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세계사 4 - 여러 문화권의 충돌과 변화 처음 세계사 시리즈 4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이번 책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게는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하나는 서양 중세시대의 '황제 vs 교황', 둘은 성지탈환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vs 이슬람교', 셋은 막강한 몽골제국의 '팽창 vs 몰락'을 다루었다. 특히, 몽골의 칭기즈 칸의 대외업적을 시작으로 원나라의 형성과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한국사의 고려시대와, 일본사의 초기 막부시대를 다루며 함께 살펴보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끼리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정답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두 문화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커다란 변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원간섭기의 고려와 몽골, 두 나라는 '서로의 풍습'이 유행을 하며 '몽골풍'과 '고려풍'이라는 형태로 지금까지 서로의 전통문화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권의 충돌과 변화'라는 주제로 역사를 바라볼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 단순히 전쟁의 승패로만 '역사관'을 쌓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테면, 몽골제국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사실만 두고서, 일본의 위대함을 뽐내고, '신풍(신의 바람)' 덕분에 일본이 승리를 거뒀으니 '신이 보호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역사관을 갖고 자란 일본인은 커서 어떤 역사관을 갖겠느냔 말이다. 그릇된 종교관을 갖고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자신의 신앙만 옳고 다른 신앙에 대해선 옳지 않다고 여겨 '이단'을 당연시 여기는 어리석음을 뽐내게 되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무한한 '자국이기주의'를 내세우고, 힘의 논리만 앞세운 '약육강식' 논리로 이웃국가를 요만큼도 배려하지 않는 못된 정책을 일삼게 되고 말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처음 마주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쟁'이라는 아픈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이는 두 문화가 모두 '성숙'하지 못한 결과일 뿐, 어느 한 쪽이 위대하거나 잘나서가 결코 아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지는 '두 문화권의 성장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서양의 중세기사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성지탈환이라는 최우선 목적을 내세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성지탈환은 핑계일 뿐이고, 본심은 '같은 종교'를 믿는 형제국끼리 더는 치고 받기 껄끄러운데 '이교도'를 공격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셈법이 작용한 결과였던 셈이다. 이런 본심이 드러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차 원정 때 '성지탈환'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예정되었던 '기적'이나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복당한 이슬람쪽의 반격으로 인해 4차 원정에서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쪽에 빼앗겼고,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밖의 원정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득이 생기는 곳이라면 '같은 편'일지라도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신앙심 가득한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양쪽이 입은 피해는 끔찍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이렇듯 '큰 충돌'이 있고난 뒤에 벌어지는 놀라운 풍경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기사들의 원정길은 '성지'로 향하는 통로가 되어 서유럽에서 예루살렘까지 왕래가 수월해졌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마땅한 지도조차 없어서 애를 먹었던 것에 비해 '성지순례길'은 더욱 다져졌고, 가는 길목마다 '상권'이 형성되며 두 문화권의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졌고 서로가 가지고 있었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교류가 활성화되니 양쪽 문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 이런 것은 아니다. 몽골의 칭기즈 칸이 '팽창정책'을 펼치며 사방팔방으로 세력권을 확대시킬 시기에는 '몽골군'을 '천벌(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죽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정복지를 다스릴 때에는 '몽골의 풍습'을 강요하였다. 승자의 당연한 권리처럼 행사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강요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피지배지역의 전통문화'를 완전히 무시하고서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구나 국가운영을 위해선 수많은 인재가 필요한 법인데, '소수의 몽골인'이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대표적으로 '원나라'가 그렇다. 금나라를 완전정복하고, 남송까지 복속시킨 뒤에 '원'이라고 나라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몽골지배층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뛰어난 인재를 얻기 위해 여러 민족의 우대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그렇게 정복지를 효과적으로 다스려 나갔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왜냐면 중국 한족만큼은 철저히 핍박하는 '차별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정복한 지역이 옛 한족들의 땅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로 인해 원나라는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끝내 멸망하고 만 셈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는 초기에는 서로 미성숙한 탓에 전쟁과 같은 큰 충돌을 피할 수 없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긍정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결국 양쪽 문화권이 서로 발전하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물론, 미성숙한 단계에서 성장하지 못하면 갈등은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오늘날에도 끝없는 내전과 폭동, 그리고 테러와 전쟁을 전세계 곳곳에서 겪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음에도 낡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만 할뿐, '성숙한 단계'로 성장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 것처럼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분단국가'로 만든 주변 강대국들조차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면서 자국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계속 우려먹고 있는 상황이다. 딴에는 '평화'를 약속하며 '분쟁의 소지'를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을 내놓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긴 한다. 하지만 '무한자국이기주의'를 위해서 우리 나라의 평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남과북의 '정치세력'도 이에 편을 들어 서로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민족의 평화'를 위태롭게 만들기는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젠, 우리 모두가 성숙해져야 할 때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펼쳐지고, 그 패거리싸움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하는 상황을 연출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결말은 '전쟁'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큰 충돌의 '전장터'는 언제나 '약소국의 몫'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약소국'처럼 행세하면 안 된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서로간에 갈등의 원인을 빠르게 해소해나가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평화는 미국과 일본의 '노예'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평화는 우리 손으로 직접 거둬들이기 위해 진한 땀을 흘려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쓰디쓴 열매'인 것이다. 하지만 두 열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달콤할지는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 혀끝에만 맴도는 단맛에 빠지는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게 되고, 입엔 쓰지만 우리 건강에는 더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큰 충돌 뒤에는 어김없이 '역사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미성숙함에서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하는 '성장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통을 앓았다고 모두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올바로 배워 크고 넓은 안목을 배우고 깊이 헤아리는 숙고를 익히게 되면 우리 모두가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서양 중세의 '황제 vs 교황'의 대결에서도 알 수 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양쪽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양쪽 모두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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