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2011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공지영 작가는 수상작이었던 "맨발로 글목을 돌다" 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한 작품속의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을 저는 가장 증오하고 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이런 메시지는 이미 전작인 "도가니" 를 통해 먼저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인 "도가니" 에서는 장애아동들을 학대하는 보육원이 등장하였고, "맨발로 글목을 돌다" 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대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H, 그리고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유태인들이 등장한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바다위의 낙엽같은 생生.

 

한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꾸는 일은 그런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들에게만 허락된 능력은 아니다.

당신도, 나도, 아주 쉽게 한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꿀 수 있다.

 

작품 속에는 그렇게 너무도 쉽게 생 전체가 폭력으로 뒤바뀐 두 남녀가 등장한다.

 

'따뜻한 콩' 이라는 의미의 '온두' 는 대형 유아용품 전문백화점인 '베이비앤마미' 의 1층 유모차 판매장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매사원이다.

시크하고 냉정하지만 번득이는 통찰력과 논리정연한 소개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는 뛰어난 사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슬트모' 의 회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슬트모가 뭐냐고?? 슬트모는 '슬'리핑 '트'렁크 족의 '모' 임 의 줄임말이다. 슬리핑 트렁크. 말 그대로 자동차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잠잘 시간이 되면 수면용품이 든 백을 들고 공터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자가용으로 간다. 그리고, 잠자기 좋게 각종 도구들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트렁크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까지 자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차 옆에 또다른 슬리핑 트렁크족이 자리잡는데, 그 남자의 이름은 '이름' 이었다.

온두와 이름은 왜 자신의 집, 방 안의 침대를 장식용 가구로 만들면서 굳이 좁디 좁은 트렁크 안에 지친 몸을 누이는 것일까??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트렁크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

'트렁커' 라는 제목과 재미있는 일러스트의 표지처럼 작품의 초반은 가볍고 경쾌하다.

시크한 온두라는 캐릭터도 얄밉지만 안타깝고 꽤나 매력적이다. 귀엽고 작아서 보듬어주고 싶은 의미의 '사랑스러움' 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린 속살 밖에 날카로운 가시를 돋우고 있는 고슴도치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청년 또한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역시나 어딘가 무심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왠지 따뜻할것만 같은 그런 남자.

전형적인 로맨스물의 캐릭터들 같다. 작품의 초반을 읽어 나가면서 '이거 그냥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아냐?' 싶어서 책을 편 것을 후회했더랬다.

웅진 "뿔" 블로그에서 리뷰어에 당첨되었으나, 어찌 된 이유에선지 한달이나 늦게 책을 받기도 했었고. 유쾌한 마음으로 펴든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게다가 달달한 로맨스 소설 따위, 난 보고싶지 않아고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가슴이 턱턱 막히는 부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리뷰의 서두에 언급했던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바꿔내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온두와 이름이 트렁크에서 잠을 자게 된 이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이 엄청난 사건들은 말 그대로 가슴이 턱턱 막힌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의 인생을 폭력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폭력에 가장 무방비하며, 인생 전체를 저당잡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옆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이들이다.

나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 될 수도있는.

누군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

바로 어린 아이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변이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한다.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의 주변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그들은 세상 전부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세상 전체가 어그러지는 충격. 그 충격은 단순히 잊어넘길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 되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세상에서의 숨을 다 하는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각인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 엄청난 사건에 대항할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세상의 법은 미성년에게 저지른 죄는 몇배로 강하게 처벌한다. 아, 국내에서는 예외로 하겠다.

지구상에서 한국을 제외한 모든 법치국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저지르는 범죄, 특히 폭력에 대한 범죄는 최소한 몇배의 처벌을 받고, 많게는 몇십배까지도 처벌의 수위를 높인다.

 

하지만, 그만큼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범죄는 세상의 법을 피해갈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아동 보호시설이나,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더더욱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폭력을 잘못된 것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동 보호시설의 경우엔 인지력과 나이, 신체적 특징이 비슷한 처지의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시에 폭력을 당하기 때문에, '원래 이렇구나' 라고 인지하게 된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저항하고 대항할 능력이 없음을 인지하고 세상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때문에 그것을 법에 호소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먹여주고 살려주는 어른을 놓친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한다.

그냥 그 폐쇄된 세상 속에서 평생을 '사육' 당하는 것이다.

 

가정 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가정 또한 하나의 사회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폐쇄된 공간이다.

우리는 옆집에서 자식을 패는 소리를 듣더라도, '가정교육' 이라고 치부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는 '우리' 문화가 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교육을 중시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는데는 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전통도 있어왔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비인격적인 폭행이나 폭언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고, 특히 어렸을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들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연옥이자, 헤어날 수 없는 거미줄이며, 끈질긴 물귀신과도 같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고, 가끔은 즐거움과 행복도 있으며, 때로는 의지가 되기도 하고 최후의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주인공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좁은 공간으로 숨어들어간다.

자신의 몸에 딱 맞는 공간을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고양이과의 동물들 중 가장 강한 동물인 호랑이는 언제나 사방이 탁 틔이고 높은 곳을 좋아한다. 동물 사파리에 가보면 호랑이 무리의 두목이 자리잡는 곳은 언제나 그런 곳이다. 누구에게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 말이다. 반면, 고양이과의 가장 약한 동물인 고양이는 자신의 몸 하나만 딱 들어갈 수있는 좁은 공간을 좋아한다. 벽과 벽의 사이, 자동차의 뒷바퀴와 자체 사이, 보일러의 연통 안, 벽에 세워진 매트리스 사이 같이 말이다. 옆과 뒤가 모두 막혀있어서 정면에서 다가오는 적을 가장 빨리 보고 도망갈 수 있고, 대적하더라도 뒤와 옆에서 협공받을 수 없는 그런 곳 말이다.

작품안에 등장하는 '트렁크' 는 주인공들에게 딱 그런 장소인 셈이다.

최후의 도피처. 가족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각종 감정으로부터.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시공간을 베베 틀면서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책의 대부분을 지하철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읽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음악을 끄고 정신을 집중해서 앞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이야깃속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고, 단편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연두의 과거와 이름의 과거가 규칙없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꽤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작가가 독자들을 잡아 당기는 흡인력의 부분에서는 선정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선을 적당히 유지하면서 정서적으로 큰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다. 작품 전체적으로 행동묘사가 굉장히 적은데, 역겹거나 잔인한 장면들을 디테일하지 않게 넘어가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며 완성도를 높인 작가의 좋은 의도였다고 보여진다.  독자의 상상력에 적절히 기대면서도 이야기의 맥을 짚어내는 작가의 기술이 상당히 돋보인다.  

 

작품은 초반의 가벼움과 경쾌함을 지나, 중반에는 정서적인 위화감과 감정의 폭발을 유발시킨다. 그러다가 후반에 접어들면 앞에 꼬아놓았던 새끼줄을 풀듯이 감정과 정서를 다시 차분하게 안정시켜 나간다. 정신없이 꼬여 없는듯한 플롯들이 그 정체를 드러내며 문장들과 더불어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배가시킨다. 확실히 정말 좋은 소설이다.

 

최근 한국문학, 특히 소설쪽에서는 신인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녀들은 서사의 구조나 시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지면 위에 풀어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더니즘의 작가주의적인 그것이라기 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중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관념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대중들에게 지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작가들이 포스트 모던한 대중주의 자체에 뿌리내리고 성장한 덕택일 것이다. 그녀들의 작품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면서도 편협하지 않고, 자유롭다.

앞으로 한국 여성작가들은 더욱 더 많이 나올것이고, 21세기 한국 문학의 최고봉에는 언제나 여성 작가들이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에 관여한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관여가 한 생을 폭력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고, 사랑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책을 덮으면서 아이가 키우고 싶어졌다.

폭력이 아닌 사랑과 기쁨에 익숙한 아이를 키워내고 싶어졌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기쁨에 익숙한 아이를 키워냈으면 한다.

자신뿐 아닌, 타인에게도 사랑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 익숙한 아이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