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거울 - 파국의 14세기, 흑사병, 백년전쟁, 그리고 움트는 혁명
바바라 터크먼 지음, 박중서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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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박스에서 가제본을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먼 거울 : 파국의 14세기, 흑사병, 백년전쟁, 그리고 움트는 혁명> 바바라 터크먼 / 박중서 / 원더박스 (2026) [원제 : A Distant Mirror(1978)]

[My Review MMCCCV / 원더박스 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네 번째 리뷰는 20세기 독보적인 역사서술가 '바바라 터크먼'이 쓴 <먼 거울>이다. 그녀를 독보적인 역사서술가로 지칭하는 까닭은 그녀가 평생 쓴 저서의 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우리 나라에 뒤쳐진 책(번역본)만 다섯 권으로 이 책 <먼 거울>은 그 다섯 번째 책이다. 또한 62년과 71년에 걸쳐 두 차례나 '퓰리쳐 상'을 수상했고, 그 가운데 우리에게 소개된 책이 1차 세계대전 연구서인 <8월의 포성>(The Guns of August)다. 이렇듯 그녀가 집필한 책들은 '역사적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거나 '특별한 인물'을 집중 조명한 책들이 많다. 이 책 <먼 거울>도 유럽의 중세 1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쿠시 가문'을 집중적으로 쫓아가며 연대기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먼 거울> 관점 포인트 :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 나면 깜짝 놀랄 것이다. 물론 1000쪽이 훌쩍 넘는 '벽돌책'에 놀라는 것은 너무 식상할 것이다. 정말 놀랄만한 것은 다름 아닌 '책 내용'이다. 읽어도 읽어도 도대체 뭔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다는데 있다. 세계사 책 좀 읽어봤다는 분들도 이 책의 진면목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힘든 대목이다. 1000쪽이 넘는 책 내용을 '망원경'으로 멀리 내다보고, 또다시 1000쪽이 넘는 책 내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작업을 번갈아가며 해내야 하는 일이 말이다. 그 요즘 내용이 이 책의 서문에 잘 적혀 있는데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꼭 읽어야할 요점 정리'이므로 반드시 읽은 뒤에 본격적인 독서를 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책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기 딱 좋으니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중세 1000년의 역사를 관통한 '한 가문'에 대한 연대기다. 바로 '쿠시 가문' 말이다. 서양인도 아닌 우리에게 너무 생소한 인물이라 몰라도 상관 없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살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살던 '한 가문이 남긴 기록'이었다. 우리 나라로 치면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터크먼이 굳이 '쿠시 가문의 기록'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까닭은 그 당시를 묘사하고 적어놓은 기록은 많지만, 한 가문에 전해져내려오는 기록물이라면 뭔가 '일관성'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객관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시대의 여러 기록물을 통해 '다각도'로 접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각각의 기록이 갖는 '주관적인 판단' 때문에 자칫 너무 혼란스럽고 산만하고 난삽한 역사서술이 될 우려가 있어서 '한 가지로 통일된 시각'이 담긴 기록이 터크만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선별기준을 잡으니 딱 한 가문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바로 '쿠시 가문' 말이다. 이제 그 방대한 기록을 읽을 차례다.

그럼에도 읽다보면 너무 세세하고 개별적인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어 '집중'하기 힘든 점이 많았다. 더구나 유럽의 중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런 편이었다. 그럼에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꾹 참고 읽어나갔지만 정말 힘들었다. 그렇게 꾹 참고 읽은 책 내용은 앞서 책 제목 옆에 나열된 '부제'의 내용으로 귀결된다. 14세기 중세 유럽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이 대유행했으며, 그로 인해 사회는 매우 혼란했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종교관(가치관)은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는 숙명적으로 엄청난 피를 부르는 혁명이었다. 아니 파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내용으로 점철 되어 있다.

그럼 이걸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것일까? 다시 제목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먼 거울>. 600여년 전이라는 머나먼 곳에 '지금, 바로 여기,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첫 출간을 한 해가 1978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위시한 전세계가 냉전이 한창이었고, 20년 간 질질 끌던 베트남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승리를 하지 못한 비참한 결과를 맞았고 말이다. 미국은 맘대로 끝내지도 못할 전쟁에 참전해서 허우적거렸고, 그로 인해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하거나 살아돌아와도 전쟁의 상처와 마약에 중독되어 비참한 생을 살아야했고, 파병을 거부하고 투쟁을 했던 젊은이들도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사회는 매우 혼란했고, 그로 인해 '가치관'은 무너져내렸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 승승장구하던 시절은 다 지나고 잔인하고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나니 도대체 어떤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가야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때 미국 사회에 이 책 <먼 거울>이 출간되었다. 머나먼 옛날이야기 속에서 뭔가 발견을 한 것이다. 그 당시 중세인들도 참으로 끔찍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었구나.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먼 거울>을 보면서 미국 사회는 성찰할 수 있는 뭔가를 느낀 것이다. 비단 미국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전쟁의 광기'로 물들었던 20세기 서구사회를 '거울'을 들여다보는 효과를 톡톡히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참하고 열악함 속에서도 '중세인'들은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엿봤던 것이다.

나가는 글 : 개인적으로는 끔찍한 경험을 극복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 '인간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느끼기 이전에 이 책을 '완독'한 독자들이 그토록 많다는 것에 훨씬 더 대단하다고 느꼈다. 현대인에게는 너무 낯선 '중세인들의 삶'을 핀셋으로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낱낱이 서술하고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더구나 동양인 독자에게는 '서양 중세인의 일상'은 말로 설명한다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날것'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였다. 21세기 현대인이 읽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인 내용이기도 했고, 지금과 비교하면 '비윤리적인 내용'도 많아서 읽기에 거슬리는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중반 넘어서 다루는 '끔찍한 전쟁의 공포와 사선을 넘나드는 죽음(전염병)의 공포'와 맞닥뜨릴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빌드 업'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이 책 <먼 거울>을 읽어야 할까? 단순히 인문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지혜'를 배울 수 있어야 할텐데, 그건 바로 '비관주의에서 극복하는 힘'이다. 현대인들은 '끈기'가 부족하다. 이 책을 읽어라. 완독을 목표하라. '끈기'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인지 톡톡히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현대인들은 '체념'이 빠르다. 비관주의 때문에 체념에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현실에서 얻을 이익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빠르게 체념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비관하고 체념하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책 속에서 중세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여다보면 현대인은 감히 살아남을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더구나 중세인이 유일하게 버틸 수 있었던 생존희망은 '믿음'이었다. 그런데 전쟁과 전염병 앞에 '믿음'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중세인들이 어떤 절망감을 느꼈겠냔 말이다. 비관하고 체념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홀로서기를 하며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그 지혜를 엿봐야 한다.

100년이 훌쩍 넘도록 지긋지긋하게 싸운 '백년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유럽 전역 인구의 3/4을 죽음으로 내몬 '흑사병'에서도 생존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초강대국 미군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돌아와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들의 공통점을 무엇으로 봐야하는가? 이 책 <먼 거울>에서는 '인간의 의지'를 꼽았다.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도 '같은 결론'인가? 청년들의 실업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국가가 먹여 살려주는 것은 '공산주의'라서 싫다고 한다. 청년들은 기성세대들처럼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면 먹고 살 수 있는 부를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허나 세상은 AI 인공지능로봇을 내놓으려 한다. 인간을 '대신'해서 힘든 일을 해주니 좋은 일이 많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에 청년들이 비관주의에 빠지고 체념을 빨리 습득한다. 과연 이 책 <먼 거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을까? 우리 청년들에게 놓인 현실은 전쟁과 전염병의 주는 공포가 아니다.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뺏겨버려 뼛속까지 추운 겨울, 아주 기나긴 겨울의 맹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을 거라는 비관주의가 팽배하다. 이를 이겨낼 지혜를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까? AI 인공지능로봇은 '넘사벽'이라서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피할 수 없는 공포라면 즐길 줄 아는 용기를 내서 위기를 극복해보는 것으로 말이다. 중세인들도 전쟁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으니 곁에다 '킵'해두고 살아남을 때까지 받아들였다. 청년실업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전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현실문제이기도 하다. AI 인공지능로봇이 다 빼앗아갈 것 같다고해서 개발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AI 인공지능을 이길 생각이 아닌 '이용'해서 '유용'하게 써먹을 발상의 전환도 필요할 것이다. AI와 싸우지 말고 AI와 협업해서 더 잘하는 재능을 살려보는 것은 어떤가? 이 책이 출간된 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책 속의 내용'에 감동하는 것만으로 이 책의 '쓸모'를 찾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딴에는 너무 먼 거울이라 비춰진 모습도 너무 작게 보여 '쓸모'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땐 현미경이 아닌 망원경이 필요할 것이다. 저멀리 먼 거울에 비췬 내 모습을 보려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비전(지혜)'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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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2 - 노무현 시대의 명암 한국 현대사 산책 2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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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2 : 노무현 시대의 명암>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11)

[My Review MMCCCIV / 인물과사상사 4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세 번째 리뷰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통령 노무현의 빛과 그림자가 수놓인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2>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당선되기 전부터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노사모')'이 엄청난 반향을 몰고 다니며 16대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기록적인 압승으로 '열린우리당 대선후보'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어찌나 압도적인 승리였던지 경선을 치르던 경쟁후보가 차례차례 '경선레이스 포기'를 선언하며 경선 중반도 넘지 않았는데 이미 경선 승리선언을 해야할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노무현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그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임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파격적인 정책운영에 들어갔다. 현직검사들과 토론을 열면서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고 팽팽히 맞대결하는 모습도 신선했고, 대통령 임기초반에 '탄핵 위기'를 맞는 모습도 참 신기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난 노무현의 대단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 내가 정치적으로 '미성숙했던' 탓 때문이었다. 그러다 노무현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서거'한 뒤에야 노무현이 대단한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살아있었을 때 했던 일들이, 다음 대통령인 이명박을 지켜보면서 실로 엄청난 업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무나도 '비교'되는 최악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임기 초반부터 '다스 사기'를 친 것처럼 수억 대의 비자금을 은닉하며 나라꼴을 하루아침에 엉망으로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한민국이 얼마나 '정상'이었는지를 이명박이 대한민국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노무현의 말을 되짚어보면서 대한민국 정치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편 2> 관점 포인트 : 김영삼 정부이후 대한민국 정치사는 '구태와의 싸움'을 시작했고, 김대중 정부 때에도 '군사독재의 폐해'를 고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26년인 지금까지도 그들이 남겨놓은 유산(?)이 진절머리 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리와 부정부패의 뿌리부터 잘라내고 뽑아내야했던 것이다. 그걸 가장 최초로 시도한 대통령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무슨 '이념'이나 '사상'으로 시도하지는 않았다. 오직 '실리'만을 원칙으로 삼았다. 지금에서야 이것을 '노무현 정신'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상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 '상식'에 준해야지 '무슨' 이념이지 사상이니 따져야 할 것이 있겠느냔 말이다. 오직 대한민국을 위해서 뜻을 세우고 행하겠다는 '원칙', 그 하나만 지키면 되었다.

물론 이 '상식'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너무 당연해서 '원칙'이라고 하기도 뭐했고, 그래서 뭔가 그럴 듯한 '제도개선'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 당시 야당과 국민들이 한 일이었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참여'라는 말로 대신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은 '노무현'이 아니라 '국민 여러분' 모두이니 국민 여러분이 직접 참여해서 정책을 만들어가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인가? 라면서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정치는 대통령을 '리더'로 삼고, 리더의 명령 하달에 국민들은 죽을둥 살둥 하면서 "하면 된다"만 외치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민이 경험한 '경제성장의 비결'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국민을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보고 '정책만들기'를 하라고 숙제를 내준 꼴이잖은가 말이다. 대단히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국민들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하나둘 '청와대 게시판'"이런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세요"라면서 호응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게 '참여정부의 탄생'을 알린 것이었다.

이대로만 계속된다면 정말 새로운 대한민국이 될 것 같은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헌데 노무현 정부의 앞날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너무나도 낯선 정책에 숱한 시행착오도 겪었고, '이게 나라냐'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트집과 훼방, 발목잡기를 하는 야당의 공세에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여기에 정부를 지원해야할 '열린우리당'은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행보만 보여줬다. 아니 제발 '똥볼'만 차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로 못난 짓만 골라서 했다. 그 최고 결정타는 야당의 '탄핵공세'였다. 노무현 같은 '고졸 출신' 대통령은 인정할 수 없으니 그만 쇼하고 내려가라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헌재의 판단은 탄핵사유 없음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복직(?)되었다. 이대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너무나도 상식적이지 않은가. 대통령이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정치적 보복을 하면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보겠느냔 말이다. 바로 국민들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 보복이 아닌 '협치'를 요구했다. 야당이 원한다면 '대연정'이라도 하겠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대인배의 성품까지 보여줬다. 그런데도 당시 야당은 그 손마저 거부했다. 끝까지 발목을 잡았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자 '논두렁 시계'를 트집 잡아 가까운 가족을 협박하기에 이르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거'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시고나니 '인간 노무현의 진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인을 100% 믿지 않는 나는, 노무현이 다른 대통령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느꼈지만, 노무현의 진심까지 믿지는 않았다. 특히 '한미FTA 추진'을 두고 대한민국 국민의 이익을 송두리채 팽개치고 거대한 미국시장에 대한민국을 헐값에 넘겨버리는 멍청한 짓을 한다며 결사반대를 외치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에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노무현의 진심'을 깨닫게 되었다. 역시 '비교대상'이 있어야 이해가 쉬운 법이다. 노무현은 미국 시장이 아무리 커도 대한민국 시장을 함부로 집어삼키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더 큰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면 거대한 미국 시장에 '메이드 인 코리아'가 더 많이 팔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미국 시장에 집어삼켜질까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느냐. 자신감을 가져라. 자긍심을 가져라. 대한민국은 할 수 있다. 이런 말을 왜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명박이 미대통령 '골프카'를 대신 몰며 '광우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미 쇠고기'를 대한민국 건강은 생각지도 않고 수입하겠다고 밀어붙이는 오만함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명박은 촛불시위를 하는 시위대 앞에서 "여러분들 소고기 좋아하시죠. 값싼 미국 소고기 많이 드셔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라고 말하는 주둥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값싸고 맛 좋은 소고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광우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니 대한민국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해서 '통관절차'를 까다롭게 하든지, '검역'을 철저히 하겠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고, 그저 싸고 좋으니 많이 사드세요라는 말이나 하는 추접스런 대통령과 어디 비교가 되겠느냔 말이다.

나가는 글 : 2003년 대선이 있기 전, 2002년 월드컵은 정말 대단했다. 월드컵 4강 신화가 쓰여졌기 때문이다. 비록 '개최국 어드벤티지'를 톡톡히 본 대회였지만, 그럼에도 예선전 2승 1무로 16강 본선진출,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전 역전승하고 8강 진출, 스페인과 혈투 끝에 4강 진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아쉽게 석패하고 3,4위전 진출, 터키에게 어이없게 패배하며 최종 4위 달성. 월드컵 사상 아시아팀 최고 성적을 거둔 영광스런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의 응원전도 전세계인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 벌어진 월드컵대회에서는 한국의 응원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 월드컵 직관을 포기하고 '한국여행'을 예약할 정도였다. 이후 해마다 증가하더니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는 값비싼 본선경기티켓을 못 구하거나 포기하고 '한국'에 와서 거리응원을 계획한 이들이 엄청 몰렸다고도 했다. 그것도 한국전에서 한국을 응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홍명보호는 졸전 끝에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최선을 다하고 탈락했으면 뭐라 탓할 것도 없을텐데, 감독 전술은 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실력 대신 인맥으로 선수를 발탁해서 출전했다는 의혹만 더욱 불거진 월드컵이었다. 더구나 탈락 이유를 밝히는 자리에서 '감독은 아무 잘못이 없고, 진 이유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선수들이 열심히 뛰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뻔뻔한 인성에 팬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암튼 이번 월드컵 이후 '홍명보만 출입금지'는 전국적으로 밈이 되어 조리돌림을 당할 것 같다. 그래도 싸고 말이다.

하지만 2002년에는 달랐다. 전 경기 너무 멋진 경기였고, 멋진 골로 팬들을 설레게 했으며, 아쉽게 3,4위 전에서 더이상 뛸 체력이 남지 않아 터키에게 기선제압을 당하고 패배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 마지막 경기에 체력이 바닥이 나서 뛰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붉은 악마들도 멋졌고 말이다. 암튼 그 엄청난 열기는 대선까지 쭉 이어진 셈이다. 한때는 정몽준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구호까지 나와서 정몽준도 대선 출마를 결심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정신 차리고 출마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대선 레이스의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었다. 만에 하나 2002년 월드컵 경기가 이번 북중미 월드컵처럼 졸전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도 '월드컵 신드롬'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이 야당 뿐만 아니라 행정부처까지도 노무현을 깔보는(?) 식으로 일관하자,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는 발언이 나왔고, 이를 언론이 얼른 주워서 대서특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때는 수많은 군중이 노무현에게 "그럼 당장 때려쳐라"는 구호를 내지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슬기롭게 '참여정부'를 이끌며 국민들의 신임을 하나하나 되찾아오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열린우리당의 인기도 급상승하게 된다. 향후 노무현 대통령은 꽃길을 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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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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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II / 인물과사상사 4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두 번째 리뷰는 김영삼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지로 IMF를 맞이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는 군사문화에 찌든 잔재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다시 '구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애초에 '3당 합당'을 하며 노태우 정권의 후임을 자처한 것부터 과거와 단절할 수 없는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 때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면서 민주화 투쟁의 업적을 남긴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군사정권에 오랫동안 탄압을 받으며 그토록 미워하던 그 방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냐면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본 적이 없었는데, 국민들이 갑자기 '민주시민'이 되어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실수를 해도 알맞게 지적을 하며 고쳐나가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영삼 대통령도 과거 박정희가 했던 것처럼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마음을 갖고 대통령 주위에 '충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내쳐버리고 '내 사람'만으로 가득 채워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더구나 고집까지 강하게 부리며 '자기 방식'을 밀어붙이니 여기에 '반론'을 던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실력이 뛰어나보이는 차남 김현철이 눈에 들어왔고, 김현철만을 통해서 '다른 의견'을 듣는 모습을 대통령이 자주 보여주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죄다 '김현철' 앞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일까지 자행하고 말았다. 결국 김현철이 없으면 정국이 돌아가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현철'을 염두에 뒀던 것일까? 자신이 장기집권할 수 없다면 대를 이어서 대통령직을 '세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일까?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관점 포인트 : 96년도에 들어서자 '한보사태''김현철 사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한보그룹의 정경유착 정황이 낱낱이 드러나고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자마자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이 수두룩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십 억원대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고, 이를 감추기 위해서 얼마나 방만한 경영을...아니 신사업을 투자하는데 '점쟁이'까지 동원했다는 증거가 쏟아져 나오자 정치인과 일반대중을 가릴 것 없이 전국민이 아연실색이 되었다. 아니 정도껏 해 쳐먹었으면 대기업 총수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나오는 증거마다 억 억 거리고 있으니 그걸 뇌물로 받아 정치자금으로 유용했던 정치인은 들킬까봐 숨도 못 쉬었고, 일반대중은 억장이 무너져서 말문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태수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입을 막은 채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한때 '실어증'이 생겼다는 꾀병(?)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변명도 통하지 않자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몰염치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고 말이다.

이에 김영삼 정부에 대한 질타까지 연이어 나왔다. 그 많은 돈을 받아먹고도 국민들 앞에 '떳떳하게' 정치를 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답하지도 못하고 김영삼 정부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여기에 '소통령'에 이어 '문민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차남 김현철에 대한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야만 했다. 김영삼도 등떠밀리다시피 신한국당 대표로 '이회창'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김현철은 정치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게 되어 잠깐이나마 분노를 표출했다고 전한다. 93년부터 96년까지 4년간 김현철은 정치권의 모든 정보를 독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에 있어서 '고급정보 취득'은 생명줄과도 같았기에 김현철은 '1인 안기부'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고급 정보로 그간 뭘 했던 것일까? 심지어 군장성들까지 김현철에게 '충성 맹세'를 한 각서를 작성했다고 하니 거의 못할 일이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도대체 김영삼은 자신의 아들이 이런 짓까지 하고 있을 때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결국 김현철은 대검찰청에 구속수사를 받게 되었고, 언론은 일제히 한보사태와 김현철을 연결지어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거짓말'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김현철이 뇌물수수를 받는 전화통화 내용이 모 병원 CCTV에 고스란히 찍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테이프가 언론에 전달되었고, 김영삼 정권의 총체적 부실이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때마침 '황장엽 망명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노동당 비서관 출신으로 '실세'였던 인물이 중국 북경에서 한국총영사관을 찾아와 귀순을 요청했던 것이다. 황장엽은 북한이 전쟁도발을 준비하고 있으며, 남조선은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라 귀순 배경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정국은 금세 얼어붙었다. 전쟁이라니! 황장엽은 "남조선의 군대와 경찰, 구가기관에 잠입해 있는 적대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면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북측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면 더 큰 우환거리만 되니, 북측의 경제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체의 경제협력을 봉쇄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왜 하필 이때 김영삼 정부는 '황장엽 망명'을 추진했느냔 말이다. 그리고 황장엽이 쏟아낸 말은 한마디로 '북풍, 그 잡채'였다. 정부여당이 오갈 때 없이 궁지에 몰렸을 때 국민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국면전환용'으로 말이다.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그렇게 잘 써먹었던 '반공노선'과 맥을 같이 한다. 쉽게 말해, 북한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했으니 우리끼리 내분이 일어나서 좋을 일이 없다. 그러니 온갖 의혹이나 정황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일단 덮고,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단결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의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이 달라졌다.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치더라도 통일만큼은 찬성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젠 뒤바뀐 것이다. 통일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거셌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당시 기자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이 있었는데 초등학생조차 '통일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럼 반대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통일되면 거지떼가 몰려올까봐 싫어요"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은 싫어도 통일은 해야 한다던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통일이 되면 '경제적 빈곤문제'가 현실이 될까 두려워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한 측면도 있고, '중산층'의 살림살이가 퍽 여유로워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또 의심스러운 것도 있다. 황장엽은 북한 실세였다. 그의 사상은 '좌파 중에서도 극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한다는 얘기는 죄다 '극우성향의 입맛'에 딱 맞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황장엽의 심경변화는 뭔가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순'은 김영삼 정부에서도 발견된다.

15대 대통령선거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라 여당의 대선 후보를 정해야 했다. 누구를 내보내야 할까? 신한국당 대표는 '이회창'이었다. 하지만 경기지사였던 '이인제'도 출마를 선언했고, 당시 서울시장이던 '조순'도 출마의사를 내비췄다. 여당의 대표가 3명이나 출마선언을 한 것이다. 이에 김영삼은 누구를 지지했을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여당 대표였던 '이회창'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인제의 출마를 막지 못했고, 조순의 출마에도 그닥 반대하지 않았단다. 이게 뭔가? 김영삼은 차기대선에서 승부를 포기한 것이었을까?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편 야당 대표주자로는 당연히 국민회의 대표 '김대중'과 자민련 총재 '김종필'이 나섰다. 하지만 이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DJP 연합'을 하며 후보단일화에 합의한다.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 단일화를 '3김 정치의 연장'이라고 비꼬면서 어깃장을 놓았다. 하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선 감내해야 했다. 이에 이회창(신한국당 총재)과 조순(민주당 총재)도 '후보단일화'에 나섰다. 그리고 둘이 합쳐 '한나라당'이 탄생한 것이다.

나가는 글 : 이렇게 대선이 한창 준비중일 때, 느닷없이 '경제위기설'이 터져나왔다.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금융공황이 연이어 터졌던 것이다. 3월에 삼미, 4월에 진로, 5월에 한신, 7월에 기아, 11월에 해태, 뉴코아, 12월에는 고려증권이 무너졌다. 시시각각 경제위기에 대한 경고등이 켜지고 있었는데도 김영삼 정부는 경제위기설을 부정했다. 여기에 보수언론도 가세해 '한국 경제 위기 아니다'라는 뉴스를 타전하며 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위기는 곧 닥쳐왔다. 외환보유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단기 외채로 빌렸던 부채의 만기가 다가오자 외국에서는 한국 경제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면서 너도나도 원금과 이자를 내놓으라며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뒤늦게 IMF행을 결정하며 달러 지원요청을 했고, IMF 총재 미셸 캉드쉬 일행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동의서를 요구했다. 빌려주면 빌려주는 것이지 차기 대통령 후보들에게 '각서'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였다. 이를 수용한 김영삼 정부의 무능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경제가 폭망했기 때문에 IMF에 손을 벌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경제는 튼튼한 편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단기 외채'를 한방에 상환할 수 있는 달러보유고가 낮았기 때문이다. 이건 충분히 막을 수 있고, 예방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김영삼 정부의 무능과 더불어 무지까지 탓하지 않을 수 없다. 93년 집권 당시부터 내세웠던 '세계화'는 국민들을 속이는 속임수였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이에 발맞춰 OECD에 가입하고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는 등 국민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심어주는 것이 되려 '외화낭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단 말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환상이 94년에 출범한 WTO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고 우리 정부는 그대로 수용했고, 국민들은 갑자기 열려버린 해외여행 자유화에 들떠 '호화 외국여행', '해외송금 자유화', '해외 부동산 매입 장려' 등은 외화유출을 부추기는 꼴이었다. 여기에 기업들의 '부동산 투기''동남아시아 투자 실수'가 대한민국 경제의 재정건전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일본 투자자들이 한국경제에 칼을 꽂는 심정으로 11월 한 달동안 70억 달러나 인출 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유럽 각국들도 한국에 빌려준 돈을 떼일 걱정에 한꺼번에 상환요구를 했고,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끝내 IMF 사태를 맞은 것이다.

누구 탓을 해야 할까? 절박한 상황에 '결정타'를 날린 일본투자자 탓으로 돌려야 할까? 대한민국 경제를 믿지 못하고 한순간에 달려와 돈 갚으라고 요구한 유럽 각국들 탓으로 돌려야 할까? 방만한 투자로 본전도 되찾지 못한 한국기업들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까?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소득 1만 달러'의 환상에 속아 무분별한 해외여행과 해외송금으로 달러를 흥청망청 써버린 국민 탓을 해야 할까? 나는 이런 모든 변수를 예상하고 감안해서 정책을 추진해었야할 막중한 책임을 '김영삼 정부'에게 묻고 싶다. 국가 비전을 어떻게 잡았기에 이 지경이 될때까지 그냥 손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더구나 IMF 총재가 대한민국에 요구한 내용들은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거기다 미국과 일본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IMF가 미국기업과 일본기업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항들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요구했다는 정황을 알고도 왜 막지 못했느냔 말이다. 미국과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제보복'을 당하고 미군철수 따위의 '안보협박'이라도 받고 있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우리 국민들의 고통을 덜 수 있는 방식으로 협상을 했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최초의 문민정부'를 구성하고 '5공 청산' 등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국 경제를 망쳐 먹은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영원히 달게 되었다.

이제 대선은 '경제 살리기'에 돌입했다. 각 후보들간 여론전이 치열했지만, 결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쪽은 '김대중 후보'(40.3%)였다. 2위였던 이회창 후보(38.7%)와는 고작 1.6%(39만 557표)차이였다. 암튼 국민들은 '김대중 정부'에 환호했고, '금 모으기 운동'으로 IMF 조기 졸업을 달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여기에 '햇볕정책'으로 남북평화무드가 조성되었고, 국민들은 다시 '소비의 시대'로 돌아서며 1999년을 보냈다. 그리고 98년에 치룬 지방선거에서 '박근혜 신드롬'이 탄생하면서, 경상도 지역은 거의 '한나라당'이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근소한 차이로 '여대야소'를 유지하긴 했지만, 훗날 '박근혜가 등장하면 승리한다'는 공식이 나타나게된 선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경상도는 '한나라당 텃밭'이 된다. 해묵은 지역감정이 다시 되살아 난 덕분이지만, 당시 여당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홍신의 '공업용 미싱' 발언이 단단히 밉보였던 것이다. 이런 미움이 '김대중도 싫다'는 정서로 확산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편, 요새 '민주당 적통 논란'으로 말이 많은 유시민이 '김대중 당선 불가론'을 내세우며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필패를 예언(?)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발언을 했을까? 이 발언은 그의 책 <97년 대선 게임의 법칙>(돌베개)에 적혀 있단다. "97 대선, 게임의 법칙이 결정한다! DJ의 당선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DJP연합은 득표 효과가 거의 없으며 '정치적 자해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국민회의가 조순 시장을 제3후보로 세우면 승산 있다. DJP연합이 제3후보를 단일후보로 밀면 야권의 승률은 가장 높다. 신한국당 후보 누가 돼도 선거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YS가 미치지 않는 한 내각제 개헌은 없다"고 실려 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유시민과 조순의 특수관계밖에 없을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인 '조순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평소에 했었고, 유시민의 정치적 동지였던 이해찬이 조순 서울시장을 만드는데 1등 공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암튼 유시민이 김대중이 아니라 조순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민주당 적통 논란'을 유발하며 정청래를 띄우고, 이재명을 죽이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암튼 유시민이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유시민을 쭉 지켜봐왔는데, 이번엔 너무 실망했다.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이다.

#리뷰 #에세이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IMF사태 #유시민 #책이있는구석방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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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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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I / 인물과사상사 4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한 번째 리뷰는 세계속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이 안쓰러운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다. 나는 93학번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젊은 20대 시절에 다 겪었다. 물론 잘알았던 내용도 있지만 잘모르고 지나가버린 사건사고들도 엄청 많았다. 그럼 이 시대를 한마디로 뭐라 정리하면 좋을까? '세계화'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다. 대한민국이란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 저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80년대 '3저 호황'의 탄력을 받아 90년대 초반까지도 대한민국 경제는 경제적인 풍요를 만끽했다. 부모세대가 살던 빈곤의 60년대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가난'을 면치 못했고, '중산층'이라 자부하던 부모님이셨지만, 그 흔한 '용돈'도 받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늘 얻어 먹고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그런 풍요를 누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주위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거리에는 '오렌지족''야타족'이 즐비했고, '날라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TV속 연예인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그들은 젊음과 자유를 노래하며 몸을 흔들고 다녔다. 확실히 달라진 풍경이었다. 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했다. 6공화국에 이어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세상은 그닥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으로 인해 과거의 군부독재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소통령'이라 불리던 김현철이 존재했기에 조금은 달라진 양상이라고 불러야 했을까? 암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 관점 포인트 : 90년대는 누가 뭐라해도 '민주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처럼 '군부독재'가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유'를 만끽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보려 했다. 더구나 미국도 1999년까지는 경제성장이 최고조였기 때문에 풍요로운 경제속에서 세계적으로 자유사상이 거리낌없이 퍼져나갔다. 거기다 199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산주의는 몰락하게 되었고, 바야흐로 '냉전 시대'가 종결된 것도 한 몫 했다. 더구나 새천년을 맞이하는 '세기말 현상'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아름답다 못해 퇴폐적인 풍조가 널리 퍼졌고, 하나의 사상에 얽매이기보다는 그저 흥청망청 놀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한민국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런 자유로운 풍요를 완벽히 누리지는 못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94년엔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95년엔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등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이 맴도는 굵직한 사건사고가 해마다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양새였지만,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혼선'을 주어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김영삼 정부는 대북관계를 개선하려 김일성과 여러 차례 회담을 시도했다. 이 회담이 삐거덕거리더니 '서울 불바다'를 거론하며 북쪽의 협박성 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까닭인 즉슨, 북한이 먹고 살기 팍팍해지자 '핵무기 개발'을 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이를 막으려 여러 차례 회담을 시도했지만, 북쪽의 대답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원조'를 확답받으려 했었는데, 김영삼 정부는 이 사안에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북쪽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면서 전쟁 위협까지 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에게 알아서 생필품을 조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수많은 국민들이 시장에 나온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일부는 너무 많이 쟁여놓는 '사재기'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언론은 '사재기'는 망국의 징조라며 국민들이 몰지각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며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무슨 조치를 내렸을까? 그저 관망만 하면서 아무런 대책도, 가이드라인도 발표하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의 사건들도 대동소이했다. 수습하는 것은 언제나 아픔을 겪은 이웃을 도우려는 온국민의 따뜻한 마음 뿐이었다. 그렇게 얼추 수습이 되고 나서야 정부가 나서서 뒷정리를 하는 모양새가 연이어 나왔다. 하지만 그 정도만이라도 하는 정부가 대견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군부독재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이건희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세계화'에 발맞춰 우리 기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반도체 공장을 세우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던 삼성 이건희는 명언을 하나 남겼다.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이다. 그간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인 과거의 군부독재였지만, 90년대 들어 '민주정부'가 앞장서서 뭔가를 하지도 못하고 옛방식만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은 '세계화'에 발맞춰 과감히 투자하고 성장을 계획했지만, 이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정치권이었고, 부실한 행정력이었다. 비단 기업문화에만 후진적인 시스템을 적용했을까? 사회전반적으로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구조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김영삼이 대단한 '정치인''행정가'였을까? 민주화 투쟁의 산증인이긴 했지만, 그밖에 다른 역량은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대통령 신분이기에 국민 모두가 '김영삼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더구나 김영삼은 '고지식'한데다가 '고집'도 쎘다. 이런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다. 자칫 '국정농단'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김현철'이 권력을 명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에 김영삼 대통령 앞에서 '할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소통령'이라 부르며, 그의 영향력이 말도 하지 못하게 드높였다.

나가는 글 : 이런 와중에 대학가는 '한국대학생총연합(한총련)'이 세를 자랑했다.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화'를 이뤘는데 당시 대학생들이 무엇을 바랐기에 이토록 극렬한 시위를 이어갔던 것일까? 바로 '민족통일'이었다. 기성세대는 통일에 대한 염원을 바란다면서도 실질적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이 나서서 민족통일을 말하고, 우리 민족의 장래에 관한 청사진을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애초에 정부가 나서서해야 할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94년에 군입대를 했기 때문에 '대학생 신분'으로 한총련에 가담해 시위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96년에 제대를 한 뒤에 복학을 하니, 대학가에서 시위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한총련'이 거의 와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당시 군내부에서는 '주체사상파(주사파) 색출'을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남공작의 성격으로 학생시위를 이끌거나 참여했던 이들을 뿌리 뽑겠다며 내놓은 조치였는데, 그래서 군시절에 원없이 '반공교육'을 받곤 했다. 국민학교시절에 받던 그 방공교육을 군대에서 또 배웠던 것이다. 이렇게 한총련이 와해가 된데에는 96년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한총련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 빌미가 되어 구속 기소된 400여 명의 학생 가운데 51명이 실형 선고를 받으면서 해체되었다. 북한이 끊임없이 도발을 벌이고 있고, 학생시위대가 문란한 짓을 벌이고 있으니 '학생시위의 순수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국가 안위를 도외시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학생시위를 더는 묵과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이에 한총련은 폭력적인 시위를 거의 하지 못했고, 간간히 집회가 이어졌지만 집회를 하더라도 마땅히 할 것이 없어져버린 까닭에 학생시위는 점차 수그러 들었던 것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때마침 95년에 수출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서자 김영삼 정부는 그대로 공약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렇게 1996년 대한민국은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허나 80년대부터 OECD 가입을 추진했었지만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의견이 더 많아서 미루고 또 미뤘던 것인데, 김영삼 정부는 내친김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듬해 97년에 벌어질 일은 상상밖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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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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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 / 인물과사상사 4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 번째 리뷰는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문민정부의 탄생'과 함께 'IMF 금융위기'로 추락한 9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을 밝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이다. 대한민국의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적어도 지식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허나 우리는 품격 높은 문화를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 아직은 말이다. 그럼 어떤 문화가 주름 잡던 시대였을까? 강준만은 '소비문화'를 꼽았다.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 절제없고 허세가 난무한 그런 시대정신의 승리였던 것이라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덕분에 우리는 무절제한 소비와 향락을 즐기다 'IMF 환란'을 맞이하고 한동안 통곡하고 고통에 겨워 신음했다. 그리고 2000대가 넘어서도 '소비문화'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환란을 극복한 뒤에 무서운 속도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는 2026년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절제보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부를 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관점 포인트 : 1990년 새해 벽두에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맹렬하게 비난을 하던 김영삼도 어느덧 수위를 낮추더니 급기야 정권에 야합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민주계열에서는 '배신'이니 '배반'이니 '치매'라는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가 난무했지만, 김영삼은 노태우가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이는 3당 합당에 협력하고 말았다. 그렇게 김영삼과 김종필이 합당을 해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창당되었고, 이들은 노태우 정권을 수호하는 '보수연합'에 시동을 걸었다. 일설에는 김영삼이 김대중이 이끄는 민정당에 이어 '제2 야당'에 만족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여당쪽'으로 선회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보다는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을 옥죄는 검찰 수사에 항복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더 신빙성이 높다.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서청원의 증언에 따르면,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매수자금을 조사하던 중 그 자금이 '김영삼의 은행구좌'에서 나왔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였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어찌 되었든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서 노태우 정권의 뒤를 잇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고 되려 반격하는 노련한 정치적 셈법을 성공한 셈이다. 물론 여전히 김영삼과 김대중의 맞대결에서 누구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6공화국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런 한계점을 안고 있는 노태우는 김영삼과의 당내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고, 다음 대권은 김영삼에게 물러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93년 대선에서 DJ와 YS 가운데 누가 승리할 것인지가 관건이 되었다. 누가 승리하든 그토록 바라던 '민주정권의 승리'가 예약되었다.

그렇게 시대는 점차 바뀌었다. 신군부가 서슬 퍼런 독재를 펼치던 시대는 저물고 바야흐로 '문민정부'가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억눌려오던 것들이 한껏 뿜어져 나오는 시대를 만끽했던 것이다. 허나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사상'은 뒤쳐지고 있었기에 우리 사회에는 여러 곳에서 '문화지체 현상'이 발현되고 있었다.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내각제'를 추진했지만, 권력자가 되면 권력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손가락 걸고 야합을 하며 '난 대통령, 넌 내각총리'를 약속하지만,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이를 번복하기 일쑤였다. 아니 대통령이 될 것까지도 없었다. 당 대표가 되기만 해도 권력을 나누는 일은 '있었더라도 없던 일'이 되기 일쑤였다.

비단 정치권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온 사회가 천지개벽이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변혁을 보여줬다. 그래서 온갖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그런 자유도 누려본 적이 있어야 제대로 누리는 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신용카드'였다.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도 마음껏 사고 싶은 물건을 쓱쓱 긁고 살 수 있다는 '신용카드'는 한 달 뒤에 엄청난 액수를 청구받으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제 정신을 갖고 있거나 '경제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당장 '신용카드'를 없애고 빚청산부터 한 뒤에 알뜰살뜰한 소비생활을 이어나갔을테지만, 그런 상식을 배운 적이 없었던 세대는 무책임하게 '카드 돌려막기(일명 '카드깡')'로 위기를 해결하려 했고,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는 이자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끝내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혀서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92년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노래를 들은 '기성세대'는 노래 같지도 않다며 폄하했지만 10대, 20대 젊은 세대는 '랩 음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에 신선함을 느끼며 열광했다. 그렇다고 서태지가 추구하는 음악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성세대의 주류 음악과는 뭔가 다른 차원을 보여줬기에 열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가 천박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 이들이 체감하는 색다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누구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얼떨떨해 할 뿐이었다. 그렇게 바뀌는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왜 전율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저 온몸을 던지던 '새 물결'을 만끽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여기에 마광수와 이문열의 '시대관'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92년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직접 쓴 <즐거운 사라>가 음란 시비에 휘말리면서 검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었다.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가 구속 사유였다. 책 내용 가운데 여주인공 사라가 학생 신분으로 대학교수에게 학점을 얻기 위해 목적으로 유혹하고 변태적인(?) 성관계를 하는 내용이 문제시 되었지만, 이 정도 수준의 내용을 가지고 '야한 소설'이란 딱지를 붙일 만한 이유가 있겠느냔 말이다. 정작 문제는 마광수 교수가 평소에 '기성문학'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일삼았다는 점이 대중문학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점이다. 그런 까닭에 정권이 '문학'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검열'하려 할 때 '표현의 자유''문학인들의 동료의식'으로 마광수 교수를 옹호하지 않고 되려 '마광수 씨'라고 호칭하며 외면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당대 유명작가였던 '이문열'은 <시대와의 불화>라는 산문집을 내며 '지식인의 권위주의 문화'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학교수라는 신분으로 그토록 '교육적인 효과'를 강조하던 양반이 그런 야한 소설이나 써대는 꼴을 비아냥거리는 투로 발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평소 마광수 교수의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은 이런 이문열의 비난(?)에 대해 반론을 내놓기도 했다. 마광수 교수는 평소 교수들에게도 "학생은 아랫사람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말하며, 꼰대 지식인들을 비판했단다. 더구나 지나가는 학생과도 항상 깎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아주어서 되려 학생들이 황송해하는 일화를 많이 남긴 교수이기도 했다. 그런 마 교수가 <즐거운 사라>를 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성 풍속도'가 퇴폐적이고 기형적으로 문란한 성접대를 하며 '기생관광'으로 수익창출을 하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도 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그토록 난삽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며 부를 창출하기까지 하면서 지식인과 민주화 투쟁을 하는 이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비난할 자격이 있기나 하느냐?"면서 진정한 '성 자유화'를 논하려면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사라처럼 찐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광수 교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 대략 난감이다. 마 교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죄'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박정희 복고주의'도 단단히 유행했다. 이 시절만큼 언론, 출판, 방송 등 문화 분야에서 '박정희 띄워주기'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남산의 부장들>, 한국일보의 <실록 청와대>, 중앙일보의 <청와대 비서실>, 월간조선 등의 월간지도 '박정희 비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데 열을 올렸다. 또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공개 발언'도 여실했다. 이때부터 공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해댔기 때문이다. 여기에 MBC드라마 <제3공화국>이 절찬 방영하고 인기를 끌었으며, 드라마 중간중간에 '다큐형식'으로 관계자의 증언을 삽입하여 박정희 정권 시절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93년 11월호에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라는 글에서 "그의 장기집권은 권력욕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 조국근대화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거나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상태가 배고픈 상태라면 박 대통령은 인권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이런 발언의 진짜 목적은 '김영삼 폄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김영삼 쪽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정치평론가 고성국은 "필자는 대통령이 이렇게 혹독하게 공격당하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한 정부를 알지 못한다"면서 1년 넘게 연재하면서 현 집권여당과 현 대통령을 비꼬고 있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김영삼 측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암튼 세상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던 것만은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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