(약 3000년)를 다루고 있기에 비교적 짧은 시대의 역사책이지만, 공자가 쓴 <춘추>이후에 제대로 쓰여진 '단 하나의 역사책'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기에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암튼, 2권에서는 '춘추시대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제자백가 가운데 '병법가'로 유명한 사마양저와 손무, 오자서의 일화를 중심으로 소개하였고, 오자서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춘추오패' 가운데 4패 오왕 합려와 5패 월왕 구천의 일화로 이어지며 '춘추시대'의 마지막을 장엄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자와 장자, 그리고 공자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위대한 사상가조차 재미난 일화로 만나게 되니 부담은 내려가고 관심은 높아져서, 그들이 말하는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곱씹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비록 '만화형식'이라 상당히 가볍게 다뤄지고 있지만, 고전의 깊이가 남다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란 무엇인가?'다. 사람의 욕심이란 제각각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뜻이 다르고 하고자 하는 바도 사뭇 다르다. 그런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어지러운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이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상 만물이 서로 다른 욕망을 품고 살지만, 하늘은 그 모든 만물의 욕망을 미리 점지해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하늘의 이치는 '변함'이 없고, 단지 '거대'할 뿐이기에 한낱 미물에 불가한 사람의 모두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말이다. 그런데 그런 지고지순할 것 같은 '하늘의 이치'란게 참으로 요상하다. 착하게 산 사람이 큰 재앙을 맞아 비참하게 죽는 일이 있는 반면에, 악독하게 살던 사람 같지 않은 짐승이 온갖 복은 다 타고난 것처럼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을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관찰했기 때문이다. 비록 '기록'에 적혀 있는 것을 한데 모아 '정리'한 것인데도, 이토록 '하늘의 이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겠으니,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란 말인가? 정작 자신도 '궁형'을 당하여 치욕스런 삶을 연명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마천이 무에 큰 잘못을 했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보면, 종종 '하늘의 이치'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 하는 대목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노장사상에서는 '도'와 '덕'을 중시했고, 공자와 제자들은 '인의'와 '예'를 강조했다. 그런데 도덕도 중요하고, 어질고 의로운 것도 중요한데, 진정으로 무엇이 맞는 것인가? 도덕을 중시하다 보면 끝내 '무욕의 경지'에 다달아 속세를 떠나야 궁극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인의와 예를 강조하다 보면 결국 '출세하여, 입신양명을 이루어야' 최종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하나는 세상을 등지라 하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정점에 오르라 한다. 어쩌란 말이냐? 오자서의 일화를 보면, 자신의 가문을 몰살 시킨 초나라 왕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했고,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허나 오자서는 '정점'에 올라서서 결국 오왕 부차에게 자결을 강요 받게 된다. 내려 놓아야 할 때 내려 놓지 못했기에 끝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한편, 월왕 구천을 도와 복수를 성공시킨 범려는 정점에 올라서자 모든 짐을 내려놓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토사구팽이라면서 쓰임새가 다한 사냥개는 결국 잡아 먹힌다면서, 세상에는 고난의 짐을 나눠 가질 수는 있어도 부귀와 권력을 나누지 못하는 용렬한 사람이 있다면서, 월왕 구천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 밖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과연 범려의 말이 맞다면, 그렇게 허무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라고 사마천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 읽기'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까닭은 이와 같은 깊이가 묻어나는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으면 그게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답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일 수 있다. 그러니 고전 읽기는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