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한국 기업에 거버넌스의 기본을 묻다 서가명강 시리즈 23
이관휘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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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 / 21세기북스 24번째 리뷰] 기업은 '경제의 주체'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국가경제의 기틀이 되는 '경쟁력'도 기업이 그 척도가 되며, 나라살림의 원천이 되는 '세금'도 기업의 경영이익에 따라 더 많이 낼 수도 있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또한 그 양질에 따라 개인의 삶의 질까지 좌우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업은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기업의 목적 또한 '단순한 이윤추구'만이어선 곤란하다.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지구와 국가와 사회와 개인에게 '해악'을 끼치며 벌어들이는 이익이라면, 그런 이윤추구를 하는 기업은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테면, 범죄집단과 다를 바가 없는 기업에 의해 국가운영이 휘둘리고, 그런 범죄집단에서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사회에서 어떻게 맘 편하게 살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는 이윤추구를 한답시고 '공해물질'을 제대로 된 정화장치로 거르지도 않고 배출해서 우리 주변환경을 오염시키는 기업에서 아무리 임금을 많이 받는다고해도 결국 '인간조차'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병들어 고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좋은 기업'이 많아져야 한다. 지구환경을 걱정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사회전반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직장일을 하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개개인의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안정된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기업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럴까?

  그건 '기업의 주인'이 명확하지 않은 까닭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의 '창업주'가 위와 같은 좋은 취지로 기업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경영권'을 유지하며 기업을 끌어나가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기업을 '위기'에서 살리는 일이 기업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버리고, 그러기 위해서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을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살려내고 이윤을 극대화시켜 '좋은 기업'으로 새출발을 하면 된다. 그러나 '경영권'을 지켜내다보면 주주와 채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좋은 기업의 활동으로 이윤추구를 극대화시키는 프로젝트(사업)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주주와 채권자 들이 되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주주나 채권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기업은 '위기' 앞에서 흔들리기 마련이다.

  21세기 들어서 지구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변화, 탄소중립, 원전제로 등등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감마저 들 정도다. 인류가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오면서 이토록 '급격한 환경변화'에 직면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구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인류가 살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50도가 넘는 폭염에,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지는 극한의 추위, 종잡을 수 없는 기상이변은 전세계 곳곳을 홍수와 가뭄, 그리고 야구공보다 더 큰 우박을 떨어뜨리고, 2개 이상의 강력한 태풍과 토네이도가 시도때도 없이 강타하는 등 재앙의 빈도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한 '농작물 생산량의 급감'은 단순히 식량난을 불러오는 것만이 아니라 '경제난'까지 동시에 불러와 사회전반을 뒤흔들고 만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류는 어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엉뚱하지만 '좋은 기업'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경제적 풍요'에 따라 삶의 수준이 결정된다. 바로 대한민국이 '산 증인'이지 않은가 말이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전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한 나라다. 물론 그 경제성장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발생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경제성장으로 인해 '삶의 질'이 개선되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불합리한 점'들을 하나둘 고쳐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통해 그 수준에 맞는 품격을 만들어내는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높은 도덕성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문화선진국'이었기에 뛰어난 경제력에 걸맞는 아름다운 전통을 되살리며 '불의'와 '불공정'을 참지 않는 정의로운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런 대한민국이 앞으로 해나갈 일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바로 '좋은 기업'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일이다. 기업을 지지하는 일은 당연히 '소비와 투자'를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갖춘 경제력으로 '좋은 기업'을 지지하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환경을 개선하는데 적극적인 기업을 지지하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전 국민의 99%가 노동자인 나라가 '노동환경'에 무심하게 되고, 그저 싼 값의 물건, 유명 브랜드에 치중하는 소비나 투자를 일삼게 된다면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처우개선을 하려 들지 않게 된다. 오히려 노동자를 혹사시키면 시킬수록 매출이 늘어나니 더욱더 혹사시킬뿐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환경을 쾌적하게 만들려 노력한다는 기업의 속사정에 관심을 높이면 '기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기업은 자연스럽게 퇴출 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내기업 뿐만 아니라 국외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수입해서 소비하고 '해외투자'하는 기업 가운데 '좋은 기업'을 선별한다는 자세만 취해도 기업문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이윤을 추구한다면 억지로라도(?) '좋은 기업, 흉내'라도 낼테니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구환경'을 깨끗하게 만들려 노력하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소비와 투자를 하게 된다면 전세계적으로 '좋은 기업'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기업의 주인은 '창업주', '주주', '채권자' 일 것이다. 누구 하나라고 하기보다는 '모두'가 기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은 그 '주인'이 바라는대로 운영되기 마련이다. 기업의 경영을 통해서 이윤추구의 극대화시키는데 어느 누가 반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이 운영을 잘해서 해마다 이윤을 빵빵하게 늘려나간다면 누가 주인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만족할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윤배분의 불균형, 불공정이 일어나게 되면 '주인 자격'을 갖춘 이들은 서로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려 싸우려 들 것이다. 기업의 경영이 악화되어 '부도'나 '폐업'을 할 지경에 이르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것이다. 그럴 때는 '기업의 주인이 누구인지' 더욱 신랄하게 따지며 서로 더 적은 손해를 보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거의 대부분이 바로 '그 최선'이었다.

  그러나 기업의 진정한 주인은 '소비자'다. 아무리 좋은 상품(또는 서비스)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없다면 누가 주인인지 따지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기에 기업은 '소비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존재할 가치를 부여하는 이가 진정한 주인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소비자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좋은 기업일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관리감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기업은 바로바로 솎아내야 한다. 그 역할도 소비자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기업들이 그러한 정보를 순순히 내놓을리 없다. 자신들이 좋은 기업인지 나쁜 기업인지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이상, 일반 소비자들이 기업을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좋은 기업'이 스스로 티를 팍팍 내고 있다는 것이 희소식이다. 기업들 스스로 '선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홍보전략을 짜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스스로 기업가치를 높이려 애쓰고 있단 말이다. 이는 과거에 '단순한 이윤추구'만을 하던 기업의 역할에서 한단계 격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일하기 좋은 기업'의 명단을 작성해 언론홍보는 경향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좋은 기업'이 더 빨리 망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면 할수록 '기업활동'하기 힘들어지게 되어 '실적'도 떨어지고, '주가'도 떨어지고, '수익률', '수익성'이 다 떨어저 주주에게 돌아가야할 이득도 현저히 떨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주에게 돌아가야할 이득을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데 써버려서 '배당금'이 줄어들게 된다면, 이를 좋아할 주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업의 진정한 주인인 '소비자'가 깨어나 현명한 투자를 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 당장 나에게 돌아올 배당금이 줄어들지라도 '좋은 기업'이 살아나 더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이 펼쳐져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환경이 개선되고, 노동환경이 쾌적해지게 되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둔 '깨어있는 주인'이 되도록 말이다. 그저 꿈같은 기적을 바라는 몽상적인 이야기 같겠지만, 우리 모두가 '실현'시키지 않는다면 인류의 절멸을 우리 세대가 직접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현실을 맞딱뜨리고서 얻을 '이윤추구의 극대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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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살인자의 쇼핑몰 2 새소설 13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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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X / 자음과모음 40번째 리뷰] 어릴 적 '홍콩영화'에 푹 빠졌더랬다. 그때 들었던 의문은 '홍콩은 범죄도시인가?'였다. 영화마다 범죄를 일으키는 악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연배우는 그런 악당을 천신만고 끝에 철창에 가두는 것으로 엔딩을 장식했다. 이 책 <살인자의 쇼핑몰>을 읽으니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킬러들이 활개를 치는 나라인가?'하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나 소설에서 심심찮게 '범죄'가 벌어지고 '킬러'가 등장해서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솔직히 어색하기 때문이다. '홍콩영화'가 대흥행을 하던 시절의 홍콩시민들도 똑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평화롭기 그지 없는데, 영화나 소설에서는 끔찍한 범죄와 살육이 판을 쳤으니 말이다. <살인자의 쇼핑몰 2>에서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구리'를 배경으로 킬러들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구리에는 '용석동'이 없으며, '킬러'는 더더군다나 찾아볼 수가 없다. 가끔 폭주족들이 한밤에 질주를 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킬러들의 한 판 대결'이 내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암튼, 이런 어려움에도 책의 내용에 몰입을 시도해보면, 두 킬러집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정지안의 대머리 삼촌인 정진만이 운영하는 '머더헬프'와 알렉스 김이라는 용병출신이 운영하는 글로벌 킬러 '바빌론'이 한 쪽이 전멸할 때까지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 2권의 핵심 줄거리다. 두 집단 사이의 원한이라면 정진만과 알렉스 김(한국명 김진영)이 한때 '같은 용병부대 출신'이었는데, 정진만의 돌출행동으로 용병전체가 위기에 빠질 뻔 했는데 정진만의 활약으로 용병전체에 이득을 가져왔다는 것, 그런데 그 이득이 '알렉스 김'을 비롯한 몇몇 용병들에겐 오히려 불편한 것이었고, 정진만의 활약도 눈꼴 시렵게 보일 정도의 원한을 쌓았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억지설정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원한'은 원한이다. 그렇게 악연이 이어져 두 집단은 대한민국에서 '원톱'이 되기 위해 실력을 겨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킬러들이 겨루는 실력이란 바로 서로의 우두머리, 즉 '정진만 vs 알렉스 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빈틈'은 없는 법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러 움직임을 드러내는 서툰 짓은 서로 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만 드러내고 있었다. 정진만은 '쇼핑몰'로, 알렉스 김은 '편의점'으로 말이다.

  쇼핑몰과 편의점의 겉으로 드러난 대결은 '매출경쟁'이었다. 킬러들에게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는 두 집단인데도 공개적으로 오픈하고 있는 상점에선 '일상용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나마 바빌론이 정진만을 암살하기 위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마더헬프'는 소소한 판매실적조차 뚝 끊어지고 쫄쫄 굶고 있었다. 반면에 알렉스 김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선 에어팟만 줄기차게 판매되고 있었다. 물론 편의점에서 판매할 법한 물건이 아니긴 하지만 '편의점'임을 감안하면 못 팔 제품도 아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잘 팔릴 법한 것은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유독 '에어팟'만 잘 팔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중에 밝혀지는 내용이지만, 바빌론은 대한민국에 '마약'을 판매하기 위해, 또한, 대한민국을 거점으로 동아시아에 '마약공급'하는 허브를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에 상륙한 것이다. 물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머더헬프'는 바빌론의 계획을 하나씩 무산시키며 계속 방해를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알렉스 김'은 '정진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쇼핑몰'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정진만을 죽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지난 1권에서 '쇼핑몰'이 얼마나 견고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잘 드러냈기 때문에 '쇼핑몰 안'에 있는 정진만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정진만을 자기 발로 '쇼핑몰'을 나서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하나 뿐인 조카, 정지안을 '표적'으로 삼아 죽이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표적'이 제 발로 알렉스 김이 소재하고 있는 '편의점'으로 찾아가 알렉스 김을 죽이겠다고 나섰는데, 삼촌인 정진만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빌론은 '쇼핑몰'을 떠난 정진만을 쫓으면서 동시에 '쇼핑몰'을 장악해서 파괴할 작정이었고, 거기에 덤으로 정진만의 조카인 '정지안'도 죽여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소설은 없다. 정지안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킬러 수업'을, 다른 킬러들에게 쫓기면서 '속성'으로 학습하게 되고, 단박에 그 스킬들을 습득하면서 '편의점'에 숨어 있는 알렉스 김을 찾아낸다. 그런데 막상 마주친 '알렉스 김'은 의외의 인물이었고, 두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는 '배신자의 정체'가 속속 밝혀지면서 사건의 윤곽도 훤히 밝혀지게 된다. 속고 속이는 사이에 주인공은 번번히 목숨이 사라질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그 때마다 '진실'이 밝혀지면서 주인공은 살아남고, 악당은 하나씩 제거되어 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웬만한 '추리소설'과 '스릴러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법이라 크게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은 없다.

  <살인자의 쇼핑몰>은 분명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적어도 내게는 '대한민국 안에 이렇게나 많은 킬러들이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어색할 따름이지만, 홍콩영화나 미국범죄드라마의 화려한 액션장면에 열광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닥 어색해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색함을 한거풀 벗겨내는 순간부터 이 책의 재미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TV드라마로 방영까지 했더랬다. 그러니 드라마 감상을 먼저 했다면 소설의 내용은 '동영상'처럼 살아 움직이는 장면묘사로 인해 더욱더 매료될 것이다. 아직 드라마는 시청하지 못했는데, 어서 시청을 해보아야겠다. 참고로 드라마의 제목은 <킬러들의 쇼핑몰>이다. 주연은 이동욱. 소설에서는 배불뚝이 대머리였는데, 드라마에서는 미남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장담컨대, 소설보다 훨씬 재밌을 것 같다. 아쉽게도 드라마의 내용은 '소설 1권'의 내용을 다루고 있어 2권의 내용은 '시즌 2편'에서나 나올 듯 싶다. 그리고 '시즌 2편'이 나올 때즈음에는 소설도 3권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무려 이동욱이 주연으로 나왔는데, 제대로 찍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면 '소설 2권'에서 충격적인 엔딩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정진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모든 답은 '과거'에 있을지 모르지만, 독자들이 원하는 답은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3권을 써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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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4 - '프런티어'의 재발견 미국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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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III / 인물과사상사 11번째 리뷰] 19세기 미국의 '프런티어(frontier)'는 '변경'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서점운동'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광활한 서부지역을 차지한 미국 사회에서 '프런티어'는 비문명화가 되어 있는 빈땅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비칠 정도로 미국 백인들에겐 '정체성, 그 잡채'였다. 그런데 1890년 연방정부 국세조사국이 '프런티어의 소멸'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왜냐면 '1평방 마일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을 경계하여 잇는 선을 '프런티어'라고 했는데, 미국이 차지한 동부연안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더 이상의 '빈땅'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내에 더는 개척할 빈땅이 없다는 얘기란 말이다. 미국처럼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가 더는 개척할 빈땅이 없어 '프런티어의 소멸'을 공식선언까지 했으니 미국인들 사이에 어떤 생각이 널리 퍼졌겠느냔 말이다. 지난 리뷰에 언급했던, 미국인은 영토야욕이 없어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고종의 칭찬'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 광활한 땅을 그토록 빠르게 '개척'해 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개척정신'은 미국인들의 자긍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런티어 소멸'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바로 흑인노예의 비참한 삶, 인디언 학살, 그리고 중국노동자 '쿨리'의 끔찍한 노동현실 등이다. 미국 백인들의 만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도, 그런 만행을 '자긍심'으로 탈바꿈시켜 미국의 위대함으로 포장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다. 과연 이런 나라가 '다른 나라의 인권'을 운운하며 간섭을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19세기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르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미국은 아직 본격적인 '제국주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한 때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미 준비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셈이다. 다른 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도 전에 자국으로 편입한 땅, 그것도 하늘의 은혜라고 할 정도로 광활하고 풍부하고 비옥한 땅을 독립한 지 불과 100여 년 만에 모조리 '개척'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프런티어 소멸'을 공식선언한 미국연방은 '서부개척'을 끝으로 개척을 멈추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다 피해를 본 흑인, 인디언, 중국노동자 등을 위해 보상을 마련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내실을 다졌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일 것이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바로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은 드디어 '제국주의'라는 본색을 드러내려 했다. 자국내(?)에 개척지가 마땅하지 않다면 답은 아주 쉽다. 국외로 눈길을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바로 대서양의 진출 관문인 '카리브 해, 쿠바'였다. 마침맞게 쿠바인들이 스페인 본국에 반란을 일으키자 미국은 '독립전쟁'을 일으킨 쿠바 아바나 항에 전함 '메인호'를 정박시키고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그 '메인호'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고, 266명의 해군의 사망(메인호사건)하니 이를 스페인의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두달 뒤, 미군과 스페인군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격전을 벌였고, 스페인군 380여명, 미군 10여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는 미군의 무력시위가 계속 이어졌고, 괌을 무혈입성하는 등 미군의 우세적 행보가 이어지다가 이듬해인 1899년 2월에 미국과 스페인은 '평화조약 비준'을 하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 스페인 식민지 대부분에서 '미군정'이 실시 되었고, 한 달 뒤에 쿠바에서 미군정을 종료하고 독립정부를 설립하며 '카리브해'를 미국이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미국은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며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진정한 '패권국가'로 자리매김하는데도 '프런티어 정신'은 굳건하게 활약하게 된다.

  이와 같은 미국인들의 자긍심인 '프런티어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만 할까? 끝없는 영토야욕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내고야 만다'는 멈추지 않는 에너지로 봐야 할까? 어느 쪽이든 '피해당사국'이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며, 피해를 당하는 쪽은 무조건 '악당'이 되어야 하는 억울함까지 옴팡 뒤집어 써야만 한다. 과연 이런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우방으로서 응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느냔 말이다. 아무리 국제관계가 '힘의 논리'로 결정 지어진다손 치더라도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간 미국의 행보에 대한민국이 딴죽을 걸었던 적은 없었다. 베트남전도 함께 했고, 걸프전도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선 콩고물을 받으며 감지덕지 했던 것이 대한민국의 서글픈 처지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형국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가? 미국도 선뜻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못하는 상황이다. 비록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표방하지만, 내심 러시아와 맞짱을 뜨는 상황이 되는 걸 미국도 애써 피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이스라엘 편만 들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판국에 대한민국이 미국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지지 성명을 내세우며 미국도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미국이 지지하는 쪽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맹목적 지지를 해야만 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미국은 '불리한 상황'에 빠지는 일을 자처할 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런티어 정신'을 자긍심으로 여기고 있는 미국이 '전세계 패권국'이란 자존심을 내버리고 '자국의 이익'만 쫓는 결정을 내릴리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한민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내세우면서 '미국의 결정'에 적절한 선을 긋고 냉철하게 대처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그랬을 경우 '미국의 보복'까지 만반의 대비를 해둬야 한다. 적당한 떡고물을 미국에게 던져주면서 '우리의 이익'을 확실히 챙기는 방향으로 말이다. 우리가 하릴없이 '러시아'와 척을 지을 필요가 없다. 푸틴이라는 꼴통이 불편할 따름이지 '러시아'는 확실히 '우리편'으로 활용할 가치가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라는 균형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이팔 갈등'의 결말은 전세계가 이스라엘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행보는 과거 나치의 홀로코스트(민족대학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이 피해자일 때 전세계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었지만, 저들이 가해자가 된 지금 상황에까지 편을 들어줄 멍청국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마스에 의해 납치를 당한 것은 끔찍한 테러이지만, 그 테러를 빌미로 삼아 '학살'을 저지른다면 정도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이스라엘은 '공공의 적'이 될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미국도 전세계와 함께 인식을 하고 있겠지만,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패권국의 지위'를 상실 당한 것일 테다.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러시아'도, '이스라엘'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의 말한마디에 '무력침공'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이제 더는 미국의 입김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을 전세계가 지켜보았다. 이런 판국에 '프런티어 정신'으로 똘똘 뭉칭 미국인이 함부러 나댔다가는 큰일을 치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중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내뱉어야 할 때다. 이런 와중에 '또라이 트럼프'와 '치매할배 바이든'이 다시 맞붙어 대선을 치루게 된다. 살얼음판을 걷는 미국을 우리는 '어떤 자세'로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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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3 - 남북전쟁과 제국의 탄생 미국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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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II / 인물과사상사 10번째 리뷰] 1882년(고종19년)에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서 서양인들 가운데 예를 안다는 뜻으로 '양대인(洋大人)'이라 존칭했다고 한다. 일본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고 다른 서양국가와도 '불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한 고종은 미국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다. 조선에서 '보빙사(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를 파견할 때만해도 미국의 기업은 큰 관심을 두는 듯 싶었으나 '통역'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사업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지 못한 탓인지 미국의 관심은 금방 시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국 정부도 조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후 1905년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해는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맺고 말았으니,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하릴없이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잡고서 버둥거렸으나, 미국은 조선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는 '국권피탈 이후'에도, '한국전쟁 이후'에도 오매불망 미국만 바라보고 있는데, 미국은 우리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3권의 내용은 미국의 '노예제'와 '남북전쟁'을 주로 다뤘다.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노예해방'을 주장했던 북의 연방군이 승리를 했음에도 흑인노예들의 처지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의 인기도 당시의 흑인들 사이에서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어리둥절할 법도 싶다. 지금도 미국 흑인들의 이름 가운데 '링컨'이란 이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것이 '남북전쟁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아닐지 의심해본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도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인 편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미국사에서 '남북전쟁'을 중요하게 다루는 까닭은 바로 '미국 흑인노예해방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흔히 알고 있기로 미국의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해서 자본주의 시장이 활성화되어 노예보다는 '자유민(노동자)'가 더 필요했고, 남부는 면화, 담배 등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대농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노예'가 더 많이 필요했었기에, 남북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를 중재하려던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선언'까지 하면서 노예제 폐지를 통해 미국의 통합을 끌어내려 했지만, 남부쪽에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거의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북전쟁의 시작은 남부의 연맹군이 아닌 북부의 연방군이 먼저 '선제공격'을 하면서 발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도 '노예제'와 하등 상관이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남북전쟁 초기만해도 북군이 아닌 남군이 더 우세했다고 한다. 왜냐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미군의 군사장교들이 대부분 '남부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란다. 아무래도 장교들은 일반서민 출신보다는 돈 많은 부자나 배운 것이 많은 엘리트 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라, 당시 미국 경제의 부는 거의 대부분 '남쪽 주'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황이 남부연맹쪽으로 유리해지자 북부연방군의 수장인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선언'을 내세우며 불리한 상황을 타계하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술책이었다고 한다. 이건 또 뭔소리고 하면, 애초에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는 70% 이상 영국으로 수출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면 원활한 면화수입을 통해 자국의 산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영국군의 참전'이 있을 거라는 예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남부연맹군이 유리한 상황인데, 영국군까지 연맹군 편을 들게 되면 북부연방군 처지에서 좋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컨은 영국의 참전을 막을 방법으로 '노예해방선언'을 단행한 것이다. 영국이 참전하게 되면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쪽을 편들게 되는 것이라면서, 참전하면 찝찝해지게 만드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만약,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진심이었다면, 연방군의 승리와 동시에 미 전역의 '노예들'을 자유민으로 보장하고, 더 이상의 흑인노예에 대한 탄압이나 폭력, 수탈,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법안을 단호하게 시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링컨은 헌법에 '노예해방'에 대한 언급을 넣는데까진 진척시키지만, 실질적으로 흑인노예들이 처한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서는 거의 '나몰라라'하며 방조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연맹 주에서는 전쟁 패배에 대한 충격과 좌절 따위를 풀기 위해 '흑인을 향한 폭력'을 자행했다. 그 유명한 KKK단원의 활동의 시작이 바로 이 시절이다. 그러나 흑인노예를 향한 폭력은 '인디언의 처지'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북부연방군들의 주요 표적은 남부연맹군이 아니라 '서부의 인디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영토야욕'은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미국 정부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앞세워 '멕시코 전쟁'을 일으켜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을 학살하며 그 땅에 '철도'를 깔아버렸다. 이런 만행은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만연했고,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대륙횡단열차'를 완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까지 사들여 야심차게 '캐나다 영토'까지 차지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자, 영국은 부랴부랴 캐나다를 '영국령'으로부터 '자치독립' 시켜버리고 미국의 야욕을 한풀 꺾어버리게 된다. 이런 미국을 '양대인'이라 추켜세우며, '영토야욕'이 없는 예의를 아는 서양인으로 바라보았으니, 고종의 안목도 형편 없거니와 당시 조선지식인들의 인식수준이 정말로 형편없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정도로 높은 '혜안'을 갖고 있느냔 말이다. 문재인정부 때 다른 것은 차치하고 '외교력'만큼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현 정권인 윤석열정부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못하지만 '외교'를 가장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대통령의 입'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무슨 외교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할 말은 있는지, '한미일 공조'만큼은 탄탄하다고 자랑질인데...글쎄, 고종이 일본에 이어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해놓고서 '한미일 공조, 어쩌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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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살인자의 쇼핑몰 - 강지영 장편소설 새소설 5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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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VI / 자음과모음 39번째 리뷰] 범죄와 폭력을 예술적으로 그린 작품을 흔히 '느와르(noir)'라고 부른다. 검다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인데,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가 '암흑가'를 배경으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으로 표현한 것을 비꼬는 의미로 쓰던 용어였다. 하지만 20년 뒤에 홍콩영화가 액션을 가미해서 '홍콩 느와르'를 선보이며 '킬러들의 사생활'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영화나 소설을 '느와르'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느와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장군의 아들>를 비롯해서 코믹 영화 <두사부일체>, <조폭마누라> 같은 장르가 극장가를 점령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한국 느와르'는 총칼이 난무하기보다 '맨주먹'으로 승부를 내는 색다른 맛을 선보이기도 했다. 허나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 우리 영화도 액션이 화려해지며 총칼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범죄도시>, <아수라> 같은 영화는 피가 난무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등 점점 잔혹한 장면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는 드라마도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여성작가가 쓴 <살인자의 쇼핑몰>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스토리도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만 빼면 그다지 색다른 면모는 없다. 살인자나 킬러가 등장했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 이런 '느와르 장르'가 돋보이기 위해선 '살인자'가 저지른 살인에 정당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색다를까?

  이야기는 시작부터 사람이 죽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아빠와 엄마가 죽고 느닷없이 고아가 된 '정지안'이란 소녀가 등장한다. 이 소녀에겐 삼촌이 유일한 혈육으로 남았는데 묘사된 꼬라지가 영락없는 '백수'다. 그렇게 백수 삼촌과 소녀는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이 삼촌이란 사람이 아주 능력이 없지는 않는 모양이다. 소녀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 생활비를 마련해 오고, 대학등록금에 서울 자취방까지 때가 되면 착착 준비해서 부족한 것이 없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넉넉하지도 않게 딱 필요한 만큼 말이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소녀는 누가 보더라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너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크고 작은 '트러블'은 있기 마련이고, 인생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만나 '맘고생'을 하는 일도 있을 법 한데, 정지안의 주변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그런 사람들이 정지안의 주변에서 말끔하게(?)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었다. 그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삼촌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니 '신원 확인'을 해달라면서 시체안치소까지 방문해달라는 경찰의 연락까지 받았다. 이제 정지안이 믿고 의지할 가족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능력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던 삼촌은 외모도 그저 그랬다. 어릴 적부터 심한 노안으로 중학생때 이미 '30대 밑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탈모도 일찍 시작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머리'가 될 정도였단다. 노안에, 대머리에, 덩치까지 한 덩어리한 삼촘이 난데없이 '자살'을 했다고 하니 온통 의심스러움 투성이였다. 그래도 시신을 확인하니 분명 자신의 삼촌이 맞았다. 정지안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서둘러 장례식을 치뤘고, 시신을 화장을 해서 납골함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삼촌이 운영하던 '쇼핑몰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지안은 삼촌의 납골함을 들고 삼촌이 자주 다녔던 장소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간만에 고향방문을 해서 오랜만에 동네를 돌아다녀보니, 의외로 삼촌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생전에 삼촌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말이다. 정지안은 이것이 의외였다. 삼촌의 생김새가 영락없는 백수에, 술담배에 쩔어서 어디 도박장에나 들락거리는 한량으로만 보였는데, 삼촌은 '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정지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삼촌이 운영하던 쇼핑몰을 둘러보게 되었다. 삼촌이 자살한 장소이기도 했고, 정지안이 '상속'으로 물려받을 재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정지안은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생 남자도 만나게 되고, 수상쩍어 보이는 모습의 30대 여자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삼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백수인 줄로만 알았고, 장사도 드럽게 안 되는 쇼핑몰이라 여겼던 곳이 '킬러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암흑세계의 쇼핑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정지안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살해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하세계의 보스격이던 삼촌이 죽었으니, 삼촌이 무서워서 잠잠하던 뒷골목의 살인자와 킬러들이 정지안을 죽이고, 삼촌의 쇼핑몰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정지안은 졸지에 '암살자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쇼핑몰은 느닷없이 '벙커'로 돌변하게 되었다. 어차피 '무기'는 많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평범한 여대생 정지안이 무슨 수로 '벙커'에서 몰려드는 암살자들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의외의 인물들이 정지안을 '보호'하기 위해 쇼핑몰로 달려왔고, 정지안을 대신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쇼핑몰 안팎에 꼼꼼하게 부착된 '폐쇄회로(CCTV)'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가운데 의문의 인물이 속속 등장하며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리고 삼촌의 자살에 관한 '감춰진 비밀'이 서서히 풀어지면서 암흑가끼리의 대결 상황이 전개되며, 삼촌이 그 암흑가 보스와 맞서 싸우는 '정의의 보스(?)'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삼촌을 죽인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삼촌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니 '시신'까지 확인했으니 죽었어야 마땅할 삼촌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밝혀지는 거대한 음모로 인해 이야기는 점점 스케일이 커지게 된다.

  이 책의 초반부는 너무나도 지루해서 읽다가 덮을 뻔 했다. 하지만 '삼촌의 죽음'과 함께 전개되는 스토리가 점점 흥미를 돋우기 시작하더니,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몰입감'이 장난이 아닐 정도다. 더구나 킬러의 세계라는 어둠의 세계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디테일'해서 마치 대한민국이 킬러들의 천국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거기에 글로벌한 범죄집단이 대한민국을 '아시아 거점'으로 삼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나, 이를 막기 위해 수많은 범죄자들(?)을 적절히 통제해가며 '살인자들'인데도 나쁜 짓은 가급적 삼가고 착한 일을 많이 하도록 만든 인물이 '삼촌'이었다는 설정은 얼핏 '말이 안 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설정이라,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범죄는 범죄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어떤 '정당성'을 갖다 붙이더라도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선한 일'을 한다해도 널리 장려할 일도 아닌 것이다. 프랑스엔 '괴도 아르센 루팡'이 있고, 우리에겐 '의적'이라 불리는 홍길동과 '장길산', '임꺽정'이 있으나, 결국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악한 짓으로 배를 불린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이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며 빼앗긴 재산을 돌려받는다해도 '공명정대한 공권력'이 아닌 '사적인 복수'로 일을 해결하게 되면 더 큰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바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지안의 엄마 아빠도 삼촌을 죽이려는 킬러에게 '인질(?)'이 되었다가 애꿎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도 삼촌은 부모를 잃은 조카에게 사과를 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또 다시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다는 핑계(!)로 조카에게 철저히 비밀로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그 킬러에게 자신조차 당하게 되면서 조카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 이런 일은 자꾸 반복된다. 삼촌을 돕던 '배달원'도 죽임을 당하고, 통신두절로 인해 복구를 하러 현장에 도착한 'A/S 기사'와 마침맞게 우연히 쇼핑몰로 택배를 배달하러 온 '우체국 직원'도 죽고 말았다. 정녕 '살인자의 쇼핑몰'은 대한민국에서 필수불가결한 '필요악'이라도 된단 말인가? 작가는 이런 것에 대한 속시원한 답변도 없이 그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오로지 '흥미요소'로 삼아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글쎄, 필요악에 대한 '당위성'을 적절하게 밝히지 않으면, 독자들을 '설득'할 수도 없게 되고, 결국 독자들에게 '외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권에서는 그 '당위성'이 조금이라도 밝혀지지 않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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