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고 떠도는 유대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보다 ‘대학‘을 먼저 설립한 것이다. 대체 아인슈타인이라는 과학자가 어떤 인물이길래, 상대성이론‘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나라도 없는 터에 대학을 세우는지 궁금해했다. 그 이후 갑자기 아인슈타인에 조선 사회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비로소 모두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교육, 즉 과학을 외쳤고, 해결책은 오로지 과학이었다. 나라를 뺏긴 이유가 서구의 과학기술에 무지했던 때문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 P67
이어지는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 ㅣ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도쿄공업대학 출신인 나경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하여 상대성이론에 대해 무려 7편에 걸친 시리즈로 상세히 설명한다. 참고로 도쿄공업대학은 나중에 노벨상을 두 명 배출하는 명문 대학이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 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 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 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 P71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콩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세계적인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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