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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다소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문학에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한국문학은 그야말로 '일어날법한 일' 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상상력들은 '현실' -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의 법칙 안에서만 발휘되었고, 앗차! 하고 한 발 그 법칙을 벗어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 처럼 현실적인 설정으로 덮곤 했다.
그런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작품들은 '판타지' 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인 장르 소설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 ' 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늠하는 일종의 척도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세기말을 겪고, 2000 이라는 상상속에서나 가능했던 숫자와, 밀레니엄 이라는 단어. 그리고 밀레니엄 버그와 같은 일들이 어떤 단초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국 문학은 '상상력' 에 대해 보다 관대해졌다.
바다 건너 우리보다 '컨텐츠' 의 활용에는 한 수 위인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부터 끊임없이 시도해 왔던 현실과 환상의 경계 허물기를 '해변의 카프카' 를 통해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것 역시, 어떤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올해 타계하신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세계가 노벨상과 더불어 국내에 많이 들어오게 되면서 순수 문학에서 '상상력' 을 받아들이는 폭이 꾸준히 넓어져갔다.
어쩌면, 판타지 문학들 스스로가 '경계문학' '환상문학' 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스스로 문학성을 획득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유독 한국에서만은 '판타지,SF' 등의 장르문학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가치를 문단 자체에서 애써 폄훼하는 모습들이 분명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들이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점차 약해졌고, 이제 현실의 법칙을 흩뜨리는 상상력들도 보다 자유스럽게 순수문학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단편들을 통해 환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 실력을 뽐내던 '상상력' 은 [고래] 와 이 작품 [캐비닛] 을 통해 장편세계에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타던 절묘한 균형감각 역시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이제는 그 외줄 위에서 묘기까지 부린다.
이 작품은 주인공 공대리가 '13호 캐비닛' 을 접하면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커다란 서류서랍장이다.
요즘엔 컴퓨터 서버의 발달로 왠만한 서류들은 DB에 저장해 놓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서화해서 보관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캐비닛은 지금도 여러 사무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바로 그거다. 더 특별할 것도 없는.
이 평범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캐비닛 안에 엄청난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가 흔히 만나볼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들. 그들의 인생이 기록되어 들어있었다.
공대리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져들고, 13호 캐비닛의 주인이자 그 이야기를 기록한 당사자인 '권박사' 를 만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작품을 접했을때 주는 많은 즐거움들 중, 가장 크고 강렬한 것은 캐비닛에 담겨있는 '특별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특이점들일 것이다.
손톱 밑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라던지, 겨울잠을 자듯 3개월씩 잠을 자는 사람들이라던지.
혀 밑에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라던지, 스스로 자신의 과거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이라던지.
이런 특별한 능력들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마치 미국 SiFi 채널에 등장하는 드라마들처럼 그야말로 '상상초월'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자신의 특별한 능력들을 숨기고 인간사회 속에 적응하려는 모습은 눈물겹지만, 그다지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이란것들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환경적 장애나 어려움, 혹은 재능, 장점들과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캐비닛] 이란 작품이 주는 진짜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주로 작가들은 스스로를 속된 표현으로 '구라쟁이' 라고 부른다.
어떤 작가님은 어떤 지면을 통해 심지어 스스로를 '사기꾼' 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설' 이든 '영화' 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말 그대로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요는 얼마나 '리얼'한 '구라'를 치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작가인 '김언수' 는 이 작품을 통해 그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그리고 서서히 독자들을 '속여' 넘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작품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들 중 일부는 '이거 진짜일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포털 사이트에서 단어를 검색해 본 독자들도 분명 있을것이다.
[캐비닛] 의 이야기는 그만큼 절묘하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다시 표현하자면, 현실이라는 틀 안에 상상력이라는 씨실과 날실을 교묘하게 짜맞추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들이 아주 새롭고 신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SF나 판타지도 좋아하고, 누군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미국 SiFi 채널의 판타스틱하고 SF적인 드라마들을 즐겨 보는 나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세상에서 뛰쳐나온 '특이한 능력자' 들이 아닌, 세상이 품고있는 '특별한 사람들' 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을 이제부터 '삶' 이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결국 그의 이야기는 '삶' 의 이야기다.
삶은 누구에게나 고달프다.
그래, 그건 맞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돈이 미치도록 많은 사람이든.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특별한 능력' 들은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불운들과 장애와 편견, 어려움 등 삶을 괴롭히는 요소들일 수도 있다.
누구나 불운을 만나고, 장애를 가지고, 편견들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과정이 대부분의 '삶' 이기 때문이다.
고달프지 않으면 그건 삶이 아니라 꿈일터다.
결국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나의 삶속에 어떻게 녹여내느냐 일 것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리고 단순한 관망자에 불과했던 '공대리' 가 만난 13호 캐비닛은 그의 삶속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온 것일까?
그리고 13호 캐비닛 안에 있던 서류에 기록되어있는 '특수한 능력' 을 지닌 인물들과의 만남은 '공대리' 의 인생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불운? 어려움? 고통의 근원? 삶의 가장 큰 실수?
우리 모두가 13호 캐비닛 안에 든 서류에 기록된 '특수한 능력' 을 지닌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특이점' 은 있기 마련이니까.
다들 아둥바둥. 그 특이점을 숨기려 애쓰며, 혹은 발휘하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이점' 에 함몰되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삶 속에 녹여내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불운이나 어려움, 장애에 대응하는 방법과 별 다를게 없다.
우리도 삶 속에서 언제나 큰 불운을 맞닥뜨리기도 하고, 큰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어려움도 찾아오고.
어떤 사람들을 그것들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그 안에 함몰되어 삶을 송두리째 잃기도 한다. 스스로 버리기도 한다.
공대리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터다.
내 생각엔 심심한걸 못참는 공대리는 조만간 안전가옥 안에서 책을 쓸 것 같다.
당연히, 그 책 제목은
[설계자들]
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