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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평점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 / 인물과사상사 4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 번째 리뷰는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문민정부의 탄생'과 함께 'IMF 금융위기'로 추락한 9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을 밝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이다. 대한민국의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적어도 지식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허나 우리는 품격 높은 문화를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 아직은 말이다. 그럼 어떤 문화가 주름 잡던 시대였을까? 강준만은 '소비문화'를 꼽았다.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 절제없고 허세가 난무한 그런 시대정신의 승리였던 것이라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덕분에 우리는 무절제한 소비와 향락을 즐기다 'IMF 환란'을 맞이하고 한동안 통곡하고 고통에 겨워 신음했다. 그리고 2000대가 넘어서도 '소비문화'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환란을 극복한 뒤에 무서운 속도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는 2026년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절제보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부를 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관점 포인트 : 1990년 새해 벽두에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맹렬하게 비난을 하던 김영삼도 어느덧 수위를 낮추더니 급기야 정권에 야합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민주계열에서는 '배신'이니 '배반'이니 '치매'라는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가 난무했지만, 김영삼은 노태우가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이는 3당 합당에 협력하고 말았다. 그렇게 김영삼과 김종필이 합당을 해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창당되었고, 이들은 노태우 정권을 수호하는 '보수연합'에 시동을 걸었다. 일설에는 김영삼이 김대중이 이끄는 민정당에 이어 '제2 야당'에 만족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여당쪽'으로 선회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보다는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을 옥죄는 검찰 수사에 항복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더 신빙성이 높다.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서청원의 증언에 따르면,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매수자금을 조사하던 중 그 자금이 '김영삼의 은행구좌'에서 나왔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였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어찌 되었든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서 노태우 정권의 뒤를 잇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고 되려 반격하는 노련한 정치적 셈법을 성공한 셈이다. 물론 여전히 김영삼과 김대중의 맞대결에서 누구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6공화국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런 한계점을 안고 있는 노태우는 김영삼과의 당내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고, 다음 대권은 김영삼에게 물러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93년 대선에서 DJ와 YS 가운데 누가 승리할 것인지가 관건이 되었다. 누가 승리하든 그토록 바라던 '민주정권의 승리'가 예약되었다.
그렇게 시대는 점차 바뀌었다. 신군부가 서슬 퍼런 독재를 펼치던 시대는 저물고 바야흐로 '문민정부'가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억눌려오던 것들이 한껏 뿜어져 나오는 시대를 만끽했던 것이다. 허나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사상'은 뒤쳐지고 있었기에 우리 사회에는 여러 곳에서 '문화지체 현상'이 발현되고 있었다.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내각제'를 추진했지만, 권력자가 되면 권력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손가락 걸고 야합을 하며 '난 대통령, 넌 내각총리'를 약속하지만,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이를 번복하기 일쑤였다. 아니 대통령이 될 것까지도 없었다. 당 대표가 되기만 해도 권력을 나누는 일은 '있었더라도 없던 일'이 되기 일쑤였다.
비단 정치권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온 사회가 천지개벽이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변혁을 보여줬다. 그래서 온갖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그런 자유도 누려본 적이 있어야 제대로 누리는 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신용카드'였다.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도 마음껏 사고 싶은 물건을 쓱쓱 긁고 살 수 있다는 '신용카드'는 한 달 뒤에 엄청난 액수를 청구받으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제 정신을 갖고 있거나 '경제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당장 '신용카드'를 없애고 빚청산부터 한 뒤에 알뜰살뜰한 소비생활을 이어나갔을테지만, 그런 상식을 배운 적이 없었던 세대는 무책임하게 '카드 돌려막기(일명 '카드깡')'로 위기를 해결하려 했고,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는 이자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끝내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혀서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92년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노래를 들은 '기성세대'는 노래 같지도 않다며 폄하했지만 10대, 20대 젊은 세대는 '랩 음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에 신선함을 느끼며 열광했다. 그렇다고 서태지가 추구하는 음악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성세대의 주류 음악과는 뭔가 다른 차원을 보여줬기에 열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가 천박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 이들이 체감하는 색다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누구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얼떨떨해 할 뿐이었다. 그렇게 바뀌는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왜 전율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저 온몸을 던지던 '새 물결'을 만끽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여기에 마광수와 이문열의 '시대관'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92년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직접 쓴 <즐거운 사라>가 음란 시비에 휘말리면서 검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었다.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가 구속 사유였다. 책 내용 가운데 여주인공 사라가 학생 신분으로 대학교수에게 학점을 얻기 위해 목적으로 유혹하고 변태적인(?) 성관계를 하는 내용이 문제시 되었지만, 이 정도 수준의 내용을 가지고 '야한 소설'이란 딱지를 붙일 만한 이유가 있겠느냔 말이다. 정작 문제는 마광수 교수가 평소에 '기성문학'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일삼았다는 점이 대중문학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점이다. 그런 까닭에 정권이 '문학'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검열'하려 할 때 '표현의 자유'와 '문학인들의 동료의식'으로 마광수 교수를 옹호하지 않고 되려 '마광수 씨'라고 호칭하며 외면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당대 유명작가였던 '이문열'은 <시대와의 불화>라는 산문집을 내며 '지식인의 권위주의 문화'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학교수라는 신분으로 그토록 '교육적인 효과'를 강조하던 양반이 그런 야한 소설이나 써대는 꼴을 비아냥거리는 투로 발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평소 마광수 교수의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은 이런 이문열의 비난(?)에 대해 반론을 내놓기도 했다. 마광수 교수는 평소 교수들에게도 "학생은 아랫사람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말하며, 꼰대 지식인들을 비판했단다. 더구나 지나가는 학생과도 항상 깎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아주어서 되려 학생들이 황송해하는 일화를 많이 남긴 교수이기도 했다. 그런 마 교수가 <즐거운 사라>를 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성 풍속도'가 퇴폐적이고 기형적으로 문란한 성접대를 하며 '기생관광'으로 수익창출을 하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도 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그토록 난삽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며 부를 창출하기까지 하면서 지식인과 민주화 투쟁을 하는 이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비난할 자격이 있기나 하느냐?"면서 진정한 '성 자유화'를 논하려면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사라처럼 찐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광수 교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 대략 난감이다. 마 교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죄'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박정희 복고주의'도 단단히 유행했다. 이 시절만큼 언론, 출판, 방송 등 문화 분야에서 '박정희 띄워주기'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남산의 부장들>, 한국일보의 <실록 청와대>, 중앙일보의 <청와대 비서실>, 월간조선 등의 월간지도 '박정희 비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데 열을 올렸다. 또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공개 발언'도 여실했다. 이때부터 공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해댔기 때문이다. 여기에 MBC드라마 <제3공화국>이 절찬 방영하고 인기를 끌었으며, 드라마 중간중간에 '다큐형식'으로 관계자의 증언을 삽입하여 박정희 정권 시절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93년 11월호에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라는 글에서 "그의 장기집권은 권력욕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 조국근대화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거나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상태가 배고픈 상태라면 박 대통령은 인권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이런 발언의 진짜 목적은 '김영삼 폄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김영삼 쪽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정치평론가 고성국은 "필자는 대통령이 이렇게 혹독하게 공격당하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한 정부를 알지 못한다"면서 1년 넘게 연재하면서 현 집권여당과 현 대통령을 비꼬고 있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김영삼 측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암튼 세상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던 것만은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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