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2 : 말테의 수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2
홍은희 글, 최순표 그림, 손영운 기획,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원작 / 채우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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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대체 왜 이 책이 '서울대선정도서'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읽어도 읽어도 뜻모를 책인데 말이다. 솔직히 <말테의 수기>를 읽고 이 책에 담긴 명확한 뜻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도 헤매는 이들에게 속시원히 답을 내어주면 정말 고맙겠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책의 '정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왜 이 책을 선정했는지 짐작은 된다. 비록 '정답'은 없지만,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문제는 '답이 뻔한 문제'가 아닌 '누구도 풀 수 없다'고 믿는 가운데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길을 묻는 문제다. 그렇다면 <말테의 수기>는 아주 훌륭한 문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줄거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 책을 읽고서 '정답'을 말해야 하는 부담감 말이다. '일기 형식'과 '편지 형식'이 두서 없이 나열되어 있고, 줄거리가 없으니 일관된 '하나의 사건'도 없으며, 오로지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속내만이 고백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는 넋두리처럼 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주 유명한 시인이 아니었던들, 이 소설은 결코 출간되지도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암튼 그의 경험과 일상이 담긴 '단편의 나열'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라도 발견하려 드는 모습만 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설에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주제는 '죽음과 사랑'이다. 하지만 왜 죽는지 이유를 알 수 없고, 왜 사랑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다. 그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람이기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절실히 바라지만 '죽음의 공포와 고통'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냔 말이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어서 빨리 죽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비명을 듣는 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며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허나 그 분이 너무나도 고귀한 분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도 없어 그냥 죽을 때까지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통에 겨워 울부짓는 비명소리가 잦아든 것은 그에게 찾아온 '죽음의 순간' 덕분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공포스런 비명이 사라지자 그의 곁을 지키던 수많은 사람들은 안도하고 평온을 느끼지만, 고귀한 분이 죽었다는 사실에 또다시 누군가는 오열하고 슬퍼하고 만다.

 

  한편, 사랑도 누구든 바라마지 않는다. 허나 너무 사랑한 탓에 어느 순간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난 탕아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떠돌이 삶을 살다보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더럽고 추한 빈털털이가 되어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자유도 탕아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탕아는 집으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가족들은 그 탕아를 아무런 비난 없이 반갑게 받아들이고 '무한한 사랑'을 듬뿍 전한다. 되돌아온 탕아는 가족의 품에서 다시 말끔한 사람으로 되돌아오지만, 또다시 가족들이 '넘치는 사랑'을 줄 거라는 부담감에 걱정이 밀려온다.

 

  릴케는 일생을 살면서 이런 '죽음의 공포'와 '사랑의 부담감'을 느끼며 지냈는가 보다.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가 겪은 수많은 경험들이 모두 자기 맘에 쏙들지 않은 불만족이 <말테의 수기> 속에 수두룩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내면의 혼란은 자신을 너무 완벽한 사람이라고..완벽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생겨난 듯 싶다. 사랑이란 감정조차 완벽하기 위해선 '완벽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야 '순수한 사랑'이고, 표현을 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향한 욕망이 꿈틀대니 '순수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대목이 그렇다.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굳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절실히 아끼고 충만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첫눈에 빠진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조차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애초부터 사랑은 순수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지르는 다양한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릴케는 현실에서는 있지도 않은 '순수'를 찾아헤매다 스스로 '만족'이라는 것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듯 싶다. 하지만 그도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완벽하고 순수한 '죽음'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희노애락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안분지족'을 일찍 깨달았다면 릴케의 분신인 '말테'도 무난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기 삶의 완벽함을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민과 번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테라는 주인공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해질 때까지 번뇌하며, '해탈'할 때까지 고통을 맛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삶은 너무나도 끔찍한 '고행'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고행'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고행을 겪어야만 진짜 사람이 된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선 곤란할 것이다. 어쩌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뒤치면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이니 말이다. 멋대로 뜻을 부여한다면, 죽음의 고통을 맛 본 자만이 지금 이 순간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사랑을 맛보기 위해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겪으라고 강요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아라. 그런 삶은 완벽한 사랑은커녕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맛'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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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의 거침없는 중국사 - 신화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영화처럼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썬킴의 거침없는 역사
썬킴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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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사를 '한국사'와 '세계사'로 나누어 배우는 경향이 있다. 각 나라별 역사를 공부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한 나라'를 중점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역사가 어찌 '국내와 국외'를 칼로 무를 자르듯 반듯하게 나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면 분명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무엇'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역사는 한데 뭉뚱그려서 '통찰'을 하듯 바라보면서 공부를 해야지 '한국사' 따로, '세계사' 따로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를 둘러싼 나라들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특히,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만큼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그 가운데 이 책은 '중국사'를 후루룩 들이킬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나게 풀어썼기에 '중국사 입문용'으로도, 폭넓게는 '역사 입문용'으로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심지어 역사와 담을 쌓았던 독자라도 쉬이 빠져들며 읽어나갈 수 있을테니 한 번쯤 필독해보길 권한다.

 

  우리에게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상으로 굉장히 먼 나라에 속한다. 물론,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고, 유교, 불교, 도교 등 사상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지만, 지금도 '공산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느낌적인 느낌이 가로막고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에는 우리를 침공한 나라였고, 지금도 우리와 적대시하고 있는 '북한'과 형제관계 운운하고 있는 상황이라 마냥 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런데도 <삼국지>와 <초한지>, 그리고 <수호지> 같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나라인 까닭에 꽤나 친숙한 느낌을 지울 수도 없다. 한국사에서도 중국은 빠지지 않고 등장을 하며 우리가 전통사상을 이야기하며 '공맹사상'이니, '노장사상'이니 동양사상을 거론할 때에도 중국의 '요순시대'와 '춘추전국시대'를 들먹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작 <중국사>에 대해서 깊이 얘기하지 못한다. 알면서도 잘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국의 역사를 너무 띄엄띄엄 공부한 탓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역사는 흐름이 중요한 법이다.

 

  거기다 우리는 중국과 너무나도 자주 싸웠다. 중국사의 시초라고 하는 '삼황오제시절'부터 동이족의 수호신인 '치우천왕'과 수없이 싸웠다고 하며, 상나라의 유적이 발굴된 '은허'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은 거의 대부분 '동이족'의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서 연구를 할 수 없다. 중국정부가 '중국땅' 안의 모든 것은 '중국사'라고 트집을 잡고 있기에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출입국조차 쉽지 않고,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한다면 심한 '검열'을 하고, 심지어 자기네들에게 불리한 사료가 나오면 '체포와 수감'까지 불사하고 있는 탓에 '고대사 연구'는 더욱더 힘들다고 한다. 정황으로 봤을 때 분명 '한국의 역사'인 것이 틀림없는데도 말이다. 암튼,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으니 살짝 재껴두고, 우리와 똑같은 '반만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중국사의 흐름을 조명하며 읽어나가면, 도리어 '한국사'가 절로 이해되는 '역사의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너무 자주 싸운 탓에 '공통의 역사'도 많기 때문이다. 한무제는 '고조선 멸망', 수당시대는 '고구려침공 및 멸망', 송요금원시대에는 '고려의 위상'을 느낄 수 있으며, 명청시대에 '조선'이 중국사를 들었다놨다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잘 들여다보면 중국이 '분열의 시대'를 겪을 때에는 한국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하고, 중국이 '통일제국'을 건설하게 되면 한국이 '위기의 시대'를 겪게되는 묘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국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주목적이다. 중국은 우리에 비해 엄청 큰 대륙이라는 지리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이 분열되면 우리에겐 '기회'가 되고, 통일을 하면 '위협'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분열되었을 때 중국은 '부흥'했고, 우리가 통일했을 땐 중국도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중국의 초기역사는 미약했고 혼란했다. 그렇기에 '고조선'은 대륙을 호령하는 강국있었고, 중국이 진한시대에 통일을 한 뒤에 '고조선'은 위기에 봉착했다. 중국이 위진남북조(5호16국)시절을 겪을 때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라 외칠 정도였다. 하지만 수당제국으로 중국이 또다시 통일을 하자 고구려는 수차례의 대규모 침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또다시 중국이 '5대10국', '송요금원'으로 분열하자 우리는 북쪽에 발해가, 남쪽에 고려가 차례로 등장해 각각 당당히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랑하였다. 하지만 몽골이 '원제국'으로 통일을 하자 고려는 다시 위축되고 말았다. 이후 명청시대에도, 현재의 중국도 마찬가지다. 비록 현재는 우리가 '남북'으로 분열하여 중국에 짓눌린 상황에 처했지만, 중국의 공산주의가 쇠퇴하여 혼란해지고, 우리가 통일을 이룩하면 또다시 반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사'에 깊이 빠져들어야만 한다. 아예 '한국사와 중국사'를 뭉뚱그려 '동아시아 대륙사'로 같이 묶어 빠삭하게 파헤쳐야 마땅하다. 분명 앞으로는 그리해야만 할 것이다.

 

  역사공부는 다분히 '자국중심주의'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사를 배우며 '서양의 위대함'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되는 것처럼 '중국사'를 다루면서 '대륙의 스케일'에 압도될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대륙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심정으로 '중국사'를 바라보면 의외로 '중국의 빈틈'이 굉장히 많고 상당히 크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훨씬 더 많게 된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말이다. 중국이 '동북공정' 따위로 무한한 자국이기주의 사상의 근거를 조작하려는 속셈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중국은 심각한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는 못된 버릇이 있기 때문에 애써 마련한 자기애적인 이기주의조차 헛물켜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바로 이 틈을 파고 들어 우리는 '냉철한 이성'으로 한국사를 다시 써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할 수 있는 역량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 역량을 발휘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사분야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게 되면 중국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더 냉혹한 법이다. 대한민국의 국력은 아직까지 중국과 맞짱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편이다. 중국을 비롯해서 미국, 일본, 러시아, 심지어 북한과도 '역사적 명분'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 행세에 익숙했고,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속국신세를 면하나 싶었는데, 일제가 강제로 '식민통치'를 했으며, 해방된 뒤에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통치'로 혼란했고,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남북으로 분단된채 오래도록 '미국의 그늘'에서 쑥쑥 성장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이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정도로 성장하긴 했으나, 막상 '홀로 우뚝 서 본 경험'이 없는 관계로 자신감이 실종된 상태가 우리가 직면한 처지다. 과연 우리는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역사는 거대한 중국조차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도 거대한 중국을 쫄게 만든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그 시절이 되돌아오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다. 이제 전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사의 변방이 아니라 '주역'이 되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하루 빨리 '홀로서기'를 달성해야만 한다. 중국사의 흥망성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공부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 책이 분명 '그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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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사회 통합 및 양극화 해소 방안 연구
이진로.채진원.하봉준 지음, 한국정치평론학회 엮음 / 인간사랑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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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사회는 꽤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보수 vs 진보, 우파 vs 좌파, 친일 vs 종북, 이뿐 아니라 세대갈등, 남녀갈등 등등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갈등양상을 보이고 하루가 멀다하고 가짜뉴스가 양산되고 펙트체크하느라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새로운 이슈를 들먹이며 떠들썩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분열의 핵심쟁점은 언제나 '빈부격차'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어가는데 빈자는 일상을 걱정할 정도로 빈털털이..아니 빈털털이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영끌해서 장만한 '내집'은 고금리로 '가격'이 뚝뚝 떨어지고, 무리해서 투자한 주식과 코인은 반토막도 건지지 못해 날이 갈수록 '적자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이런 마당에도 정치와 언론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의 장을 마련하지는 못할 망정 더욱더 갈등을 조장하고 격차를 벌려 서로를 혐오하게 만드는 원흉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살 길은 '똑바로 선 언론'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언론의 사회 통합 및 양극화 해소 방안 연구>는 뜻깊다.

 

  사실 일반대중은 첨예한 갈등과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 솔직히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오직 '대한민국의 이익'과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될 뿐이지, 어느 당에서 나오건, 어떤 편향을 갖고 있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은 "검은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훌륭한 고양이다"라고 말했다. 막말로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선도적인 위상을 펼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경제력과 정치력,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힘을 과시할 수 있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냔 말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모든 정당이 오직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저마다 재주를 뽐내려한다면 무엇인들 마다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다못해 못죽여서 안달이 나는 정치를 하고 있으니 뭐라도 사단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에 이르렀다.

 

  더 큰 문제점은 '언론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해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텐데, 대한민국 언론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편향성을 추구하는 것을 숙명처럼 여기고, 이쪽 언론은 저쪽을 깎아내리고, 저쪽 언론은 이쪽을 혐오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이런 갈등과 이슈로 '저들만의 밥벌이'를 할뿐, 언론의 핵심인 '건전한 여론 형성' 역할은 아예 포기한 상황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오직 갈등을 조장하고 혐오를 양산하는 이슈를 전달하는 것에만 올인한 상황이란 말이다. 더구나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은 애저녁에 포기하였다. 이른바 '기계적 중립'이란 미명 아래 '국민여론을 호도'하게 만들고, 정치권과 경제계의 잘못에 분명한 비판을 제시해야 함에도 '양쪽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무슨 안건이든 '50 : 50'이라는 균형을 맞추는 바람에 '압도적인 여론'조차 불을 꺼버리는 '관영매체'로 스스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어떻게 '언론'을 신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 이미 양극화의 끝자락으로 치달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극명하게 조명하고 적절한 해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해소방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 국민' 스스로 해내야만 한다. 먼저 첨예하게 갈라진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부터 해소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든 진보든 목적은 하나다. 대한민국이 잘 사는 것 말이다. 문제는 '방법'인데, 이른바 '부자감세 vs 복지포퓰리즘' 이란 대립구조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세금은 부자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싫어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균형발전'을 위해선 국민 모두가 세금을 성실히 납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세금의 형평성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부자가 좀더 많이, 빈자가 혜택 많이' 라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잘 살기 위해 '얼마만큼의 세금'이 필요한데, 이 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공평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집중조명'하려는 노력부터 보여야 한단 말이다. 이런 조명을 하는 역할은 바로 '언론'이 할 일이다. 언론이 앞장 서서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비추어주면 온국민이 판단하여 지지할 세력을 찾고, 어려운 일에도 손발을 걷어부치고 나설 것이 아니냔 말이다.

 

  언론이 바뀌면 국민들도 언론을 신뢰하게 된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가짜뉴스'에는 가차없는 '팩트체크'로 국민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건전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쪽의 목소리 '한 번'이면, 저쪽의 의견도 '한 번'이라는 기계적 중립 따위는 집어치우란 말이다. 누가 봐도 '살인자'가 분명한데, '어떻게 해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을 전달하는 짓도 그만 둬라. 어떤 정치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달하기만 하는 '기사'는 그만 써라. 그 정치인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자의 양심'과 '언론의 사명감'을 가지고 오직 국민을 위한 '소신발언'을 하란 말이다. 그래야 국민들도 '판단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기자'가 될 것인지 '기레기'가 될 것인지는 바로 이것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국민들도 깨어나야 할 때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대가리가 깨져도 '누구'를 지지한다는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방향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향을 틀어버릴 수도 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옳다거나, 분명 잘못된 것이 틀림없는데도 '남 좋은 일은 절대 못한다'는 심보라면 될 일도 망칠 뿐이다. 오직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얼마든지 다른 이의 주장과 의견을 듣고 난 뒤에 반드시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내 이익'과 '우리나라의 이익', 그리고 '인류공영발전'에 위배되는 일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첨예한 사안이라면 '더 큰 이익'을 위해 편을 들어야 하고, 기꺼이 '자기희생'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대한민국 사회가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내린 판단이 올바른지 혹은 그른지 적절한 판별을 하기 위해 평생공부도 꼭 필요하다. 이 책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한 '훌륭한 정보'가 담긴 연구서다. 국내의 문제를 국외의 사례와 비교분석하여 해결방안을 제시한 점도 좋았다. 언론의 사회통합 역할을 위해선 '정치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과 그 방안으로 '사회적 합의로 도출된 원칙으로 복지정책을 제대로 추진'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점에도 공감한다. 한편 '언론양극화'는 더욱 어려운 문제다. 우리 언론이 기계적인 중립 자세로 보도하는 경향이 강한 탓에 올바른 여론 형성을 언론 스스로 막아왔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다수의 의견'은 더 많이, '소수의 의견'은 낮은 비중으로 '여론의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실에 더욱 부합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찬반 양쪽의 대화와 타협을 '사회적 합의'에 담아 진실되게 보도하는 것이 '현실적인 중간'일 것이고, 이것이 언론이 지향해야 할 점이라는 지적에도 공감한다. 여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의 교양수준을 높이면 첨예한 갈등으로 싸울지언정 '품격있고 우아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 아름다운(?) 싸움이 보고 싶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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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상상놀이터 2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함미라 옮김 / 보물창고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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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을 대비하라고 말이다. 또한, 평화를 위한다면 상대보다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 감히 우리를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상대보다 더욱 더 강한 무기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해도 그닥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그 강한 무기를 끝내 만들고 말았다. 단 한 발만으로도 도시 하나를 순삭시킬 수 있고, 서로를 향해 수십 발을 쏘아대는 것만으로 온 지구의 생태계를 망가뜨려, 결국 인류의 멸망을 앞당길 '핵무기'를 말이다. 다행히 여지껏 단 두 발밖에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만 발을 '쏘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중 1/10만 터뜨려도 온 지구는 끔찍한 일을 치루게 되겠지만 말이다. 인류는 그런 끔찍한 일을 잘 알고 있기에 아직까지 만들었으나 쏘지는 않는 '암묵적인 합의'를 도출해내었다.

 

  물론 전쟁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비극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서는 '내전(시빌 워)'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강대국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자신들보다 한 없이 약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을 향해 거침없이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이라고 해서 마냥 당하고만 있지도 않는다. 그들은 처참하게 패배하고 망가져 가고 있지만 결코 '항복'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결국 '누구도 승리하지 못할 전쟁'의 마침표를 찾지 못하고 헤맬 뿐이다.

 

  만약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만에 하나라도...핵무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서로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라면 '서로를 향해' 아낌없이 쏘아 댈 것이며, 한 쪽만 보유한 상황이라면 '또 다른 나라'가 끼어들어 '핵우산 카드'라고 이름을 붙여 대신 쏘아 댈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파괴할 것이 분명한 '핵전쟁'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지게 될까? 이 책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은 바로 그 '핵전쟁 이후'에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며 쓴 소설이다. 1983년이 쓰여졌기에 '독일 통일(1991)'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을 배경으로 삼았다. 바로 서독은 미국을 대신하고, 동독은 소련을 대신하여 '냉전체제'에 종지부를 찍고서 서로를 향해 핵탄두가 실린 미사일 '버튼'을 눌렀다고 가정한 뒤에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전쟁의 원인' 따위는 밝히고 있지도 않다. 그저 '핵폭탄'이 터진 상황만 보여줄 뿐이다.

 

  물론 '핵폭탄'이 터졌다고해서 곧바로 지구가 붕괴되거나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은 끊임없이 고통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원자병'이라 불리는 병은 아예 치료가 불가능하다. 엄청난 고용량의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겉으론 멀쩡해보여도 심각한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치료를 할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병원치료라는 것은 '자가치료(면역체계)'를 도와주는 역할일 뿐, 망가진 유전자만 골라내어 '정상 유전자'로 치유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전자'가 망가지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이 불가능하게 된다. '원자병'은 그래서 무섭다.

 

  다행히 핵폭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방사능 피폭'을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방사능 물질'은 오랜 시간동안 남아 우리가 숨쉬는 '공기속'에, 마시는 '물속'에, 그리고 먹는 '음식속'에 남아 숨쉬고, 마시고, 먹는 행위를 하면 할수록 '우리몸'에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견딜 수 있는 만큼 견디다 '그 이상'이 축적이 되고나면 결국 '유전자 변형'을 시킬 것이며, 한 번 변한 유전자는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끝없는 고통'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렇게 '변형된 유전자'는 고스란히 유전되어서 뒤이어 태어날 아이들에게도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원자병'은 2세, 3세, 4세, 5세...그 이상의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되어 태어날 때부터 고통받을 것이란 말이다. 허나 이런 고통도 엄마의 뱃속에서 '건강'히 자라다 '안전'하게 순산한 뒤에 받을 고통이다. 대부분은 '유산'되어 햇빛도 받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향해 '천벌받을 부모들'이라고 욕을 써놨다. 어른들이 저지른 전쟁 때문에 자신들은 어른이 되어 보지도 못한채 고통받으며 죽어갈 뿐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너무 끔찍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른채 죽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핵폭발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마을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모든 교통과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나마 나았다. 어린이들은 '핵폭발' 이후에 벌어진 끔찍한 아비규환의 다툼속에서 '힘쎈 어른들'에게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심지어 쉴 곳도 다 빼앗기고서 '도둑고양이'마냥 먹을 것을 몰래 훔치려다가 매를 맞아 죽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또한 심한 굶주림에 아프고 병이 들면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서로를 끌어안은채 죽어갈 뿐이었다. 어제 한 아이가 죽고, 오늘 두 아이가 죽고, 그렇게 하나둘 죽고 나면 마지막으로 죽은 아이가 서툰 솜씨로 묘비를 만들어주고서 자신은 맨바닥에 쓸쓸히 죽어나자빠질 뿐이었다. 그나마 서둘러 찾아온 '핵겨울'에 '방사능 낙진'으로 오염된 하얀눈이 그 작은 주검 위를 덮어주었다.

 

  그럼에도 온정은 남아 있어 그러한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 전에 마을 어른들이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을 하나둘 거두어 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썼고, 이미 '방사능'에 오염된 먹거리와 마실거리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따뜻한 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이들에게 남은 희망이란 것이 있을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만들어놓은 '핵무기'를 아직도 보유하고 있고, 그 보유량만으로도 지구를 절딴내고도 남을 만한데, 여기에 더 보태서 더 강력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없어도 될 '핵무기'를 생산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21세기에 접어드니 국가간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고, 이런 불평등을 해소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전세계 곳곳에 갈등과 불화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으니 '핵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류는 이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비극을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미국의 '스리마일', 그리고 일본의 '후쿠시마' 등등에서 죽음의 방사능이 아직도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핵전쟁의 무서움'을 잘 모르고 있다. 그저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에만 떨어지지 않으면 그뿐이라는 안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 책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지구마을 어느 곳에라도 '핵폭발'이 일어나게 되면 모두가 '똑같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핵전쟁'만큼은 막아야 한다. 단 한 발의 핵폭탄도 터뜨려서는 안 될 일이다. 그 뒤에 벌어질 무서움을 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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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끝내는 소프트 스킬 10: 스펙보다 대세는 일머리 - 시대 경쟁력인 소프트 스킬을 비즈니스 사례로 배운다
라제쉬 스리바스타바 지음, 이미경 옮김 / 프리렉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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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스펙의 시대'다. 고3수험생을 지나 대입에 성공한 새내기들이 일주일에 두세 시간 남짓한 강의 하나만 듣고 판판이 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학입학과 동시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어도 시간이 모자르기 때문에 놀면서도 '스펙쌓기', 알바하면서도 '스펙쌓기'에 목숨을 걸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스펙을 쌓고도 정작 '입사성공'을 하면 또다시 배워야 한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게 '신입사원' 딱지를 달고 나면 그간 쌓아온 스펙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십 장의 자격증이 있어도 신입사원용 '업무스킬'에선 그닥 쓸만 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동안 배웠던 것을 요만큼이라도 써먹을 수는 경우라면 다행인 편이다. 상사가 던져주는 일감의 대부분은 난생 처음 본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나마 '회사연수시절'에 익혔던 사내용 업무프로세스가 써먹을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허나 그것들은 그간 쌓아놓은 스펙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스펙을 쌓아야 보탬이 되는 걸까?

 

  사실 어떤 회사에 입사를 하든 '스펙'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물론 '스펙'이 아주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어렵고 따기 힘든 '스펙'을 하나하나 챙긴 만큼 '실력'을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실무경험'이 아닌 스펙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왜? 회삿일은 '스펙'보다 '센스'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척하면 착하고 잘 통하며 일을 요리조리 잘하는 센스 말이다. 이 책에선 '일머리'라고 표현했다. 한마디로 어느 회사에서나 환영받는 인재는 '일머리'가 뛰어난 사람이란 말이다.

 

  어쩌면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하드웨어의 성능을 키운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메인보드에 끼깔나는 그래픽카드, 그리고 어떠한 프로그램을 돌려도 부족할리 없는 빵빵한 메모리에 절대로 꺼질리 없는 하이퍼울트라 전원장치를 장착한 뒤에 어떠한 발열도 쉬이 식혀줄 수 있는 초강력 펜과 방열판까지 꽂고 나면 정말 뿌듯할 것이다. 이렇게 빵빵한 하드웨어를 탑재한 컴퓨터를 장만하고서 전원버튼을 켠 뒤에 화려한 모니터를 켜고 부팅을 마무리한 뒤에 고작 '지뢰찾기'나 하고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외유학에 석박사 학위까지 다 마친 인재가 회사에 입사해서 '복사기'와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다. 결국은 '소프트웨어'가 빵빵해야 한다. 심지어 고졸이나 전문대만 나왔더라도 '일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어떤 업무를 던져주어도 척척 해낼 것이고, 하는 일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대박을 터트리고, 남부러울 성과급에 초고속 승진까지 꿰 찰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스펙'이 뛰어난데 '일머리'까지 엄청나다면...이런 인재라면 '회사의 부속품'보다는 차라리 '창업'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암튼, 일머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바로 그 '소프트 스킬'을 키우는 방법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이 책 <한 권으로 끝내는 소프트 스킬 10>이 바로 그 방법을 익히는데 아주 유용한 책일 것이다. 더구나 '생생한 비즈니스 사례'를 선보이며 10가지 스킬을 소개하고 있다. 그 10가지란 '창의력', '혁신', '비판적 사고', '올바른 질문법', '현명한 문제해결법', '평생학습', '스토리텔링', '권한보다 영향력', 휴머니스', 기업가 정신'이다. 분명 제시한 단어만 읽어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런 독자라면 '일머리'가 뛰어난 재능 있는 인재가 틀림없다. 근데 무슨 내용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 독자라면...그래도 상관 없다. 이 책에 아주 상세하고 쉽고 재밌으며 유용하게 익히도록 '사례'들이 잘 드러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나온 사례들을 '직접적'으로 써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예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남들이 써먹은 방법을 고대로 베껴서 써먹는다고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만 잘 써먹어도 '카피'에 불과하니 고대로 써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이 책의 사례를 통해 '스킬'로 익히고서, 자기만의 스킬로 써먹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면 매우 훌륭한 인재가 틀림없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훌륭한 인재가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된다. 처음부터 뛰어난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이 책에서 선보인 사례들을 더듬더듬 따라하면서 '자기만의 스킬'로 승화시키면 더욱 훌륭한 방법일 것이다.

 

  이 책은 비단 '비즈니스 업무'를 하는 이들에게만 유용한 책은 아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소프트 스킬 10가지'는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고,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성공을 꿈꾸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조언을 해줄 것이 틀림없다. 성공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좋다. 처음부터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0가지 스킬을 몽땅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꼼꼼하게 읽지는 말길 바란다. 때로는 천재적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거나 '업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딴짓에 열중하기'라든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조건 신나고 재밌는 것'에 심취하는 것도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갓지고 긴장이 풀어지는 남아도는 시간에 이 책을 한두 쪽씩 읽는다면 족할 것이다. 원래 '일머리'라는 것은 그렇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이 바라는 성공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이 책과 함께 하길 바란다.

 

프리렉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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