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설마 '섹스' 나 '정사'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고 청소년 유해 게시물, 19금 딱지가 붙는건 아니겠지....

 

 

 

 

한 때 소설속에 등장하는 정사장면은 사랑과 화합의 상징이었다.

겉돌던 두 남녀가 결국 소통에 극적으로 성공하고, 마음이 서로에게 맞닿아있다는 증거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했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수많은 창조적인 메타포들로 도배되다 싶이 했었다. 이제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너울너울 나부끼는 얇은 실크 커텐이나 솜털같은 침대, 귓가에 울린다는 종소리나 뜨거운 불기둥 같은 묘사는 오히려 직유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당연하게도, 그런 메타포들은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가 완벽하게 그 궤를 달리했다. 공격적이고 일방적이며 보다 욕구에 충실한 남성 작가들의 메타포는 울렁거릴정도로 선정적이었고, 여성 작가들의 메타포는 보다 은밀하고 포용적이었으며 아름다웠더랬다.

 

문화가 더욱 개방되며,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의 작품들을 접했을땐,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더랬다.

일본 소설들은 보다 적나라한 시각적 묘사들로 정사장면을 그려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메타포란 불필요했다. 애초에 정사장면을 메타포로 그려내려고 했던 적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농밀하고 디테일한 묘사는 거의 야동을 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인터넷만 틀면 헐벗은 여자들의 정사장면을 가림 없이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 나의 고교시절엔 그런 일본 소설들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포르노와 함께 손에 손을 타고 옮겨다니곤했다.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정사장면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당시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지만, 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런 자극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 장면들이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신다. 섹스또한 그러하다. 우리보다 일찍 개방적인 성문화를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섹스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쌀을 씻어서 솥에 앉히고, 뜸을 들인 뒤, 반찬을 조리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숟갈로 떠먹는 장면을 묘사할땐 메타포가 불필요한 것 처럼, 섹스 또한 그랬던 것이다. 굳이 메타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필요도 없고, 상징적인 의미를 애써 부여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성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찾아오면서 최근 한국의 현대문학에서도 거침없고 가감없는 정사장면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유교관념에 의해 혼전순결이 중시되던 풍조는 사라진지 오래고, 성경험 시기도 10대 중후반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이 세대는 우리 이전 세대보다 섹스가 보다 친숙하고 쉽다. 생명의 잉태, 가족의 탄생, 사랑의 결실, 소통과 조화의 증거. 이런 단어들은 섹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관점에서 나의 세대는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10대때와 20대때. 그리고 30대에 접어든 이 시기에 섹스에 관한 사회적 분위기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성을 만나, 보다 쉽게 하룻밤을 함께한다. 만난지 몇시간만에 키스...이런전 이제 구시대의 질문에 불과하고, 만난지 얼마만에 모텔이나 러브호텔로 가느냐...가 더 설득력있는 질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과도기 시대에 섹스에 대한 관념이 변하고, 문학작품 속에서 그 역할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개인적인 성 관념을 떠나 한명의 독자로서 대단히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비교적 유연하게 흐름을 타며 작품들을 즐겨왔지만, [제리] 에 등장하는 정사장면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에 가까울 정도였다. 뭐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르노에 등장하는 오럴섹스를 보았을때의 느낌이랄까. 뒷골이 저릿 할 정도의 강렬한 불쾌감. 성적인 흥분은 훨씬 뒤에 찾아드는, 역겨움. 위화감. 내가 [제리] 의 정사장면에서 그런 위화감과 역함을 느낀건 단지 그 묘사가 디테일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디테일한 묘사는 위에 언급한 무라카미 류나 하루키와 비슷한 정도. 글로 정사장면을 묘사할때 메타포를 배재한다면, 그저 도색사진이나 포르노를 보는 그대로 묘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가 [제리] 의 정사장면에서 위화감과 역함을 느낀건, 작가가 '섹스' 라는 행위 자체를 '단절' 과 '불협화음' 의 메타포, 은유이자 상징으로 사용하기 있기 때문이다. 단절과 불협화음은 언제나 지극한 고통을 가지고 온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 는 섹스를 통해 순전히 고통만을 느낀다. 그녀가 고통을 어느정도까지 즐기는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육체의 고통을 이기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간의 뇌는 때때로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인공인 '나' 는 그정도는 아닌 듯 하다. 그녀는 단순히 '그냥' 고통을 참아내고, 섹스를 한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오히려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닮아있다. 작품속에서 '내' 가 '나눈다' 고 서술하는 '섹스' 는 단순히 폭력에 가깝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섹스장면을 모조리 신체적, 물리적 폭행으로 치환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주인공 '나' 는 끝까지 그런 섹스는 '나눈다' 고 서술하는데, 그런 점이 오히려 그녀가 '당하고 있는' 지독한 폭행을 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작품을 읽으면서 위화감과 역함을 느꼈던 건 아마 이렇게 읽었기 때문이리라.

난 폭력이 정말 싫다. 베고 썰고 하는 게임도 전혀 좋아하지 않고, 설사 한다고 해도 만화풍의 느낌이 완연한 게임을 하지, 리얼하게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시뻘건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엔 얼굴을 찌푸린다. 누가 눈 앞에서 뺨을 얻어맞는 장면만 봐도 화가 치밀정도로(아이러니 하지만) 싫어한다. 영화도 물론 잔인한 슬래셔 무비는 전혀 안보고, 심지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안(이라고 쓰고 못 이라고 읽어도 된다) 봤을 정도다. 이런 나이니, 섹스가 폭력으로 읽혔고, 책 전체가 그것으로 도배되어있다시피 했기때문에, 작품을 읽는 내내 상당히 힘들었다. 뭐, 아직 나에게 섹스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충분히 남아있음 또한 한 몫 했을 것이고. 이 작품이 섹스를 다루는 방식은 그야말로, 거식증 환자가 음식책을 만드는 수준이었으니.

 

이 작품은 그렇게 힘겹게 충분히 책장을 넘길 가치는 충분했다.

내가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통 단절의시대, 불협화음과 계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시대 청춘들의 단상은 명확히 와닿았다. 한때는 사랑의 결실, 증거와도 같았던 섹스가 욕망의 배출구도 아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가까울 정도인 현대의 젊은. 아니, 어린 청춘들. 우유부단하고, 자신이 당하는 폭력의 의미와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수도권 2년제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는 여자인 '나' 는 '88만원 세대' 라고 불리기도 하는 98%의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단상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선택받은 2%를 바라볼 수도, 쳐다볼 수도 없는 대부분의 젊은이들.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가 늪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꿈을 잃은 세대들. 우리 세대는 세대간의 경쟁에서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고, 세대 안에서의 경쟁조차 할 수 없는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야말로 계급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셈이다.

 

그런 이 세대의 일그러진 단상을 이렇게 직접적이고 디테일하게 들이민 작가가 지금껏 있었던가.

언제나 우회적으로 윗세대 탓을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자학적이고 자조적이었지 않았는가. 가까운 일본에서는 그것이 니힐리즘이 가득한 공허한 작품 투성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이런 상황을 유희적으로 받아들이는 낙천주의가 퍼져있는 듯 하다. 우리 문학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는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후 재벌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했고, 그런 버블경제가 일거에 무너지며 오랜 경제 침체기를 겪고있는 일본은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문학 사조의 유행 또한 엇비슷하게 나아가고 있으며,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민족성은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대륙과 머리를 마주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와,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아왔던 민족성엔 '한' 뿐 아니라 '저항정신' 이 뿌리깊이 박혀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시한폭탄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저항정신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미 여러 현대의 한국문학들은 니힐리즘이나 낙천주의 같은 '이즘' 을 뛰어넘는 독특한 느낌의 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이 눈에 띄고 있다.

[제리] 또한 그 연장선으로, 보다 은밀한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섹스' 의 리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듯 하다.

 

작품을 종결짓는 마지막 챕터 몇 페이지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 나 ' 인셉션' 혹은 우리의 고전인 '구운몽'이나 장자의 '호접몽' 등을 떠오르게 했다.

불이 꺼진 캄캄한 복도를 걷는 '나' . 사방에 불꺼진 방들이 가득하지만, 결국 '나' 는 푸르스름하게 퍼져나오는 빛을 향해 걸어간다.

온통 까만 실내에서 유일하게 빛이 있는 사각형의 수조. '내' 가 수조안의 열대어를 바라보는 것인가, 수조안의 열대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현실과 환상이 모호한 속에서도 '나' 는 결국 빛을 향해 나아간다.

 

'나' 나 '제리' 의 삶이 내일 당장 변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녀나 그는 내일도, 모레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김혜나 작가는 이렇게 충격적인 데뷔작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했다. 나보다 딱 한살 어린 여류작가의 모습은 마치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를 떠올리게 한다. 나에겐 그정도의 충격이었다. [제리] 라는 작품은. 자, 이제 김혜나 작가는 현대 문학에 강렬한 현실주의를 던져 질문을 던졌다.

이런 황폐한 세상속에서, 대한민국의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나' 는 그리고, '제리' 는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해답에 도달할 것인가??

아마 우리가, 큰 사고없이 제 수명대로 잘 살아간다면, 언젠가 난 그녀가 내놓는 해답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리고 애정을 담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난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경쟁이라면, 태어날때부터 장애를 안고 있거나, 남들과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물주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 ---- 조물주는 변명따위 안하려나?? ㅋㅋㅋ

삶은 흐르는 강물이고,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다. 누구보다 먼저 바다에 도달하고, 누구보다 먼저 표적을 꿰뚫어서 뭐를 할것인가??

인생이란 거대한 트랙 안에서, 나 아닌 남을 앞질러서 뭐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수명이나, 인생을 얻어올 수 있는가??

짜디짠 바닷물을 더 많이 마시고, 화살을 쏜 사람에게 다시 수합되거, 활에 걸릴 것인가??

 

우리는 이미 아주 중요한 격언을 하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만약 내가 [제리] 의 '나' 나 '제리'를 만난다면 그렇게 말해줄 것이다.

너무...

생각없어 보이나?????ㅋㅋㅋ

 

 

 

 

+덧:  예기치 않게 비슷한 나이의 여류 작가들의 작품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장은진 작가, 김희진 작가, 그리고, 김혜나 작가. (우연찮게도 다 김씨다, 역시 한국엔 김씨가 젤 많아~!)

애정을 듬뿍듬뿍 담아, 좋은 작품 앞으로도 쭉쭉, 부탁~~~~~~~~~~~~해요~~~~~~~~

아니, 좋은작품 아니어도 좋으니, 다작해주시길. 에쿠니 가오리 한창때만큼은 해줘야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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