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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2 : 말테의 수기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2
홍은희 글, 최순표 그림, 손영운 기획,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원작 / 채우리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도대체 왜 이 책이 '서울대선정도서'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읽어도 읽어도 뜻모를 책인데 말이다. 솔직히 <말테의 수기>를 읽고 이 책에 담긴 명확한 뜻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도 헤매는 이들에게 속시원히 답을 내어주면 정말 고맙겠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책의 '정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왜 이 책을 선정했는지 짐작은 된다. 비록 '정답'은 없지만,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문제는 '답이 뻔한 문제'가 아닌 '누구도 풀 수 없다'고 믿는 가운데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길을 묻는 문제다. 그렇다면 <말테의 수기>는 아주 훌륭한 문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줄거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 책을 읽고서 '정답'을 말해야 하는 부담감 말이다. '일기 형식'과 '편지 형식'이 두서 없이 나열되어 있고, 줄거리가 없으니 일관된 '하나의 사건'도 없으며, 오로지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속내만이 고백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는 넋두리처럼 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주 유명한 시인이 아니었던들, 이 소설은 결코 출간되지도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암튼 그의 경험과 일상이 담긴 '단편의 나열'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라도 발견하려 드는 모습만 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설에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주제는 '죽음과 사랑'이다. 하지만 왜 죽는지 이유를 알 수 없고, 왜 사랑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다. 그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람이기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절실히 바라지만 '죽음의 공포와 고통'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냔 말이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어서 빨리 죽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비명을 듣는 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며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허나 그 분이 너무나도 고귀한 분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도 없어 그냥 죽을 때까지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통에 겨워 울부짓는 비명소리가 잦아든 것은 그에게 찾아온 '죽음의 순간' 덕분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공포스런 비명이 사라지자 그의 곁을 지키던 수많은 사람들은 안도하고 평온을 느끼지만, 고귀한 분이 죽었다는 사실에 또다시 누군가는 오열하고 슬퍼하고 만다.
한편, 사랑도 누구든 바라마지 않는다. 허나 너무 사랑한 탓에 어느 순간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난 탕아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떠돌이 삶을 살다보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더럽고 추한 빈털털이가 되어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자유도 탕아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탕아는 집으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가족들은 그 탕아를 아무런 비난 없이 반갑게 받아들이고 '무한한 사랑'을 듬뿍 전한다. 되돌아온 탕아는 가족의 품에서 다시 말끔한 사람으로 되돌아오지만, 또다시 가족들이 '넘치는 사랑'을 줄 거라는 부담감에 걱정이 밀려온다.
릴케는 일생을 살면서 이런 '죽음의 공포'와 '사랑의 부담감'을 느끼며 지냈는가 보다.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가 겪은 수많은 경험들이 모두 자기 맘에 쏙들지 않은 불만족이 <말테의 수기> 속에 수두룩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내면의 혼란은 자신을 너무 완벽한 사람이라고..완벽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생겨난 듯 싶다. 사랑이란 감정조차 완벽하기 위해선 '완벽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야 '순수한 사랑'이고, 표현을 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향한 욕망이 꿈틀대니 '순수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대목이 그렇다.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굳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절실히 아끼고 충만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첫눈에 빠진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조차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애초부터 사랑은 순수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지르는 다양한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릴케는 현실에서는 있지도 않은 '순수'를 찾아헤매다 스스로 '만족'이라는 것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듯 싶다. 하지만 그도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완벽하고 순수한 '죽음'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희노애락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안분지족'을 일찍 깨달았다면 릴케의 분신인 '말테'도 무난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기 삶의 완벽함을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민과 번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테라는 주인공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해질 때까지 번뇌하며, '해탈'할 때까지 고통을 맛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삶은 너무나도 끔찍한 '고행'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고행'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고행을 겪어야만 진짜 사람이 된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선 곤란할 것이다. 어쩌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뒤치면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이니 말이다. 멋대로 뜻을 부여한다면, 죽음의 고통을 맛 본 자만이 지금 이 순간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사랑을 맛보기 위해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겪으라고 강요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아라. 그런 삶은 완벽한 사랑은커녕 죽음보다 더한 '지옥의 맛'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