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_도정
그를 잘 알고 있는 기철은 먼저 "당"을 조직하게 된 이유부터자상히 설명을 하면서, 「자넨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정치란 다르이. 지하에나 해외에 있는 동무들을 제쳐 두고, 어떻게 함부로 당을 맨드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러나 이 동무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일은 해야 되겠고, 어떻건담, 조직을 해야지. 이리하여 일할 토대를 닥고 지반을 맨드러 놓는 것이, 그 동무들을 위해서도 우리들의 떳떳한 도리가 아니겠느냐 말일세」 하고, 말을 끊었다 기철은 조금도 꿀릴 데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뭔지 그저 퀭해서, 이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야릇하게도이 「동무」란 말이 새삼스럽게 비위에 와 부딪친다. 참 히한한 말이었다. 어제까지 고루거각에서 별별 짓을 다 허든 사람도 오늘 이 말한마디만 쓰고, 손을 잡고 보면, 그만 피차간 "일등 공산주의자"가 되고 마는 판이니, 대체 이 말의 조화ㅅ속을 알 길이 없다기보다도, 십년 이십 년, 몽땅 팽개쳤든 이 말을, 이제 신주처럼 들고 나와, 꼭무슨 험집에 고약이나 부치듯, 철석 올려 부치고는, 용케도 넹큼 넹큼 불러 대는 그 염체나 배심을 도통 칭양할 길이 없었다. 물론 그는 십 년 전에 맛나나 십 년 후에 맛나나, 비록 말로 표현하지 못할경우라도, 눈이 먼저, 맛나면 꼭 "동무"라고 부르는 몇 사람의 선배와 친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부르는 「동무」는 조금도 이렇지가 않었다. 그렇기에 열 번 대하면 열 번, 그는 뭔지 가슴이 철석하곤 하였든 것이다. - P163
한무숙_허물어진 환상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남편에게 씨워진 『애국자』의 광영도, 영희의 가책을 덜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혁구 씨에게 그것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영희자신이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무서운 고초와 위협 그 한 가지가 남편에 대한 속죄라기보다, 자신의양심을 위하여 다소의 위안이 되었다. 동시에 뜻하지 않았던 사건의 낙착에, 놀랐을 혁구에게 대한 영희의 침묵은, 자학적(自虐的)이기는 하나, 일종의 복수심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영희의 남편은 해방 후 삼 년 만에, 급성 복막념으로 세상을떠난 것이었으나, 긴 회오는, 깊은 상처같이 가슴에 남았다. 하이보ㅡㄹ이 왔다. 영희의 권에 겊을 들기는 하였으나, 혁구 씨는 한모금 마셨을 뿐, 또 겉봉을 써 간다. 남이 시킨다고, 천진으로 그것에만 골돌하는 폐인이 된 혁명가-그는 『고문을 너무 받아, 천치가 된 것』이 아니고, 의미를 잃어버린 자기 존재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았다. 한숨에 드리켠 하이보 - ㄹ이 뜨겁게 자신의 혈관을 달리는것을 깨달으며, 영희는 아프도록, 이 폐인에게 가까움을 느낀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정신이 허물어진 사람이었고, 그 허물어진 일각에서 맺어진 사이었기에- - P195
강신재_안개
성혜는 끝이 모즈러진 호미와 꼬챙이를 하나 찾아 들고서 뒤꼍으로 나갔다. 흙을 긁어 올리고 발로 밟고 몸은 그대로 움지기면서도 성혜의 마음은 어덴가 먼 데로 나르고 있었다. 막연한 생각 속을 더듬으면서. 재미나게 일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성혜의 쓸쓸한 버릇이었다. 어째서인지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에게는 무엇을 생각하거나 쓰거나 하는 외의 대개의 일은 흥미에서보다도 필요에서 하여졌다. 그렇지만 이렇게 일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깨끗하고 쓸모 있게간직하고 될 수 있으면 개량하고 윤택히 하고 이런 곳에 삶의 즐거움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추상적인 감정의조각구름 따위에는 결국 아무 의의도 없을런지 모른다. 성혜는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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