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내가 쓴 것이 나다
글을 쓰는 주체인 나를 알기 위해 나를 대상으로 삼은(는)그들의 언어를 아는 것, 이것이 맥락적 지식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는 성실성(integrity)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객관성을 독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관점은 부분적 시각(partial perspective)일 뿐이다. 이에 더해 ‘왔다 갔다(流)‘ 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앎이고 쾌락임을 받아들일 때 외로움도 덜하고 인생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 이것이 지식의 본질인 맥락성, 상황이다. 언어가 아무 데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소통 가능하다. "거대 담론 말고 일상성"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 P12
지식은 어디 (인식자의 위치)에서 어디 (현실의 일부)를 보는가에 관한이야기이다. ‘진정한 객관성‘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곳, 그 주소(address, ‘말하다‘는 뜻도 있다)를 분명히 함으로써 확보된다. 현실 밖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P23
이런 말하기 방식에 대한 저항이 예술이요, 사회 정의다.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저항에서 탄생한 사상이다. 이 사유들은 말하는 사람(주체)과 규정되는 대상(텍스트, 영화・・・) 간의 관계에서, 주체의 일방성을 성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체의 말이 상대화되고 부분화될 때 대상도 여러 모습으로 달리 보일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관점은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더 개방할 수 있고 더 다양하게말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상대주의가 아니다. 상대주의와 반대다. 상대주의는 인식자의 위치, 부분성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다. 부분적 관점은 모두를 똑같이 ‘여럿 중의 하나‘라고 보는 탈정치가 아니다. 자기 입장의 사회성과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인식 대상에 대해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元), 위치, 체현(embodiment)을 밝혀야 한다. 다시 강조하면, 본디 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 - P24
영화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현실보다 더 현실을 정확하고 넓게 드러낸다. 영화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알 수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르는 현실을 알 수 있는 강력한 매체 중의 하나다. 그래서 영화 감상이나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영역이요, 삶의 방도다(물론 영화나 소설 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재현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 P26
본디 자립의 반대는 의존이 아니라 독점이다. 나는 로컬이나 커뮤니티들이 무너지는 현상이 가장 두렵다. 인간이 지구를 파먹는ㅡ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인류세 시대의 세계에서 새삼 구조와 개인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대개 ‘진보‘가 주장하는 사회에 대한 구조적 인식(구조주의)과 ‘보수‘의 논조인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시각(자유주의 우파?)의 대립조 - P32
차 사라졌다. 이제 자본주의는 앞뒤도 내외도 없이 완전히 지구를 장악했다. 분리수거로도, 일회용 컵 안 쓰기로도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의 질주는 어차피 중단이 없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애초부터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었다. 국가는 복지와 고용에 관심이 없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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