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킬링 조크 BATMAN The Killing Joke : 디럭스 에디션 The Deluxe Edition (양장)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앨런 무어 지음, 박중서 옮김, 브라이언 볼런드 그림 / 세미콜론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흔히 '코믹스 ' ,'코믹 이슈' , '코믹북' 정도로 불리웠던 미국의 만화가 '그래픽 노블' 이라는 고급스러운 명칭을 얻은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의 만화는 주로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발전해 나갔다.

글과 그림의 조합이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할때 훨씬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입각한 실용주의의 서양식 사고방식다운 접근이다. 광고선전물과 교육자료등으로 발전한 미국의 만화는 그 틀 안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붐을 일으켰던 '슈퍼 히어로' 들의 등장도 그 안에서 멤돌았던 것이다.

망토를 입은 초능력자들은 말 그대로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고있는 무적의 사나이들이었고, 만화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했다.

 

1980년대 말기, 프랭크 밀러, 앨런 무어, 존 히긴스등으로 대표되는 몇몇 천재적인 스토리 텔러들이 등장했다.

미국 대중문화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온갖 경의를 담아 '미치광이'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정도로 보통 작가들이 상상할 수 없는 관점으로 '문학예술' 의 범주 안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조망했던 것이다.

 앨런 무어는 일찌감치 'V 포 벤데타' '왓치맨' 등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직유에 가깝게 만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고, 프랭크 밀러가 재창조해낸 배트맨은 망또를 걸친 강력한 사나이에서 어렸을때의 트라우마와 인간적인 고뇌를 안은 남자로 재창조 되었다.

이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은 현실을 그대로 담아놓은 도시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슈퍼 히어로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배트맨' 은 미국 내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기있는 캐릭터이다.

아니, 캐릭터라기 보다 '인물' 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위인' . 즉 '히어로' 인 것이다.

배트맨과 슈퍼맨은 미국 안에서는 단순히 캐릭터의 가치를 넘어서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메타포이자, 심볼이다.

 

1980년대의 스토리 텔러들은 배트맨의 이중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검은 가면을 쓴 냉혹하고 강력한 징벌자이지만, 가면을 벗으면 그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부잣집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은 가면은 그의 정체를 가려줌과 동시에 연약함을 가려주는 장치가 된다.

그런 그의 이중성은 인간다움 그 자체였다. 익명성에 가려 악당들을 처단하지만, 검은 마스크가 대변하는 그 익명성이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안에 내재되어있는 악마성을 불어 일으키는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브루스 웨인' 으로서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는 분노와 증오를 잉태하고, 그것은 당연히 폭력을 낳는다.

'배트맨' 이 가지고 있는 정의감으로 간신히 분노와 증오를 어느정도 제어하고 있지만, 이 균형은 언제나 위태롭다.

 

프랭크 밀러는 배트맨의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의 탄생에 집중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중성이 있고, 그 감정의 분화에는 마땅한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이 평탄한 인생을 버리고, 마스크를 쓴 두얼굴의 사나이로 살며, 밤마다 온 몸이 상처와 멍투성이가 되며 악당들을 사냥하는데는 보다 설득력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배트맨 '이어 원Year One' 이라는 작품이 탄생했고, 비로소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고, 현실성을 획득하기 시작한다.

그 작품 안에서 마스크를 쓴지 얼마 안된 초기의 배트맨은 밤마다 악당들에게 쥐어 터지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으며 아슬아슬한 시간들을 보낸다. 이런 배트맨의 인간적인 모습에 수많은 팬들은 실망했지만, 또다른 수많은 팬들이 생겨났다.

또한, 늙고 은퇴한 배트맨의 모습을 그려낸 ' 다크나이트 리턴즈' 와 '다크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같은 작품들을 통해 보다 더 현실적인 배트맨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시도가 한 발 나아간 작품이 바로 이 작품, '킬링 조크'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트맨' 의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조커' 이다.

놀란감독의 '다크 나이트' 에서 히스레저가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열연했던 바로 그 하얀 얼굴의 광대.

조커는 배트맨의 이중성 중, 악마성이 현신한 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배트맨이 지키는 '선line' 은 '살생' 이다. 그는 아무리 증오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라고 할 지라도 절대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는다.

이미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악당들을 징벌하는 배트맨은 스스로가 어둠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는 악당과 영웅의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걷고있다. '사회' 의 시스템이 이미 모든 악을 처단할 수 없음을 인지한, 시스템 밖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한 발만 내딛으면, 더이상 그에게 악당과 영웅의 경계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것이다.

그리고 그 선이 바로 살생. 살인인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조커는 배트맨이 가지고 있는 그 '선' 을 언제나 교묘하게 조종한다.

'나만 죽이면 1000명을 구할 수 있어!'

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조커는 배트맨으로 인해 점점 더 악랄한 범죄를 구상하게 된다.

배트맨은 항상 조커를 잡지만, 결국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조커는 언제나 법정에서는 정신분열을 이유로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받지 못하고, 정신병원 수용 정도의 형량만 받는다.

천재적인 범죄자인 조커는 언제나처럼 정신병원을 탈출하여, 악랄한 범죄를 구상하고, 배트맨을 괴롭힌다.

 

50p에 지나지 않는 짤막한 이 작품은 그런 '조커' 의 탄생을 재해석하고 있다.

히어로가 등장하는 그래픽 노블 중에서도 보기 힘들정도의 단편이지만, '배트맨' 이라는 캐릭터를 언급할때 '꼭 읽어야 할 작품'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작중의 명작이다.

'조커' 라는 인물의 탄생을 그려냈다는 부분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코미디언인 지구상 최악의 악당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역사 뿐 아니라, '그래픽 노블' 이라는 장르 전체를 봐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만화 생산 시스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식 망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들은 '캐릭터' 가 가지고있는 상업성에 주목했다.

캐릭터의 탄생배경, 가지고 있는 특수능력, 디자인의 독창성, 이름등을 하나의 '상품' 으로 규정하고 회사가 소유했다.

그리고, 이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들을 만들어 줄 작가들을 고용한 것이다.

물론 가장 처음에는 이야기와 인물이 함께 있었지만, 그 후부터는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위한 이야기가 구상되었던 것이다.

배트맨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이야기를 쓰는 작가에 따라 배트맨은 항상 조금씩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 고담시에 사는 검은 마스크를 쓴 재벌 브루스 웨인 ' 이라는 설정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주변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커나 펭귄, 캣우먼, 포이즌 아이비, 하비 덴트 같은 익숙한 인물들이 모두 등장은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악당이 되었는지, 어떤 성격이며, 외모는 어떤지 매번 달라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첫번째 배트맨이 등장한지 십수년이 지나자, 수십종류의 배트맨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고담시에 살고있었고, 박쥐모양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스크를 벗으면 재벌인 브루스 웨인이었다.

결국 '배트맨' 이란 캐릭터를 소유한 회사는 이 세계관을 정리하고 하나로 묶을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 캐릭터가 아닌 '악당 캐릭터' 의 정립 역시 시도된 셈이다.

 

미국의 히어로 만화에서 악당 캐릭터는 일회성이었다.

누구도 악당의 성격이 어땠는지, 그 기원이 어디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히어로에게 어떤 식의 고통을 주며,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 응징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킬링 조크' 를 통해 악당들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와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처음의 조커는 별 다를 것 없는 아주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내를 잃고, 우연한 사건에 어이없이 휘말리면서 내재된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과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사실적이다.

물론 앨런 무어의 뛰어난 시나리오도 좋지만, 최고의 작화가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브라이언 볼런드의 그림도 아주 기가 막히다.

그의 작화는 그야말로 그래픽 내러티브의 교과서적인 장면들을 그려낸다.

컷, 구도, 앵글. 그야말로 정석적인 화면연출을 구사하는데, 일본 만화와는 다른 '정련' 되고 '제련' 된 섬세한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수많은 작품들이 '그래픽 노블' 이라는 이름을 달고 국내에 정식 발매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역동적이고 찰나적인 만화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에겐 한 컷 한 컷을 세심하게 '읽어' 야 하는 그래픽 노블은 절대적인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미 수십년동안 역사를 만들어온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일회성 프로젝트로는 그 매력을 충분히 읽어낼 수 조차 없다.

그런 관점들에서, 이 작품 '킬링 조크' 는 그래픽 노블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도 큰 즐거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 인물에 대한 몰입도 높은 묘사, 국내에도 어느정도 정보가 알려져있는 '조커' 라는 캐릭터성에 비춰, 진정한 의미로서의 그래픽 노블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굉장히 좋은 질의 종이와 완벽한 인쇄와 번역. 수준높은 대사들과 연출은 '명작' 이라는 수식어 앞에서는 당연히 뒤따르는 것들일테고 말이다.

부담없는 두께 또한 마찬가지일터.

 

히스 레저의 '조커' 가 인상적이었던 분들에게도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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