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생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어." 콘이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런 여행 한 번 못 해 보고 아주 늙어버릴 것 같아."
"바보 같은 소리 마. 넌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잖아. 돈이 많으니." 내가 말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선뜻 출발할 수가 없단 말이야."
"기운을 내. 어떤 나라든 꼭 영화같이 보이는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삶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투우사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 - P22

"이봐, 제이크." 그는 카운터 위에 몸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넌 인생이 깡그리 달아나 버리고 있는데, 그걸 조금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본적 없어? 벌써 인생을 절반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느냐는 말이야!"
"그럼,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
"이제 앞으로 35년쯤 지나면 우린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로버트. 도대체 왜 그래." 내가 말했다.
"진심에서 하는 말이야."
"나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 내가 대꾸했다.
"너도 그런 걱정을 해야 해."
"그런 거 아니라도 늘 걱정거리가 많아. 그래, 이제 난 걱정같은 건 하지 않아."
"어쨌든 난 남아메리카에 가고 싶어."
"이봐, 로버트,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나도 벌써 그런 짓은 모조리해 봤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너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있는 건 아냐. 그래 봤자 별거 없어." - P24

"나갈까?"
나는 마치 뭔가 모두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 이미 겪었던 일을 또다시 겪어야 하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06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란 말이야. 반어와 연민을 보이게." 빌은 속옷을 입었다.
나는 낚시 도구 가방과 망과 낚싯대 케이스를 들고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봐! 잠깐만 와 봐!"
나는 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약간의 반어와 연민도 보이지 않을 작정이야?"
나는 엄지손가락을 코에 대고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반어법이 아닌걸."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빌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반어와 연민…………. 기분이 내킬 때는, 아, 그들에게 반어를 안겨 주고 또 연민을 안겨 주라. 아, 반어를 그들에게 안겨 주라…. 기분이 내킬 때는 약간의 반어를 약간의 연민을………" 그는 아래층에 내려올 때까지 계속 노래를 불렀다. 「나와 내 애인을 위해 좋은 울리도다」의 가락이었다. 나는 한주 전의 스페인 신문을 읽고 있었다.
"반어와 연민이라니 도대체 그게 뭐야?" - P175

"저렇다니까. 저러고서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가. 넌 신문장이를 못 면하겠어. 국적을 상실한 신문기자 말이야. 침대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반어적이어야 하는 거야. 입안 가득 연민을 머금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계속 지껄여봐. 누구한테서 얻어들은 밑천이야?" 내가 물었다.
"누구랄 것 없이 모든 사람한테서 얻어들었어. 넌 책도 안읽어? 아무도 안 만나? 넌 자신이 뭐라고 알고 있어? 국적 상실자야. 왜 뉴욕에서 살지 않지? 그랬더라면 이런 걸 알 텐데.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야? 해마다 이곳까지 건너와 너한테 얘기를 들려주라는 거야?"
"커피나 더 마셔."내가 말했다. - P177

소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는 큰 위험에 빠진다. 전성기 시절 벨몬테는 언제나 소의 영역에서 싸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관객들에게 비극이 닥쳐오리라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벨몬테를 보려고, 비극적 감정을 맛보려고, 어쩌면 벨몬테가 죽는 것을 목격하려고 투우장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15년 전만 해도 벨몬테를 볼 생각이라면,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서둘러서 가 봐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 이후로 그는 1,000마리가 넘는황소를 죽였다. 그가 은퇴한 뒤에는 그가 어떻게 투우를 했는지에 대해 전설이 생겨났지만, 은퇴했다가 복귀한 뒤로 관중은 실망했다. 어떤 살아 있는 투우사도 왕년의 벨몬테만큼 그렇게 황소 가까이 접근해 싸우지 못했고, 물론 벨몬테 자신조차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324

작품 해설

더구나 이 작품은 이렇게 자전적 요소를 지닐 뿐만 아니라 소설 장르에서 보면 ‘실명(實名) 소설‘에 속한다. 실명 소설은 17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소설 장르로 지금도 ‘로망아 클레 (roman à clef)‘라고 부른다. 가령 마들렌 드 스퀴데리는 『키루스 대왕』 (1649~1653)에서 이 유형의 소설을 처음 발표하여 관심을 모았다. 19세기에는 영국 소설가 토머스 러브 피콕이 『악몽의 수도원』(1818)에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올더스 헉슬리가 『대위법』(1928)에서 이 장르의 소설을 썼다. 미국 문학으로 좁혀 보면 피츠제럴드가 『낙원의 이쪽』(1920)에서, 마이클 알린이 『초록색 모자』 (1924)에서 이 장르의 소설을 조심스럽게 실험하였다.
‘로망 아 클레‘란 글자 그대로 열쇠가 달린 소설이라는 뜻이다. 열쇠로 문을 열 수 있듯이 실명 소설에서는 작품에 나타난 단서만 잘 이용하면 독자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이 과연 어떤 실제인물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비교적 쉽게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아 작중인물을 만들었다고 하여 이 유형의 소설은 흔히 ‘모델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 P379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주제나 의미를 쉽게 이해하려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 작품의 제사(題詞)로 삼고 있는 글을좀 더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한다. 작품이 시작되기전 첫머리에서 그는 두 제사를 사용한다. 이중 하나는 이 무렵 파리에서 작가 수업을 받고 있던 젊은 작가들에게 대모 역할을 하던 미국의 여성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한 대화에서 하였다는말이다.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라는 문장이 바로그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말을 맨 처음 한 사람은 스타인이 아니라 파리에 있는 어느 자동차 정비소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 수리를 맡긴 스타인에게 그는 이무렵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젊은 자동차 수리공들을 두고 이렇게 내뱉었다는 것이다. - P382

전쟁을 겪고 난 뒤 삶의 좌표와 방향을 잃어버리다시피 한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찾아 방황하였다. 이 무렵 그들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낡은 관습과 인습의 벽을 과감하게 허물어 버리고 가히 혁명적이라고할 만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변화는 작게는 의상, 태도, 행동 방식, 언어, 섹스, 크게는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폭넓게 나타났다. 과거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던 모든 것이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전쟁이 끝난 1910년대 말과 1920년대는 유동성의 시대이자 실험의 시대요, 회의의 시대이자 환멸의 시대였던 것이다.
1920년대를 흔히 ‘재즈 시대‘ 또는 ‘광란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재즈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무렵 재즈 음악이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광란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삶의 여러 영역에 걸쳐 전통적인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는 ‘광란’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광란‘의 소리는 엄격한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낡은 굴레를 끊어 버리는 소리였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긴치마를 벗어 버리고 짧은 스커트를 입고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는 헤어스타일이 크게 유행하였다. 전쟁에 참가하여 환멸 - P384

을 느낀 제대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남성들까지 덩달아 술과 파티로 흥청거렸다. 그리하여 한 역사가는 이 시대를 두고 "만취 상태로 보낸 기나긴 주말"에 빗대기도 한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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