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앞둔 지금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그녀는 책방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러 나를 데려갔던 것이 아니라, 나를 서점에 데리고 가기 위해 책방 아주머니와 친해져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라 책이었고 아들이었다. 아이가 자연스레 책을 읽는 그 몇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는 별다른 내용도 없는 수다를 몇 시간이고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유년의 기억 때문일까. 아직도 나는 어디든 책을 파는 곳에 들어서면 마음 한구석이 이유 없이 설레 온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한다. 이 설렘을 선사하기 위해 숨겨야만 했던 어머니의 작은 비밀을. - P118

한국어에서 시간은 ‘시간‘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세 가지 단어로 구분했다. 아이온(aion), 크로노스(chronos), 그리고 카이로스(kairos). 아이온은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한 시간, 그러므로 신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양적이고 균질한 시간,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의미한 시간,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이다. 마지막 카이로스(kairos)는 질적이고 특별한 시간, 구별되고 이질적이며 의미를 지닌 시간, 말하자면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아이온에 둘러싸인 채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는 존재다. 무심하지만 규칙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시간 감옥의 죄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에는 가끔씩 카이로스가 찾아오는데, 이를테면 화살이 날아가거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전과 이후가 갈 - P127

라지고,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따라서 시간을 묻는 방법은 두 가지여야만 한다.

1. 크로노스를 물을 때: 지금 몇 시예요?
2. 카이로스를 물을 때: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 P128

세상 어디에도 나의 자리는 없었고,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바닥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A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나중에 B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런데 그 B는 내가 A보다 먼저 만났다면 사랑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 내게 있어 그 B는 바로 커트 보니것의 문장이었다.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다시 2000년 여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그 애는 폴 오스터가 아니라 커트 보니것을 적어 주었어야 했다. - P147

"지혁 씨 글은, 너무 반듯한 게 탈이에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주겠다는 - P148

게 아니라, 그래서 상을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상을 못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반듯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너는 결코 진짜 예술가가 될수 없다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내 딴에는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말 그대로 ‘반듯하게‘ 가다가 큰 일탈을 결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속이 뒤집어졌다. 그럼 어떡할까? 그냥 그만둘까? 죽을까?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하다‘는 평가, 날 미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겹쳤다.
말대답하는 성격은 못 되지만, 그날 나는 분노를 담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비뚤어지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들도 웃었다. 두 사람만 웃지 않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머리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음이 분명한 나와, 그 소설가 선생님.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지혁 씨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소설가는 덧붙였다.
"반듯한 게 어때서요,라고 해야지."
말문이 막혔다. - P149

마지막 단어 때문이었을까? 은혜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는 낮이겠네. 여긴 밤이고, 니가 볼땐 어제야. 있잖아, 니가 미국에 간 뒤로는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겠어. 내가 늘 과거에 남겨지는 느낌이라서그랬나봐. 넌 어느새 저만큼, 미래에 가 있는데, 과거의 목소리는 여기까지만 듣는 걸로 해.

나는 갑자기 뭔가 생각나서 핸드폰을 꺼내 세계 시간을 찾았다.
[서울, 내일 +13시간]
은혜가 틀렸다. 서울의 시간은 뉴욕보다 늦지 않다. 오히려 열세 시간이나 빠르다.
서울은 뉴욕의 미래다. - P166

이를테면 플롯이나 개연성, 복선과 반전 같은? 그건 혹시 편견이나 선입견이 아닐까? 삶은 평범하고 소설은 특별하다는 고정 관념만큼이나 해로운 것은 아닐까? 현실과소설 사이에는 대체 어떤 벽이 세워져 있기에?
나는 자주 가던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에 [미니픽션]이라는 말머리를 달아 이 소설을 올렸다. 새로운 전자 제품과 연예계가십, 정치 이슈들 사이에서 내 소설은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 없이 금방 뒤 페이지로 밀려났다. 마침내 딱 하나의 댓글이 달렸는데, 그걸 확인하고 나는 뭔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미국 섭웨이가 한국보다 더 맛있나여??? -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