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평점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II / 인물과사상사 4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두 번째 리뷰는 김영삼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지로 IMF를 맞이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는 군사문화에 찌든 잔재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하려 했지만, 다시 '구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애초에 '3당 합당'을 하며 노태우 정권의 후임을 자처한 것부터 과거와 단절할 수 없는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 때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면서 민주화 투쟁의 업적을 남긴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군사정권에 오랫동안 탄압을 받으며 그토록 미워하던 그 방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냐면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본 적이 없었는데, 국민들이 갑자기 '민주시민'이 되어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실수를 해도 알맞게 지적을 하며 고쳐나가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영삼 대통령도 과거 박정희가 했던 것처럼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마음을 갖고 대통령 주위에 '충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내쳐버리고 '내 사람'만으로 가득 채워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더구나 고집까지 강하게 부리며 '자기 방식'을 밀어붙이니 여기에 '반론'을 던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실력이 뛰어나보이는 차남 김현철이 눈에 들어왔고, 김현철만을 통해서 '다른 의견'을 듣는 모습을 대통령이 자주 보여주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죄다 '김현철' 앞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일까지 자행하고 말았다. 결국 김현철이 없으면 정국이 돌아가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현철'을 염두에 뒀던 것일까? 자신이 장기집권할 수 없다면 대를 이어서 대통령직을 '세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일까?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 관점 포인트 : 96년도에 들어서자 '한보사태'와 '김현철 사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한보그룹의 정경유착 정황이 낱낱이 드러나고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자마자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이 수두룩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십 억원대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고, 이를 감추기 위해서 얼마나 방만한 경영을...아니 신사업을 투자하는데 '점쟁이'까지 동원했다는 증거가 쏟아져 나오자 정치인과 일반대중을 가릴 것 없이 전국민이 아연실색이 되었다. 아니 정도껏 해 쳐먹었으면 대기업 총수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나오는 증거마다 억 억 거리고 있으니 그걸 뇌물로 받아 정치자금으로 유용했던 정치인은 들킬까봐 숨도 못 쉬었고, 일반대중은 억장이 무너져서 말문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태수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입을 막은 채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한때 '실어증'이 생겼다는 꾀병(?)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변명도 통하지 않자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몰염치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고 말이다.
이에 김영삼 정부에 대한 질타까지 연이어 나왔다. 그 많은 돈을 받아먹고도 국민들 앞에 '떳떳하게' 정치를 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답하지도 못하고 김영삼 정부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여기에 '소통령'에 이어 '문민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차남 김현철에 대한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물러나야만 했다. 김영삼도 등떠밀리다시피 신한국당 대표로 '이회창'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김현철은 정치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게 되어 잠깐이나마 분노를 표출했다고 전한다. 93년부터 96년까지 4년간 김현철은 정치권의 모든 정보를 독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에 있어서 '고급정보 취득'은 생명줄과도 같았기에 김현철은 '1인 안기부'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고급 정보로 그간 뭘 했던 것일까? 심지어 군장성들까지 김현철에게 '충성 맹세'를 한 각서를 작성했다고 하니 거의 못할 일이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도대체 김영삼은 자신의 아들이 이런 짓까지 하고 있을 때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결국 김현철은 대검찰청에 구속수사를 받게 되었고, 언론은 일제히 한보사태와 김현철을 연결지어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거짓말'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김현철이 뇌물수수를 받는 전화통화 내용이 모 병원 CCTV에 고스란히 찍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테이프가 언론에 전달되었고, 김영삼 정권의 총체적 부실이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때마침 '황장엽 망명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노동당 비서관 출신으로 '실세'였던 인물이 중국 북경에서 한국총영사관을 찾아와 귀순을 요청했던 것이다. 황장엽은 북한이 전쟁도발을 준비하고 있으며, 남조선은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라 귀순 배경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정국은 금세 얼어붙었다. 전쟁이라니! 황장엽은 "남조선의 군대와 경찰, 구가기관에 잠입해 있는 적대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면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북측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면 더 큰 우환거리만 되니, 북측의 경제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일체의 경제협력을 봉쇄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왜 하필 이때 김영삼 정부는 '황장엽 망명'을 추진했느냔 말이다. 그리고 황장엽이 쏟아낸 말은 한마디로 '북풍, 그 잡채'였다. 정부여당이 오갈 때 없이 궁지에 몰렸을 때 국민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국면전환용'으로 말이다.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그렇게 잘 써먹었던 '반공노선'과 맥을 같이 한다. 쉽게 말해, 북한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했으니 우리끼리 내분이 일어나서 좋을 일이 없다. 그러니 온갖 의혹이나 정황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일단 덮고,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단결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의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이 달라졌다. 반공정신으로 똘똘 뭉치더라도 통일만큼은 찬성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젠 뒤바뀐 것이다. 통일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거셌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당시 기자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이 있었는데 초등학생조차 '통일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럼 반대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통일되면 거지떼가 몰려올까봐 싫어요"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다. 공산당은 싫어도 통일은 해야 한다던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통일이 되면 '경제적 빈곤문제'가 현실이 될까 두려워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한 측면도 있고, '중산층'의 살림살이가 퍽 여유로워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또 의심스러운 것도 있다. 황장엽은 북한 실세였다. 그의 사상은 '좌파 중에서도 극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 한다는 얘기는 죄다 '극우성향의 입맛'에 딱 맞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황장엽의 심경변화는 뭔가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순'은 김영삼 정부에서도 발견된다.
15대 대통령선거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라 여당의 대선 후보를 정해야 했다. 누구를 내보내야 할까? 신한국당 대표는 '이회창'이었다. 하지만 경기지사였던 '이인제'도 출마를 선언했고, 당시 서울시장이던 '조순'도 출마의사를 내비췄다. 여당의 대표가 3명이나 출마선언을 한 것이다. 이에 김영삼은 누구를 지지했을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여당 대표였던 '이회창'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인제의 출마를 막지 못했고, 조순의 출마에도 그닥 반대하지 않았단다. 이게 뭔가? 김영삼은 차기대선에서 승부를 포기한 것이었을까?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편 야당 대표주자로는 당연히 국민회의 대표 '김대중'과 자민련 총재 '김종필'이 나섰다. 하지만 이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DJP 연합'을 하며 후보단일화에 합의한다.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 단일화를 '3김 정치의 연장'이라고 비꼬면서 어깃장을 놓았다. 하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선 감내해야 했다. 이에 이회창(신한국당 총재)과 조순(민주당 총재)도 '후보단일화'에 나섰다. 그리고 둘이 합쳐 '한나라당'이 탄생한 것이다.
나가는 글 : 이렇게 대선이 한창 준비중일 때, 느닷없이 '경제위기설'이 터져나왔다.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금융공황이 연이어 터졌던 것이다. 3월에 삼미, 4월에 진로, 5월에 한신, 7월에 기아, 11월에 해태, 뉴코아, 12월에는 고려증권이 무너졌다. 시시각각 경제위기에 대한 경고등이 켜지고 있었는데도 김영삼 정부는 경제위기설을 부정했다. 여기에 보수언론도 가세해 '한국 경제 위기 아니다'라는 뉴스를 타전하며 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위기는 곧 닥쳐왔다. 외환보유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단기 외채로 빌렸던 부채의 만기가 다가오자 외국에서는 한국 경제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면서 너도나도 원금과 이자를 내놓으라며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뒤늦게 IMF행을 결정하며 달러 지원요청을 했고, IMF 총재 미셸 캉드쉬 일행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동의서를 요구했다. 빌려주면 빌려주는 것이지 차기 대통령 후보들에게 '각서'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였다. 이를 수용한 김영삼 정부의 무능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경제가 폭망했기 때문에 IMF에 손을 벌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경제는 튼튼한 편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단기 외채'를 한방에 상환할 수 있는 달러보유고가 낮았기 때문이다. 이건 충분히 막을 수 있고, 예방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김영삼 정부의 무능과 더불어 무지까지 탓하지 않을 수 없다. 93년 집권 당시부터 내세웠던 '세계화'는 국민들을 속이는 속임수였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이에 발맞춰 OECD에 가입하고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는 등 국민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심어주는 것이 되려 '외화낭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단 말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환상이 94년에 출범한 WTO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고 우리 정부는 그대로 수용했고, 국민들은 갑자기 열려버린 해외여행 자유화에 들떠 '호화 외국여행', '해외송금 자유화', '해외 부동산 매입 장려' 등은 외화유출을 부추기는 꼴이었다. 여기에 기업들의 '부동산 투기'와 '동남아시아 투자 실수'가 대한민국 경제의 재정건전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일본 투자자들이 한국경제에 칼을 꽂는 심정으로 11월 한 달동안 70억 달러나 인출 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유럽 각국들도 한국에 빌려준 돈을 떼일 걱정에 한꺼번에 상환요구를 했고,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끝내 IMF 사태를 맞은 것이다.
누구 탓을 해야 할까? 절박한 상황에 '결정타'를 날린 일본투자자 탓으로 돌려야 할까? 대한민국 경제를 믿지 못하고 한순간에 달려와 돈 갚으라고 요구한 유럽 각국들 탓으로 돌려야 할까? 방만한 투자로 본전도 되찾지 못한 한국기업들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까?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소득 1만 달러'의 환상에 속아 무분별한 해외여행과 해외송금으로 달러를 흥청망청 써버린 국민 탓을 해야 할까? 나는 이런 모든 변수를 예상하고 감안해서 정책을 추진해었야할 막중한 책임을 '김영삼 정부'에게 묻고 싶다. 국가 비전을 어떻게 잡았기에 이 지경이 될때까지 그냥 손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더구나 IMF 총재가 대한민국에 요구한 내용들은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거기다 미국과 일본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IMF가 미국기업과 일본기업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항들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요구했다는 정황을 알고도 왜 막지 못했느냔 말이다. 미국과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제보복'을 당하고 미군철수 따위의 '안보협박'이라도 받고 있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우리 국민들의 고통을 덜 수 있는 방식으로 협상을 했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최초의 문민정부'를 구성하고 '5공 청산' 등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국 경제를 망쳐 먹은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영원히 달게 되었다.
이제 대선은 '경제 살리기'에 돌입했다. 각 후보들간 여론전이 치열했지만, 결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쪽은 '김대중 후보'(40.3%)였다. 2위였던 이회창 후보(38.7%)와는 고작 1.6%(39만 557표)차이였다. 암튼 국민들은 '김대중 정부'에 환호했고, '금 모으기 운동'으로 IMF 조기 졸업을 달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여기에 '햇볕정책'으로 남북평화무드가 조성되었고, 국민들은 다시 '소비의 시대'로 돌아서며 1999년을 보냈다. 그리고 98년에 치룬 지방선거에서 '박근혜 신드롬'이 탄생하면서, 경상도 지역은 거의 '한나라당'이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근소한 차이로 '여대야소'를 유지하긴 했지만, 훗날 '박근혜가 등장하면 승리한다'는 공식이 나타나게된 선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경상도는 '한나라당 텃밭'이 된다. 해묵은 지역감정이 다시 되살아 난 덕분이지만, 당시 여당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홍신의 '공업용 미싱' 발언이 단단히 밉보였던 것이다. 이런 미움이 '김대중도 싫다'는 정서로 확산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편, 요새 '민주당 적통 논란'으로 말이 많은 유시민이 '김대중 당선 불가론'을 내세우며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필패를 예언(?)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발언을 했을까? 이 발언은 그의 책 <97년 대선 게임의 법칙>(돌베개)에 적혀 있단다. "97 대선, 게임의 법칙이 결정한다! DJ의 당선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DJP연합은 득표 효과가 거의 없으며 '정치적 자해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국민회의가 조순 시장을 제3후보로 세우면 승산 있다. DJP연합이 제3후보를 단일후보로 밀면 야권의 승률은 가장 높다. 신한국당 후보 누가 돼도 선거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YS가 미치지 않는 한 내각제 개헌은 없다"고 실려 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유시민과 조순의 특수관계밖에 없을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인 '조순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평소에 했었고, 유시민의 정치적 동지였던 이해찬이 조순 서울시장을 만드는데 1등 공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암튼 유시민이 김대중이 아니라 조순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민주당 적통 논란'을 유발하며 정청래를 띄우고, 이재명을 죽이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암튼 유시민이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유시민을 쭉 지켜봐왔는데, 이번엔 너무 실망했다.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이다.
#리뷰 #에세이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IMF사태 #유시민 #책이있는구석방 #추천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