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종, 계급>에서 언급되는 주요한 인물 중 한 명인 미국 최초 흑인 여성 언론인인 아이다 B. 웰스에 관한 전기 그림책이다.
웰스는 린치 반대 운동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신문 사설을 통해, 전국적인 연설을 통해, 클럽 운동을 통해, 린치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해외 순방을 통해, 린치의 잔혹함을 알리고 린치를 없애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웰스의 활동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던지 [뉴욕 타임스]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웰스의 노력으로 웰스가 사망한 1931년 즈음에는 린치가 거의 사라졌다.
아이다 B. 웰스는 흑인 여성들을 클럽 운동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인기 연사 그 이상이었다. 웰스는 왕성한 조직가로서 시카고에서 최초의 흑인 여성 클럽을 설립하고 그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린치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최초의 해외순방을 하고 난 뒤에는 프레더릭 더글러스를 도와서 1893년 만국박람회에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했다. 웰스의 노력 덕분에 ‘미국의 유색인종이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 없는 이유(TheReason Why the Colored American is not in 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라는 제목으로 박람회장에 배포할 소책자 발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여성위원회가 조직되었다. -207
웰스는 22세라는 어린 나이에 철도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인종차별에 맞서서 철도회사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0년 뒤 아이다 B. 웰스는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자기신문을 발행했고, 친구 세 명이 인종주의 폭도들에게 살해당한 뒤 이 신문을 린치에 대항하는 강력한 무기로 전환했다. 인종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신문사 사무실이 파괴당하면서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웰스는 린치를 상대로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인 성전에 돌입했다. 웰스는 미국 전역의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횡행하는 린치에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자고 촉구했다. 또한 해외순방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미국에서 흑인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린치에 반대하는 연대운동을 조직해달라고 촉구했다. 20년뒤 57세가 된 아이다 B. 웰스는 이스트세인트루이스 봉기 현장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63세에는 아칸소주에서 일어난 인종주의자들의 집단공격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여느 때만큼이나 호전적으로 시카고에 있는 한 호텔의 분리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흑인 여성 시위를이끌었다. -215
자신마저 린치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 웰스는 동부에 남기로, 그리고 "끔찍함과 빈도가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니그로 린치의 진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려주기로 결심했다. 뉴욕에이지」에 실린 웰스의 기사들은 흑인 여성들이 웰스를 지원하는 캠페인을 조직하는 동기가 되었고, 이 캠페인은 흑인 여성 클럽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웰스의 선구적인 노력 덕분에 미국 전역의 흑인 여성들이 린치에 저항하는 성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웰스는 직접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면서 성직자, 전문직, 노동자 들을 향해 비이성적인 린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웰스가 해외를 순방하는 동안 중요한 연대운동이 영국에서 조직되었고 이는 미국의 여론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던지 웰스는 「뉴욕타임스」의 노여움을 샀다. 이 악의에 찬 사설은 웰스가 1904년에 잉글랜드에 갔다 온 뒤에 발표되었다.
웰스 양이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한 니그로 남자가 ‘성욕과 강탈을 목적으로‘ 뉴욕시에서 한 백인 여성을 공격했다. (…) 이 사악한 범죄의 여러 정황들은 이 흑백혼혈의 해외선교 활동가에게, 뉴욕에서 니그로가 잔혹 행위의 대상이라는 그녀의 이론을 발표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확신을 심어줄지도 모르겠다.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