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다시, 페미니즘을 묻는다

신자유주의 체제 일상에서 한국 사회 구성원의 섹슈얼리티 실천(practice)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이면서도 구조 안에서 다양한 대응을 해 나가는 여성들의 행위성의 다양화 2) 젠더에 기반한 폭력(gender-based violence)이 성차별에서 안전 문제로 확대 3) 터프를 비롯한 사회 정의에 반하는 페미니즘의 등장 4) 여성주의의 대중화와 함께 가속화하는 정체성의 정치화(본질화) 5) 신자유주의 체제의 고립적 개인화 전략이 여성에게는 성 역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함으로써 생기는 여성의 개인화. - P10

남성의 젠더 인식, 성 인식은 남성 자신의 사회 적응과 인간관계, 인권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섹슈얼리티가 남성의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인지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척도요, 남성 개인의 성장에 필수적이다. 섹슈얼리티 교육은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남성에게 가장 필요하다. 물론 남성은 (여성에 대해) 가해자도 잠재적 가해자도 아니다. 그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것은 무지, 무의식, 공부하지 않음, 무신경이다. 무지가 가해자로 만들기 때문에 남성들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젠더나 섹슈얼리티 외에 인종, 계급, 지역, 나이라는 모순에 의해 우리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예외인 인간은 없다. 문제는 공동체의 지적 감수성이요, (사회적 소수자를 포함한) 개인들의 노력이다. - P16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한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다. 자명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 P17

1장. 페미니즘 논쟁의 재구성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는 말로 이 곤경을 정확히 해석했다. 남성 문화는 남성들의 주관성을 보편성, 객관성, 과학, 전통, 국민의 뜻, 대의 따위로 포장해 왔다. 이에 대항한 여성주의 지식은 남성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고 해체하려고 노력해 왔다.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여성의 경험도 객관적이지 않다. 여성들간에 이해의 충돌이 있을 때 어떤 여성의 경험을 여성주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지식은 맥락에서 발생하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고 당파적/부분적(partial)이다. - P26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영국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 말은 서울에서 발생한 ‘강남역 사건‘을 묘사한 기사 같다. 2016년 5월 17일, 서울 서초동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강남역 사건 이후 내게 ‘오월‘의 이미지는 두 겹이 되었다. 5·18과 강남역.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이 크게 바뀌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사건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한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 P63

조직 내 위계나 물리적 폭력의 정도에 따라 피해 내용이 다를 뿐, 성폭력의 본질은 위계와 결합한 성별권력관계이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은 없다. 나의 생명과 생계 그리고 평생의 경력을 쥐고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평등한 합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본래합의(consensus)는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끼리도 달성하기 어려운 지속적이고 끈질긴 협상 과정이다. "너, 합의였지?"라는 비난 때문에 피해 여성은 분노 속에 침묵한다. 성폭력이 최고의 ‘암수(數)범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P69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 P78

여성주의는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인가를 정하는 권력의 소재를 밝히는 사회 정의에 관한 인식이지,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 다툼에서 여성의 피해를 강조하는 사유가 아니다. 흑인과 백인은 대립하는가? 부자와 빈자는 대립하는가? 그렇다면 유토피아일 것이다. 억압과 피억압,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구도를 ‘대립‘이라는 중립적 언어로 표현하는 발상으로는 여성폭력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남녀 대립(equity)‘은 차라리 희망사항이다. 남녀가 대립하는 사회라면, ‘바바리 우먼‘도 있어야 하고 남성도 2백만 명쯤은 성 판매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여성에게 성폭력당하는 남성도 수시로 뉴스에 나와야 한다. ‘매맞는 남편‘은 평생 폭력 아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야 한다. - P101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 (performance)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별 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 범주(category)로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factor)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 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 P103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meta gender)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episteme), 새로운 인식론이다. - P104

쟁점은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젠더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젠더를 이해할 때 미투 운동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미투는 젠더 체제에 비하면, 너무나 갈 길이 먼 시작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는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 한 움직임(범죄 신고 캠페인)이지만, 이 작은 실천조차 남성 문화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고있다.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자신들이 진공 상태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남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이 어떤 사회를 향한 징조인지,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 정지 작업으로서 미투인지를 되묻는 일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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