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다른 미덕도 있다. 고전 읽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남다른 시간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전을 읽을 때는 동시대의 작품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자기장 안으로들어가는 감각이 있다. 여름방학의 나른함, 마루에 누워 두꺼운 책을 베고 졸다가 깼을 때 멀리 다녀오기라도 한 듯 얼떨떨한 느낌, 또다시 이어지는 낮이 암시하는 시간의 영속성같은 감각이 그와 유사한 것을 일깨운다. 너무 방대하고 섬세해서 독자로 하여금 정말로 시간 개념을 잃게 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몇 부분이도움이 될 것 같다. 프루스트는 가상의 시골 마을 콩브레 한가운데 있는 생틸레르 성당 종탑에서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다음은 주인공이 집에서 책 - P11
을 읽다가 가까이서 들리는 종소리를 놓치곤 하는 부분이다.또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마다, 이전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온 것이 바로 조금 전이라고 느껴져, 막 울려온 시각이 또 다른 시각 옆 하늘에 새겨지면서 그 두 금빛 기호 사이에 끼어든 작고 푸른 궁형 안에 육십 분이라는 시간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가끔 때이르게 찾아온 이 시각은 바로 앞 종소리보다 두 번 더 울리는경우도 있었다. 내가 듣지 못한 시각이 한 번 더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 잠과 마찬가지로, 마술적인 독서의 이점은 환각에 사로잡힌내 귀를 속이고, 고요라는 창공의 표면에서 금빛 종을 지워 버린다는 데 있다. - P12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는 오래된 책을 읽는 일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명의 감각 같은 것이 스며 있다. 그 책이 쓰인 시대와읽는 지금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의 부피를 꿰뚫고 울려오는동심원의 파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도리고 에번스의표현을 응용하자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는 아름답고지칠 줄 모르는 세계로부터 고전이라는 징검다리를 타고 시간을 건너오는 진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전 읽기는 ‘들어가는‘ 것이다. 오래된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장이나 시간성, 종소리, 분위기 모두 고전읽기라는 행위의 체험적 측면을 표현하려고 동원한 말들이다. 그것은 다른 시대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공간의 어떤 정신을 체험하는 일이다. - P15
아우라, 너라는 아우라디스프루타르『아우라』는 이런 신화의 원리가 핏방울처럼 맺힌 붉고 푸른자두 같은 단편이다. 자두 또한 하나의 구슬이며, 햇빛과 흙의 조각들이 시간의 축을 따라 응결된 결과물이다. 우리는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따는 것, 즉 서가에서 한 권의 책을뽑아 드는 것으로 읽기를 시작한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는멕시코 작가이고 『아우라』는 스페인어로 쓰였다. 스페인어에는 ‘즐기다, 향유하다‘라는 뜻의 ‘디스프루타르(disfrutar)‘라는 동사가 있는데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이 단어를 - P46
뜯어 보면 과일을 뜻하는 스페인어 ‘프루타(fruta)‘가 들어있다. 과일로부터 다양한 즐거움을 추출하듯 무언가로부터즐거움을 느낀다는 뜻이 된다. - P47
유튜버 구르님의 책. 휠체어 좀 타본 멋진 여자들의 이야기. 앞선 누군가의 ‘혼자 가볼 만한데?’가 이어져 혼자 집 밖 조차 나가본 적 없는, 뒤에 가는 누군가가 혼자 해외여행 가고 혼자 해외교환학생 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휠체어로 더 멋지게 활보하길!
지현 축제란 같은 날, 같은 곳에 모인 사람들이 우리가 동시에 같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인것 같아. 공간이 사람을 불러들여 축제를 만든다.새벽 심오하다. 그치만 축제로 사회적 에너지를 최고로 끌어올린 뒤에 남는 허탈함과 외로움은 어쩌지? 나는 요즘후유증이 사흘은 가.세영 군산북페어 전시에서 이런 질문을 봤어. ‘만약에 아트북 페어가 그저 공간이나 플랫폼에 그치지 않는다면?‘ 그런데 군산에서 동아시아의 사회참여예술을 다룬 책『점(占): 아시아, 참여, 예술』을 발견했거든. 도시를 점거한 홍콩의 우산혁명, 티베트 땅의 흙을 인도로 ‘이주‘시켜서 여러 티베트인들의 작은 화단을 만드는 참여예술 등을 다루고 있어. 축제가 그저 특정 공간이나 스쳐가는 플랫폼이 아니라면, 어느 시간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일, 거기서 뭔가를 키워 내는 일일 수 있겠다.축제를 즐기고 집에 돌아가는 길 혼자가 되어서도 뭔가 충만한 느낌이 남아 있잖아. 그걸 붙잡고 다음에 다시모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축제가 시작된 바로 그곳을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새벽 잠시 차지한 땅에서 뭔가 키우기.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헛헛하지 않을 방법이구나. 다음 호 주제인 ‘혼자‘에서 나눌 이야기도 기다려져. - P16
이수유_죽음과 축제내가 만난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례의 축제적 외양은 집집마다 찾아오는 비극의 시기를 함께 다루면서 빚어진 무늬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볼 때 축제란 각자가 지닌 색색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보다 - P33
는 홀로 맞서기 힘든 비극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것일 수 있다. 죽음은 하나의 공백을 만들어 내지만, 그 공백으로 수렴하는 힘들을 느끼게 하는 계기이기도하다. 웃음과 울음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독이나 침묵에 견주었을 때는 같은 편이다. 어쩌면 지금이 순간에도 축제적인 것은 크고 작은 비극으로 모여드는 이들, 비극 곁에 머무는 이들 가운데 잠재해 있는지모른다. - P34
정윤영폭죽 터지는 소리 대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소리와 고래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축제. 폭탄이 터지듯굉음을 내며 번쩍이는 불꽃 대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초록 나무에 닿은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쓰레기가 없는 축제였고, 아무도 죽이지 않는 축제였다.동물의 삶을 상상하며 나의 1분과 말의 45분을 헤아릴 줄 아는 체험, 어린이가 어린이로 존중받고 말과고래가, 산천어와 나비가 그 존재만으로 존중받는 경험, 그래서 인간도 동물도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슴 뻐근하게 느끼는 시간. 그게 놀이가 되고 서로의 기쁨이 되는 축제를 기다린다. - P84
김경은「메밀꽃 필 무렵」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이효석(1907~1942년)은 욕망, 노동, 월경(越境), 자연과 같은주제를 미시적으로 풀어낸 작가다.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효석은 흔히 토속적인 공간, 이국적인 정서 그리고 세련된 미감을 지닌 작가로 설명된다. 그런데 이효석은 인간의 현실을구성하는 복잡하고 첨예한 문제, 가령 계급, 인종, 폭력의 문제를 정밀하게 재현한 작가이기도 하다. 「깨트려지는 홍등」을 비롯해 기존의 소설 연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효석의 작품들은 일관된 하나의 경향을추구하지 않고 이분법적 구도를 지양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2025년인 지금 읽어도 현대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 P92
국명표「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자, 나중에 ‘97년생촛불집회 사회자‘로 유명해진 보조요원이 사회자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에스파 「위플래시」로 시작해 로제「아파트」, 지드래곤 「삐딱하게」, 데이식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등 대중적인 아이돌 노래들을 연달아 틀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당시 「다시 만난 세계」가조성한 새로운 분위기를 보고 "지금 「위플래시」를 틀어야 해."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위플래시」 박자에 맞춰 외치는 구호는 참가자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냈고, 이것은 연이은 아이돌 그룹 노래의 활용으로, 즉 "탄핵송 플레이리스트"의 생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 P114
집회의 축제화로 이어졌다. [6]유튜브 채널 씨리얼 - P115
결국 무언가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이 실현되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기를 바라는 동력과 정향이 12월 이후 집회 경험의 핵심이며 이후의 집회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벤야민이 남긴 말처럼 말이다. "인식은 오로지 번개의 섬광처럼 이루어진다. 텍스트는 그런 후에 길게 이어지는 천둥소리와 같다."[11] - P118
신동일지난 여름의 경험으로 드러난 자신의 경직된 모습이 못마땅했거나 충동적 위반으로 오해와 갈등에 휩쓸리는 자신이 싫었다면, 오디세우스적 금욕과 오르페우스적 방종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단련된 자유를지향한 고대 그리스의 통찰을 빌려 자신을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창조해야 할 때다. 물론 쉽진 않을 것이다. 삶의 질서에 새롭고도 규칙적인 형식성을 부여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근력, 심력, 혹은 권력(덕)을 강화하는 건 수개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윤리의 어원인 에토스(ethos)가 ‘습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 각자의 정체성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재형성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품성의 힘을반복된 에토스에서 보았듯이, 작은 습관만이 큰 변화를만든다. 나는 언어 사용에도 에토스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학생들에게 애미 커디의 테드 강연 영상을 보여주곤 한다. 신체언어(body language)를 바꾸는 작은 습관이 마치 사기꾼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기회를 새롭게 연다는 메시지 "Fake it until - P150
you become it. Tiny tweaks become big change. (될 때까지 그런 척 하세요. 작은 변화가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듭니다.)"는 습관의 형식성이 결국 정체성마저 바꿀 수 있다는 논점을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 P151
예를 들면,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미학적 실천의 예시로 에크리튀르(e‘criture, 일상의 자기에 대해 쓰기)를 언급했다. 일기를 포함한 서사 형식을 가진글쓰기는 주체가 자신을 돌보고 변형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까지 반복될 때 글쓰기는 단편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새로운 에토스를 세울 수 있는 반복 가능한 실천이 된다. [5] -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