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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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때는...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기 전, 국민학교 시절일 것이다.

내가 6학년때 전국적으로 동시에 명칭이 바뀌었으니, 1학년~5학년 사이였으리라.

담임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떤 선생님이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씀은 명확히 기억난다.

선생님은 분필을 들고 직선을 쭉 그으셨다. 그게 땅이라고 하셨고, 거기에 삐죽한 바늘을 그려 넣으셨다.

"자 봐. 얘들아. 전 세계위에 땅 아무데나 이렇게 바늘을 하나 거꾸로 박아놓고, 저~~기 높은 하늘 아무데서 쌀알을 하나 휙 던지는거야.

그러면 쌀알이 휘이이익 하고 떨어져서, 땅 아무데나 박혀있는 바늘위에 정확하게 콕 박힐 확률.

너희들이 지금 우리반에 되서, 옆에 있는 짝을 만나고, 선생님을 만날 확률이 바로 그정도인거야.

그러니까, 짝궁한테 어떻게 해줘야 되겠니?"

물론, 그 말을 하셨다고, 우리 반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던 건 아니고, 옆에 있던 짝궁이 갑자기 세상천지에 둘도 없는 아이인 것 처럼 사랑을 느꼈던 것도 역시 아니지만, 그래도 '인연' 의 놀라운 확률을 일찌감치 깨달았더랬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놀라울 정도의 확률을 꿰뚫은 '우연' 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가 흔히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구 탄생이론 역시, 우주 라는 무한한 공간 안에 떠도는 어떤 가스들과 어떤 먼지들이, 우연히 어떤 조합으로 뭉쳐져서 만들어졌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남자의 정자들이 여자의 난소에 착상되고, 생명이 잉태되는 일련의 과정 또한 엄청난 확률의 우연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연애를 할 무렵부터 따져보기 시작하면 그 확률은 우주에서 지구가 만들어질 정도의 확률과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무한한 확률속에서 우리는 가족이 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정자가 난소를 만나고, 생명으로 잉태되어 모태에서 열달을 건강히 잘 자라다가, 여자의 골반을 부수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수많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여자의 아이는 건강히, 그리고 무사히 자라나서, 또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또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작품안의 '나' 도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삼촌, 작은삼촌, 고모.

요즘 세상에 2대가 모여사는 가족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많이 줄었지만, 이정도가 한국에서는 평범한 가족구성이었다.

아버지는 4남매의 장남이었고, 본인도 어렸을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니까 '나' 에게는 증조할머니겠지.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한국의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우연이라면, 죽음 또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우연이라면, 헤어짐 또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살펴보면,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죽음도 필연적인 과정을 겪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도, 헤어짐에도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인생이란 그렇듯 우연같은 필연과, 필연같은 우연들이 촘촘하게 이어진 거미집과도 같다.

모든 실들이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며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다.

 

난 어렸을땐 인연이 무서웠다.

사람이 무서웠다고 봐도 될것이다.

남들이 내게 상처를 주는것도 아팠고, 내가 남들에게 주는 상처도 아팠다.

냉랭히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팠고, 대꾸하지 않는 입술이 아팠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아픈말을 내뱉고, 상처를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은 무서워서 사근사근, 조근조근, 부드럽게 잘 하면서, 가족들에게는 그게 잘 안된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했다.

나 또한 많은 상처를 받곤 했다.

부모님의 말에, 동생의 말에.

이 엄청난 확률로 모인 가장 단단하고, 촘촘한 실들로 짜여진 '가족' 이라는 융단 위에서, 난  왜 이렇게 못되지는 걸까. 약해지는 걸까.

반성하고, 또 반성해도, 어느샌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언젠가 나도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될것이다.

그리고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릴 것이다.

그러다가 명명백백히, 난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인 사고로(혹은 노환으로) 죽을 것이고.

 

삶에 끝이 있다는건 참 좋은 일이다.

 

이 작품안에는 삶을 시작하는 사람과, 삶의 끝에 도달한 사람들이 담담하게 그려져있다.

뭔가 대단한 주제의식이 있을수도 있겠고, 뭔가 엄청난 은유나 비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얽히고 설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의 작은 행동, 나의 말 한마디.

그게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의 작은 행동과 말 한마디로, 나의 인생 역시 큰 영향을 미칠수도 있고.

 

인생은 그렇게, 필연적인 우연들 속에서,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떡할거냐고~?

 

그러게.

 

움....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소문날까나.

아, 그래.

 

아버지는 말하셨어.

 

인생을 즐겨라!!

 

 

우연이든.필연이든. 지독하게 꼬였든, 술술 잘 풀려가든,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즐기자.'

인연을 만드는 것 또한 겁내선 안될 것이다.

어차피, 그건 내 마음대로 안되는거다.

필연같은 우연히, 우연같은 필연적으로.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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