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담 <깃발>
윤정모 <고삐>

박완서_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아뇨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돈이 얼마 없는 상태가 얼마나 좋아요. 난 그걸 알거든요."
"저를 놀리실 셈이군요."
"천만에요. 내가 자랄 때 우리 어머니한테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그 소리였어요. 얘야 우린 돈이 얼마 없단다. 그러면서 교복도 내리 입히고, 내복도 기워 입히고 용돈도 조금밖에 안 주셨죠. 그렇지만 학비를 제때에 못 내거나 밥을 실컷 못 먹거나 할 정도로 궁색한형편은 아니었어요. 얼마 없다는 건 아주 없는 것보다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교육자셨는데 6남매나 되었으니 어머니가 언제나 돈이 얼마 없을 수밖에요. 돈이 얼마 없는 상태는 형제 간에 우애 절제 근면을 배우기에 아주 적절한 상태였나 봐요. 6남매가 다쓸 만하게 되었거든요. 지금 난 남매밖에 안 낳았어요. 남편도 의사니까 아이들은 아쉬운 것 모르고 유복하게 자라죠. 돈이면 다라고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해 줄 수 없는 게 딱 한 가지 있잖아요. 돈이 얼마 없을 때의 활력 말예요. 그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알고있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 없이 해 주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거있죠?"
"선생님이 돈이 얼마 없는 상태가 뭐라는 걸 정확하게 이해해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앞으로 잘될 거예요. 잘되길 빌겠어요."
"그래도 재판받을 생각하면 떨려요. 어려서부터 빚보증 서기나 소송 좋아하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식의 가정교육을 받아 온탓인지 웬만한 손해라면 당하고 말지 경찰이나 법원 신세 안 지자 주의였는데." - P172

홍희담(1945~)

본명은 홍희윤으로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국문과를 졸업했다. 1971년 소설가 황석영과 결혼해 작가의 꿈을 접고 주부로 살다가 황석영이 연재소설 「장길산」 집필에 전념하고 새로운 문화 운동을 기획하기 위해 1977년 해남으로 내려가자 함께 이주한다. 1978년 광주로 이주한 홍희담은 ‘현대문화연구소‘의 윤한봉과 함께 광주 전남 지역 구속자 가족 모임과 진보적 여성 활동가 그룹을 모아 광주 지역 최초의 민주 여성 단체 ‘송백회‘를 만든다. 2003년 첫 소설집 『깃발을 내면서 "내 소설은 ‘송백회‘ 동지들과 함께 쓴 것"이라고 말한 데서 드러나듯, 홍희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회원들과 함께 투쟁 기금 모금, 대자보 작성, 회보 배포, 깃발 제작, 선전 및 홍보 등을 담당한 여성 활동가로서 시민군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수행한다. 1986년 황석영과 이혼한 이후에도광주에 남아 송백회 동지들과 지내다가 2000년이 되어야 광주를떠나 경기도 광명으로 이주한다.
"광주와 5월은 나를 소설가로 만든 원인이자, 내가 소설가로서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라는 작가의 소회에서 알 수 있듯 광주에서의 경험은 홍희담 소설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룬다. 대표작 「깃발」(1988)은 5·18민주화운동을 노동문학의 맥락에서 형상화한 문제작이다. - P179

김채원(原·1946~)

김채원은 1946년 남양주시 덕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인 파인 김동환, 어머니는 소설가 최정희이고 언니는 소설가 김지원이다. 유년 시절 서울 동숭동으로 이주해 지내다가 한국전쟁기 아버지의 납북 후 피난지인 대구에서 달성초등학교를, 휴전 후에는서울로 돌아와 창경국민학교를 다녔다. 이후 숙명여중을 거쳐 1년휴학 후 이화대학부속중학교,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2년동경 한국초중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지내다가 1975년 언니 김지원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수학했다. 이후 프랑스에서도 유학 생활을 했다. - P183

김채원_겨울의 환

저는 생각했지요. 제가 요새 여자들처럼 호강을 하다가 온 여자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막숟가락을 가지고 된장을 뜨러 어둠속 장독대를 다니던 여자이다. 그때부터 죽 밥짓고 반찬하는 일들이 훈련되어 있다. 어머니의 말대로 격식 있는 음식은 못 한다 해도밥 지을 줄도 김치 담글 줄도 모르는 여자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왜 이렇게 숨 쉬기마저 곤란한가. 저는 그만가져온 버선도 속치마도 입지 않고 오로지 살림과 싸우기에만 분투했지요. 이 괴물 같은 살림아,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해보자 라고 들러붙으며 저는 애꿎은 살림 쪽을 원망했습니다.
생일이나 환갑잔치 등으로 하여 친척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그는 항상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있었습니다. 친척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스스로 창피해지고 자존심이 상하여 잊고 있던 결혼 당시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가 봅니다.
샐쭉하게 내려앉은 그의 눈꼬리를 보며 저의 마음은 말할 수없이 썰렁해져서 버스 손잡이를 잡은 채 울음을 삼키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곤 하였습니다.
제게 돌아올 용기를 직접적으로 부어 준 것은 눈입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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