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시대정신이 되다 -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 서가명강 시리즈 27
이동신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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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그렇겠지만 '장르'에 흠뻑 빠지면 너무 즐겁다. '시즌제 드라마'를 비롯해서 '수십 편에 달하는 소설'까지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시간이기에 절대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뭔소린고 의아한 분들이라면 '마블영화'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아이언맨>으로 시작해서 <어벤져스 : 엔드 게임>까지 무려 12년(2008년~2019년)의 세월이었지만, 마블팬들에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엔드 게임' 이후에 너무나도 사랑했던 아이언맨, 블랙 위도우, 캡틴 아메리카, 블랙팬서, 스파이더맨이 사라졌을 때 눈물을 펑펑 쏟은 팬도 있었고, 울적한 감정에 빠져 우울감을 호소한 팬도 많았다. 비록 현실의 인물이 아닌 상상속의 캐릭터였지만, 그 캐릭터를 더는 연기할 수 없다는 소식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SF장르에 빠지리라는 걸 상상조차 못했다. SF보다 더 먼저 '판타지장르'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호빗>, J.K. 롤링의 <해리포터>,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이우혁의 <퇴마록>, <치우천왕기> 등을 비롯해서 웬만한 '판타지장르'는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타지물'이 아니어도 '엘프'와 '드래곤', 그리고 '칼을 든 전사(<야만인 코난> 같은 '스워드 앤 소서러 장르')'만 나오면 환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루카스의 <스타워즈>와 스필버그의 <백 투더 퓨처>의 추억을 떠올리며 F. 허버트의 <듄>, A.C.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I. 아시모프의 <로봇>, <파운데이션>, 그리고 P.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비롯한 숱한 SF 소설을 탐닉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SF소설에는 어떤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궁금해서 이 책 <SF, 시대정신이 되다>를 펼쳐들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길, 사실 '판타지'나 '공상과학' 장르의 소설들은 모두 '현실도피'를 위해서 고안된 장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장르소설이 유행을 할 시점은 실제 현실이 고달픈 시기라고 한다. 허나 딱히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신빙성'은 높겠지만, 내가 이런 장르를 좋아한 까닭은 딱히 '현실도피'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판타지'나 '공상과학'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것이지 팍팍한 현실이 괴로운 탓에 뭔가 새로운 활력소를 찾다가 매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해리포터> 소설을 읽던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져들었다거나 <마블영화>를 즐겨보던 20, 30대 젊은이들이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현실도피한 것은 아닐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저 '재밌으니까' 본 것 뿐이다.

 

  어쨌든, '냉전시대'를 맞으며 전세계적인 '공상과학(SF)' 장르가 대유행을 했더란다. 미소가 펼친 우주경쟁시대 속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거둬야만 했는데, 그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기 위해선 'SF' 장르에 대한 대유행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1969년 달착륙에 성공하면서 SF 장르는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기대했던 막상 도착을 해보니 '외계생명체'가 살 수 없는 척박하고 황량한 모습에 관심이 급감했기 때문이란다. 그 전까지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우주전쟁>까지 벌이곤 했는데,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런 상상력이 더는 통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달 착륙 이후에도 화성과 금성 등 생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고, 더 먼 목성과 토성, 그리고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탐사위성을 쏘아올리며 SF 장르는 최대 흥행을 이끌어나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생명체의 흔적'은 찾지 못했고, 오직 지구에만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칼 세이건을 비롯해서 '지적외계인'을 찾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점점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실망(?)한 대중들의 관심을 주목받게 된 것이 바로 '판타지 장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신비한 대상이 필요했는데, 시기적절하게 '판타지 장르'가 그 대상으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2000년대 <해리포터> 등이 대유행을 했던 거란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SF장르는 또다시 흥행을 이끌게 되었단다. 바로 'SF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들이 잇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1900년대에 이미 출간된 소설들이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우리 나라에 상륙하게 되었고, 올드팬들의 추억이 깃들어 있던 소설들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셈이다. 그리고 더는 '우주'를 배경으로 '로켓(우주선)'을 쏘아대지 않는 SF장르가 쏟아지듯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작을 소개하라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같은 암울한 미래사회를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이렇게 SF 장르는 단순히 '상상력'만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불안'까지 담아내며 '문제작'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는 실제로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데서 많은 '공감'을 얻게 된 점이 인기비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SF소설과 영화속에서나마 그런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었는지 분석하며 막연하게나마 현실의 사회문제를 간접적으로 접해보고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해보는 점이 '색다른 맛'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SF적인 상상력'이 왜 필요한지 제시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SF적 상상력'이 필요를 넘어 절실한 시점에 SF 소설에 위기가 찾아왔더란다. '장르소설'은 전적으로 팬덤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대중에게 '팔려야' 소설가가 '더 쓸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더 많이 사주어야 할 대중들에게 '너튜브' 같은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장르소설'이 외면받게 되었단다. 실제로 '장르소설'의 판매량은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고, 대중들은 점점 더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숏폼'에 빠져드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단다. 이래선 결국 'SF 장르'는 다시 침체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우울한 전망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SF 장르를 읽고 'SF적인 상상력'을 키워야 한단다. 왜냐면 '인공지능 로봇' 같은 것이 멀지 않은 미래에 곧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공상'에 불과했던 일이 곧 '현실'이 되는 시점에서 무언가 '대책마련'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시모프가 '로봇 3원칙'과 같은 것을 이미 마련해놓긴 했다. 1원칙,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 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원칙,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물론 '앞선 원칙'이 우선 되어야함은 당근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로봇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한다.

 

  어디 이뿐인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재정립'해야만 한다. 이젠 인간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삶의 터전을 넓히려다 동물의 터전을 보장하지 않으니 당장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대유행하고 말았다. 이젠 '조류독감(AI)'는 해마다 터지며,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다른 동물에 비해 건강하던 돼지마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물론 '항생제'를 먹여 인간이 먹거리 걱정을 하지 않게 할 순 있겠지만 결국엔 '언 발에 오줌누기' 같은 처방일 뿐이다. 언젠간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항생제'가 더 많이 함유된 고기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 동물뿐이랴. 식물까지 확장해서 생각을 한다면 인간이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인류세'를 넘지 못하고 절멸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들 지경이다.

 

  우리는 이런 '지구적인 문제점'을 더 깊은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SF적인 상상력'이 담뿍 들어 있는 소설을 더 많이 접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젠 SF 장르는 '취향'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의무'로 접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과학'적인 공상만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과학으로 연구되어야만 할 것이다. 정리하면, SF 소설이라고해서 우주를 배경으로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모험만을 떠올리지 말라는 얘기다. 물론, 그런 장르의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이제는 우주가 아닌 '지구'에서도 얼마든지 '공상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골소재였던 '시간여행(타임루프)'뿐만 아니라 '남녀의 구분'이 없는 세상, '동식물'이 일체인 세상,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로 더는 지구가 아닌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모든 것이 SF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쓰여진 소설들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를 '사변'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굳이 (외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용어를 써가며 생각하지 않아도, 우린 그냥 '생각'하면 될 뿐이다.

 

  끝으로 SF장르는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듦과 동시에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새로운 장르가 모두 그렇다. 새로 보여주기 때문에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세계에 빠져들면 결국 '낯설었던 것들'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아직 현실에는 '없는' 그런 것들에 익숙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이런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맞이할 미래는 결코 '낯선 것'에 당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슬기롭게 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SF 장르'에 흠뻑 빠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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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언어 - 상 - 논어와 함께 노자, 열자, 장자 읽기 고전 아틀리에 3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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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번역'이라는 일본식 한자표현이 아닌 '뒤침'이라는 우리식 표현이 옳다고 본다. 다른 나랏말로 쓰여진 것을 '옳게' 이해하려면 우리말로 '바르게' 뒤쳐야 온전히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나랏말에는 '있지'만 우리말에는 '없는' 표현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랏말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버스나 컴퓨터 같은 말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려들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태우고 저절로 달리는 커다란 수레'라든지, '번갯불같이 빠르게 어려운 풀이를 척척 해내는 전에 없던 편리하고 유용한 전자장치' 따위로 어색하고 뜬금없이 말만 긴 표현만 즐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뒤침'은 적절한 '풀이(해석)'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외국의 고전이 '뒤침'의 첫 대상이 될 것이다. <고전>의 유용함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니 건너띄면 좋을 것이고, 따져볼 일은 <고전>을 '어찌' 풀이할 것인지다. 서양의 고전은 '논리적인 풀이'를 좋아하니,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서 풀어나가면 '뜻'이 크게 달라질 까닭은 없을 것이고, 각 나라의 '문화'적 특색을 고려하며 풀어나가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나, 동양의 고전은 좀 생각해볼 일이다. 왜냐면 '한자'로 쓰였기 때문이다. 크게 '한중일, 세 나라'가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탓에 오래된 문헌은 거의 대부분 '한자'로 쓰였다. 허나 한자의 쓰임새와 뜻풀이는 서로 다르게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같은 문구'라도 나라마다 뜻풀이가 달랐고. 시대에 따라 달랐고, 심지어 학자마다 서로 다르게 풀어낸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동양의 고전'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풀이(해석)'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책 <치유의 언어 (상)>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저자가 '그런 고민'까지 미리 해준 덕분일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열자의 <열자>, 장자의 <장자>는 각 고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테지만, 이들을 한데 엮어서 우리에게 '고전의 매력'을 흠뻑 젖게 만들어주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참,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한 손엔 유가사상을, 다른 한 손엔 노장사상을 들고서, 옛 사람들의 지혜를 곱씹으면 현대인들의 만성고민도 해결될 묘책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인들은 '부의 넉넉함'을 꿈꾸며 부단히 쫓아가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는 절망만을 느낄 뿐이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시간을 쪼개며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공평과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현실에 분노할 뿐이다. 이런 현대인들이 <논어>만 읽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과 의로 개인의 덕성과 인성을 닦고, 충과 효로 나라(사회)를 바로 잡으며, 평생을 갈고 닦은 지혜로 세상을 평안하게 만드는데 부단히 '자기 채찍질'만 가할 뿐일 것이다. 이러면 끝내 지쳐 쓰러지고 만다. 반면에 무위자연을 노래한 <노장사상>만 읽었을 땐 어떨까? 바쁜 일상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선사하며 '안분지족'으로 저마다 스스로 만족한 삶을 영위하며 '안빈낙도'하는 신선의 삶을 살게 될까? 오히려 그런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모으려 안달복달할 것이며, 그도 안 되면 코인과 주식으로 평생 모은 돈을 탕진하거나, 로또라는 환상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는 '도피처'만 찾는 우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생을 놀고 먹을 돈을 모은 현대인은 행복하게 살까? 현대인 가운데 젊은 나이에 평생 써도 남을 돈을 모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리 없으니 '비정상적인 삶'에 쉽게 유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마디로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허튼 일에 돈을 쓰게 되고 탕진 이후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시 돈을 모을 줄 모르니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기 십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찌 살았을까? 그들도 근본적으로 현대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실은 가혹했고 불공평과 불평등은 더욱 심했으며 세상은 짧은 환란과 긴 혼돈의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 될 뿐이었다. 그 지독한 괴로움 속에서 옛 사람들의 지혜는 돋보였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공맹사상>과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노장사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책 <치유의 언어 (상)>이 말하는 핵심사항이다. 지나고 보니 나도 그랬다. 부지런히 달리다가 지치면 적당히 쉬었고, 쉼에 지쳐 몸이 달아올랐을 땐 미치도록 달리기를 반복한 삶을 살았다. 우리 선조들도 벼슬을 탐할 땐 공자의 <논어>를 파고 들었고, 벼슬을 내려놓을 땐 노자, 장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낙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특히, 풍진 세상을 만났을 땐,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속세를 떠나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가진 것 하나 없음에도 근심걱정하지 않았으니, 그 균형점의 어느 곳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다해도 '마음'이 병들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찾은 셈이다.

 

  물론, 이런 지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삶'에서나 이룰 수 있다. 혼란한 사회속에서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외면하고 저 혼자만의 낙원을 찾는다면 '현실도피'와 다를 바 없다. 더구나 현대인들에게 속세를 벗어난 무릉도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많은 개인이 아프면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다. 그럴 땐 '안빈낙도'에서 탈출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난세를 평정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러 분연히 일어서야 한단 말이다. 그때 바로 공맹사상의 '인의예지'가 필요한 법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특효약은 <논어>, <맹자>에 있단 말이다. 이렇듯 공자와 노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속에 서로를 존경하며 탐하는 사이였단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각자도생'을 외치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병들었기에 그렇다. 옛 사람들의 지혜에서 해법을 찾자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책의 '해석'에 무리가 있다며 딴죽을 걸지도 모르겠다. <논어>를 그렇게 읽으면 안 되고, <도덕경>과 <장자>를 누가 그렇게 읽느냐면서 말이다. 또는 '걍 뒤침말투(직역투)'를 트집 잡으며 저자의 비전문성을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만 번듯하면 '뜻'을 곡해할 까닭이 없다. 시의적절하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따위로 못생긴 주제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한다"고 지적하면, '부적절'한 이가 누군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현재 우리는 '비정상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홀라당 '비정상'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각자도생'이라는 모진 상황일지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정상적인 사회로 치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이 아플 땐 '개인적 치유'에, 우리가 아플 땐 '국가적 치유'에, 모두가 아플 땐 '세계적 치유'에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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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1 최후의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4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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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자면, <3001 최후의 오디세이>는 전작들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매 시리즈를 더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충격'을 선보였던 것에 비해 '최후의 오디세이'는 비교적 잔잔한 마무리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 클라크가 언급한 것처럼 '2001', '2010', '2061', 그리고 '3001'에서 이어지는 줄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류보다 앞선 문명의 산물이었던 'TMA-1(일명 '티코석판')이 지구에서 초기 인류에게 '발견'된 이후 인류가 달에 발을 딛는 순간 '새로운 티코석판'을 발견했고, 인류가 태양계로 확장시켜 눈을 돌리는 순간 '또 새롭고 거대한 티코석판(일명 '큰형')이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에서 발견하는 '순서'로 점차점차 독자들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나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이 그린 '미래'는 오류투성이였다. 작가가 살던 시기는 7080 '냉전시대'였지만, 작가가 그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21세기였기 때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그 시기에서 보았을 때에는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화합을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최후의 오디세이'를 집필하던 90년대에는 느닷없이 독일이 통일하고 구소련이 붕괴를 하는 등 작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뻥뻥 터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최후의 오디세이'는 어떤 면에선 '방향전환'이 필요했었을 거라 짐작이 된다. 더구나 세 번의 밀레니엄을 거쳐 네 번째 밀레니엄 시대를 맞은 '3001년의 지구'는...아니 '우주'는 온인류가 '지구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의 체제 아래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구인들이 이렇게 똘똘(?) 뭉칠 수밖에 없게 된 까닭은 지구인들이 더는 지구에서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속에서도 지구인은 '지표면'에서 살지 않았다. 바로 '인공위성이 돌던 궤도'상에 인공건축물을 만들고, 그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 대에 수없이 많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한 '기술적 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보다 손쉽게 우주로 나아갈 수 있고, 우주 어디서든 머물 수 있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을 거라 작가는 상상했던 것이다. 이른바 '테라포밍(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이나 위성에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지구환경과 비슷하게 조성하는 일련의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테라포밍'은 다각도로 연구되고 있고 현재의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기도 한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46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듯이 가장 가까운 달을 비롯해서 화성과 수성, 그리고 거대한 기체행성들의 위성들을 '테라포밍'해서 지구인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까지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억 년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긴 시간들조차 137억 년전에 만들어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작가 클라크는 비교적 짧은 '1000년'이라는 시간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가능케 한 '작가적 상상력'에 뜨거운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가정'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목성'이 '또 하나의 태양(루시퍼)'으로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코석판'이라는 외계 문명의 결정체가 지구인과, 그리고 '인공지능'과도 결합(?)하여 최고의 지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의 '지적설계론'이 한몫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 클라크는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두고 상상력을 펼칠 것은 아닐 것이다. 티코석판이 '어떤 존재'인지 밝히지 않았기에 독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배경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작가도 '새로운 생명체'가 지구인과 조우하기 위해선 '운명적인 만남'을 주선할 '무엇'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설계)이 필요했을 뿐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특정' 종교가 이야기하는 '종말론'이 전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 클라크의 소설에서는 '지구의 종말'이나 '외계의 침공', 그로 인해 지구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허황된 짓을 전혀 하지 않아 고마울 따름이다. 뭐, 소행성 충돌 따위의 위험인자까지 싹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시나리오는 우주적 관점에서 평범한 일상이고, 이미 지구가 경험한 '사실(팩트)'이니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의 줄거리를 짤막하게나마 소개를 해야 겠다. <3001 최후의 오디세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놀랍게도 1편에서 등장했다가 우주선(디스커버리 호) 밖으로 튕겨나간 프랭크 폴이다. 미친 인공지능 HAL과의 싸움에서 어이없게 소외(?)되었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니 얼떨떨한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렇게 차가운 우주속에서 그야말로 '얼어붙었다가' 거의 1000년 만에 다시 깨어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태양계 안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광활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그 넓고 텅빈 공간을 떠돌다가 기적과 같이 지구로 생환하게 된 셈이다. 신호가 끊긴 인공위성도 찾지 못하는 21세기 과학수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31세기에는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더 기적같은 일은 1000년 가까이 꽁꽁 얼었던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는 '의료기술'일 것이다.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안에 있던 미라를 다시 되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미라클처럼 펼쳐진 것이다. 물론 '미라'와 '동면기술'은 엄연히 다른 방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폴의 기적같은 생환이 벌어진 이후의 묘사들은 살짝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마치 '고대 중세사람'이 오랜 잠을 자다 '현대'에 깨어나서 벌이는 에피소드처럼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이 책이 쓰여진 1996년 당시의 상상력이 그려낸 먼 미래와 현재 2024년에 펼쳐진 현실과 상상하는 미래 '사이'의 묘한 이질감이 집중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30년 전의 독자들은 이 책에 묘사된 이야기에 열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전편에서 다루었던 '지적외계인의 존재', '목성의 대폭발', '에우로파(유로파)의 생명체' 등의 '충격'에 비하면 너무나도 밋밋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31세기 사람들은 모두 '대머리'...아니아니 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기에 이쯤 하겠다.

 

  그럼에도 대작의 결말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인류는 오랜 꿈인 우주로 나아가기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우주정복'과 같은 심술궂은 야망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시의 불빛이 사라진 깜깜한 어둠속에서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이다. 그 까닭은 세이건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다시 우주로 돌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작가 클라크는 우리의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담은 것일테다. 그리스의 지략가 오디세이가 온갖 험난한 모험을 겪으며 기나긴 항해 끝에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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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4 : 무기여 잘 있거라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4
이연호 글, 백문호 그림, 손영운 기획,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 / 채우리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전쟁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 싸워서 승리하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탐욕 때문만이 아니라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기면 '착한 영웅'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승리한 쪽이 언제나 선하고, 패배한 쪽은 늘 사악한 집단으로 매도할 수 있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전쟁을 참 좋아한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고인물이 썩듯' 장기집권의 야욕을 탐하는 순간부터 권력자는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감언이설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고 오직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요행수로 전쟁을 이용할 따름이다.

 

  하지만 전쟁의 끝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오직 '파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승리한 쪽도 수많은 희생자과 파괴된 터전만 남을 뿐이고, 패배한 쪽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오래도록 남긴다. 전쟁 영웅이라고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영웅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테고 더욱더 처참한 고통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터라 제정신을 차릴 새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쟁 영웅'을 추켜세우고,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는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런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도록 방치하고 만다. 왜? '애국자'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을 한 위대한 인물이며, 사악한 적들을 초토화시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낸 위인이라 칭송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적보다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며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분이 철옹성같이 안전하기 이를데 없는 '지하벙커'에 꽁꽁 숨어서 수많은 군장병들을 살벌한 전장터로 내보내 죽어나가는 보고를 받고도, 또 공격명령을 서슴없이 내리는 무자비한 권력가로 활약할 뿐이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전쟁영웅은 '살인자'를 뛰어넘는 '살육자'이며, 전쟁광일 뿐인 이들에게 절대로 권력을 쥐어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들의 단순한 머리로는 '평화'란 자신의 독재에 대한 복종일 따름이고, 자신이 독재자가 되지 못하게 되면 언제든 '영광스런 전쟁'을 통해 권력을 오래오래 이러나갈 생각뿐인 존재들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각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보면 어김없다. 냉전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내전'의 양상들을 살펴봐도 꼭 맞아 떨어질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장에 참전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저마다 자신의 조국이 가장 강하다는 신념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은 전쟁에 뛰어들었고, 각 나라들은 발달된 무기로 인해 수많은 군인들이 전장터의 이슬로 사라지는 충격속에서도 결코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장터의 빈곳으로 '보충병'들을 기차로, 택시로, 심지어 걸어서라도 보급하는데만 골머리를 썩혔을 뿐이다. 후방에 남겨진 사람들도 언제든 기회만을 엿보면서 '참전'을 하려했고, 지리한 전투가 이어지며 교착상태에 빠져 '무의미한 돌격'만을 감행하는 무모한 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시체들이 쓰러져 넘어진 '똑같은' 그곳에 쓰러져 생을 마감할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달라졌을까? 달라진 것은 '대량살상무기'의 가공할 위력뿐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양상은 똑같았다.

 

  이 책 <무기여 잘 있거라>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20살의 젊은 헤밍웨이는 '전쟁영웅'이 되고자 참전을 희망했고,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어찌어찌 고집을 피워 '구급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전장터에서 포탄의 피격을 받고 부상을 당한 뒤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게 되었고, 그 참혹함을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녹여내었다. 정녕 '전쟁'이 무엇이길래 수많은 젊은이들을 참전하게 만들고, 거기서 무슨 일을 당했길래 정반대의 '반전'을 외치게 된 걸까? 헤밍웨이는 무려 다섯 번의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는 소설에 그런 경험을 제대로 살려내 '허무주의' 가득한 현대의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바로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거야!'였다.

 

  하긴 권력을 탐한 야심가들은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자'로 변신을 하여 한몫 단단히 챙겼지만, 그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사람을 죽인 경험, 부상을 당해 평생 불구가 된 경험, 그리고 숱한 씻지 못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아픔을 안고 돌아와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험 따위를 생생하게 전해듣고서, 결국 '전쟁'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회의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회의감은 곧 '허무주의'로 빠져들게 만들면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누리며 살길 바라는 나약한 존재로 만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 책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데릭이 그런 '허무주의'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자발적인 참전으로 '영웅적인 부상'을 당한 주인공이 훈장까지 수여하며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지만,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결국 패배의 불명예를 안고서 퇴각하는 길에 '전쟁의 무상함'을 느끼고 끝내 탈영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죽음뿐이라는 허무함이었다. 프레데릭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탈영한 신분을 숨기고 스위스로 도망가서 아내 캐서린과 함께 했던 몇 달뿐이었다.

 

  그런 20세기 허무주의를 딛고서 21세기를 맞이한 이들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뛰어들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이란 탐욕에 눈 먼 '독재자'들만이 전쟁을 외칠 뿐이다. 이제 똑똑해진 시민들과 현명한 민중들은 그딴 독재자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다만, 미래비전 따위도 없이 그저 '그들만의 천국'을 꿈꾸는 영혼없는 정치인과 추종자들만이 그런 독재권력을 옹호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가짜언론들까지 '그들만의 게임'에 참여하며 전쟁을 통해 영욕을 채우려는 검은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물론 그런 '거짓'에 속아넘어갈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주 '적은 표 차이'만으로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나니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을 따름이다. 팬데믹 시대에도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안전한 대한민국'이 어쩌다 '각자도생'을 외칠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이제라도 제정신을 차리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헤밍웨이의 말마따나, 무기여, 잘 있거라~ 전쟁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면 '이득'을 보는 건, 오직 독재자와 그를 옹위하는 소수자들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승전국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잡힐 뿐이고, 패전국은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될 뿐이다. 그렇게 승전국과 패전국 '국민들의 무덤' 위에 쌓은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길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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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8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8
이충환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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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나 읽지 못하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 책 속에 담긴 내용이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벽돌책'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두께와 쪽수를 자랑하는 까닭에 좀처럼 읽기 꺼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렵고 난해한 내용을 한 번이라도 접해보는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보이는 까닭에 '고전'은 꾸준히 사랑받아 왔고 오래도록 '읽어야 할 책'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고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왜 없겠는가. 지금껏 수많은 선배독자들이 '고전'을 먼저 접하고서 최선을 다해서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게 풀어내려 엄청나게 노력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쫌만 발품을 팔다보면 <고전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중에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선보인 '지적 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시리즈가 있다.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그 내용이 참으로 '수준급'이고, 빠르게 완독할 수 있도록 분량도 '종이책 100쪽 분량' 안팎이라 누구라도 쉽게 읽고 교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 내용을 음미하며 읽는 '정독 독서가'라면 30분만에 독파하기는 힘들 것이고, 책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길 좋아하는 '속독 독서가'라면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참고 삼아, '정독 vs 속독'의 장단점을 비교하자면, 정독은 '기억'에 오래남기는 장점이 있는 반면 완독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강박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속독은 '전체 내용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아주 탁월한 방법이자, 원하는 내용만 골라 읽을 수 있는 발췌독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독서법이지만, 책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이 금세 휘발되어 사라져버리는 단점도 있다. 이렇게 장단점이 다양한 만큼 '어느 방법'이 더 좋으냐는 물음보다는 '필요에 따라' 어떤 독서법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판단이 더욱 현명할 것이다. 유의할 점은 '독서는 절대 강요해서는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이는 '독서법'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독서법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이 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그 유명한 <코스모스>의 '축약본'이라고 해도 좋다. 다른 고전책에 비하면 책 내용이 어렵지 않고 재밌기로 유명한 책인데 유일한 단점은 '두껍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매한 분들'은 많지만 '완독한 분들'은 그닥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쉽고 재밌는 책을 '완독'의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포켓북 버전'이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지 이 '지대30분고전' 시리즈는 eBook으로만 출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예쁘고 깜찍한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이 되었어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부담없이 수준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요즘에는 누구나 손에 들고다니는 '스마트폰'이 있으니 전자책으로 나온 것도 시기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긴 '종이책'을 여전히 좋아하는 나조차 요즘에는 부쩍 '전자책'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노안이 찾아와서 '작은 글자'가 잘 뵈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그렇지 않다고 깨톡을 날리는 모양이다.

 

  암튼, 책의 내용은 이렇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주를 친숙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나사에 몸을 담고서 참여한 프로젝트만 59년 마리너 계획(금성), 69년 아폴로 계획(달), 72년 파이어니어 10호(목성), 73년 파이어니어 11호(토성) 계획, 75년 바이킹 계획(화성), 77년 보이저 계획(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직접 참여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미국 나사는 그의 뜻을 기리며 꾸준히 우주탐사를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우주를 친숙하게 만들어준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아서 모든 프로젝트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찾아 헤매곤 했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읽으면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로 찾아올 외계인에게 "여기에 지구인이 살고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력 또한 느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보이저 호'에는 혹시 만날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메시지'가 황금 레코드에 실려 지금도 태양계 밖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이 보이저 호에는 '한국어' 메시지도 담겨 있어 한국의 7080세대 가운데 '천문학자'를 꿈꾼 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안타깝게 성적이 살짝 모자라서 '천문학도'는 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코스모스>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주의 신비'를 파헤쳐주는 동시에 '어딘가에' 꼭 있을 외계인의 존재를 찾으려는 세이건의 노력이 담뿍 담긴 책이다. 그래서 그 방대한 내용을 탐독하다보면 누구라도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현재까지 태양계 안에서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한 바는 없으며, 지금까지 관측한 결과에서도 '외계인의 존재'는커녕 지구 행성 말고 다른 곳에서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폐기처분해야 할 책일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왜냐면 우주가 너무나도 넓기 때문이다. 77년에 쏘아올린 보이저 호조차 2024년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이저 호가 명왕성의 궤도를 벗어나 더 멀리 날아가긴 했지만, 태양계의 범위 안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트 구름'에 이제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 구름을 벗어나는데만도 지금까지 날아간 거리만큼 더 멀리 나아가야 겨우 '태양계 밖으로' 나가 항성과 항성 사이의 '텅빈 공간'에 접어들게 된단다. 이렇게나 큰 태양계조차 '우리 은하'에 비춰보면 조그만 점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 은하를 포함한 '은하단'에 견주면 깨알 같은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는 범주일 뿐이며, 온 우주에 비하면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우주인 셈이다. 이렇게나 넓고 넓은 우주에서 오직 '지구 행성'에만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비효율적인 '공간낭비'냔 말이다. 바로 칼 세이건이 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를 연구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곳에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적능력은 '지구밖까지' 뻗어나가고 있는데, 우리보다 훨씬 더 지적능력이 뛰어날 것이 틀림없는 '외계인'들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구 행성'에서만 갇혀 있다면 우리는 지적인 생명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한 장면처럼 운명적인 만남을 성사시켜야 할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숙제검사'를 할 존재는 없다. 그러나 숙제를 꼭 검사받는 맛으로 하는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생애를 통해서 오직 이것 '숙제'를 하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숙제'를 하다 뜻하지 않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태양계 개발'을 통해서 인류가 지구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달'이 될테고, 그 다음엔 화성, 수성, 그리고 커다란 행성의 위성들에도 정착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외계인'과도 조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도 비로소 '우주마을'로 축소되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칼 세이건의 꿈이 담긴 <코스모스>에 오롯이 새겨진 것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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