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논리는 여성과 남성이 태어날 때부터 명확히 구분되고, 성별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며 성차에 따르는 것이사회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소수자는타고난 이분법적 성별과 그에 기반을 둔 성역할 분리가 당연하지 않음을자신의 존재로써 입증한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성소수자는 낯설고기이하고 불편한 존재다. 성소수자는 전통적인 성역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 부적응자이자 조직생활에 부적합한 노동자, 질서의 교란자로 평가되어 차별과 괴롭힘이 정당화된다. 무급 돌봄노동자 여성과 생계부양자 남성의 결합에 바탕을 둔 이성애적 혼인제도에 편입되지 못하는 성소수자는 공고한 가족제도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노동시장에서 저 멀리 밀려나고, 이상적 노동자상에 가닿을 수도 없다. - P84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차별을 "사회적 소수자 개인을 그가 속한 집단과 동일시하여 그 개인 역시 그 집단의 속성을 가졌다는 전제 아래 그 개인을 불리하게 구분하고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정의에서는 차별이 ‘그 집단의 속성‘을 전제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고있다. 특정 집단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사회적 소수자개인‘도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집단과 동일시하여 그 사람을 불리하게 구분하고 배제한다는 것이다. - P94
성소수자를 존중하기 시작하면 성수소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우리 애가 저거 보고 동성애자가 되면 어떡해요?"나 "댁의 자식이 동성애자가 돼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성소수자가 많아지는 것이 성소수자가 주는 피해라는 인식이다. 그런데 성소수자가 되면 어떤가? 성소수자가 늘어나는 데 우려를 보이는 사람은 성소수자가 문제라는 생각을 먼저 가지고 있다. 논리학에서는 이것을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라고 말한다. 자신이 증명하려고 하는 명제(‘성소수자가 문제다’)를 아직 증명하지 않은 채 새로운 주장( ‘성소수자가 늘어나는 것이 문제다’)의 근거로 쓰는 잘못이다. 그리고 성소수자는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닌데, 성소수자가 늘어난다거나 바뀐다고 오해하고 있다. - P100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그 거부감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다른 집단을 향한 혐오로 이어지면 사회적 문제가 따른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자주 접하기 힘든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다가 성소수자의 존재가 점차 가시화됨에 따라 사회 전체적으로 혐오 분위기가 퍼져가고 특정 종교가 거기에 가세하여 성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 특히 성소수자의 ‘익숙하지 않음‘ 또는 ‘자연스럽지 않음‘은 그들을 특이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성소수자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거나 아이를 낳지 못한다‘거나 하는 이유로 부자연스럽다는 논리다. 철학에서는 자연스러움에서 어떤 규범을 이끌어내는 시도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부른다. 자연스러움은 자연스러움으로 끝나는 것이지 거기서 어떤 옳고 그름을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풍, 가뭄, 전염병 따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를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거꾸로 태풍, 가뭄, 전염병따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자연의 일에 역행하므로 옳지 않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성소수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옳고 그름의 규범을 도출할 수는 없다. 만약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옳지 않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불임 부부들은 모두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들에게 혐오를 보내는 것이 마땅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 P110
이들은 100여년 전, 미국 사회와 교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개신교 주류집단이 "인종차별철폐는 동 시대와 사회의 시각일 뿐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하느님의 질서는 인종차별이다"라고 했던 주장을 ‘여성 혐오와 차별‘로 변주하고 있었다. - P122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은 우리가 낯설게 만든 이들의 얼굴과 삶, 목소리를 통해 다가오신다. 신은 우리에게 그 낯섦으로 질문하신다.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때, 우리는 신의 꿈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너머의 하느님‘ 이다. 신은 항상 우리가 ‘안다‘라고 생각하는 그 너머에 계신다. 그 너머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오늘날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 신의 초대가 ‘사랑과 연대, 다양성과 교차성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뿐이다. - P130
청소년 성소수자가 가능하다면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를 위해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다운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부모님한테 커밍아웃을 한 후 사이가 나빠졌다. 엄마는 다운을 "치료" 하려고 교회 수련회에 보내기도 했다. 다운은 이런 불행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자신도 행복해지고 부모님도 행복해지려면 자신이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때 거의 2년 동안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까지 모든 예배를 다 나가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떠날때까지 교회에 앉아서 혼자 기도하고 울며 고쳐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걸 보고 다운은 결론을 내렸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고치려는 사람들이 잘못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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