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온다, 미래 식량 와이즈만 미래과학 19
김성화.권수진 지음, 박정섭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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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서스는 <인구론>(1826년)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미래 인류는 식량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물론 19세기 '농업기술'은 소가 밭을 갈던 수준이었기 때문에 20세기에 발달된 '농업기술'과 '유전공학'에 힘입어 21세기까지도 풍요로운 먹거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멜서스의 '식량위기설'은 기우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050년 100억 인구를 돌파할 것이라 예상한 과학자들은 멜서스의 식량위기설을 다시금 주목하기 시작했다. 과연 100억 인구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양의 '곡물과 고기'를 공급할 수 있을까?

 

  결론만 놓고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왜냐면 현재 지구는 빠르게 '농경지'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열대우림에서는 밀림을 밀어버리고 엄청난 지역을 '농경지'로 새로 개척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세계가 '도시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농경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향후 2050년 즈음에는 100억 인구가 충분히 먹을만한 '곡물생산'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을까? 누가 최초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는 유언비어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더 말이 안 된다. 왜냐면 '1킬로그램의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에게 '9킬로그램의 곡물'을 먹여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축을 길러서 맛있는 고기를 먹는 것이 이토록 '비효율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까닭 가운데 가장 으뜸이 바로 '육식'을 즐기는 부자나라 사람들 때문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육식'은 매우 비효율적인 '음식낭비'였기 때문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더 절실히 와 닿을 것이다. 소고기 스테이크 1~2개를 먹는 것은 잔치국수 900그릇을 만들어서 800그릇은 버리고 100그릇만 먹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세계의 농경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기후온난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한마디로 지구가 너무 빨리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에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곡물생산량'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 곡물생산량의 '절반'을 가축의 사료로 쓰고 있단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공학자'들은 '유전자변형옥수수'를 재배해서 부족한 곡물사료를 대체하고 있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옥수수'라는 단일영양소만 섭취하게 되어 심각한 '영양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고 한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골고루 섞어서 먹고 있는데도, 결국엔 '옥수수', 단 한가지의 영양소만 섭취한 꼴이다. 왜 그럴까? 마트에서 팔고 있는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첨가물의 거의 대부분이 '옥수수'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고기'도 영양소로 분해하면 옥수수, '우유'도 옥수수, '콜라'도 옥수수라면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왜냐면 소에게 먹이는 사료를 '값싼 옥수수'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소는 원래 '풀'을 뜯고 살을 찌웠는데 그렇게 자연방목을 하게 되면 살을 찌우기까지 4~5년이나 걸리는데 반해, 좁은 우리에 가둬두고 옥수수사료만 먹이면 14개월이면 충분히 살을 찌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급속도로 살을 찌운 소에서 '우유'를 짜고, 좁은 양계장에서 자란 닭도 옥수수를 사료로 먹고 '달걀'을 낳으며, 엄마돼지도 좁은 우리에 갇혀 새끼돼지를 낳고 옥수수만 먹고 살을 찌워 '햄, 소지지'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옥수수'만 섭취한 인간이 쉬이 '영양불균형'에 빠지고 비만으로 인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게 된 까닭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기'를 대체할 수 음식이 있기는 한 걸까? 가장 좋은 방법은 '육식'을 포기하는 것이겠지만, 인간은 '고기맛'을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내놓은 대안은 '소의 줄기세포'를 배양액에서 '길러내서' 고깃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일명 '실험실 고기'인데, 각종 영양제와 항생제를 먹이고, 불결하고 좁은 우리에 가둬서 기르며, 도축장에서 끔찍한 살육과정을 거친 뒤에 먹게 되는 '고기'보다는 훨씬 깨끗한 '클린 미트'라고 과학자들은 자부한단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마트에 올라올지도 모르겠다. 같은 가격의 '도축 고기'와 '클린 미트'. 당신은 어떤 고기를 선택하게 될까?

 

  도축한 고기든, 실험실에서 기른 고기든 둘다 싫어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단백질'을 보충할 방법은 또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미래식량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인류의 오랜 먹거리, 바로 '곤충'이다. 지금도 우리는 누에나방의 번데기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먹고 있고, 메뚜기를 튀기거나 구워 먹는다. 다른 나라에서도 각종 곤충을 맛있게 조리해서 즐겨 먹고 있으니 인류역사상 아주 오래된 '미래 식량'인 셈이다. 물론, 미래에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곤충을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단백질파우더처럼 '가루 형태'로 만들어서 각종 요리에 첨가해서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곤충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다만 '성분표'에는 나와 있겠지만, 지금도 각종 '가공식품'을 먹으면서 성분표 따위는 잘 보지 않으니 크게 우려할 것은 없을 거라고 예상한다.

 

  암튼, 인류의 미래는 걱정할 것 투성이다. 이 책 <미래가 온다> 시리즈는 바로 그런 불안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유용한 '과학지식'을 선물해준다. 물론 '어린이독자'를 대상으로 펴낸 책이라서 수록된 내용이 깊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나게 엮어낸 것이 특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먼저 읽고 자녀에게 권해주기에도 딱 좋은 책이기도 하다. 또한 '과학'을 어렵게만 느끼는 중고등학교 '청소년독자'에게도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책으로 다가갈 것이다. 현재까지 20권이 출간되었는데, 더 출간할지는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미래를 현명하게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꼭 출간이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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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계사 4 - 여러 문화권의 충돌과 변화 처음 세계사 시리즈 4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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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책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게는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하나는 서양 중세시대의 '황제 vs 교황', 둘은 성지탈환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vs 이슬람교', 셋은 막강한 몽골제국의 '팽창 vs 몰락'을 다루었다. 특히, 몽골의 칭기즈 칸의 대외업적을 시작으로 원나라의 형성과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한국사의 고려시대와, 일본사의 초기 막부시대를 다루며 함께 살펴보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끼리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정답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두 문화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커다란 변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원간섭기의 고려와 몽골, 두 나라는 '서로의 풍습'이 유행을 하며 '몽골풍'과 '고려풍'이라는 형태로 지금까지 서로의 전통문화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권의 충돌과 변화'라는 주제로 역사를 바라볼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 단순히 전쟁의 승패로만 '역사관'을 쌓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테면, 몽골제국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사실만 두고서, 일본의 위대함을 뽐내고, '신풍(신의 바람)' 덕분에 일본이 승리를 거뒀으니 '신이 보호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역사관을 갖고 자란 일본인은 커서 어떤 역사관을 갖겠느냔 말이다. 그릇된 종교관을 갖고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자신의 신앙만 옳고 다른 신앙에 대해선 옳지 않다고 여겨 '이단'을 당연시 여기는 어리석음을 뽐내게 되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무한한 '자국이기주의'를 내세우고, 힘의 논리만 앞세운 '약육강식' 논리로 이웃국가를 요만큼도 배려하지 않는 못된 정책을 일삼게 되고 말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처음 마주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쟁'이라는 아픈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이는 두 문화가 모두 '성숙'하지 못한 결과일 뿐, 어느 한 쪽이 위대하거나 잘나서가 결코 아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지는 '두 문화권의 성장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서양의 중세기사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성지탈환이라는 최우선 목적을 내세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성지탈환은 핑계일 뿐이고, 본심은 '같은 종교'를 믿는 형제국끼리 더는 치고 받기 껄끄러운데 '이교도'를 공격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셈법이 작용한 결과였던 셈이다. 이런 본심이 드러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차 원정 때 '성지탈환'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예정되었던 '기적'이나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복당한 이슬람쪽의 반격으로 인해 4차 원정에서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쪽에 빼앗겼고,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밖의 원정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득이 생기는 곳이라면 '같은 편'일지라도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신앙심 가득한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양쪽이 입은 피해는 끔찍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이렇듯 '큰 충돌'이 있고난 뒤에 벌어지는 놀라운 풍경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기사들의 원정길은 '성지'로 향하는 통로가 되어 서유럽에서 예루살렘까지 왕래가 수월해졌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마땅한 지도조차 없어서 애를 먹었던 것에 비해 '성지순례길'은 더욱 다져졌고, 가는 길목마다 '상권'이 형성되며 두 문화권의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졌고 서로가 가지고 있었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교류가 활성화되니 양쪽 문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 이런 것은 아니다. 몽골의 칭기즈 칸이 '팽창정책'을 펼치며 사방팔방으로 세력권을 확대시킬 시기에는 '몽골군'을 '천벌(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죽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정복지를 다스릴 때에는 '몽골의 풍습'을 강요하였다. 승자의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강요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피지배지역의 전통문화'를 완전히 무시하고서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구나 국가운영을 위해선 수많은 인재가 필요한 법인데, '소수의 몽골인'이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대표적으로 '원나라'가 그렇다. 금나라를 완전정복하고, 남송까지 복속시킨 뒤에 '원'이라고 나라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몽골지배층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뛰어난 인재를 얻기 위해 여러 민족의 우대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그렇게 정복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려 나갔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왜냐면 중국 한족만큼은 철저히 핍박하는 '차별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정복한 지역이 옛 한족들의 땅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로 인해 원나라는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끝내 멸망하고 만 셈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는 초기에는 서로 미성숙한 탓에 전쟁과 같은 큰 충돌을 피할 수 없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긍정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결국 양쪽 문화권이 서로 발전하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물론, 미성숙한 단계에서 성장하지 못하면 갈등은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오늘날에도 끝없는 내전과 폭동, 그리고 테러와 전쟁을 전세계 곳곳에서 겪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음에도 낡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만 할뿐, '성숙한 단계'로 성장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 것처럼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분단국가'로 만든 주변 강대국들조차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면서 자국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계속 우려먹고 있는 상황이다. 딴에는 '평화'를 약속하며 '분쟁의 소지'를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내놓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긴 한다. 하지만 '무한자국이기주의'를 위해서 우리 나라의 평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남과북의 '정치세력'도 이에 편을 들어 서로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민족의 평화'를 위태롭게 만들기는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젠, 우리 모두가 성숙해져야 할 때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펼쳐지고, 그 패거리싸움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하는 상황을 연출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결말은 '전쟁'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큰 충돌의 '전장터'는 언제나 '약소국의 몫'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약소국'처럼 행세하면 안 된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서로간에 갈등의 원인을 빠르게 해소해나가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평화는 미국과 일본의 '노예'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평화는 우리 손으로 직접 거둬들이기 위해 진한 땀을 흘려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쓰디쓴 열매'인 것이다. 하지만 두 열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달콤할지는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 혀끝에만 맴도는 단맛에 빠지는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게 되고, 입엔 쓰지만 우리 건강에는 더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큰 충돌 뒤에는 어김없이 '역사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미성숙함에서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하는 '성장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통을 앓았다고 모두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올바로 배워 크고 넓은 안목을 배우고 깊이 헤아리는 숙고를 익히게 되면 우리 모두가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서양 중세의 '황제 vs 교황'의 대결에서도 알 수 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쪽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양쪽 모두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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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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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이 다 그렇지만, 시작은 늘 뜬금없다.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쓸 수 없는 장르이기도 하지만, '과학'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읽다보면 대강의 얼개가 대충 감이 잡히기 마련이다. 물론 읽는 분들의 '과학지식'에 따라 느낌은 달라지기 마련이겠지만, 나름 공학도인 나에게는 식상한 범주임에 틀림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SF소설'을 윤리도덕적인 관점에서 읽곤 한다. 첨단과학이 등장하게 되면 어김없이 '과학자의 윤리의식'과 '윤리도덕적으로 올바른 과학인가'에 대한 물음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인간을 복제해도 괜찮은가? 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힘든 까닭은 '의학기술'의 발달로 불치병을 고치고, 난치병을 줄이며, 불의의 사고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새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장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러한 첨단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타나게 될 새로운 문젯거리는 정말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골치가 아파오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문젯거리라는 것이 '생명윤리문제'와 '종교문제' 등 첨예한 갈등을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고, 나와 똑같은 복제인간이 '동시간대'에 둘 이상 존재할 경우,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할지, '다른 사람'으로 인식해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어려운 문제를 속속 끄집어내기에 결코 쉽게 다룰 문제는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SF소설'에서는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고 재미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언제일 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어떤 문젯거리를 언급하고 있을까? 바로 '불멸의 삶'을 사는 익스펜더블(소모용 작업자)을 등장시켰다. 가까운 미래에 핵전쟁, 그 이상의 파괴력을 갖춘 '반물질 폭탄(버블)'으로 버블전쟁을 일으킨 인류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거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테라포밍(미개척 행성을 지구환경처럼 바꾸는 일)'을 통해서 외계행성에서도 인류가 거주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선발대를 모아 개척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발전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아시다시피 '거친 환경'에서 개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그런 위험한 작업인데도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까닭에 먼 미래에서도 당연히 '인공지능 로봇'보다는 '우주복을 입은 사람'을 작업자로 삼아 일을 부려먹었다는 설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위험한 일이다보니 종종 '작업자의 목숨'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렇다고 외계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작업자를 탑승시킬 우주선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왜냐면 우주선에 실어나를 '무게'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 '적정수준'에서 감당하기 위해선 '복제인간 기술'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죽어도' 다시 살려내서 일을 시킬 수 있는 '소모용 작업자'를 우주선에 탑승시킨 것이다. 애초에 '소모용 작업자', 다시 말해 '익스펜더블'로 선발된 작업자의 '기억'을 백업시켜놓고,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경우, '다량의 단백질과 칼슘, 그밖의 필수적인 소량의 원소'를 배양액에 넣고, 복제인간을 탄생시킨 다음에 백업한 기억을 다시 주입하면, 죽었던 작업자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나게 된다. 물론, 다시 깨어난 순간에는 지독한 숙취와 며칠은 굶은 것 같은 배고픔을 느끼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잠을 자다 깬 것 같은 몽롱한 느낌이 전부인 셈이다.

 

  하지만 분명 예전과 달라졌다. 처음으로 '익스펜더블'로 선발되었을 때는 '미키1'이라고 불렸지만, 죽음을 거듭하면 할수록 '숫자'는 점점 커지게 되고, 이 책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는 '미키7'이 죽을 뻔한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벌써 여섯 번의 죽음을 경험했고, 이제 일곱 번째 죽을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미키7'을 구해줘야 마땅할 친구조차 미키를 그냥 죽도록 내비두고 만다. 구출작업을 하다가 목숨이 '하나' 뿐인 사람이 덩달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미키를 죽게 내버려두고 귀환을 해버린 것이다. 왜냐면 미키는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키8'으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는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미키7'은 용케 죽지 않고 살아서 기지로 귀환하게 된다. 그리고 되돌아온 기지에서 이제 갓 태어난(!) '미키8'과 '미키7'은 조우하게 된다. 둘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갓 깨어난 미키8은 처음 '복제'했던 그 모습 그대로 건강한 모습이지만,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온 미키7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던 것이다. 거기다 미키7이 저장하지 않았던 '지난 6주간의 기억'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켜주었다. 과연,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빠밤~ 이 정도만 소개하여도 이 책의 흥미로움은 보장되었을 것이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으로 물망에 올렸다는 소문은 덤일 뿐이고 말이다.

 

  그보다는 이 책의 최고 흥밋거리는 다름 아닌 '철학의 문제'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이 먼 옛날에 있었는데, 이 배가 오랜 여정을 거치면서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이렇게 고장이 날 때마다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새것처럼 고쳐나가다가, 이 배의 부품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면,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말이다. 생각을 달리 해서, 테세우스의 배가 고장 났을 때, 하나씩 부품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를 만들었다면, 처음 배와 나중 배는 '같은 배'인가? 이렇게 물었다면 '두 배'는 서로 다른 배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장난 '부품 하나'만 교체했을 경우에는 '처음 배'와 '나중 배'를 '같은 배'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하나씩 교체를 하더라도 '같은 배'라고 얘기할 것이 분명한데, 교체를 하나보니 '예전 부품'은 하나도 없고 몽땅 '교체된 부품'으로 바꿔졌다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여전히 '같은 배'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를 '사람'으로 바꾸어보자. 손가락이 부러져서 '새 손가락'으로 교체했다고 한들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도 여전히 '본인'이라고 말할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여러 번 사고를 당하다보니 몸의 70%를 '새 부품'으로 교체하게 되고, 80%, 90%, 99%를 '새 부품'으로 바꿨다고 가정해보자. 여전히 '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본인의 자아의식은 아무리 새 부품으로 교체했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여기지, '또 다른 나'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과거의 기억'을 모두 갖고 있고, 하나씩 새롭게 교체된 몸이라는 것도 알지만, 여전히 '내몸'이라고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엄청난 사고를 당한 뒤에 단 한 번에 99% '새 부품'으로 완전 교체를 할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때에도 '본인'이라고 인식하게 될까? 사고 당사자는 굉장히 수용하기 힘들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모두 온전히 갖고 있다면 '자신'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무엇이 다 바뀌더라도 '예전의 기억'만 떠올릴 수 있다면, '자기자신'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불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인간의 기억을 온전히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간의 몸'이 무엇으로 대체된다고 한들 '죽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불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쌩뚱맞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과학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 묻겠다. 당신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인 죽음으로 '소멸'될 수도 있겠지만, 생전의 기억을 '저장'하여 불멸의 삶을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물음에는 쉽게 답할 수 있겠는가?

 

  '내 선택'을 말하자면, 조건이 필요한 불멸을 선택할 것이다. 현재의 '생체조직'과 똑같은 '감각'을 유지하면서, 살아생전의 '겉모습'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면 '불멸'을 선택하겠다고 말이다. 나에게 이 두가지는 '필수조건'이다. '나의 감각과 겉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나는 이전과 다른 '또 다른 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나에겐 '똑같은 삶'이 아니니 자연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젊고 잘생기게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삶은 '예전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 또한 '내'가 아니기에 만족스럽지 않다.

 

  나에게 'SF소설'은 이런 식의 철학적 문제를 접근하게 해주고, 미래에 닥칠지도 모르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주기에 늘 만족스럽다. 다음에는 어떤 소설을 만나고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 여러분은 즐겁지 않으신가요?

 

 

  참,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이야기라 고민고민했는데, 제발 '책표지'에서 반짝이 좀 묻어나지 않게 제작하면 안 될까요? 미래를 다룬 책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SF장르의 책'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재질로 제작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손에 들고 읽을 때면 어김없이 손에 반짝이가 묻어나고, 책의 겉표지는 닳아서 번쩍임이 없게 변하고 맙니다. 이럴 거면 애초에 '무광'으로 만들면 되지 왜 빛바랜 책으로 만들어버리냔 말입니다. 더구나 손에 뭐를 묻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책은 굉장히 기피하게 됩니다. 소장용으로 책을 구매했는데 빛바래서 낡은 책이 되고마는 이런 '반짝이 겉표지', 제발 만들지 말아주세요.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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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7-21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리뷰만 읽었는데 왜 이리 재밌게 잘쓰신 거예욧! 전 문과라 이런 이과적 관점의 글은 절대 못쓰겠지만 철학과 맞닿은 문제라는것이 생길 수 있다는 것엔 공감합니다.
근데 전 저의 기억을 가진, 생체조직과 감각, 같은 겉모습이라해도... 홀로 불멸을 살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異之我_또다른나 2023-07-21 23:40   좋아요 1 | URL
후훗~ 재밌게 읽으셨다니 참으로 고맙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문과를 선택하셨군요. 저는 이과의 삶을 살다보니, 제 적성이 실은 ‘문과‘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문헌정보학과‘를 선택해서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하필 돌고 돌아 ‘이과와 문과‘를 두루 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답니다. 현재는 논술쌤이에요ㅋㅋ

저도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직까지 불멸을 실현시킬 방법은 없답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 그리고 생명유전학자들이 연구하고 있긴 하지만 훗날에나 가능할 지도 모르는 방법일 뿐이죠. 현재까진 ‘냉동인간‘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되살아날 수나 있을런지 미지수랍니다. 불멸을 ‘과학적 실험‘으로 성공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아요ㅎㅎ

하지만 상상은 늘 즐겁죠. 그것이 ‘진리의 빛‘인 철학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더욱 뜻깊을테고요. 저는 이런 철학적 공상을 즐긴답니다^^
 
미래가 온다, 대멸종 와이즈만 미래과학 20
김성화.권수진 지음, 이철민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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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금 '대멸종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싶겠지만, 사실이다. 지구의 역사는 46억 년쯤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모두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4억 4500만 년 전 오르도비스기 대멸종, 3억 7000만 년 전 데본기 대멸종, 2억 5000만 년 전 페름기 대멸종, 2억 500만 년 전, 트라이아스기 대멸종, 6500만 년 전 백악기 대멸종, 이렇게 말이다. 대략 1억 년의 간극을 두고 대멸종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페름기 대멸종은 지구 생물종 96%가 사라졌단다. 그러니 '대멸종'은 지구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주 끔찍한 대멸종이었더라도 '지구 생태계'는 결국 다시 복원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대멸종이었던 '백악기 대멸종' 이후로 아직 1억 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대멸종의 징후가 보이고 있단다.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이산화탄소의 농도'다. 다시 말해, 지구의 온도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지구온난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지구의 기온이 서서히 오르고 내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인데, 이번 '여섯 번째 대멸종'은 시기적으로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특징 중의 특징이다. 그 원인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바로 '인간'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의 환경을 급속도로 바꿔 놓고 있다. 지하에 매립되어 있어야 할 '이산화탄소'를 자꾸자꾸 꺼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있었던 대멸종 시기의 공통점은 엄청난 화산폭발로 인해서 벌어졌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백악기 대멸종은 '소행성 충돌'로 인해 공룡이 멸종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멸종 시나리오는 땅속에 잠자고 있던 '이산화탄소'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와 지구의 기온을 끌어올렸고, 그로 인해 그 시대에 번성했던 생물들이 거의 대부분 멸종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지구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면서 '극한 환경'을 이겨낸 생물종이 다시 번성을 이루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지만, 이번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바로 '인간의 절멸'이 분명하리라는 사실이다. 용케 '대멸종'을 견뎌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려 1000만 년을 버텨야만 다시 예전의 온화한 기후로 바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석기시대'보다 못한 생활을 하며 근근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멸종을 막을 방법은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그렇다면 시기를 미룰 수는 있을까? 그 방법은 있을 수 있지만, 참을성이 없는 인간들은 결코 해내지 못할 방법이다. 왜냐면 이제 겨우 풍족한 에너지와 먹거리를 즐기게 된 인간들이 '멸종행 열차'에서 결코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 없는 대멸종인데도 인간은 그 멸종을 눈으로 확인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더라도 결국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최극빈국에서는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잘 사는 나라들'은 이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해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태평양 섬나라들의 비극적 운명을 간간히 소식으로 접하고 있는데도, 인간은 '그들'을 위해 에너지를 아끼고 먹거리를 줄여 '지구 환경'을 되살리겠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지구의 기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잘 살고 있는 나라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겪고 있다. 그런데도 '경각심'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는 '사실'을 감추기 급급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겪게 될 것이 뻔한 이치인데도, 애써 전쟁 등의 '다른 이슈'로 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멸종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본질을 흐리고, 본질을 바꾸고, 그렇게 본질을 외면해버리고서 끝내 '대멸종의 시대'를 직면하게 되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현재의 지구 파괴 속도라면 향후 200년 뒤에는 '여섯 번재 대멸종'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래서 그게 100년 뒤일지, 50년 뒤일지 아무도 장담하거나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제2의 지구'를 찾고, 외계행성을 '테라포밍'하고, 거대한 '돔' 따위를 설치해서 지구인이 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지만, 그렇게 살아남게 된다하더라도 결국은 '소수의 인간'만이 '선별'적인 과정을 거쳐 살아남을 뿐이다. 그러니 궁극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내놓은 방안이 바로 '지구의 절반을 남기자'다.

 

  그곳은 '야생,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언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DMZ(비무장지대)'를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그곳은 1953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무려 70년 동안이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다. 그곳에는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인간의 발자취 또한 '멈춰진 곳'이어서 전세계 인류가 보존할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도 하다. 향후 우리가 통일을 하더라도 '이 지역'만큼은 결코 손을 대서는 안 될 곳이다. 관광 따위의 목적으로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순간, 그 가치 또한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천혜의 보고를 '지구의 절반, 그 이상'으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가 있게 된다. 자연이 되살아날 것이며 지구도 점점 살기 좋은 곳으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실천하면 좋겠는가? 나는 이미 '자동차'를 버렸고, 올여름에는 '에어컨'도 틀지 않을 작정이다. 대중교통과 자전거를 이용하며 탄소발자국을 낮출 것이며, 선풍기와 손부채로 에너지를 아낄 작정이다. 이렇게 하나씩 실천해나가면 분명 변화가 보일 것이다. 지난 '코로나' 시기에도 '이동'을 멈추니 깨끗하고 맑은 하늘을 구경할 수 있지 않았느냔 말이다. 불필요한 공장도 줄이고, 꼭 필요한 자동차만 남기고, 적정한 에너지소비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되면 분명 바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후손은 태어나자마자 분명 '대멸종'을 겪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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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서가명강 시리즈 15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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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는 말했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가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라고 말이다. 이는 역사적 진실을 '사료, 그 자체'로 바라보던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역사적 진실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물론, 역사적 평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내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허나 '역사적 서술'은 역사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사료'를 근거로 삼아 철저한 실증적 검토를 통해 서술해야겠지만, 그마저도 '사람'이 내린 평가인 까닭에 얼마쯤은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는 '편견'이 담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단 한 사람의 평가'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서도 여러 역사가들의 '주관적인 해석'을 포용하다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 '타당한 해석'으로 모아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모아진 '역사적 해석'을 수많은 역사가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고, '검증'해나가다 보면 어느 정도 '해석의 객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더욱더 타당한 해석'이 등장하게 되면 그간의 '역사적 해석'은 보편성을 잃게 되고, '또 다른 해석'으로 귀결되어, 또다시 여러 역사가들이 인정과 검증을 받게 되어 '객관적인 역사적 해석'에 다다를 것이다.

 

  이처럼 '해석'은 역사의 고인물을 걸러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비단 역사에서만 '해석'이 중요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거의 모든 학문에서 '해석'은 중요하게 다루며 '고정불변인 정답'은 없다고 인정하는 바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의 '문학해석'만이 정답인 것이 아니라 그저 대중적인 '일반독자'의 해석일지라도 '설득력'과 '타당성'을 갖추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의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끊임없이 '해석' 받고 있다.

 

  여기 이 책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에는 <데미안>, <젊은 베르터의 고통>, <672번째 밤의 동화>, <변신>, <시골의사> 등 '독일문학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다. 물론 '서가명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이라서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홍진호 교수'의 해석이 수록되어 있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철한 주석이 담겨 있긴 하다. 그렇지만 이미 위에 열거한 책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서울대 교수의 해석'을 읽으면서도 어딘가 미심 쩍거나 그닥 공감이 가지 않은 해석도 읽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서울대 교수'와 '일반 독자' 사이의 간극이다. 문학작품 해석의 재미는 바로 그 '간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게 된 까닭을 거슬러 올라가는 재미를 느낄 수만 있다면 '문학작품'을 즐길 준비가 이미 충만한 독자인 것이다.

 

  이 책은 교수님의 해석답게 여러 '문학사조'와 '장르분석' 등에 따른 이야기들이 솔솔한 재미를 불러 일으킨다. 헤세의 <데미안>을 해석하면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끌여들여 독일 청소년들이 <데미안>을 읽고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 까닭을 설명하면서, 왜 '고전문학'이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지 해석하였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에서는 괴테의 소설들이 '발전소설(성장소설)의 전형으로 독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언급하면서, 그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 효과(모방자살)'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계몽주의'와 '질풍노도'로 풀어내었다.

 

  이밖에도 우리에게 덜 유명한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를 설명하면서 '유미주의'라는 문학사조를 '음식사진'에 비유하며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음식'이라는 본질은 먹어서 소화시켜야 비로소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데, 음식 자체는 '먹음'이라는 행동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져버리고 말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움'이란 본질도 그렇다는 것이다. 유미주의는 예술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둔 까닭에 오로지 '예술, 아름다움, 그 잡채'를 지향하게 되는데, 예술이나 아름다움은 시간, 상황, 유행, 또는 그밖의 변수들에 의해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까닭에 끝내는 '무한한 존재'인 죽음을 찬미하게 되고 만다. 샤르트르는 '인생이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고 말했단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리는 열차를 탔다면서 살아있는 동안에 '선택'이라도 잘해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지만, 결국 종착지는 '죽음'인 까닭에 염세주의적인 미학에 심취할 수밖에 없단다. 유미주의는 바로 이런 경향에 영향을 받아 유행을 했고 말이다.

 

  반면에 카프카의 소설은 '정답은 없다, 오직 해석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라는 총평을 남겼다. 실제로 카프카의 소설들은 무수히 많은 해석을 남겼지만 어느 것 하나 '정답'이라고 할만 한 것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변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아픔이라고 소개했지만, 정설은 아니니 '또 다른 해석'으로 즐겨보시라 하였고, <시골의사>는 더더욱 수수께끼 같은 소설이라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선보였지만, 독자들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시라면서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였다.

 

  그렇다면 '고전문학'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이 책에 '귀띔'이 담겨 있긴 하지만, 곧이 곧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 서울대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고전문학을 해석하시니 '나름, 공식화'하여 다른 고전문학도 그 '공식'에 대입해서 풀어내는 재미도 솔솔할 것이 틀림없다. 허나 공식에 대입해서 '그럴 듯한 풀이'를 해내는 것으로 만족할 필요는 없다. 공식에 기대어 '명석한 풀이'를 해보았으면 '자기만의 경험'이란 필터로 한 번쯤 걸어내어 보길 권한다. 그래야 '나만의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서를 하면서 좋은 문구를 '베껴쓰고' '옮겨적는' 일을 곧잘 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 책' 읽어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베껴 쓴 '유명한 문구'를 읊어대며 자랑하기 일쑤다. 헌데 그렇게 유명한 문구를 아무런 '해석'도 없이 그저 읊어대는 것만으로 좋은 독서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앵무새'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냔 말이다. 차라리 '나의 생각'으로 고전명작을 걸러낸 뒤에 '나만의 생각'으로 거듭난 문구를 말해보는 것은 어떠냔 말이다.

 

  무릇 '진정한 독서'란 이런 것이다. 작품해석도 마찬가지다. 권위 있는 사람의 '해석'은 그저 참고만 하면 그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생각'으로 거듭나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고전명작'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유명한 문학작품을 읽었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런 작업을 하지 않고 그저 '남의 생각'을 외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문학사조니 장르분석이니 하는 것도 '그 당시의 유행'을 참고해서 '나름의 해석'을 내놓은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때는 맞는 해석일지라도 지금은 틀린 해석도 부지기수다. 물론 '훌륭한 해석'은 오래도록 공감을 얻는 것일테지만, 결국엔 '달라진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해석'하길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해석 자체를 즐기다보면 저절로 '문학감상의 실력'도 쑥쑥 오르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즐기면서 해석한 것이 유행을 타면 '문학사조'로 여러 사람들의 공신력을 얻게 되니, 혹시 모르지 않느냔 말이다. 지금 당신의 '해석'이 훗날 '문예사조'로 발돋움할런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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