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지갑
25년도 더 전에, 지금은 가고 없는, 친하게 지내던 직원으로부터 새 지갑을 양도 받았다. 그 친구도 그 지갑을 선물 받았는데 자기는 긴 지갑을 좋아한다며 나에게 양도한 것이었다. 하긴 그때는 긴 지갑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뒷주머니에 넣으면 약간 삐져나오는 모습이 그렇고, 안주머니에서 꺼내 구겨지지 않은 돈을 꺼낼 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야 뭐 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겉모양보다 내용물이 중요하다고 여겨 흔쾌히 지갑을 양도 받았다.
당시에는 신용카드도 막 나오기 시작할 때라 지갑 속에는 항상 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어야 남자들 배짱도 두둑해진다고 생각했고, 그게 좀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받은 새 지갑 속엔 돈과 함께 시간도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그래서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그렇게 세월은 자꾸 흘러가더니, 신용카드가 보편화되자 지갑의 부피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했지 줄어든 부피만큼 내가 가진 시간도 줄어든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오만하기도 했었지, 결정 장애를 겪는, 무능하다고 생각되는 상사들을 비웃기도 했고,
단 한 번, 두 군데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조언을 해 줄 멘토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진로를 결정한 후, 내가 내렸던 그때의 결정이 최선이었으며,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 결정할 것이라 가볍게 생각해 버리고,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지도 않고 자신만
만하게 살아왔었다. 모든 일이 다 그랬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성인들이 한 순간 속세에서 깨달음을 얻듯이, 지나간 일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한꺼번에 머리속에서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더니, 그것이 한 가지 생각으로 뿅하고 정리가 되어 불쑥 튀어나왔다. ‘도대체 내가 제대로 살고는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으로.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내 지갑 속에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후, 나는, 지난 일들도 돌아보면서 절대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의미 없는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읽는 책들도 그런 쪽으로 트랜드를 바꿨고, 이렇게 알라딘 서재에도 별 재미없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것들이 모두, 나에게는, 설명하자면 긴-, 나만의 나름대로는 의미를 가진 일들이다.
아이들이 맞벌이를 했던 터라, 엊그제 고등학교에 입학한 손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이들 키우기에 환경이 더 나은 우리집에서 키우기로 할매가 어려운 결단을 내렸었다. 그렇게 우리집에 온 손녀는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그리고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공맹의 군자3락(君子三樂)을 능가하는 즐거움이요 기쁨이었는데, 이제는 손녀의 학교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하니, 같이 재미있게 미,적분을 풀던 시간이 없어진 것이 다소 서운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차피 날개를 달고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가야 할 아인데 나의 서운함이 대수겠냐?
피하거나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고, 내 오래된 지갑 속에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지갑의 부피가 조금은 늘어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지. 그래서 그것
도 좋기만 하다. 이렇게 쓰고 싶을 때 글을 쓸 시간이 있으니.
(아직도 나는 그때의 그 지갑을 갖고 있고, 외제 브랜드인 그 지갑은 겉으로 보기에는 말짱하다. 속이 많이 비어 얇아진 것 빼고는, 가끔은 지갑을 주었던 그 친구가 꿈속에 나타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