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깃발 아래에서 -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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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벤 앤더슨의 <세 깃발 아래에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2009, 서지원 역, 도서출판 길)을 읽는다. 원출판년도가 2005. 70세의 저자가 이렇게 '발랄한' 상상력의 책을 쓸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근대 필리핀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리잘H. Lizal의 소설들을 다루면서, 단순히 텍스트 분석에 그치지 않고 리잘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가면서, 당시의 필리핀, 그리고 본국 스페인,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와 노벨(‘폭탄이자 동시에 미끄러지듯 소설일 수도 있는), 나아가 국제적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나의 성좌(星座; constellation)로 그려내고 있다. 앤더슨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허먼 멜빌이라면 정치적 천문학이라고 불렀을 하나의 실험, 혹은 벤야민이라면 성좌적 글쓰기의 한 실험을 저자는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리잘의 소설에서 그가 읽어냈던 '조마조마한'(anxious), '떨리는'(trembling), '잡아매어지지 않은'(unmoored) '기대하고 있는'(unexpected)을 모두 포함하는 글리샤’(Gelisha), 즉 도래의 예감은 책을 덮은 지금도, 마치 고토다마’(言霊)가 뇌리를 떠다니는 듯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2. 이 느낌을 어떻게 나의 언어로 다시 표현해낼 수 있을까. 리살의 첫 소설인 <놀리 메 탕헤레>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날카로운 구절 el deminio de las comparaciones(굳이 번역한다면 비교의 유령일까)로부터 시작해볼까. 앤더슨은 이 구절을 잘못 번역해서, 1998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The Spectre of Comparisons-으로 썼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무엇을 잘못 번역했다는 말일까. 이 책의 역자는 spectre(무시무시한) 유령 정도로 번역 가능하지만, 리살이 사용한 스페인어 단어 'demonio'는 귀찮은 꼬마 악마라는 느낌에 가깝다고 역주를 달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앤더슨은 어휘를 잘못 선택해서 번역했다는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어쩌면 앤더슨의 후반부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일 수 있는 spectre라는 개념이 오역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cf. Spectre라는 용어를 썼던 앤더슨의 의도에 대해, 역자는 진짜로 오역이라기보다는 공산당선언을 염두에 두다 보니 다소 의미를 늘여붙이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닐까 라는 의견을 제시해주었다.. (왜냐하면) 비교의 경험에는 무시무시한 느낌은 없으니까..

 

2..1 자, 다시 앤더슨의 텍스트로 돌아가보자.

리살은 이 구절을 젊은 이바라가 풀 향기 가득한 마닐라의 식물원을 다시 보며, 도착적이게도(perversely) 유럽에서 지낼 때 종종 찾았던 대식물원들을 마음의 눈으로 어쩔 수 없이 상상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기괴한 경험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그것은 마치 그가 더 이상 그의 앞에 놓인 것을 단순히 친숙한 대상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 악마(demonio)는 작가 스스로에게도 작용한다. 파리와 베를린에서 '저편' 마닐라에 있는 젊은이, '저편'... 즉 베를린과 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젊은이에 대해 쓰고 있는 작가에게도....

2.2. 사실, 리살의 이러한 의식(정치적 상상)이야말로, 전작 The Spectre of Comparisons에서 앤더슨이 담아내려고 했던 하나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서술은 리살의 의미심장한 이 구절의 출처를 찾으려는 여정으로 옮겨진다. 말라르메의 산문시 제목인 유추의 악마Le Demon de l'analogie에서 애드거 앨런 포의 도착자의 꼬마 도깨비The Imp of the Perverse(<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 1839)-말라르메의 산문시 제목은 포의 작품 도착자의 꼬마 도깨비를 보들레르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Le Demon de la perversitè”의 창조적 오마주라는 것이 밝혀졌다-. 포의 신경심리학적인 꼬마 도깨비로부터 보들레르의 유사-신학적인 악마와 말라르메의 시적 영감의 신비스러운 원천으로까지 이어지는 상상력의 연쇄(물론 이 역시 상당한 오독의 산물이지만), 어떻게 당시 유럽에 있던 식민지 필리핀의 청년 리살의 정치적 상상력을 연결할 수 있을까. 앤더슨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앤더슨은 말라르메와 보들레르, 그리고 포가 한꺼번에 언급되는 조리-칼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를 자신의 쇠해 가는 기억속에서 찾아낸다. 위스망스의 소설을 리살이 읽었을까. 하지만 <거꾸로>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연결지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cf. 라살의 독창성은 그가 읽은 것을 바꾸어 쓰고, 엮고, 변형하는 방식에 있었다. 이 장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그의 소설에서 포-보들레르-말라르메의 꼬마 도깨비-악마(imp-demon)가 식민지 하 지식인에 붙어 따라다니는 비교의 악마가 되고, 뒤마의 만연체 대화는 자유로의 길에 대한 절박한 논쟁으로 다시 만들어졌으며 파리의 사회구조에 대한 외젠 쉬의 파노라마는 식민지 사회의 병폐에 대한 개관적인 진단으로 다시 그려졌다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젊은 필리핀 반식민주의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위스망스의 아방가르드 미학을 차용하고 급진적으로 변형시킨 방식보다 라살의 창조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98-99).

 

물론 이렇게 유사성들을 찾아내어 연결선을 그려내는 작업을 대학원생이 시도했다면 어김없이 <낙제>를 당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부정합하고, <과학적>으로도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과감한 선긋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세계의 풍요로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 “대가니까 이렇게도 쓰는 거여라고 내뱉어버리기엔, 그러한 서술이 갖는 힘이 너무나 큰 것이다.

 

3. 일단 제 3장의 결론부를 인용하면서 잠시 호흡을 멈춘다. <사건>이 가지는 역동성, 혁명성, 혹은 도래coming라고 부를 수도 있을 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아름다운 주석이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예시적인 성격과 리살이 이 책에 붙인 '필리핀 소설'이라는 부제, 양자 모두의 중요성을 이해하기에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예시는 대부분 스페인에서 필리핀으로 교묘하게 대량으로 옮겨 온 실제의 사건들, 경험들, 감정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임박한 미래의 그림자로 나타난다. 또한 이 임박함은 이 책이 나올 때 아직 권력을 잡고 있었던 웨일레르 총독의 시대에 단단히 뿌리박힘으로써 확실해진다. 그러나 시모운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는 <놀리 메 탕헤레>를 비롯한 전작들에 근원을 둔 인물이며, 스페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상상된 쿠바로부터, 그리고 지구를 도는 방랑으로부터 소설에 입장한다. 그는 이스키에르도가 한때 인터내셔널이라는 감추어진 마키아벨리적 네트워크를 공상했던 것에 대한 거울, 필리핀에 출몰하게 될 '세계적 유령'(espectro mundai)의 일종이다. 마치 그의 민족처럼, 아직 현실에는 없지만, 이미 상상되었으므로, 앞으로 오게 될..
...
1945년 말, 일본 점령이 끝난 지 겨우 두 달 뒤, 그러나 네덜란드 식민 지배가 아직 복귀하지 않았던 순간에, 인도네시아의 젊은 초대 총리 수탄 샤흐리르는 막 혁명을 시작하려는 겨레의 상황을 '겔리사'(gelisah)라는 단어로 묘사했다. 이 말은 영어로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조마조마한'(anxious), '떨리는'(trembling), '잡아매어지지않은'(unmoored) '기대하고 있는'(unexpected)을 포함하는 의미의 범위를 상상해야 한다. 이것이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느낌이다. 무엇인가 오고 있다는..

 

cf. gelisah의 인도네시아 원발음이 글리샤에 더 가깝다고 지적해주신 분도 역자이다.. 이 자리를 빌어 거듭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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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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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때문에 검색해보니 개정판이 나왔구나. 진보와 사해동포주의라는 시대 분위기에 젖어있던 유럽 사회는 어떻게 전쟁을 맞이했을까. 또 대전쟁 이후 곧이어 찾아온 2차대전을 유럽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 절망과 회한, 공포에 대한 가장 성실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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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사적 고찰 - 붕괴와 전환의 순간들
후지타 쇼조 지음, 조성은 옮김 / 돌베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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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리뷰에 공감.. 다소 옥석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후지타 쇼조의 목소리가 잘 묻어나오는 책. 문체만 보더라도 원리원칙에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강직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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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 친밀성의 구조 변동
앤소니 기든스 지음, 배은경.황정미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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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분야의 입문서로는 여전히 유용한 책. 하긴 기든스는 언제나 입문서의 저자로서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푸코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모습은 너무 안쓰럽다. 마치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와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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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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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말(칼)들이 난무하는 강호를 거닐다보면 숨은 고수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기호의 제국>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하지만 아마 대다수가 읽지 않았을, 그래서 항상 이 책을 이야기할 때면, <텅 빈 중심>에서 이야기가 멈춰버리는, 이 책을 나 역시 한참이 지난 후에야 꺼내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게 뭥미>였다.. 이건 이 책이 지니는 아름다움과는 별개의 문제다.. 

 

실로, 이 책은 아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향락비평, 혹은 방법적 나르시시즘의 괴서>임에 분명하다.. 이 리뷰를 조금 더 친절하게 풀어쓰자면, 역자들은 괜한 사족(몇 가지 아쉬운 점, p.202-203)을 달아서, 번역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식>을 스스로 폭로했고, 정화열 선생 역시 <일본을 텍스트화하는 즐거움>이라는 제목을 통해 바르트의 의도를 잘 포착했으면서도, 메타주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무공으로 보이는 <삶의 경험의 현상학>을 꺼내들면서 바르트의 현학적 문화해석이 갖는 위험(고백적 자서전, 혹은 문화적 자기도취증, p.183)에 대해 꼬집어 이야기하면서, 아쉽게도 <꼰대>의 기질을 발휘하고 말았다는 것일테다..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이다.. 확실히 역자는 자신이 번역한 책의 의미를 아쉽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정화열의 주석에 대해, 아메리카화한, 그래서 이 책의 번역될 수 없는 에스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일방적인 비판은 과하다.. 그는 바르트의 글쓰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짚었고, 또 이 책이 오독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다만, 현상학자인 그에게, 구조주의적 기호학은 바르트 스스로가 언명하듯, 다시 한 번 비워져야 하는(현상학적으로) 혐의가 있는 접근방법이었을 뿐이다.. 뭐, 이건 <문파>가 상당히 다르니, 뭐라고 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도  결코 <사파>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니, 자신과 다른 주의들은 모두 <사파>로 싸잡아 욕하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에 비하면 훨씬 양반인 셈이다..

 

어쨌거나, 한 걸음 더 나가본다면, 결국 이 책을 어떻게 읽고 다시 전유할 것인가.. 즉 소화의 문제는 남아 있다..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나르시시즘 앞에 붙어 있는 <방법적>이라는 형용사에 있을 것이다.. 방법이란 무엇일까..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 대상을 한 번 더 자신이 싸안아서, 역으로 그 대상을 이쪽에서 변혁한다는 <되감기>를 의미하는 것일테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그 되감기를 할 수 있을 독자적인 무엇인가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예전 누군가가 썼던 <<일본>의 기원: 글과 말의 사이에서>라는 글이 떠올랐다.. 물론 검색한다고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보르헤스적 기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과거 한국의 어느 대학의 수업시간에 한 일본인이 썼던 소위 <발제문>이었다.. 대략 16페이지에 이르는 그 글은 지금의 기억으로도 조금만 더 수정하면 바로 간단한 논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야심찬 글이었다(실제로 그의 글은 다시 고쳐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밝혀둔다)..  <일본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이니, <일본인의 경계>니 하는 논의들이 어느 정도 수입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 학계에서야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과연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있었을까..  
과거 우리의 <이두>나 <향찰>과 같이 다양한 <음독>과 <훈독>의 변이형을 갖고 있는 일본어에 착목해서  <日本>이라는 국명의 기원을 추적해들어가는 시도는 사료적 입증이 가능한가의 여부와 관계 없이 흥미로웠다.. 특히 발제문의 핵심 논의이기도 한 기원이 책봉체제를 근원으로 하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법 체제에서 일본어의 특징인 글과 말의 차이를 이용해서, 책봉체제에 저항하고 <자주권?>을 지킨 일본 측의 세련된 국제적 감각에 있다는 주장은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1. <일본>은 중국(당나라)의 외교담당자의 반응을 먼저 고려해서 글자로 먼저 선택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니혼>이냐, <닛뽄>이냐를 놓고 싸우는 것은 한 마디로 우습다고밖에 할 수 없다는 것..
2. <일본>(해가 뜨는 나라)은 중국을 중심에 놓고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인 것이며, 그것이 <분열증적>일지 모르지만, 사실 <일본>은 그러한 국칭이라는 결론이 주는 참신함.. 이는 일본 국사학계에 던지는 <야유>지만, 동시에 더욱 더 고루한 한국 국사학계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사고의 배경에는 훈독과 음독이라는 복잡한 변이형을 보여주는 일본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굳건한 일본학의 두 전통, 구미중심의 <보편주의적> 연구경향(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국제학계는 영어를 쓰는 우리거야~) vs. 일본 중심의 <특수주의>적 연구경향(일본어도 잘 모르는 주제에~ 결국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어로 쓸 수밖에 없다는 <일본밀교>)에 대한 나름의 <지겨움>이 깔려 있었으리라.. 이 <훈독>이라는 장벽이 깨어졌을 때 이 지겨운 <보편/특수>라는 자동인형은 돈을 넣어도 커피가 아니라 맹물이 나오는(아니면 설탕이 빠지거나 프림이 빠진) <먹통>이 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은 채, <훈독>이라는 마의 장벽을 가장 잘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한자문화권>의 한국인 연구자를 찾아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닐까.. 이는 <추측>이 아니라 발제문에 실린 그의 <고백>이기도 했다,.


이런 대립구조의 지식은, 혼미한 일본연구를 정리하는 데에 아마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정리를 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상기의 대립구조는 일문/영문, 일본인/구미인, 내부인/외부인, 특수/보편이라는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외국인 내지는 <외부자들>(outsiders) 안에 중국인/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는가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거의 검토가 없었다. .. 물론 두번째의 기술적 문제인 훈독은, 이들 나라들에서도 여전히 문제로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훈독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으면, 금후 일본 연구의 특수/보편의 이항대립은 흔들릴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 보고자는 한국인 학자의 일본연구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기호의 제국>을 읽다 보니, 불현듯 그 시절의 발제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 사람이었다면 바르트의 이 책은 전형적인 서구중심주의적 글쓰기라고 한 방에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꼭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찌 됐건 일본인이 이 책을 보고 허허 헛웃음을 짓는다면, 그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아마 바르트도 웃어줄 것이다.. 다만, 그 때 그 발제문이 말을 건 대상은 파란 눈의 서양인이 아니라, 바로 옆 나라, 그것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었다.. <환대>에 대한 데리다의 텍스트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주인은 손님의 손님이며, 손님은 주인의 주인이다. 즉, 환대의 주체는 <주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것이다.. 이렇듯 손님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손님이 되는 치환은 모두를, 그리고 각자를 상대방의 <인질>로 만든다는 것, 이것이 <환대>의 법인 것이다.. (물론 그 방식이, 혹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허허) 과연 그 <환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

 

언제쯤이나 웃으며 강호를 거닐 수 있을지..

笑傲江湖를 흥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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