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위의 세계사
올댓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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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제일 먼저 마주하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지

뭉그적뭉그적 꿈틀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포근한 시간을 최대한 늘여 보고자 발악 하는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을 너. 질질 끌며 무거운 몸을 축 늘인 채 그대로 뛰어 들어가도 탄성 좋은 너는 흔들림 없이 아주 힘 있게 나를 받아내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너의 일관성 있는 태도에 미워할 수 없는 존재, 너란 존재는 나에게 내일을 위한 힘이지

 

나의 하루는 이렇게 침대 위에서 온몸을 뒤틀면서 묵직한 몸을 일으키며 시작한다. 침대는 이렇게 내 몸과 밀착되어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나를 느끼는 녀석일 것이다. '만일' 이라는 조건을 걸어 침대가 생명이 있다면, 사랑하지만 매우 불편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주절주절 거리는 이유는 이 책이 다루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하루는 침대라는 공간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 공간에서 끝을 맺는다. 이 공간이 숙면을 위한 가구가 아니라 지친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친구이며, 그 어떤 영양제보다 더한 에너지 보조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대가 있는 침실 공간은 가장 사적이고 가장 은밀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제목의 침대라는 단어부터 책은 호기심을 끌었다. 


역사는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침대에서 모든 일을 한 시절이 있었다. 우리에게 사적이고 은밀하다는 개념은 근대에 생긴 것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공간에서 불가능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싶을 만큼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침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개인적으로 침대는 쉬는 날에 뒹굴 수 있는 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풍부한 영감과 소재를 던져 준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동안 침대 위에서 군을 지휘했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야기는, 침대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잉태와 죽음, 그리고 살아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베드타임 스토리는 역사에서 빠진 이야기다. 


"거의 모든 사회와 개인의 역사에서 이야기의 3분의 1은 빠져 있다."

1960년대에 건축화가이자 가구 전문가인 로렌스 라이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침대에서 지낸 시간들이 과거 역사를 이해하는 데 공백으로 남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침대는 고고학의 역사에서도 대부분 빠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파내고 훑어보고 고고학자로서의 일을 하려면, 침대는 인류의 수평적 역사를 읽어내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적절한 장소이다.


-<침대 위의 세계사> 중에서 



'아침형 인간', 이 단어는 나에게 패배감을 맛보게 한 단어로 그다지 반가운 단어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아침형 인간이 되지 못하는 불만일 수도 있지만, 그 단어가 한때 모든 성공을 의미하는 단어로 비춰지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잠이 많은 나로서는 여간 불편한 단어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불편함의 조각들이 이 책을 통해서 완전히 부서졌다. <침대 위의 세계사> 이 책은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던져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것 또한 책이 주는 기분 좋은 힘이겠다. 


이중 수면 패턴


자연 세계를 재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1990년대 초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정신과 의사 토머스 베어는 참가자들을 한 달 간 하루 14 시간씩 암흑 속에서 지내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베어는 이 실험을 통해 '이중 수면 패턴' 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밤의 리듬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공대의 역사학자 로저 에커치는 베어의 수면 연구에 힘입어 '이중 수면 패턴'을 기록한 역사 문헌들을 모았다.이 실험과 역사학자의 고찰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중 수면 패턴' 때문에 한밤중에 깨어날 때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 수면 패턴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수면 리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밤에 깨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안고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다음날에 대한 걱정으로 말이다. 자연스러운 이러한 수면 리듬까지도 우리는 스케줄이라는 틀에 묶여 불면증이라는 병을 만들었다. 


수면의 산업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우리들의 수면 시간도 규정된다. 제시간에 잠들기와 깨기, 적당한 수면 시간, 규칙적인 수면 시간도 산업화로 인해 사회화 되었던 것이다. 산업 혁명과 수면 보조제의 관계에서 수면 보조제는 인간이 진화론적 측면에서 인간의 또 다른 적응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화에 떠 밀려진 인류에게 어쩌면 이러한 과정은 필수였다는 점이다. 산업화로 인해 우리의 수면 시간은 산업화에 적응하여 그 사회를 성공적으로 살아 가야 했으므로 적당한 수면과 규칙적인 스케줄은 성공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공 조명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깊은 밤에도 오락과 사교를 즐기며 북적거렸다. 이로 인해 대부분 우리의 수명 시간도 불규칙하게 변했으며 편안한 수면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도 공공 조명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19세기 전반 런던은 처음으로 전문적인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조금 더 안전한 수면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호 받고 있을 때 잠을 더 많이 잔다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의 수면 손실은 이렇듯 사라진 이익과 균형을 맞추려는 결과일 수도 있다."



'수면 회피'가 실제로 생산성 향상을 시킨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 속 인물들을 보면서 나는 또 한번 안심한다.  대표적인 인물  레오나르드 다빈치,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등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수면 시간에 대한 불안함을 지웠다. 잠을 적게 자는 것으로 칭송받아 온 대표적 인물 처칠은 '낮잠' 시간을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유명한 말 "낮잠을 건성건성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처칠은 전쟁 때도 그의 수면 습관 때문에 중대한 결정은 거의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장군들이나 장관들과의 회의 또한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역사는 이렇게 또 침대 위에서 바뀌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말하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자신만의 수면 사이클과 시간이 있다. 단지 여기서 우리가 힘들어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르지만, 자신에게 자연스럽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웃기게도 나의 수면에 대해 자꾸만 변명을 하게 되는 기분이 든다. 이중 수면 패턴과 수면 회피를 동시에 다 갖고 있는 것 같아서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근거를 이 책에서 어떻게든 찾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과 성 그리고 침대


과거 여성들의 지위는 단지 잉태와 출산에 따른 목적만이 필요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는 시민의 축에도 들지 못했고 아내의 가장 큰 의무는 출산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영국과 유럽 사회 대부분이 청교도의 교리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 때도 여성들의 위치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 위의 역사는 여성에게도 가혹했다.


침대에서의 분만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산부인과 수술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외과 의사의 의료 기술이 필수가 되고, 산모는 수동적으로 침대에 누워 의사는 기술을 통해 적극적으로 출산을 돕는다. 출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침대 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병원 침대에 관한 이야기에서 초기 병원은 감염과 전염의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는 너무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씻는다는 것조차 설득할 수 없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의료 기술의 발전과 기적 같은 '마취'의 등장은 고통에서 더 이상 신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당연히 출산은 병원 안의 침대 위에서 이루어 지는 과정으로 그 개념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성 산파의 역할이 의사로 바뀐 것은 이전의 가부장 체제의 사회, 출산의 공로를 대부분 남성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는 것이다. 


"침대는 생명 탄생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회복의 공간에서 수동적인 출산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p135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가 남긴 마지막 말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마지막 말에 그의 친구들과 제자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궁극의 죽음이었다. 죽음 직전에 하는 마지막 말에 대해 우리는 묘하게도 의미를 둔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말들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고 전한다. "망자가 대꾸할 리 없으므로 마지막 말은 지어내기 쉽다." 누군가의 명분에 의해 끌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마지막 말로 기억되는 이들조차 자신의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것에 의미를 두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나에게 반가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책을 읽어 가다가 저자의 생각 못지 않게 나와 공감을 이룰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말 그대로 나랑 통했다. 별 것 아니지만 또 이런 것에 기분 좋아진다. 내 손 위에 놓인 책에서 잘 통하는 친구를 찾은 기분이다. 책 중간 중간에서 만나는 이런 공감은 여행지에서 반가운 친구를 사귀는 기분 좋은 경험을 준다.   


6장의 다른 사람과의 침대 공유에서 다시 만난 <모비딕>의 이스마엘과 작살잡이 퀴퀘그의 만남이 한 여인숙의 침대 위였다는 것이다. 책에서 <모비딕>의 한 장면을 묘사할 때 이미 나의 머리 속에 등장한 이스마엘과 그의 친구는 읽는 순간 반가움에 악수를 나누었다. 이 둘은 같은 침대를 공유하며 서로의 친구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침대 공유 문화가 당시에는 당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 존 애덤스와 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침은 최악으로 기록된다. 



나폴레옹은 헬레나 섬 유배지 야전 침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움직이는 침대의 등장과 탐험가와 모험가의 이야기에서도 빠질 수 없는 침대 이야기는 스콧과 아문센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까지 미국 군인들에게 담요와 그라운드 시트(방수포) 만을 지급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침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침대란,

현대인의 숙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모 침대 광고처럼 침대는 숙면을 취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인 과학이 되었다. 그리고 베개며 침구 세트는 다양한 기능으로 상품성을 높이고 광고를 섭렵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침대의 등장과 함께 과연 미래의 침대가 어디까지 우리의 수면을 조종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침대 위에서 쓰여진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때 삶의 역동적인 과정

이 녹아 있는 침대는 사라졌지만, 개인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 온 침대는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시대가 변화고 사회가 다르면 그 쓰임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과거 침대라는 가구가 역사 속에서 단지 가구로써 그 가치를 채우고 있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침대 위에 쓰여지는 시간은 이전처럼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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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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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로타에게 

우리의 열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사랑하는 당신에게

해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원고를 당신께 바칩니다. 

행복을 기념하는 날의 선물로는 영 부적절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게 사랑에 대한 믿음을 주어 

마침내 죽은 가족들을 마주하고 이 극을 쓰게 해준 당신, 

고통에 시달리는 네 명의 티론 가족을 향한 연민과 이해, 

용서의 마음으로 이 극을 쓰게 해준 당신, 

당신의 사랑과 따스함에 고마움을 전하는 의미로 이 극을 바칩니다. 

내 소중한 사랑, 지난 십이 년은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였습니다. 

내 고마운 마음, 당신은 알겠지요. 나의 사랑도! 

1941년 7월 22일

타오 하우스에서 

진 

-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 중에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 극작가로 유진 오닐은 현대 극의 모든 형식을 시험하고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탐험한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가벼운 상업 극에 머물러 있던 미국 연극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미국 극작가라고 한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유진 오닐의 자전적인 요소가 이 작품의 바탕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아일랜드 이민 2세대로 불행한 가족 사와 함께 심연의 아픔이 비극적으로 녹아있다. 그리고 술과 약물, 질병에서 고통 받았던 모든 아픔은 당시 시대 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기존의 이민자와 새로운 이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인종, 종교 등 다양한 차별로 나타났다. 같은 백인일지라도 종교적 이유로 온갖 핍박을 견뎌야 했던 아일랜드인들은 기근과 질병의 악순환에서 힘겹게 적응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누가 백인인가?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에서  이민자의 아픔을 이미 접해서 인지 이 책에 녹아있는 아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등장 인물을 간략하게 이야기 한다면,

 

무신경한 아버지 티론, 

모두가 아버지 티론을 원망하고 욕한다. 

서른 세 살의 큰 아들 제이미,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상을 풍기며 술에 빠져 산다.

제이미 보다 열 살 어린 에드먼드, 

예민한 감수성과 섬세하다. 건강이 좋지 않고 어머니 메리를 닮았다. 

소녀 같은 메리, 

예민한 감수성으로 섬세한 그녀는 약물 중독에 빠진다.

 

 

아일랜드 기독교인 아버지 티론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갖은 노동으로 고된 시간을 보내고 힘겹게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리고 청년 시절 한 때 희극 배우로 유망주를 꿈꾸며 열정을 품었던 젊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티론은 메리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메리를 사랑하지만, 무심한 티론은 아내 메리가 외롭고 홀로 지내는 힘든 시간을 보지 못한다. 그 속에서 출산과 우울은 메리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티론의 직업상 호텔을 전전하며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면서 작은 아들이 홍역에 걸려 죽게 된다. 작품에 나오는 큰 아들 제임스는 이 일로 인한 죄책감으로 술에 빠져 방탕하게 보낸다. 에드먼드는 형 제임스를 따르면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닮은 섬세하고 감수성 많은 에드먼드는 폐 결핵에 걸리고 만다. 극 중 에드먼드는 유진 오닐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다. 

 

 

유진 오닐의 피 땀 눈물이 섞인 < 밤으로의 긴 여로>는 한 장소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1912년 8월의 어느 하루'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 거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작품은 줄곧 어둡고 칙칙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족의 대화는 앞 부분에서 짧게 끝이 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차가운 비난과 질타 뿐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서로의 이야기는 이해 받지 못하고 집안에서 그저 빙빙 돌고 돈다. 


이처럼 <밤으로의 긴 여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극적인 사건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다. 톤도 없고 색깔도 없는 단조롭기 그지 없는 이야기에 쓴 맛만 느낄 수 있는 대화가 오고 간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지만, 눈에서 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공감 포인트를 찾을 때였다. 이 얄궂은 애증 관계에 얽힌 가족 이야기가 짜증 날 만큼 어둡고 지루하지만, 여느 가족의 이야기 한 편을 보는 것처럼 공감을 불러 일으킬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부모 세대, 그 시대를 겪고 견뎌 내야만 했던 세대를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어느 한 나라의 가족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리고 한 가족의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가족 사 만이 아니다. 불편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이야기로 한 부분을 차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드먼드를 편애 하는 부모,  형제인 제임스와 에드먼드의 관계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랑은 제임스를 더 방황하게 만들었다. 제임스는 동생 에드먼드를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 사랑에는 질투 또한 무섭게 작용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힘들게 살아 온 아버지 티론의 구두쇠 기질은 과거 자신의 어머니의 두려움이 섞인 푸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색함은 그가 가족들에게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 메리의 약물 중독이 아버지 티론의 인색함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의 불운을 아버지 티론의 인색함 탓으로 돌린다. 이렇게 서로 지나온 과거를 들추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들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결국 가족은 가족이었다. 서로에게 아픈 상처를 주면서도 서로 미워할 수 없는 애증의 끈이 그들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 '돈의 가치'

아버지 티론이 아들들에게 잔소리로 퍼붓는 단어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후회에도 들어있는 단어다. 

이 단어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의미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밤으로의 긴 여로>>이 작품을 쓰면서 그는 너무 힘들어 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운한 가족 사를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진 오닐은 자신의 삶 밑바닥에 있는 아픔을 다시 꺼내어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사후 25년 간은 발표도 무대에 올리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에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 끔찍한 불행의 가족 사에 대해 적나라하게 녹아 있는 이 작품이 그에게도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오닐이 죽은 지 3년 만인 1956년 스웨덴 스톡홀롬의 왕립 극장에서 초연 되고, 그해 뉴욕 무대에 선을 보이며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밤으로의 긴 여로>>는 1957년 유진 오닐의 네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기록된다. 

 

 


 "인생 교훈에 너무 데여서 돈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건지도 몰라. 그러다 결국은 실수로 잘나가던 배우 인생까지 망쳐버리게 된 건지도. (슬프게) 전에는 누구한테도 이런 점을 인정한 적 없는데. 오늘은 마음이 너무 아파 그런가?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이런 마당에 자존심 세우고 허세 부린들 무슨 소용이겠니."

 

 -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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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3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길이 안 보이는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도 모르겠어.] 오닐이 살아생전에 이작푸 절대로 발표 안하고 사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죠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 이뿐 호빵님 덕분에 ‘밤으로의 긴여로‘ 다시 펼쳐 읽고 싶어집니다.^.^.
 

선물 주려고 샀다가 슬쩍 넘겼다ㅋ

앙증맞은 사이즈와 센스 넘치는 sns문구들
가볍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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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그것이 사람을 ‘만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사람은 사물에 에워싸여 살고 있다. 그것은 유용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물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동물인 것처럼.
이제 생각났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들쩍지근하고 메슥거리는기분이었다. 얼마나 불쾌한 기분이던지! 
그것은 그 조약돌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그 불쾌함은 조약돌에서 내 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 그거다,
- P27

바로 그거야. 손안에서 느끼는 어떠한 구토증.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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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시간을 사는 사람, 즉 존은 '시간 밖에서 사는 사람'이다. 유한한 우리의 시간에 비해 존의 시간은 우리와 달리 넉넉했다. 4천 년을 살아온 주인공 존은, 구석기 후반에 걸쳐 현재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맨 프럼 어스>는 현생 인류가 현재를 사는, 아주 아주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다소 획기적인 영화다.

 

 

2021년 나의 첫 영화다. 나는 또 이렇게 SF 장르를 벗어나지 못했다. 책 보다 영화의 편식이 유난히 심한 나를 질책하며 새해 첫 영화를 시청한다. 그리고 황당하게 <맨 프럼 어스> 2편을 먼저 보고 다시 1편을 찾아서 보고 있다.

 


<맨 프럼 어스> 1편은 SF 장르지만, 화려한 CG도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는 영화다. 소박하지만 아주 탄탄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반전의 재미로 이야기는 끝을 낸다. 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존과 그 이야기를 게임처럼 흥미롭게 토론하고 경청하는 사람들만 있다. 장소의 변화도 거의 없고 역동적인 사건도 없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보는 나도 이미 존의 이야기에 빠져 두 눈을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겨울 따뜻한 난로를 끼고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다운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의 이야기는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기고,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억지 같은 이야기다. 난로 옆에 앉아 덤덤히 이야기하는 존이 만 4천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때, 이들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편과 속편에도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은 그가 오랜 시간을 살았음을 증명한다. 한때 고흐의 친구였던 존은 오래된 우정을 간직하듯 고흐의 그림을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닌다.


존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모두 권위 있는 학자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 절실한 기독교 신자 등 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존의 이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들을 놀랍게도 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존은 교수로 아주 능력도 있고 인간성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편의 <맨 프럼 어스>는 그를 아는 동료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진지하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료들의 정을 느낀 존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죽지 않는 존의 시간은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과 연결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그의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한참 흘러 종교적인 인물에 관한 존의 이야기는 이들을 모두 충격에 빠뜨렸다.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사실을 모두 부정하는 획기적인 이야기는 영화 속 인물뿐만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도 아주 불편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반기독교적인 영화로 반감을 살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도 절실한 기독교 신자의 분노가 표출된다. 그들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렇게 이들의 질문과 이야기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듣는 동료들의 힘듦을 느낀 존은 모든 것이 그저 상상을 가미한 이야기라고 마무리 짓는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뭔가 허탈하지만,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안도하고 동료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떠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까지 나의 차분한 마음은 숨겨 둔 이 영화의 대반전에서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의 2편을 먼저 본 나는 허무한 결과를 보며 멍을 때렸다. 그때 쿠키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의미심장한 영화의 반전 수수께끼를 알기 위해 나는 2편을 접하고 1편을 더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 1편이 논리적인 이야기로 지식의 향연을 펼쳐나간다면, 2<맨 프럼 어스 2: 홀로신>은 약간의 스릴러 적인 면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1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편에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정체가 드러나자 떠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1편의 움직임 없던 공간은 2편에서는 조금 확장된다. 학교와 집, 그리고 1편의 연관된 인물의 장소의 공간 확장은 이야기의 범위가 더 다양하고 복잡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고 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존이 늙어 간다는 것이다. 홀로세 마지막을 산 존도 이제 최후를 맞이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이 약간 끊어지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1편보다는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1편의 조용한 전개를 생각하면 속편은 긴장감을 자극하지만, 그 긴장감이 주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학생들의 등장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들의 활동과 존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구조도 뭔가 어설프다. 존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또 그렇게 흥미롭지도 않다. 후반부로 갈수록 존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존의 실체를 알자 기독교적 광신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그에게 질문하며 흥분한다. 조금은 지나친 설정에 영화를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싶은 장면이 몇몇 있었다. 존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범법 행위가 결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먼 행동들은 점점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들의 행동은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분노를 일으켰다. 영화의 설정이 이런 의도였다면 성공이다. 2편의 다소 산만한 설정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나의 부족으로 영화의 충분한 감상은 떨어졌지만,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틀림없다.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나, 그저 이 감정을 놓치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근래 접하는 책이며 영화며 종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비종교인으로 나름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중립적인 편이라 생각했다. 종교가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지만, 근래에 부정적인 면을 너무 많이 접한지라 종교에 대해 자꾸만 편견이 생기고 있다. 본질이 흐려지는 종교의 순기능이 점점 더 왜곡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주인공 존은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다. 하지만 주변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존에게서 사람들은 비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도 느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은 존이 말했듯이 많은 경험에 대한 깨달음의 축적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랜 시간을 죽지 않는 존은 우리에게 선지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불멸의 힘은 마치 전지전능함으로 과대 포장된다. 그래서 그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고 위대함을 발견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존이 말했듯이 그저 자신은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아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지나온 시간을 공부했다고, 단지 오랜 경험의 축적은 우리가 몰랐던 진실에 대해 조금 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존에게 경험의 축적은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느긋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존의 여유가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질문이 제법 많은데,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한숨 짓게 된다.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긴 시간 끄적거려 본 적은 처음 같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도 영화처럼 계속 불편하다.

 


마침, 묘하게도 넘긴 책이 샤르트르의 <구토>


그의 글이 강하게 눈길을 끄는 건지금 나의 기분을 대변한 듯한 반가움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늘 있는 어떤 확신이나 뻔한 일과는 달리, 마치 질병에 걸리듯 닥쳐왔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나는 기분이 좀 이상하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뿐이다. 그것이 일단 자리를 잡고는 꼼짝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기에,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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