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 바닷마을 다이어리 1 바닷마을 다이어리 1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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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치, 요시노, 치카. 세 자매는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이미 십수년전에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치듯 떠나버렸던 아버지.

장녀인 사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아직 가득차 있고, 차녀인 요시노는 어렸을때의 일이라 크게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막내인 치카는 거의 아기때 겪었던 일이라 아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이미 재혼해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고, 세 자매는 이미 부모와 떨어져 조모 밑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터였다.

그런 세 자매가 십수년 전 헤어진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아버지가 재혼한 여자를 만나고, 그 사이에 낳은 아이들을 만난다.

아버지가 자신들의 어머니를 버리고 얻은 새 부인의 장녀인 '아사노 스즈'.

즉, 배다른 여동생인 스즈가 사치, 요시노, 치카 세 자매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펼쳐져 나간다.

소아과의 베테랑 간호사인 사치와, 새마을금고 직원인 요시노. 그리고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는 치카.

거기에 고등학생인 스즈.

개성이 뚜렷한 네 자매가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

 

이제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요시다 아키미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은 이제 왠만한 드라마 작가를 압도하는 수준이다.

장면과 대사의 흐름들이 어찌나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운지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게 된다.

 

삶이란 원래가 소소한 드라마의 연속이다.

작고 작은, 티끌과도 같이 소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켜켜히 쌓이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감정들이 흘러 넘치도록 모인다.

그것이 바로 '인생'.

바로 삶일터.

 

요시다 아키미는 '현재' 를 살아가는 여류 작가로서, 역시 '현실' 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일, 가족, 사랑, 친구, 우정 등.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되고,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소재가 된다.

 

그녀의 그런 재능이 엄청 부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런 장면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정말 재미있다.

이런 가로 컷들이 다음 페이지까지 4~5컷정도 이어지면서 사건이 전개되는데, 비슷한 나이대의 네 자매가 모이면 이렇게 시끌벅적 할 것 같다.

디테일이 살아있어서 대단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정말 흡인력이 엄청나다.

 

 

 



 

매력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들.

 

정말정말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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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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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인생' 을 논할때 대부분 '승부' 로 비유하곤 한다.

때문에, 그 승부가 주 목적인 스포츠들은 언제나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른다.

장인이 벼른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은 집중력으로 매 순간을 주시하고, 때로는 뚜렷하고 정확한 통찰력과 현명하고 숙련된 기술로, 거기에 처절한 노력과 하늘이 주는 천운이 깃들어야 기나긴 승부에 '승리' 라는 방점을 찍을 수 있다.

여기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천운'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나약하다.

제아무리 통찰력이 뛰어난들, 숙련된 기술을 지녔다 한들, 몰려드는 해일은 견뎌낼 수 없고, 무너지는 눈사태를 이겨낼 수는 없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숙명론자가 되기도 하고, 허무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반면 끊임없이 투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모든 인생을 걸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의 모든 것을 한가지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뜨겁게 타오르며, 자신이 인생을 건 그것을 위해 날카롭게 벼려진 투쟁심으로 매 순간을 집중한다.

 

개마고원의 포수 '산' 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호랑이 한마리에 걸게 된다.

애초에 사냥꾼으로 성장한 그는 개마공원의 지배자인 백호 '흰머리' 와 예기치 않은 악연의 고리를 엮게 된다.

지상에서 가장 사납고 강력한 맹수인 호랑이. 그리고,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불리우는 개마고원.

그 개마고원의 지배자인 백호 흰머리와, 그로 인해 가족들을 잃은 산의 외로운 복수의 여정.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애초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태어났는가?' 등의 질문들은 인류가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던 근원적인 질문이다.

형이상학적이고 근원적인건 마찬가지이지만, 조금은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무엇' 에는 - 역시나 형이상학적이고 근원적이지만 얼추 대답할만한 답이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희망' 혹은 '꿈' 혹은 '행복' 등일 것이다.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한편, 그렇게 밝은 이미지들 외의 것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분노' '욕망' '증오' '복수' 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 역시 결국은 사람이다.

 

포수 '산' 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가 그리는 종착역에는 언제나 시신이 되어 누운 백호 '흰머리'와 그 앞에 서있는 '산' 자신의 모습이 아로새겨 있다.

맹수를 잡기 위해서는 맹수가 되어야 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산은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

밀림의 형세를 익히고, 호랑이의 배설물 냄새를 익혀야 하며, 바람소리, 다른 동물들의 수많은 소리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살기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하고,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호랑이의 마음을 잘 알야 한다.

 

증오와 사랑은 언제나 백짓장 하나 차이다.

증오하는 대상을 쫓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대상을 쫓는 사람이 밟아나가는 과정은 비슷하다.

냄새를 익히고, 동선을 파악하고, 일과를 기억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위해 애쓰고, 주변관계가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도 죽음을 꿈꾸고, 누군가를 미치도록 미워해도 죽음을 꿈꾼다.

인간에게 가장 극한 감정은 증오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다.

 

그렇게 극한 감정으로 모든 젊음을 다 바쳐 흰머리를 뒤쫓는 산.

그런 그의 앞에 '주홍' 이라는 여인이 내려선다.

그리고, 자신과 꼭 닮은. '군율' 이라는 것 한가지에 모든 인생을 건 일본군 장교 '히데오' 가 끼어든다.

이야기의 큰 두 축을 이루는 히데오와 산은 굉장히 다르지만, 놀랍도록 닮아있다.

또한 산이 주홍에게 갖는 마음과 흰머리에게 갖는 마음도 놀랍도록 닮아있다.

 

이 세 사람의 인생이 '개마고원' 이라는 거대한 밀림속에서 촘촘하게 얼키고 설크러진다.

 

호랑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와, 실제 밀림 속에 있는 듯한 철저한 현장검증을 통해 이루어진 꼼꼼한 묘사가 압권이다.

마치 흙바닥에 흩어져있는 눈가루와 조그마한 나무조각 하나까지 꼼꼼히 그려넣은 극사실주의의 세밀한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특히 매서운 추위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책을 읽고 있는 방 안에서 입김을 불어보고 싶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저자의 서문에서도 밝히지만,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이야기꾼인 김탁환 작가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인생이라는 승부 안에서, 당신이 쫓는건 무엇인가?'

산처럼, 주홍처럼, 히데오처럼.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매 순간 그것을 쫓고 있는가??

아니,

쫓을게 있긴 있나??

이, 인생이라는 길고도 거대한 승부.

아니, 승부를 하고 있긴 있어?

그냥 되는대로 대강 살다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거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대신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승부하고 있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일지도.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내 일생을 걸고 대적하고 있는건 무엇인가??

모든 인생의 결말은 정해져있다.

난 반드시 흙이 될것이다.

어쩌면 재가 될수도있겠지만, 어쨌든 넉넉잡아 70년쯤 뒤에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지워지고 잊혀질 것이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그것은 명명백백한 진실이고 현실이다.

내 이름 세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 라는 존재는 지상 위에서 영영 잊혀지는 것이다.

이영도 작가가 이야기했던 '그림자 자국' 처럼 말이다.

어떠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엔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어있다.

치열하게 살아도 되고, 대강 살다가 가도 된다.

어떻게 사는지 질문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100년뒤엔 흙이되고 먼지가 되어있을텐데.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더 아둥바둥, 치열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나 명징하게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는 적확하기 짝이없어서,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눈감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은 모든 존재들에게 동일하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것이다.

타인에게 평가받을 수도, 평가받을 이유도 없다.

혹여 누군가 평가하더라도 흔들릴 필요따위는 없다.

오롯히 자기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치열' 이란 단어는 무엇인가?

난 정말 '치열' 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매 순간.

내가 긋는 한 획, 한 획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가?

정말? 끝의 끝까지, 끝의 끝의 끝까지??

 

 

 

 

덧:

책장을 덮고 나니 문득 인생을 승부로 비유하는 족속들은 남자라는 종족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본능 자체가 경쟁과 투쟁, 대결과 분열이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그렇기때문에 신은 여자와 남자를 창조하셨을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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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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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때는...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기 전, 국민학교 시절일 것이다.

내가 6학년때 전국적으로 동시에 명칭이 바뀌었으니, 1학년~5학년 사이였으리라.

담임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떤 선생님이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씀은 명확히 기억난다.

선생님은 분필을 들고 직선을 쭉 그으셨다. 그게 땅이라고 하셨고, 거기에 삐죽한 바늘을 그려 넣으셨다.

"자 봐. 얘들아. 전 세계위에 땅 아무데나 이렇게 바늘을 하나 거꾸로 박아놓고, 저~~기 높은 하늘 아무데서 쌀알을 하나 휙 던지는거야.

그러면 쌀알이 휘이이익 하고 떨어져서, 땅 아무데나 박혀있는 바늘위에 정확하게 콕 박힐 확률.

너희들이 지금 우리반에 되서, 옆에 있는 짝을 만나고, 선생님을 만날 확률이 바로 그정도인거야.

그러니까, 짝궁한테 어떻게 해줘야 되겠니?"

물론, 그 말을 하셨다고, 우리 반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던 건 아니고, 옆에 있던 짝궁이 갑자기 세상천지에 둘도 없는 아이인 것 처럼 사랑을 느꼈던 것도 역시 아니지만, 그래도 '인연' 의 놀라운 확률을 일찌감치 깨달았더랬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놀라울 정도의 확률을 꿰뚫은 '우연' 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가 흔히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구 탄생이론 역시, 우주 라는 무한한 공간 안에 떠도는 어떤 가스들과 어떤 먼지들이, 우연히 어떤 조합으로 뭉쳐져서 만들어졌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남자의 정자들이 여자의 난소에 착상되고, 생명이 잉태되는 일련의 과정 또한 엄청난 확률의 우연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연애를 할 무렵부터 따져보기 시작하면 그 확률은 우주에서 지구가 만들어질 정도의 확률과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무한한 확률속에서 우리는 가족이 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정자가 난소를 만나고, 생명으로 잉태되어 모태에서 열달을 건강히 잘 자라다가, 여자의 골반을 부수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수많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여자의 아이는 건강히, 그리고 무사히 자라나서, 또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또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작품안의 '나' 도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삼촌, 작은삼촌, 고모.

요즘 세상에 2대가 모여사는 가족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많이 줄었지만, 이정도가 한국에서는 평범한 가족구성이었다.

아버지는 4남매의 장남이었고, 본인도 어렸을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니까 '나' 에게는 증조할머니겠지.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한국의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우연이라면, 죽음 또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우연이라면, 헤어짐 또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살펴보면,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죽음도 필연적인 과정을 겪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도, 헤어짐에도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인생이란 그렇듯 우연같은 필연과, 필연같은 우연들이 촘촘하게 이어진 거미집과도 같다.

모든 실들이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며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다.

 

난 어렸을땐 인연이 무서웠다.

사람이 무서웠다고 봐도 될것이다.

남들이 내게 상처를 주는것도 아팠고, 내가 남들에게 주는 상처도 아팠다.

냉랭히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팠고, 대꾸하지 않는 입술이 아팠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아픈말을 내뱉고, 상처를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은 무서워서 사근사근, 조근조근, 부드럽게 잘 하면서, 가족들에게는 그게 잘 안된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했다.

나 또한 많은 상처를 받곤 했다.

부모님의 말에, 동생의 말에.

이 엄청난 확률로 모인 가장 단단하고, 촘촘한 실들로 짜여진 '가족' 이라는 융단 위에서, 난  왜 이렇게 못되지는 걸까. 약해지는 걸까.

반성하고, 또 반성해도, 어느샌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언젠가 나도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릴 것이다.

그러다가 명명백백히, 난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인 사고로(혹은 노환으로) 죽을 것이고.

 

삶에 끝이 있다는건 참 좋은 일이다.

 

이 작품안에는 삶을 시작하는 사람과, 삶의 끝에 도달한 사람들이 담담하게 그려져있다.

뭔가 대단한 주제의식이 있을수도 있겠고, 뭔가 엄청난 은유나 비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얽히고 설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의 작은 행동, 나의 말 한마디.

그게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의 작은 행동과 말 한마디로, 나의 인생 역시 큰 영향을 미칠수도 있고.

 

인생은 그렇게, 필연적인 우연들 속에서,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떡할거냐고~?

 

그러게.

 

움....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소문날까나.

아, 그래.

 

아버지는 말하셨어.

 

인생을 즐겨라!!

 

 

우연이든.필연이든. 지독하게 꼬였든, 술술 잘 풀려가든,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즐기자.'

인연을 만드는 것 또한 겁내선 안될 것이다.

어차피, 그건 내 마음대로 안되는거다.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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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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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문학에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한국문학은 그야말로 '일어날법한 일' 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상상력들은 '현실' -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의 법칙 안에서만 발휘되었고, 앗차! 하고 한 발 그 법칙을 벗어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 처럼 현실적인 설정으로 덮곤 했다.

그런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작품들은 '판타지' 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인 장르 소설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 '  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늠하는 일종의 척도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세기말을 겪고, 2000 이라는 상상속에서나 가능했던 숫자와, 밀레니엄 이라는 단어. 그리고 밀레니엄 버그와 같은 일들이 어떤 단초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 문학은 '상상력' 에 대해 보다 관대해졌다.

바다 건너 우리보다 '컨텐츠' 의 활용에는 한 수 위인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부터 끊임없이 시도해 왔던 현실과 환상의 경계 허물기를 '해변의 카프카' 를 통해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것 역시, 어떤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올해 타계하신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세계가 노벨상과 더불어 국내에 많이 들어오게 되면서 순수 문학에서 '상상력' 을 받아들이는 폭이 꾸준히 넓어져갔다. 

어쩌면, 판타지 문학들 스스로가 '경계문학' '환상문학' 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스스로 문학성을 획득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유독 한국에서만은 '판타지,SF' 등의 장르문학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가치를 문단 자체에서 애써 폄훼하는 모습들이 분명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들이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점차 약해졌고, 이제 현실의 법칙을 흩뜨리는 상상력들도 보다 자유스럽게 순수문학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단편들을 통해 환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 실력을 뽐내던 '상상력' 은 [고래] 와 이 작품 [캐비닛] 을 통해 장편세계에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타던 절묘한 균형감각 역시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이제는 그 외줄 위에서 묘기까지 부린다.

 

이 작품은 주인공 공대리가 '13호 캐비닛' 을 접하면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커다란 서류서랍장이다.

요즘엔 컴퓨터 서버의 발달로 왠만한 서류들은 DB에 저장해 놓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서화해서 보관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캐비닛은 지금도 여러 사무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바로 그거다. 더 특별할 것도 없는.

 

이 평범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캐비닛 안에 엄청난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가 흔히 만나볼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들. 그들의 인생이 기록되어 들어있었다.

공대리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져들고, 13호 캐비닛의 주인이자 그 이야기를 기록한 당사자인 '권박사' 를 만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작품을 접했을때 주는 많은 즐거움들 중, 가장 크고 강렬한 것은 캐비닛에 담겨있는 '특별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특이점들일 것이다.

손톱 밑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라던지, 겨울잠을 자듯 3개월씩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던지.

혀 밑에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라던지, 스스로 자신의 과거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이라던지.

이런 특별한 능력들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마치 미국 SiFi 채널에 등장하는 드라마들처럼 그야말로 '상상초월'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자신의 특별한 능력들을 숨기고 인간사회 속에 적응하려는 모습은 눈물겹지만, 그다지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이란것들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환경적 장애나 어려움, 혹은 재능, 장점들과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캐비닛] 이란 작품이 주는 진짜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주로 작가들은 스스로를 속된 표현으로 '구라쟁이' 라고 부른다.

어떤 작가님은 어떤 지면을 통해 심지어 스스로를 '사기꾼' 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설' 이든 '영화' 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말 그대로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요는 얼마나 '리얼'한 '구라'를 치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작가인 '김언수' 는 이 작품을 통해 그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그리고 서서히 독자들을 '속여' 넘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작품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들 중 일부는 '이거 진짜일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포털 사이트에서 단어를 검색해 본 독자들도 분명 있을것이다.

 

[캐비닛] 의 이야기는 그만큼 절묘하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다시 표현하자면, 현실이라는 틀 안에 상상력이라는 씨실과 날실을 교묘하게 짜맞추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들이 아주 새롭고 신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SF나 판타지도 좋아하고, 누군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미국 SiFi 채널의 판타스틱하고 SF적인 드라마들을 즐겨 보는 나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세상에서 뛰쳐나온 '특이한 능력자' 들이 아닌, 세상이 품고있는 '특별한 사람들' 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을 이제부터 '삶' 이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결국 그의 이야기는 '삶' 의 이야기다.

 

삶은 누구에게나 고달프다.

그래, 그건 맞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돈이 미치도록 많은 사람이든.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특별한 능력' 들은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불운들과 장애와 편견, 어려움 등 삶을 괴롭히는 요소들일 수도 있다.

누구나 불운을 만나고, 장애를 가지고, 편견들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과정이 대부분의 '삶' 이기 때문이다.

고달프지 않으면 그건 삶이 아니라 꿈일터다.

 

결국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나의 삶속에 어떻게 녹여내느냐 일 것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리고 단순한 관망자에 불과했던 '공대리' 가 만난 13호 캐비닛은 그의 삶속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온 것일까?

그리고 13호 캐비닛 안에 있던 서류에 기록되어있는 '특수한 능력' 을 지닌 인물들과의 만남은 '공대리' 의 인생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불운? 어려움? 고통의 근원? 삶의 가장 큰 실수? 

 

우리 모두가 13호 캐비닛 안에 든 서류에 기록된 '특수한 능력' 을 지닌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특이점' 은 있기 마련이니까.

다들 아둥바둥. 그 특이점을 숨기려 애쓰며, 혹은 발휘하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이점' 에 함몰되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삶 속에 녹여내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불운이나 어려움, 장애에 대응하는 방법과 별 다를게 없다.

우리도 삶 속에서 언제나 큰 불운을 맞닥뜨리기도 하고, 큰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어려움도 찾아오고.

어떤 사람들을 그것들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그 안에 함몰되어 삶을 송두리째 잃기도 한다. 스스로 버리기도 한다.

 

 

공대리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터다.

 

내 생각엔 심심한걸 못참는 공대리는 조만간 안전가옥 안에서 책을 쓸 것 같다.

 

당연히, 그 책 제목은

 

[설계자들]

 

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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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작가 데뷔를 한 아사다 지로는 여느 일본작가들처럼 무척이나 다작을 한 편이다.

특히, 아사다 지로의 경우엔 단편도 꾸준하게 집필했기 때문에, 단순히 책의 권수만으로 그의 작품세계의 스펙트럼을 가늠할 수 없다.

늦은 나이에 데뷔를 해서였을까? 아사다 지로는 초기작들부터 담담하게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듯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의 작품세계를 통틀어, 가장 명징한 주제의식을 담고있는 인물은 주로 '아버지' 이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다시 말해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부성애' 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철도원' 부터 엄청난 두께감의 볼륨을 자랑하는 장편인 '칼에 지다' 까지,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뤄진다.

 

아사다 지로의 최근작인 소설집 [저녁놀 천사] 는 기존의 그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경쾌하고 즐거운 느낌이다.

소설집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저녁놀 천사' 부터 기존의 아사다 지로의 작품치고는 뭔가 미스테리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원래 인생이 미스테리한거거든!"

이라고 말한다면 반박할 말은 없지만, 작품이 한 편 한 편 넘어갈 수록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특히 작품집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호박' 을 시작으로, '언덕 위의 하얀 집' 은 마치 히가시노 게이고와 '퓨전' 을 한 느낌까지 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좀 더 원숙해져서, 문장안에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담을 수 있게 되면, 그런 작품이 나올 것만 같다고나 할까??

이야기 전체를 뒤덮는 따뜻한 시선속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반전으로 가벼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나무바다의 사람' 은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하는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있다.

역시, 아사다 지로만의 따뜻한 문장들 속에서 몽환적인 느낌들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한 느낌을 안겨준다.

 

내가 '일본 문학' 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작가들이 몇 명 있다.

나쓰메 소세키와 아사다 지로, 가 그 둘이고,

온다리쿠와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 다음 둘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스러운 담백하고 절제된 감정을 다루는 문장에 익숙하다면, 아사다 지로는 역시 담백하면서도 감성이 풍부한 문장이 매력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건조하고 딱딱하며 기계적인 묘사에 강하다면, 온다리쿠는 아사다 지로와 비슷하게 감성이 풍부한 문장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아사다 지로도 어느덧 환갑을 넘어섰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장들은 더더욱 담백해졌지만, 그의 문장들은 더욱 절절해졌다.

거칠 것 없이 감성을 쏟아낸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들이 단어마다, 묘사마다 듬뿍듬뿍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조금 다른 시도를 하는 듯 해 보여서 괜히 기분이 좋다.

왠지, 작품을 통해 "인생은 60부터!" 라고 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아사다 지로의 작품은 언제나 나이도 더 먹고, 경험도 더 풍부해졌을때 와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난 고작 20살때 '철도원''백중맞이' 같은 작품을 보면서 기찻길의 정경과 가난한 탄광촌의 장면들을 읽으며 아련한 향수를 느꼈지만 말이다.

(그래, 솔직히 난 아주 조숙한 편이었다.ㅋㅋㅋ)

하지만, 이 작품집이라면 보다 어린 독자들에게도 쉬이 다가갈 수 있을 듯 하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은 너무 잔잔해서 좀 지루해.' 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 만 하다.

 

젊은 작가가 나와 함께 성장하면서 보다 뚜렷한 색채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읽는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작가가 늙어가면서도 보다 부드럽고 유연해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기분좋은 일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뉜다.

보다 편협해지고 완고해지던지, 보다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아사다 지로' 라는 사람의 인격이나 됨됨이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확실히 보다 부드럽고 유연해졌음은 확실하다.

지금부터 그가 만들어갈 새로운 문학세계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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