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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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을 파헤치다 보면 어렴풋히 한 장면이 떠오른다.

거대하고 광활한 허연 동산. 그래, 딱 책의 표지와 같은, 허연 덩어리의 거대한 군락이 멀찌감치 보이고, 흔들거림과 버스냄새 사이로 어른들은 재빨리 창문을 닫는다. 창문을 닫았어도 시큼하고 지독한 쓰레기 썪는 냄새는 어디선가 스며들어왔고, 내 멀미는 지독하게 심해졌더랬다. 엄마는 거기가 바로 '난지도' 라고 말해주었고, 난지도가 어떤 동네인지는 조금더 후에 '난지도 아이들'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던 청소년 문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난지도 동네 사람들. 어마어마한 쓰레기 동네 난지도. 지금은 거대한 인공 산으로 덮여있고, 콘크리트와 벽돌을 부어 만든 커다란 축구 경기장과 보기 좋은 공원들, 빌딩등지가 들어서 있는 그 곳은 이제 그 이름 '난지도' 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그 곳이 서울과 수도권의 각종 쓰레기들이 모여들던 초대형 쓰레기통이었다는 사실을 잊어갔다. 당연히, 그 곳에서 살던 사람들도 잊혀져 갔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책 좀 읽는다는 문학소년들 사이에서 황석영 작가는 빨갱이라더라~ 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당시에는 진보와 보수의 명확한 의미조차 알지 못했고,  황석영 작가가 법을 어기고 북한에 갔던건 사실이었으니까, '아, 정말 그런가보다, 황석영 작가의 책은 읽으면 안되나보다...' 라고 막연하게 받아들였다.  북한에서 김일성이랑 건배를 하고 왔다더라, 만세를 부르고 왔다더라, 김일성 찬양을 하고 왔다더라 라는 소문들이 바로 그 근원지였다. 황석영 작가가 평양을 방문했던 일은 내가 '국민'학생 시절이였지만, 10여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도 정말 그런 행동들이 무시무시한 - 그래, 거의 반역에 가까운 끔찍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였다. 난 얼마나 생각없는 고교생이었단 말인가. 무튼, 그런 편견은 대학 들어가서, 황석영 작가의 [오래된 정원] 을 읽고 나서야 깰 수 있었으니, 언론의 세뇌란, 그리고 획일적 교육이란 이렇듯 무서운 법이다.

 

 황석영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잊어버렸던 것들을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다. 때로는 자연히 잊힌 것들이, 때로는 억지로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린 것들 말이다. 인간은 좋은 것만 기억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언제나 우리가 지난날을 추억하며, '아 그 땐 좋았지' 라고 말하지 않는가? 분명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들, 행복하고 기쁜 것들의 총 합은 비슷 할 터인데, 희안하게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하다. 당연하다. 추한 것들은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지워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황석영 작가의 작품들은 가장 깊숙한 곳, 이중 삼중으로 콘크리트를 덮고 덮은 그 안의 것들을 퍼올린다.

 

 [바리데기] 를 읽으면서는, '아, 맞다. 북한 주민들도 우리 동포들이었지. 저 흙파먹고 살고, 풀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 다 우리 동족이었지.' 같은 것들이 불쑥 불쑥 솟아올랐다. 솔직히 잊고있었다. 군대에서 배운, 북한은 그냥 적敵이었으니까,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일 따윈 빨리 잊어버려야 했다. 전쟁이 나면 우리가 총칼을 겨눠야 할 북한 군인들의 부모들, 자녀들, 자식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만 기억해야 했다. [오래된 정원] 에서는 어땠는가.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소위 '민주투사' 들. 일부는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며 정치인으로 나서기도 하지만, 전과자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변두리에서 떠돌다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개밥바라기 별] 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겪었던 길거나 짧은 방황의 터널. 내가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어? 라며 살고 있고, 자녀들에게 혹은 아랫세대들을 조소의 눈길로 바라보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린. 잊혀버린. 잊으려고 잊으려고 애썼던 것들. '향수' 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좀 더 과격하고, 고통스러우며, 처절하고, 더러운 것들.

 [장길산] 같은 대하 역사소설이나 [강남몽] 등 다른 작품들을 더 예로 삼지 않아도, 황석영 작가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치부를 향해 비수를 던져왔다. 근대화의 과정속에, 국가의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그늘 아래, 애국심이라는 이름 안에 가리운 수많은 고난들, 고통들, 핍박들. 그것들을 마치 눈 앞에 그려내듯 생생하게 펼쳐낸다. 그가 그려내는 사건와 인간 군상들은 지나칠정도로 리얼하다.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그 리얼리즘으로 인해 대부분의 독자들은 불편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찬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의 비수는 언제나 잔뜩 벼려져 있었고, 그 시퍼런 비수의 끝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정확했으니까.

 

 몇 년 전,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형과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또 하나의 미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곳은 모든 음식들이 많고 컸다. 1인분이라고 믿겨지지 않은 만큼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와 피자, 그리고 감자튀김들. 난 먹다 먹다 남아서 어떻게든 포장해서 가지고 가려 했지만, 그 곳에서는 남는 음식을 포장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조금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미군들, 혹은 그의 미국인 가족들은 남은 음식들은 아낌없이 버리고 있었다. 형은 그것이 바로 '미국식 소비문화' 라고 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아니 부모님들만 해도 물건이란 최대한 오래 쓰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옷 한 자락, 소쿠리 하나까지도 정성들여 만들고, 알뜰하게 사용했다. 대를 이어 넘겨받을 정도로. 돌리고 돌려서 사용하고, 수명이 다 해도 그 재료를 다시 사용할 수 있을정도로. 하지만, 최근의 우리는 어떠한가?? 가장 빠른 속도로 버려지는 것들 중 대표적인 물건을 꼽으라면 휴대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 서랍 안에도 네대의 휴대폰이 잠자고 있다. 2000년에 처음 손에 쥐었던 핸드폰. 군대 다녀와서 바꾼 휴대폰, 그 뒤에 바꾼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바로 구입한 중고 휴대폰.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번호와 통신사를 옮기기 위해 해지한 휴대폰. 잃어버린 폰까지 결과적으로는 5대의 휴대폰을 10년 남짓한 시간동안 소비해버린 셈이다. 군대에 있던 시절엔 휴대폰을 쓰지 않았으니, 휴대폰 한대당 2년도 채 쓰지 못했다. 

 연간 음식물 쓰레기 양도 어마어마하다. 뿐인가, 컴퓨터, TV, MP3 플레이어, 전자수첩, PMP 등 엄청난 전자기기들이 수명을 반도 채우지 못한채 '쓰레기' 라는 딱지를 붙이고 쏟아져 나온다. 하루 석유 소비량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 사람들은 일신의 편함을 위해 수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있다. 바야흐로, 진정한 소비사회. 바로 자본주의의 화신이자, 분신이자, 본질이다.

 

 [낯익은 세상] 은 그 모든 불편한 진실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열네살이지만 열여섯이라고 나이를 불려 말해도 통할법한 덩치에, 말썽꾸러기이기도 해서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별명을 얻은 '딱부리' 는 엄마와 함께 '꽃섬' 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남편을 둔 홀어머니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어느 국가, 어느 시대건 머리가 굵기 시작한 아들을 엄마 혼자 키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딱부리의 엄마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딱부리가 '아수라 반장' 이라고 부르는 옛 동무의 제안은 달콤했을터다. 아수라 반장을 따라 둥지를 틀게 된 '꽃섬' 은 다름아닌 거대 쓰레기 매립지였다. '분리수거' 라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 정확히 어느 지역에 있었던 매립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종 산업 폐기물과 공업 폐기물이 함께 흘러드는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 꽃섬'. 그 쓰레기 더미 위에 삶의 터전을 세우고, 쓰레기를 뒤지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생존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권리조차 돈으로 사고팔던 시절, 아수라 반장은 제법 큰 구역을 가지고 있는 조폭의 보스같은 '반장' 이었고, 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딱부리의 엄마는 어렵지 않게 꽃섬에 터를 틀게 된다. 아수라 반장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머리에 화상을 입어 쭈글쭈글한 흉터가 있는 열한살의 아이는 약간 모자라 보였고, 이름은 '땜통' 이라고 했다. 아수라 반장의 아내는 땜통을 낳고, 결국 그들과 꽃섬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딱부리의 엄마가 차지하게 되었고, 딱부리와 땜통은 형제처럼 어울리게 된다.

 

 '꽃섬' 은 '난지도' 와 닮아있다. 수많은 쓰레기들이 무차별적으로 매립되던 곳이라는 점도 그렇고, 쓰레기가 쌓이기 전에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꽃섬은 지금은 어마어마한 쓰레기로 뒤덮인 쓰레기 산이지만, 그 전에는 강이 흐르고 모래밭 포구와 한들거리는 수수밭, 줄지어 서있는 버드나무들이 있었고,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어미소와 송아지들이 풀을 뜯고, 오리가 날아앉거나 물장구를 치는 모습들이 익숙한 아름다운 동네였다. 필경, 그러한 아름답던 광경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들로 뒤덮인 것은 부근에 생긴 도심 때문일 터다. 건물들을 세우며 생기는 수많은 건축 폐기물들을 도시 변두리 강 건너편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도시에서 나오는 각종 생활 폐기물들을 쌓아내기 시작했을터다. 

 작품 안에서 꽃섬과 연결되는 공간은 바로 근처 도시의 '백화점' 이다. 백화점은 자본주의 소비지향의 상징과도 같다. 욕망을 자극하는 곳인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 매대에 진열되어있는 수많은 '소비재' 들. 백화점 직원들은 '맛깔나게' 상품을 진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보석은 더욱 반짝거리게, 옷은 더욱 아름답게, 음식은 더욱 맛있어 보이게. 가라앉아 있던 온갖 욕구를 퍼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욕구를 충족시킨 소비재들은 당연하게도 쓰레기가 되어 꽃섬으로 향한다. 도시 사람들의 뒷간인 셈이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 도시 안에서 치열한 돈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는 사람들. 그들 또한 필연적으로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살아남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꽃섬으로 향한다.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은 쓰레기가 아닌, 충족되고 버려진 욕망의 찌꺼기이다.

 

 [낯익은 세상]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는 바로 '욕구' 의 메타포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욕구'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기반 에너지이다.  인간의 욕구란 그 포장을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쓰고 나면 더럽고 추해진다. 악취를 풍기고,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는 쓰레기가 된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맞물리며 인류에게 최악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내보이고 있다. 그렇다, 바로 '쓰레기' 이다. 인간들은 결국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것들을 위해 아둥바둥 거리며 삶을 소비하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고, 우리 스스로가 지켜내야 할 존엄성과 인간성을 부숴버리고 있는 셈이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꽃섬의 사람들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한 단상이다. 욕구 충족을 위한 끊임없는 경쟁. 그 안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동물과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꽃섬의 사람들은 결혼의 개념도 없고, 정조나 의리의 개념도 없다. 딱부리의 엄마와 아수라 반장처럼 꽃섬 안의 남녀들은 쉽게 파트너를 바꿔가며 욕망의 한 부분을 채워가며, 쓰레기를 뒤적이는 삶을 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욕구의 충족을 위해 자연을 파괴할 것은 물론,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전통 가치관의 파괴 또한 종용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불꽃을 부채질 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광고한다. 백화점에 진열되어있는 상품들처럼, 여성을 진열하고, 남성을 진열한다. 사랑을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우정을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윤리를 팔아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한다. 그렇다. 욕구, 욕망을 위해 인간성을 팔라고 종용한다. 결국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것들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버리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팔지 않고 지키려는 사람들은 도태되고 밀려난다. 마치 작품속에 등장하는 신들린 여자 '빼빼엄마' 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밀려가 버리는 것이다. 지금은 도깨비가 되어버린 꽃섬의 원래 주민들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쫓겨나고 만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들. 그것은 우리가 이 알량한 소비사회, 욕구충족이 최우선인 세상속에서 밀어내고 지워내고 무시하고 묻어버린 수 많은 우리의 전통 가치관과 윤리의식들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을 묻어버렸다는 사실까지 잊고자 한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런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수 많은 자연들을 파괴하고 건설한 도시들은 마치 자기들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위용을 뽐내며 서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났을때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를 입었던 후쿠시마 원전이 멜트다운에 가까워 졌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응용화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담수 프로젝트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절친이 멜트다운의 위험성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었다. 아주 간단히, 동북아 멸망에 가까운 시나리오였다. 인류는 물론 자연까지 엄청난 방사능 피해를 입히며 절대 예측이 불가능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방사능은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무시무시한 독성 물질이다.

 작품 말미에 황석영 작가는 덧붙이는 말을 통해 "도깨비가 사라진 것은 전기가 들어오면서 부터" 라는 문구가 있다. 인류가 무한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발견과 발명은 바로 '전기' 일 터. 그리고 원자력 발전은 인류가 가장 높은 효율로 '전기' 를 양껏 취할 수 있는 가장 혁신적인 발견이자 발명이 아닌가? 인류 역사상 무시무시한 원자력 사고들이 있어왔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에너지를 마음껏,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그리 쉽사리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터다. 지금 내가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것, 그리고 그 리뷰를 적을 수 있는 것 모두 전기 덕 아니던가?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없다면, 우린 엄청나게 많은 욕구 충족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의 원동력이 욕구라면, 전기는 욕구의 원동력이나 다름없다.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으며, 얻기위해 많은 것들을 파괴해야 하는 '에너지'.

 

 자본주의는 아마 인류의 멸망, 그 순간까지 유지될 것이다.

욕구충족이라는 달콤한 맛을 본 인류는 이 위대한 체제를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황석영 작가가 덧붙임을 통해 쓴 문구처럼, 우리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인 것이다. 꿈 같은 인생이고, 돌고 도는 인생이다.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평등한 욕구충족의 기회를 제공한다지만, 그것은 그 시작부터 궤변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욕구충족은 자본의 우위에 있는 자들만이 가능하고,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시작은 자본의 우위에 있는 자들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딱부리와 딱부리의 엄마가 결국은 꽃섬으로 되돌아 갔듯, 한 번 밀려난 자들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

 

씁쓸하고, 안타깝지만, 지금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꽃섬.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남들처럼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 역시 자라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을터다.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어디든 그럴터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든 곳은 낯익은 세상이다.

모두 보듬어야 할 '우리들'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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